He became Napoleon's genius son RAW novel - Chapter (16)
나폴레옹의 천재 아들이 되었다-15화(16/547)
(15) 국왕의 도주를 막아라
18세기 말, 프랑스에도 주식 거래소가 있다.
“맙소사, 분명 10리브르 짜리였는데! 오늘은 120리브르로 뛰었어!”
파리 증권거래소.
나름 루이 15세 시절, 1724년부터 만들어진 기관이다.
다만 존 로우의 미시시피 투기 사건 후, 고정된 건물 없이 떠도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주식 투기꾼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
심지어 혁명이 시작된 지금도 주식 거래가 계속되는 것이다.
문제는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품목,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주식이 널뛰기 중이란 거였다.
바로 이 동인도 회사 주식을 손에 쥔 남자, 레카미에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살 거요? 아니면 안 살 거요?”
이 시대 증권거래는 대면 거래다.
증권거래소 건물에 주식 중개인이나 소유자가 직접 모인다.
서로 흥정을 하듯 거래를 하고, 그 거래가가 주식의 시세가 된다.
이를테면 현대의 부동산 거래와 비슷하다.
하지만 국채가 그렇듯, 주식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은행가들은 따로 있다.
레카미에는 혁명 이전부터 채권 거래로 유명했던 자.
이미 주식 거래에 손을 대고 있던 은행가들은 낯을 찡그렸다.
대체 언제 레카미에가 이렇게 많은 [동인도회사] 주식을 손에 쥐었을까?
“사기 싫음 마시오. 안 팔아도 상관없으니까.”
“아, 그런 얘기는 한 적 없소. 거, 좀 싸게 안 됩니까?”
“안 되지. 이건 더 오를 건데?”
자크 네케르, 장 프레데릭 페레고, 알베르 굼펠자이머.
모두 이 시대 프랑스 금융업계의 거물들이다.
특히 네케르는 재무총감을 지낸 거물 중의 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모두 돈벌이에 혈안이 된 금융업자, 곧 은행가들이기도 하다.
주가가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는 것은 금융업자들에게는 소득 획득의 기회다.
자연히 증권거래소를 자주 출입하게 되었는데, 하필 가장 중요한 주식을 선점당한 것이다.
지금 혁명기라 불안정한 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거대하고, 잘 나가는 회사.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주식이다.
문득 레카미에가 여유롭게 눈에 불을 켠 은행가들에게 말했다.
“이건, 당신들에게만 말해주는 건데. 곧 동인도회사가 새로 배당을 할 거요.”
“배당을? 어떻게? 혁명 정부가 독점권을 폐지했잖소?”
“이런, 네케르 총감님. 잊었소? 혁명 전에 인도로 갔던 배들이 이제 막 돌아올 때가 되었단 말요.”
마치 내부 정보를 흘리듯 호언장담하며 레카미에가 은행가들을 유혹했다.
“그러니, 프랑스 동인도회사 주식은 곧 폭등할거요. 어쩌면 1000리브르 이상으로 뛸지도 모르지. 원래, 한때 2500리브르까지 갔던 거 아시지요?”
결국 프랑스 금융계의 거물 3인은 결정했다.
“사지!”
10리브르에 사들였던 프랑스 동인도회사 주식 3000주.
본래 서기 1790년 4월, 그러니까 2개월 전에 혁명정부는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박탈했다.
그 때문에 주가가 폭락했고 기존 주주들이 황급히 주식을 팔아치웠다.
이 틈을 타 레카미에가 사들였던 주식이다.
그 주식들이 딱 12배로 팔린 것이다.
거래를 체결하고 신나는 얼굴로 레카미에가 거래소를 나섰다.
“정말 좋은 거래였네, 유진 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진이 레카미에를 보다 피식 웃었다.
“다시 사셔야 할 건데요.”
“뭐? 그게 무슨 말인가? 120리브르는 덤터기 씌우고 판 건데?”
“아뇨. 1000리브르까지 오를 거라고 하신 말, 진짜로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레카미에가 동인도회사 주식을 거래한 것은 모두 유진 때문이다.
유진이 베어링과 합의한 주식 투기 거래의 대리인이 레카미에였던 것이다.
물론 레카미에는 동인도회사가 독점권이 폐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든 거였다.
