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became Napoleon's genius son RAW novel - Chapter (24)
나폴레옹의 천재 아들이 되었다-23화(24/547)
(23) 유진은 전장을 선택하고, 공주가 눈물로 환송하다
왕비를 살리고 공주를 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
뭐가?
전쟁이.
-탁!
거세게 신문을 던지며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가 외쳤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냐? 이 전쟁 시국에 왕비를 억지로 살린 거야! 국민 동원령 구실을 없앴다고!”
유진은 간만에 방크 보아르네 건물이 아니라, 보아르네 저택에 왔다.
단연, 아직도 유진의 법적 보호자인 알렉상드르가 소환했기 때문이다.
신문 전면은 단 하나의 스케치가 가득 담겨 있다.
바로 전직 공주, 이제는 폐위 공주인 마리 테레즈가 유진을 껴안고 있는 스케치다.
사실 왕비가 살아난 것보다 이 스케치에 대한 설명이 기사에 더 많을 정도다.
가볍게 신문을 들어올리며 유진이 대꾸했다.
“신문이 엄청 팔려 나가겠네요. 구독료라도 좀 내놓으라고 해야 할지도.”
“뭐? 농담할 때가 아니다, 유진!”
“어차피 왕비를 죽였으면 오스트리아가 전면 선전포고를 하는 구실로 삼았겠죠. 왕의 죽음도 이용하는 판국에. 게다가 이미 전쟁은 시작된 뒤예요.”
이미 프랑스는 [혁명전쟁]에 돌입하고 있는 시점이다.
작년, 그러니까 1792년에 벨기에 방면에서 발미 전투가 있었다.
올해, 1793년에는 곧 30만 동원령이 선포된다.
후세 악명 높은 군사 ‘징집제도’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강제 징집제도의 선포 후, 프랑스는 상시 대군을 운용하며 전유럽과 맞싸운다.
본래 혁명정부, 그러니까 국민공회의 주요 의원들이 징집령의 명분으로 삼으려던 게 왕비의 죽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진이 개입한 탓에 왕비를 죽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심지어 혁명 지지도가 가장 높은 파리에서도, 왕비사형 반대 여론이 드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알렉상드르는 너무나 여유로운 [신동] 아들이 기가 막혀 고함쳤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걸 알면 더 개입하지 말았어야지! 네가 시동이었던 건 왕실이 망하기 전이야! 이젠 우린 귀족도 아니란 말이다!”
뭘 모르면 차라리 애라서 그렇다고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아이는 그야말로 정말 ‘신동’이다.
이제 고작 12살.
하지만 방크 보아르네를 중심으로 연간 수천만 리브르의 금융거래를 벌이고 있다.
결코 아무 것도 모르고 벌인 짓이 아니다.
그렇기에 알렉상드르는 더욱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왜 국민공회의 눈 밖에 날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유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버지, 그건 아버지 생각이죠.”
“뭐야? 이놈이, 그래도!”
“우리는 모두 자코뱅 눈에는 구체제 귀족이에요!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민중의 적이라구요!”
유진의 눈이 번뜩여, 알렉상드르는 놀라 한 발 물러났다.
“왕비가 죽으면? 그 다음은 누굴 거 같아요? 구 귀족들이에요. 멍청한 아버지!”
그것은 원역사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본래 왕비는 1793년 10월에 죽는다.
곧이어 시작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공포정치다.
다음 해, 1794년 7월.
알렉상드르가 죽는 때다.
왕실을 죽이고, 구귀족을 척살하고, 반대파를 모조리 죽이는 시절의 일이랄까.
유진은 이 역사적 수순을 지적한 것이다.
물론 알렉상드르는 그저 기가 질려 물러났을 뿐이었다.
“이, 이놈이!”
“그 말이 맞네. 알렉상드르.”
“누구, 어? 라파예트 장군님!”
일순, 보아르네 저택 안으로 30대 남자가 들어섰다.
일반적으로 하인들이 먼저 막아서야 하겠지만, 이 남자는 막아설 수가 없었다.
알렉상드르의 상관이자 발미 전투의 영웅, 라파예트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라파예트는 머뭇거리는 알렉상드르 대신, 유진을 응시했다.
“용감하군, 보아르네 군. 아니, 현명하군.”
왕비 재판을 움직인 게 유진이란 사실을 라파예트도 눈치챈 것이다.
사실 눈 있는 자라면 누구든 알 수밖에 없다.