그렇지만 향후 1천 리브르까지 오른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
현대로 따지면 100원짜리 주식이 갑자기 10만원이 된다는 소리와 같은 얘기니까.
“말이 되나? 독점권도 폐지되었는데, 동인도회사가 무슨 재주로 그렇게 주가가 올라?”
“매출이 3배로 뛴다면요?”
“뭐?”
유진은 이미 알고 있는 원역사의 사실을 입에 담았다.
“혁명 당시, 1789년에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1100만 리브르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그랬나? 내부 정보일텐데 자넨 또 어떻게 알았나?”
“올해 예상 수치는 최소 2600만 리브르예요.”
입을 쩍 벌린 레카미에를 향해 유진이 싱긋 웃었다.
“그 매출 수치가 발표되면, 반드시 주가는 폭등합니다.”
나아가 1791년에는 3500만 리브르까지 매출이 오른다.
그러나 곧 문제가 발생한다.
프랑스 혁명의 악명높은 공포정치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 숙청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그 시기가 올 무렵, 주가는 다시 폭락하게 된다.
물론 미래를 모르는 레카미에로서는 식은 땀만 흘릴 뿐이었다.
“그건, 완전히 도박 아닌가?”
이 주가 거래는 레카미에와 유진의 돈만 걸린 게 아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투자자이자 거래처, 베어링스 뱅크의 자본금이 걸려 있다.
혹 실패라도 하면 베어링스 뱅크와의 거래가 완전히 끊길 것이다.
그러나 유진은 태연히 대꾸했다.
“어차피 혁명기에는 모든 금융거래가 도박이에요, 무슈 레카미에.”
레카미에는 빤히 유진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시작한 도박이니, 도박신동의 말을 따라 보지!”
물론 이 도박은 절대로 실패할 리 없는 도박이다.
***
그러나 유진의 도박 따위는 프랑스의 국가적 도박, [혁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촤아악!
물벼락이 허공에서 떨어진다.
당연히 오물이다.
다행히 유진이 맞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서 봉변을 당할 뻔 했다.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돌아오는 길.
유진은 놀라 눈앞의 상황을 보다 눈을 크게 떴다.
사제, 수녀, 그리고 시민들.
시민들이 사제와 수녀를 둘러싸고 오물 물벼락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 선서를 하지 않은 성직자와 수녀들은 꺼져!”
“타락한 수녀들 같으니! 어딜 감히 들어오려는 거야!”
“자, 따라하라고. 혁명 만세! 그리스도는 저주나 받아라!”
유진과 함께 말을 몰아 오던 부행장, 마르소가 혀를 찼다.
“이런, [비선서파] 사제와 수녀들인 모양이군. 시민들도 너무한데.”
비선서파, 곧 국민의회가 프랑스 교회에 요구한 선서를 하지 않은 사제 파벌들이다.
이 ‘선서’란 다름 아닌 법에 대한 준수 선서다.
그럼 이 법은 무엇인가?
국민의회가 만든 종교법을 의미한다.
재산 몰수, 종교세 폐지, 성직자를 국가관리로 강제 임명하는 법률.
그런데 원래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고,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청에 충성한다.
따라서 국민의회의 종교법 선서란, 곧 교황청을 버리고 국가에 충성하라는 선서다.
그 국가는 단연 국민의회가 대표한다.
원래 평민이었던 사제들은 절반 이상 찬성했다.
그러나 고위 성직자일수록 귀족들이 많았고, 자연히 선서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이게 바로 비선서파 사제다.
혁명에 동조하는 파리 시민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반역도인 셈이다.
유진을 오물로부터 보호하며, 마르소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애국자들이 비선서파 사제들을 때리는 게 점점 심해진다더니, 진짜군.”
“그만큼 교회가 기득권자였다는 얘기죠. 마르소.”
“아니, 저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사제와 수녀들 아냐. 종교전쟁할 때도 아니고, 우리가 신교도도 아닌데 사제들에게 좀 심하지 않아?”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국민위병대가 그냥 내버려두고 있잖아요.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나가던 국민위병대 병사들이 흘깃 볼 뿐, 사제에 대한 폭력을 방치한다.
오히려 낄낄대며 수녀를 희롱하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다.
그리 신실한 신자가 아닌 마르소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혁명의 모습이다.
따지고 보면 성직자들은 구 시대의 기득권.
이전에 시민들이 흉년으로 굶주릴 때는 무심히 무시했을 것이다.
그 대가를 지금 받고 있는 셈이다.
그때다.
“참, 로즈 부인이 살롱을 연다던데? 들었어?”
종교보다 미녀가 더 관심많은 소년, 이폴리트가 유진을 수행하다 물었다.
유진은 눈을 깜박였다.
로즈 부인, 그러니까 조세핀 얘기다.
그렇지만 살롱이라면 원래 대귀족 부인들이 여는 사교클럽이 아닌가.
이제 막 식민지에서 귀국한 조세핀이 어떻게 살롱을 연단 말인가?
“뭐? 아니, 내가 집 마련해주긴 했지만 가본 적이 드무니까. 갑자기 무슨 살롱이야? 무슨 돈으로?”
“왜, 너가 생활비 주는 거 있잖아. 그 돈으로 살롱 여신다고 하던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설마, 빚을 냈나?”
유진은 입을 쩍 벌렸다.
생각해보니 원역사에서 조세핀은 사치로 유명하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생각 없이 돈을 쓰기는 할 것이다.
물론 살롱은 이 시대에 단순한 사교 클럽만은 아니다.
유명인사들이 미녀 귀부인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일종의 인맥관리 장소랄까.
아마 예전에 파리에 있을 때, 살롱을 여는 귀부인들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때가 안 좋다.
“정말 어머니는 못 말리겠군. 하필 이런 시기에.”
“응? 아니, 왜. 올해는 상당히 폭동도 적고 꽤 안정된 거 같은데? 작년에 우리 갈 때와 천지 차이 같은데?”
“이게 얼마나 갈 거 같아? 이폴리트, 넌 내 옆에서 대체 뭘 들은 거야?”
예전 유진이 베어링과 대화할 때 이폴리트도 옆에 있었다.
그러나 그 진짜 의미를 제대로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유진은 이폴리트를 향해 단언했다.
“곧 대폭락이 시작된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다시 혁명 전야처럼 된다는 거야.”
서기 1790년, 혁명 발발 2년차.
이 시기, 아주 잠시 프랑스는 안정을 되찾는다.
아시냐 지폐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 풍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이 지나면 다시 흉년이 들고, 또 초 인플레이션이 밀어닥친다.
나아가 시민들이 재차 폭동을 연이어 일으키는 시기가 도래한다.
현대에 유명한 핏빛 기요틴이 남발되는 것도 그때다.
아직 살롱을 열어도 좋을 만한 시기는 아니다.
그런데 정작 멋쩍은 얼굴로 유진 옆에서 마르소가 말했다.
“어, 사실 나도 그 살롱 가는데.”
“마르소, 만약 우리 어머니랑 자면 죽여버리겠어요.”
“어, 그, 그래. 너희 어머니는 미인이지만 내 취향은 아니야. 걱정 말라고.”
마르소는 피식 웃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살롱 그만두라고 전해줄까? 너희 엄마가 네 말은 듣지 않겠니?”
유진은 입맛을 다시다 한숨을 쉬었다.
사실 조세핀은 꽤 고집이 세다.
과연 유진의 말이라고 들을지도 의문이다.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출입하는 인간들이 문제겠죠. 누가 출입하죠?”
그때 의외의 이름이 이폴리트에게서 나왔다.
“아, 그건 내가 알아. 미라보 백작이 온대.”
미라보, 곧 프랑스 혁명 초기의 지도자다.
현재 국민의회의 군사적 1인자가 라파예트라면 정치적 1인자는 단연, 미라보다.
로베스피에르?
아직 유망한 애송이일 뿐이다.
유진은 눈을 깜박이다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정작 내가 살롱에 가봐야겠는걸?”
아무래도 생각보다 조세핀은 훨씬 대단한 살롱을 연 모양이다.
물론 미라보의 권력은 고작 서기 1791년에 끝난다.
왜?
죽어서.
그러나, 어차피 장기에는 모두 죽지 않던가?
***
살롱이란 본래는 여성 귀부인이 주최하는 예술, 과학, 철학을 논하는 모임이다.
하지만 조세핀은 그 정도의 교양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 대체 무엇을 이용해 사람을 모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꺄, 오빠!”