단지 유진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다들 반신반의할 뿐이다.
허나 이미 왕이 도주할 때부터 라파예트는 유진을 보아왔다.
그러니 알 수밖에 없다.
그 재판을 지배했던 게 유진이란 사실을.
문득 유진이 공손히 답했다.
“장군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뒤에서 여론을 움직여주셨죠. 입헌군주파 의원들과 ‘프리메이슨’ 회원들을 이용해서.”
라파예트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나? 내가 프리메이슨이란 걸?”
유진은 싱긋 웃으며 저택, 벽에 걸린 라파예트의 검을 가리켰다.
“그야, 저 검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장군의 위치상 보통 회원은 아니시겠죠.”
본래 라파예트의 물건이었고, 알렉상드르에게 선물로 준 검.
역사에는 유진이 나폴레옹에게 소지 허가를 받기 위해 가느라 기록에 남은 물건.
프리메이슨 소드.
그 검을 보다 라파예트가 쓰게 웃었다.
“그래. 원래 프랑스 프리메이슨 수장은 오를레앙 공작이지. 하지만, 공작은 도망갔어.”
“그냥 국경 밖으로 나간 거 아닌가요? 영향력은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격동기에는 그런 비겁자는 권력을 가질 수 없지. 설득도 못하고. 영향력도 없어. 게다가.”
문득 라파예트가 낯을 찌푸렸다.
“공작은 스스로 그랑데 마에스트로에서 물러났다네.”
지금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실질적인 수장은 따로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발미 전투의 영웅이라든가.
굳이 입으로 거론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때 프랑스 프리메이슨의 수장이자, 입헌군주파의 거두 라파예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프리메이슨의 힘으로도, 입헌군주파 수장으로서도 할 수 없는 게 있네.”
“뭔가요?”
“자네에 대한 자코뱅의 증오.”
라파예트의 시선이 유진을 향했다.
“이제 자코뱅은 왕비가 아니라 자네를 죽이려 할 걸세.”
특히 왕비를 죽이려 했던 에베르, 생 쥐스트, 그리고 배후에 있을 마라가 문제다.
그들이 아니라도 자코뱅을 지지하는 상퀼로트 강경파 시민들도 있다.
이 파리가 유진에게 지극히 위험해진 것이다.
유진도 거기까진 납득했다.
단지 아직 대책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때였다.
부친, 알렉상드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해. 유진, 너 군대로 가라.”
“예? 그게 무슨 말이세요, 아버지?”
“어쩔 수 없어! 또 우리 보아르네 일가는 본래 군문이야!”
그 순간 라파예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고가 터졌을 때 입대하는 건, 전통적인 해결책이지.”
군대로 도망가라.
바로 이게 오늘 라파예트가 온 이유였던 것이다.
***
아들이 군대로 가는 것, 모든 어머니의 악몽이다.
“미친 놈! 내가 그런 놈하고 결혼했다니! 아들을 군대로 보내?”
조세핀은 화가 나 펄펄 뛰었다.
평소 우아한 파리지앵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게 무색할 정도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평시라도 18세기의 군대는 사람을 가혹하게 굴리는 조직이다.
하물며 지금은 전시다.
자칫 국경이라도 끌려가면,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정작 군대로 끌려가게 생긴 유진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누가 들으면 엄마가 군대 가는 줄 알겠어요.”
“절대 안 돼!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낫지. 널 어떻게 보내니?”
“엄마, 무슨 여자가 군대예요?”
그러자 조세핀이 아주 당당하게 외쳤다.
“나라면 사령관이라도 꼬셔서 무사할 수 있어! 넌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아니!”
유진은 기가 막혀 입을 쩍 벌렸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핫!”
정말 조세핀다운 소리다.
심지어 아직 실제 나이는 12살 밖에 안 된 아들 앞에서, 태연히 [유혹]을 거론하는 모습까지도.
물론 조세핀은 웃고 있는 유진을 보며 기가 막혀 했다.
“유진, 전쟁은 장난이 아냐! 웃을 때가 아니다. 당장, 레카미에 씨나 영국의 누구지? 너랑 동업하는 분 찾아가자!”
“미스터 베어링 말이에요? 그 사람이랑 지금 연락하면 반역자 소리 들어요.”
“그럼 다른 누구라도 좋아! 네덜란드로 도망가야 할까? 아니면 스위스? 빨리 짐을 싸자!”