조세핀의 저택, 본래는 프로방스 백작의 저택에 들어선 순간, 오르탕스가 유진을 덮쳤다.
아주 화사한 옷차림에 깜찍한 미모가 돋보인다.
후일 유럽 사교계를 홀릴만한 모습이랄까.
물론 지금은 아직 어린애일 뿐이다.
유진은 간신히 오르탕스를 떼냈다.
“윽, 오르탕스. 자, 얌전히 있자, 응?”
“왜, 맨날 집에도 안 오면서. 대체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 다니는 거야?”
“아니, 난 엄연히 아버지 집이 거처거든, 원래는? 그보다.”
잠시 저택 안을 둘러보다, 유진은 쓰게 웃었다.
“정말 난리도 아니군.”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나, 귀족풍은 아닌 우아함.
딱, 식민지 부잣집 아가씨였던 조세핀의 취향이 드러난 ‘파티’다.
혁명기, 귀족 문화는 부담스럽지만 고급 문화는 필요한 이들이 있다.
바로 구 귀족과 상류층 부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혁명에 줄을 선 이들이 조세핀의 살롱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이 살롱에 처음 온 목적은 따로 있다.
단연 눈부시게 빛나는 조세핀의 미모다.
조세핀의 주위에 몰려들어 아첨하는 남자들이 신나게 웃고 있었다.
그 중 아주 뚱뚱한 남자가 돋보였다.
“와하하! 정말 부인, 말씀을 잘하시는군요. 감탄했습니다! 응?”
뚱보 남자, 미라보가 오르탕스가 환영하는 유진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저기 소년은 누굽니까?”
“어머, 제 아들이네요. 유진! 이리오렴!”
“아드님이라구요. 아, 기억났어요. 그 도박 신동!”
2년 전, 아직 왕실이 건재할 때 사교계를 풍미했던 도박신동의 소문.
본래 백작 집안인 미라보는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유진이 가볍게 모친에게 인사하며 다가오자, 미라보가 흥미롭게 유진을 보았다.
그 주위에 있던 국민의회 의원들이 껄껄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호오, 왕실의 옛날 시동인가? 명성은 꽤 들었는데.”
“저 친구한테 돈 잃은 귀족들이 꽤 된다고 하더군.”
“혹시 그 돈으로 이렇게 살롱이 운영되는 건지도? 하하핫!”
당연히 유진을 우습게 보는 소리다.
하지만 혁명기에 의원들에게 굳이 주목받아서 좋을 것은 없다.
왜냐면 이들에게 주목받는다는 것은 단두대가 가까워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진은 미라보를 만날 필요가 있었다.
유진이 예를 표하며 미라보에게 낮게 물었다.
“미라보 백작님이시군요. 폐하는 무탈하십니까.”
미라보가 눈썹을 치뜨다 웃었다.
“그래. 무탈하시다마다. 얼마 전에도 연합 축제에 모습을 드러내셨지.”
“그건 그냥 보여주기식일 뿐이잖습니까. 실제로 괜찮으신지 여쭙는 겁니다. 왕비 폐하나 공주 전하도.”
“호오, 의외로 충성심이 있군. 이런 시국인데.”
유진이 여전히 짐짓 진지한 태도를 보이며 미라보에게 고했다.
“혁명은 지지하지만, 왕실은 프랑스 상징 아니겠습니까.”
미라보는 그때서야 웃음을 거두었다.
유진은 속으로 웃었다.
혁명기,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국민의회를 지도한 남자.
그러나 실은 왕실의 ‘이중첩자’ 노릇을 한 장본인.
그게 미라보의 진짜 정체다.
한 마디로 미라보는 왕실과 혁명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자다.
물론 미라보도 이유는 있다.
“꽤 온당한 친구군. 그래, 혁명의 종착지는 입헌군주제여야 해. 어디, 자네 같은 신동을 만나면 좋아할 친구가 있는데.”
바로 공화파가 아니라 입헌군주파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유진이 미라보를 만나야 했을까?
왕실 문제다.
반년 전 귀국한 후, 유진은 정신없이 은행 사업에만 몰두했다.
왕, 왕비, 그리고 무엇보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서.
일단 자금이 마련되어야 그들을 구할 방책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슬슬 왕실과 접촉을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미라보가 엉뚱한 사람을 불렀다.
“페르젠! 여기, 한 번 와보겠나?”
유진은 의외의 이름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회색 머리의 미남자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미라보는 정작 바삐 소개만 시키고 자리를 떴다.
“인사하게. 스웨덴 출신 군인인 페르젠 백작일세. 어, 난 잠시. 미녀가 날 기다리고 있어서!”
주색을 즐기는 남자로 기록되어 있다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 살롱에 있는 미녀는 조세핀만은 아니니까.
반면에 미남자지만 다른 미녀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페르젠 백작은 유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한스 악셀 폰 페르젠.
그러니까, 역사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애인으로 기록된 자다.
뭐라 말해야 할지, 유진이 망설일 찰나였다.
불쑥 페르젠이 입을 열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예?”
“마리 테레즈 공주님이 맨날 얘기하시더군. 내가 궁정에 있을 때 보지 못한 게 아쉬워. 아직 어리다지만 수완이 놀라울 정도라 들었네.”
아직 공주는 유진을 기억했던 모양이다.
잠시 유진은 1년 전을 떠올렸다.
무너지는 왕실 속에서 불안에 떨던 소녀를.
지켜주겠다고 맹세한 채 내버려두고 떠나야 했던 그 순간을.
이제 약속을 지킬 때가 됐다.
가볍게 유진은 마치 왕실충성파 귀족인양 대꾸했다.
“왕비 폐하께 빚을 진 게 있죠.”
“혹시, 그 빚. 지금 갚을 수는 있나?”
“왕실에 자금이 필요한 상황입니까? 당연히 신하로서 해야할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가만히 유진을 보다 페르젠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자네도 귀족이지. 자네를 믿고 말하겠네. 왕비 폐하도 말씀하시기도 했고.”
“뭔가요?”
“왕실을 오스트리아로 탈출시킬 자금이 필요하네. 어떤가?”
본래는 이제 10살 남짓한 유진에게 얘기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페르젠은 아주 급했다.
누구도 급전을 구해줄 상황이 아닌데, 너무 거액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유진은 눈을 부릅뜨다 빛냈다.
이거다.
유진이 반드시 막아야 할 [사건]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바로 국왕 탈주 사건.
“왕비 폐하께 진 빚을 갚을 때가 왔군요.”
프랑스 혁명을 돌이킬 수 없는 전쟁과 유혈과 공포로 몰아넣은 사건.
바렌느 탈주 사건을 막아야 할 시간이 왔다.
***
이곳은 소란스런 도심의 한복판이다.
-타다닥!
누군가 거대한 담벼락에 페인트를 칠하다 달아났다.
그 뒤로 스위스 출신 근위병들이 달려갔지만, 잡지 못했다.
남은 것은 낙서 뿐.
[어리석은 국왕에게 각성을! 오스트리아 여자는 물러가라! 비바 라볼루숑!]바로 퇼르리 궁전, 왕실이 지금 머무르는 옛 궁전이다.
“노, 노, 놓쳤습니다.”
서투른 프랑스어로 보고하는 근위병들 사이로 귀부인 한 명이 나와 비명을 질렀다.
“꺅! 또 낙서하고 갔어요, 공주님! 상퀼로트 놈들이 정말 너무해요!”
왕실이 파리 서남쪽 베르사유에서 쫓겨나 파리로 강제로 끌려온지 1년이다.
옛날, 저 유명한 메디치 가문 출신 왕비, 카테리나가 세운 궁전.
퇼르리로 왕실은 강제 입성한 상태다.
옛날에는 국왕이 거처로 썼지만 벌써 루이 14세 때 버려진 공간이다.
베르사유보다 불편하고, 비좁고, 무엇보다 소란스럽다.
걸핏하면 이렇게 반 왕실파 시민들이 소동을 피울 정도로.
하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작년, 1789년 10월에 베르사유 궁전으로 여자들이 횃불을 들고 쳐들어 온 그 날.
공주,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자신이 알던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마리는 궁전 밖으로 나와 비명을 지르는 귀부인을 달랬다.
“자, 캉팡 부인. 너무 그러지 마요. 치우면 되죠.”
“그렇지만, 내용을 보세요! 어떻게 이런!”
“대체 뭐길래. 꺅?”
이번에는 마리 테레즈도 깜짝 놀랐다.
부왕이야 그렇다치고, 모후의 출신을 욕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음란한 낙서와 함께.