그때 오르탕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오, 오빠. 죽으러 가는 거야?”
파제리 저택 거실.
유진과 오르탕스의 대화를 오르탕스도 어느새 침실에서 나와 듣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오르탕스를 껴안으며 유진이 싱긋 웃었다.
“안 죽어, 오르탕스.”
물론 운명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진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나는 유진이 원역사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에 끌려간다는 거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지금도 눈앞에서 빛나는 인도의 알림, [백은문자]다.
선택의 기로가 오면, 반드시 이 문자가 알려줄 것이다.
살 길을.
그 점을 헤아리던 유진이 조세핀을 돌아보았다.
“엄마, 난 살려면 파리를 떠나야 해요.”
“그래, 도망가야지! 여기 있으면 기요틴이야. 그러니, 외국으로!”
“그렇지만 내가 도망가면 엄마나 오르탕스가 더 위험해져요. 같이 도망가는 건 어려울 거구요. 파리 떠나서 살 수 있겠어요?”
그러나 조세핀은 전혀 유진이 예상치 못한 외침을 토해냈다.
“왜 못 사니? 난 심심한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어!”
유진은 잠시, 심장이 격동해 말을 잇지 못했다.
역사 속에서, 조세핀은 사치와 향락, 쾌감에 젖어 살아가는 방탕녀다.
그렇지만 갓 서른, 젊은 조세핀은 실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서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아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간신히 격동을 누른 유진이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걱정마시고, 엄마는 제가 전쟁터 가 있는 동안 오르탕스나 잘 돌보세요.”
“유진!”
“어차피 3, 4년 정도 앞당겨 가는 것 뿐이에요. 난 군인의 아들이라구요. 엄마. 전쟁터는 불가피해요.”
사실 원역사에서 유진은 이 무렵 모친의 애인, 오슈의 시동이 되어 전쟁터로 끌려간다.
국경보다 더 무시무시한 전장, 저 유명한 [방데학살] 현장으로.
그 후에는 부친 알렉상드르가 국경 전장으로 끌고 가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전장은 유진이 정할 생각이니까.
“그보다, 이거나 쓰세요.”
문득 유진이 준비한 선물을 보다 조세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니?”
“뭐긴 뭐예요? 피임도구지.”
“뭐?”
다시, 기가 막혀하는 조세핀에게 유진이 뻔뻔하게 말했다.
“내가 전쟁터 나가면, 엄마 남자 관계를 단속하지 못하잖아요? 사실 포기하기도 했고. 그러니 주의하시라구요. 아까 말한 베어링 씨에게 부탁해서 들여온 최신 영국산이에요.”
18세기 말,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피임도구도 영국산이 최고다.
당연히 모친에게 피임도구를 선물하는 아들은 아마 유진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진은 장난으로 이러는 게 아니다.
어쨌든 조세핀의 남자 관계는 정말로 유진과 보아르네 일가 전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게다가 혹시 나폴레옹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너무 난잡하게 살면 곤란하지 않을까?
그때 유진을 쏘아보던 조세핀이 유진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유진! 너 진짜! 이 되바라진 꼬마가 못하는 말이 없어!”
“아야야! 엄마, 아파요!”
“아프라고 꼬집는 거야! 이 녀석!”
순간, 유진의 볼을 마구 꼬집던 조세핀이 와락, 유진을 껴안았다.
“걱정할 일 없게 할 테니, 무탈히 돌아와라. 꼭!”
아주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던 아들이다.
한 번 결심하면, 절대로 결심을 꺾지 않는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저 머나먼 마르티니크까지 엄마를 구하겠다고 달려왔던 아이가 아닌가?
단지, 무탈히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유진이 싱긋 웃으며 조세핀을 향해 말했다.
“예, 가는 김에 엄마 남편감도 찾아올게요.”
“뭐라고?”
“아, 왜 전쟁터잖아요? 멋진 장군 하나 있을지 누가 알아요?”
조세핀은 전장에 나갈 아들을 형언할 수 없는 눈으로 보다 그만 웃어 버렸다.
“풋! 그래, 꼭 데려와야 한다! 흑!”
눈물을 흘리며, 웃음을 터뜨리는 조세핀을 보며 유진은 결심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와 조세핀을, 그리고 가족을 지키겠다고.
***
그렇지만, 유진은 정리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사업 정리 좀 하겠습니다.”