지금도 불면에 시달리고 있는 왕비가 이 낙서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황급히 마리 테레즈가 낙서를 보다 왕실 시녀장 캉팡 부인에게 일렀다.
“어머니가 보기 전에, 어떻게든 지워야겠어요.”
“예? 공주님, 어떻게 하시려고?”
“일단, 뭔가, 걸레라도. 가져와 줘요. 어머니는 이쪽에 못 오게 하구요.”
바삐 캉팡 부인이 안으로 시녀들을 부르러 뛰쳐 들어갔다.
그러나 왕실이 실권을 잃고, 재정은 국민의회의 통제에 놓였으며, 인원마저 많은 이들이 도망간지 오래다.
당장 전임 시녀장, 폴리냑 부인도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남은 시녀들도 많지 않으니, 캉팡 부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낙서를 노려보던 마리는 드레스를 들어 페인트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슥, 슥, 슥.
아무리 왕실이 영락했어도 공주는 공주다.
“고, 공주님!”
“자, 잠깐. 머, 멈춰야.”
“아, 아니, 이런 건 우리가 한다, 아니 할게요.”
프랑스 출신 병사들이 혁명군으로 떠나고, 스위스 근위병들만이 남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남은 근위병들은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다.
경악한 근위병들이 서투른 프랑스어로 공주를 말리려 했다.
그럼에도 몸에 손을 댈 수 없으니,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그때다.
누군가 감히 공주의 손을 잡았다.
공주, 마리가 놀라 고개를 돌렸을 찰나였다.
갈색머리 어린 소년이 웃고 있었다.
“1년 만에 정말 많이 성장하셨네요, 공주님.”
“유진?”
“예, 저예요.”
그 순간, 마리는 유진을 붙잡고 때렸다.
“야, 이 배신자야!”
그야말로 매운 손맛에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억, 공주님, 아, 아파요! 전 아직 10살이라구요!”
“나쁜 놈. 날 지켜준다며! 버리고 갔잖아!”
“아니, 그러니까 돌아왔잖아요. 어머니를 모시러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시립해 있던 스위스 근위병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일단 유진은 공주의 시동이었기 때문에 근위병들도 얼굴은 안다.
또한 공주가 때리는 게 딱히 잡아들이라는 소리 같지는 않다.
어째 고향에서 많이 봤던 광경 같다 생각하던 근위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면하기로 한 것이다.
찰나, 마리가 유진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왜 이제야 온 거야. 너무 힘들었어. 무서웠단 말야!”
이제야, 다시 마리는 자기 나이로 돌아온 것 같이 펑펑 울었다.
그리웠던 시동, 유진을 맞이한 날의 일이었다.
***
아직 유진은 10살이 채 안 됐고, 마리는 13살이 채 안 됐다.
그러나 혁명기의 1년은 구시대 10년보다 더 빠르다.
1년 간, 실로 프랑스는 격변했다.
저 멀리 베르사유에서 강제로 퇼르리로 끌려오면서, 아직 어린 마리가 어떤 세상을 보았을까?
언제든 갈퀴와 몽둥이, 칼을 든 폭도들이 습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유진은 퇼르리 궁, 한쪽 방에 들어와 마리와 마주하다, 싱긋 웃었다.
기특한 기분이 든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시간, 아이가 어떻게든 견뎌낸 것이다.
“이젠 제가 진짜로 지켜드릴게요.”
“흥, 어린 주제에 누가 누굴 지켜. 그냥 내 옆에나 있어.”
“전 이제 시동 노릇 못해요. 나이를 먹어서.”
마리가 눈을 부릅뜨며 다시 다그치려는 찰나, 유진이 창밖을 보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파리가 험악해졌나 보군요.”
“응. 상퀼로트? 캉팡 부인이 그러는데, 짧은 바지란 뜻이래. 긴 바지가 귀족들 상징이라나? 그 사람들이 우리 너무 싫어해.”
“그 사람들만 그런 거면 좋겠는데.”
상퀼로트, 그러니까 하층 계급 시민들이다.
프랑스 혁명기, 가장 강경한 집단이다.
다만 왕실에 대한 불만이 상퀼로트에 한정되어 있다면, 오히려 막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실제 무력을 쥔 국민방위대나 국경정규군은 실상 상퀼로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교는 상층 부르주아, 사병은 아예 도시 빈민이나 농민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왕실에 대한 반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왕실 자체도 문제를 일으킨다.
아직은 아닌 것 같지만.
그때다.
마리가 유진을 잡고 눈을 반짝였다.
“그래. 너도 같이 갈래, 유진?”
“뭐가요?”
“오스트리아. 읍.”
한 순간, 유진은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
마리의 입을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옛날 같으면 당장 끌려나가 감옥에 갇혔을 일이다.
그러나 유진은 무례고 뭐고, 극도로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보며 낮게 말했다.
“절대로, 입 밖에도 꺼내지 마요. 진짜로 위험해질 수 있어요.”
기묘한 스킨십에 마리는 낯을 붉히다,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마리는 사실 제대로 된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진은 마치 상황을 모두 안다는 듯 말하고 있다.
사전에 들은 얘기가 있는 것처럼.
마리가 속삭이듯 물었다.
“설마, 알아?”
“난 알아도 모르는 거예요. 내 아버지 얘기 못 들었어요? 국민의회 의장도 지냈다던데.”
“그래? 의장이 높은 거야? 네케르 아저씨 같은 건가?”
물론 이 시기 혁명 초기에는 국민의회 의장이 매번 바뀐다.
그리 뛰어난 군인도 아니고, 명성 높은 혁명가도 아니고, 대귀족도 아닌 알렉상드르가 국민의회 의장을 지낸 이유는 간단하다.
라파예트의 측근 중 하나인 탓이다.
하지만 혁명의 주도세력, 국민의회의 의장을 지냈다는 사실은 깊은 의미가 있다.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유진의 부친이 혁명파라는 얘기다.
나아가 혁명이 강경해질수록 이 혁명파는 [공화파]로 바뀔 수 밖에 없다.
요컨대 왕실 폐지론자가 될 거라는 뜻이다.
원역사에서도 알렉상드르는 결국 국왕 처형에 찬성한다.
왜?
지금 마리가 언급하려다 만 [국왕탈주] 사건 때문이다.
유진이 마리에게 바싹 붙었다.
옆에서 보면 꼭 이제 막 풋사랑을 깨닫기 시작한 애들 같이 보일 것이다.
스위스 근위병들도 야릇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심각했다.
“내 말 잘 들어요, 공주님.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처럼 굴어요.”
“애는 너가 애잖아.”
“나랑 같이 있기 싫어요?”
그러자 마리가 파르르 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절대 어디 가지마! 말 잘 들을게.”
문득 유진은 마리의 눈을 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불안에 떨고 있다.
이제 막 13살을 맞이할 소녀다.
급변한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지만, 아직 애다.
그래도 유진보다는 큰 마리를, 유진이 껴안았다.
“좋아요. 공주님만은 꼭 지켜드릴게요.”
앞으로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유진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소녀만은 지키고 싶다.
***
바렌느 탈주 사건, 프랑스 혁명기 국왕의 최대 뻘짓이다.
“돈이 필요하네, 절대적으로.”
생 제르맹 거리에 새로 생긴 카페로 페르젠이 달려왔다.
이름은 카페 드 보아르네.
눈앞의 소년, 유진이 세웠다는 보아르네 방크의 부속 카페라던가.
페르젠, 왕비의 애인이라 불리웠고 스웨덴의 유력귀족인 남자.
그 남자가 한 소년 앞에서 애원하듯 토로하고 있었다.
왕비를 살리기 위해서, 왕실을 탈주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곧, 탈주자금이다.
유진은 카페에 앉아 가볍게 탁자를 두들기다 물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일단 탈출 비용 자체만 200만 리브르는 있어야 해. 마차, 식량, 그리고 도주 중 생활비와 뇌물까지.”
“거액이긴 하군요. 이 시대에는 특히 더.”
마른 침을 삼키며, 페르젠이 물었다.
“가능하겠나?”
유진은 가볍게 탁자 위에 있던 서면 한 장을 꺼내 펜을 들었다.
-슥, 슥, 슥.
서명이 배서된 문서를 보던 페르젠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네덜란드 호프 은행 수표입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전 미성년자죠. 그러니 이 서명은 그저 제가 지급 요구를 한다는 것 뿐, 아무런 법적 효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 반대로 추적도 어렵다는 뜻이죠. 호프 은행 본점으로 가시면, 적정 시기에 환가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금액은 200만 리브르.