현대에도 오너가 군대에 끌려가면, 그 기업은 정지한다.
18세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유진은 뒤를 믿고 맡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쓴 커피를 마시며 쓴웃음을 짓는 동업자, 자크 레카미에다.
“의외로 태연하군. 거리에는 자네 찾아다니는 자코뱅의 하수인들이 천지인데.”
“작년까지는 평범한 시민들이었겠죠. 이발사라든가, 빵집 주인이거나, 혹은 화가거나.”
“화가라 하니 생각나는데, 자네도 슬슬 초상화 하나 남겨야 할 때가 됐군. 언제 죽을지 모르니.”
마치 영정 그림이라도 남기라는 듯한 농담을 듣다, 유진이 피식 웃었다.
“따님 초상화나 신경 쓰시죠. 무슈 레카미에.”
불시의 일격을 맞은 레카미에가 눈을 크게 떴다.
요컨대 미래의 레카미에 부인, 줄리에 베르나르 얘기다.
당연히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친구의 딸.
그러나 실제로는 레카미에의 딸이란 사실을 유진은 이미 안지 오래다.
물론 잘 숨겨왔다고 생각한 레카미에는 당혹해 물었다.
“언제부터 알았나?”
“처음부터 티 냈으면서 뭔 소리래요? 뭐, 사랑에 죄는 없지 않겠습니까?”
“크흠! 난 혁명이 그래서 마음에 들긴 하네. 요새는 혼인도 안 한 도덕주의자들이 난리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줄리에는 레카미에가 친구의 부인과 불륜으로 낳은 자식이다.
원역사에서는 달리 줄리에를 지킬 방도를 못 찾은 레카미에가 결국 [혼인]을 선택한다.
친자와 결혼한 꼴이지만, 최소한 재산 상속만은 확실해지는 방식이다.
바로 올해, 1793년 4월의 일이다.
유진은 그 유명한 결혼을 보지 못하고 전장으로 떠나야 하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런데 레카미에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유진에게 물었다.
“그래서, 전부 접으려고? 규모가 좀 아깝네만.”
바로 방크 보아르네가 벌이던 채권과 주식 투기 얘기다.
이 모든 거래는 유진 없이는 벌이기 어렵다.
때문에 유진은 은행과 무역회사를 부탁하면서, 투기 거래는 접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진은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못 가요.”
“뭐?”
“아사냐 채권의 폭락과 주가 폭락을 이용한 거래잖아요? 혁명정부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죠. 게다가, 동인도회사는 곧 끝날 거예요.”
유진은 냉소를 머금었다.
“파산하거나, 아니면 로베스피에르의 단두대가 날아들 겁니다.”
서기 1793년 8월, 국민공회는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다시 정지시킨다.
사유는 하나.
동인도회사의 이사들이 반혁명분자라는 이유다.
실은 당통을 비롯해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를 후원했다는 게 진짜 이유였다.
결국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강제 청산 결정을 받게 된다.
주식 거래도 그걸로 모두 끝장나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 시기다.
그러나 그간 유진의 행보를 보아온 레카미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자네 말이 맞겠지. 이런 도박 같은 결정은 정말 귀신 같더군.”
“제가 좀 그런 소리 듣죠. 어릴 때부터.”
“아직도 어려.”
고작 12살 밖에 안 된 동업자를 진지하게 보며, 레카미에가 말했다.
“자네 사업과 재산, 내가 지키고 있겠네. 마담 파제리는 걱정말고, 무탈히 다녀오게.”
그때 불쑥 레카미에 저택의 응접실로 한 여자가 뛰어들었다.
줄리에 베르나르.
바로 마담 레카미에가 될 소녀다.
아직 15살이지만, 프랑스 혁명기 최고의 미녀로 남은 미모는 눈부시다.
“그래, 전쟁터에서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아직 줄리에는 기억한다.
5년 전, 늑대로부터 자신을 지켜줬던 소년을.
눈물을 글썽이는 줄리에를 보다 유진은 싱긋 웃으며 손에 입을 맞췄다.
“물론이죠, 아가씨. 아니, 마담.”
그러나 나오는 길, 유진은 야릇한 웃음을 짓는 비서 이폴리트를 피할 수 없었다.
이폴리트는 음흉한 표정으로 웃으며 유진을 놀려댔다.
“이야, 마담 파제리에 마담 레카미에까지 유부녀들의 사랑 천지야?”