딱, 페르젠이 요구하는 돈이다.
그간 사재를 털어서 간신히 탈출 자금을 마련 중이던 페르젠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세상에, 고맙네. 자네는 어리지만 정말 충신이군!”
다음 순간, 유진은 손가락을 입에 세워 보였다.
“쉿. 누가 듣겠습니다.”
물론 이곳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진이 은밀한 만남을 하기 위해 세운 카페다.
일반 카페와 달리 출입자는 제한되어 있다.
나아가 카페 밖, 저택 전체에는 이런 간판까지 붙여진 상태다.
[방크 드 보아르네]그러니까, 사실 여기는 영국 베어링스 뱅크, 네덜란드 호프 방크, 그리고 프랑스 레카미에 은행과 거래하는 보아르네 은행 본점인 셈이다.
채권 거래, 주식 투기, 무엇보다 이런 비자금 뒷거래를 하는 곳이랄까.
따라서 카페 안의 종업원이나 관리자 모두 유진의 사람이긴 하다.
다름 아닌, 신대륙 마르티니크 항해 멤버들이니까.
그래도 만일이란 게 있다.
고개를 끄덕이는 페르젠에게 유진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건 국왕 폐하와 왕비 폐하께는 비밀로 해주시죠.”
이번에는 왕비의 최측근, 페르젠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대의 공적을 왕실이 알아야지.”
“그건 성공하신 다음에 알아도 늦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뒤에 있다는 걸 알면, 폐하는 다른 생각을 하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유진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낮게 말했다.
“제 아버지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라파예트 장군의 심복입니다.”
“응? 아, 불안해 하실 거란 건가?”
“그건 아닐걸요? 그 분들은 사람을 너무 잘 믿으셔서 탈이라. 또, 페르젠 백작, 당신도 제가 배신자라 생각했으면 접근했겠습니까? 오히려 그 분들이 저를 통해 아버지를 설득하라 할까봐 문제죠.”
물론 유진의 말은 거짓이다.
라파예트 백작,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그리고 국민위병대의 수장.
후세 원역사에서는 입헌군주파로 몰려 몰락하는 혁명 초기 지도자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라파예트를 가장 싫어한다.
무력으로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건 사실이 아니라서, 라파예트가 실각한 후 루이와 마리 왕비는 줄줄이 죽는다.
국왕과 왕비가 얼마나 정치적 혜안이 없었는지 보여주는 실례랄까.
그러니 괜히 유진이 자금을 지급했다는 걸 알면, 특히 왕비는 경계할지 모른다.
물론 그 경계는 사실과 맞닿아있긴 하지만.
반면 역시 사람을 잘 믿는 귀공자, 페르젠 백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하긴 자네가 국민위병대를 움직여줄 수 있다면, 오히려 딴 생각을 하시겠지. 알겠네.”
사람은 잘 믿지만, 페르젠은 바보는 아니다.
만약 유진이 설사 라파예트를 설득할 수 있다 해도, 혁명은 돌이키기 어렵다.
프랑스 내부에서는 혁명파를 뒤집을 세력이 사실상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국경군 대부분이 이미 혁명파로 넘어온 상태다.
게다가 국민위병대가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라파예트가 지휘한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승세를 탄 혁명파의 선봉이란 거다.
두 조건이 사라지면 국민위병대는 결국 정식 군인이 아닌 민병대에 불과하다.
이래 저래 탈출 밖에 답이 없다는 게 페르젠의 판단이다.
“그럼, 난 일을 진행하겠네!”
페르젠은 신나게, 수표를 들고 뛰쳐 나갔다.
이제 곧 혁명의회가 추적하기 어려운 수표로 페르젠은 탈주자금을 마련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휘유, 유진. 저렇게 되면 저 자금, 너만은 추적 가능한 거 아냐?”
문득, 유진의 앞, 탁자 위로 주스를 놓으며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이폴리트 샤를.
방크 보아르네에서 유진의 비서 격인 소년.
유진은 차갑게 웃었다.
“그래. 내 함정에 빠진 거지. 페르젠은.”
처음부터 유진은 왕을 탈주시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 탈주는 반드시 실패해야 한다.
공주를 살리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