“죽을래? 너 우리 엄마 넘보면 잘라 버린다고 했지? 그리고 아직 줄리에는 결혼 안 했거든?”
“아, 알겠다니까. 왜 나만 갖고 그래?”
문득 투덜거리던 이폴리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어디로 갈 거냐?”
“그건 왜 묻냐?”
“아, 나도 아버지에게 어디 가서 죽을지 모른다고 얘기는 해야 할 거 아냐?”
놀란 유진을 향해, 이폴리트가 씩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왜 이래? 유진 네가 가면, 이 이폴리트가 안 갈 수가 없지!”
전쟁터는 죽음의 공간이다.
아무리 이폴리트가 철이 없고, 이제 막 20살이 된 청년이라도 그 정도는 알 것이다.
비서 관계란 그저 고용인일 뿐.
사업을 접는 유진과 이폴리트는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이폴리트는 기꺼이 따라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유진을 전장에서도 보호하겠다고.
혹은 지키겠다고.
아주 어린 시절, 철없이 유진의 모친 조세핀에게 맹세했듯이.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미친 녀석.”
그러나 역시, 마음이 격동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잠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아 하늘을 보던 유진을 이폴리트는 말 없이 지켜 보았다.
문득 유진이 시선을 내려, 다시 이폴리트를 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유진은 이폴리트도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면 올라탄다.
“그래, 전쟁으로 끌려갈 건 선택할 수 없지만, 전쟁터는 선택할 수 있겠지.”
“좋아. 나, 이폴리트 님이 전장의 영웅이 될 날이 왔군! 어디지? 라인? 왈롱? 아니면 이탈리아인가!”
“아니.”
유진에게 운명의 전장이 될 곳은 따로 있다.
“툴롱.”
바로 전설의 전장,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비약하는 도시다.
유진은 이 순간, 나폴레옹을 선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왕이 죽고, 왕실이 망했어도, 해는 뜬다.
“우리 강아지, 이제 일어나야지?”
오늘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애써 떠지지 않는 눈을 뜬다.
침대가 거칠어 잠이 잘 들지 않는 탓이다.
예전에 베르사유 궁전, 아니 퇼르리 궁전만 해도 이보다 훨씬 푹신한 솜으로 된 침대일 것이다.
여기는 짚으로 된 침대다.
피곤한 눈을 간신히 뜨며, 마리 테레즈는 방금 말을 건 ‘마망’에게 물었다.
“지금 디스비에게 말씀하신 거예요, 아니면 제게 말씀하신 거예요?”
“둘 다야. 아니 셋인가? 루이! 어서 일어나!”
“어, 엄마. 나 졸려.”
막내 동생, ‘루이’가 하품을 하며 저 멀리 침대에서 일어났다.
옛날 같으면 시종이 한참 먼 방에서 불러야 한데 모일 수 있었던 가족이다.
허나 이제는 작은 방에 모여서 잠을 자고, 일어나 빵을 먹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생활이다.
그러나 루이를 본 순간, 마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꿈이 아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이는 주정뱅이의 집에, ‘마망’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마리도 수도원에 연금되어 죄수나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적어도 같은 집에 있다.
여전히 공화국 군인들에게 감시받는 신세지만, 그래도 모두 함께 있는 것이다.
죽은 부친을 제외하면.
그때 거실에서 오늘도 활기찬 가정교사 캉팡 부인이 외쳤다.
“오늘은 특제 오트밀이랍니다, 공주님!”
공주는 하품을 하며 나오다, 고개를 저었다.
“나 이제 공주 아니에요. 마담 캉팡.”
“에이, 제겐 여전히 공주님이시죠!”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언제 우리 모두 죽을지 몰라요.”
순간 ‘마망’, 그러니까 마리 앙투아네트도 걱정되는 얼굴로 일렀다.
“그래요, 샤를로트 말이 맞아요. 마담 캉팡. 당신도 우리를 떠나요. 일단 살고 봐야죠.”
한때는 사람으로 가득했던 베르사유는 이제 폐허에 가깝다.
왕실이 파리에서 지내던 퇼르리 궁전은 국민공회에 빼앗겼다.
공주의 일가가 머무는 곳은 라파예트가 마련해 준 교외의 작은 주택이다.
게다가 비록 왕비가 살았다지만, 언제 다시 위험해질지 모른다.
살려준 사람도 언제든 다시 죽이는 게 혁명정국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왕실의 가정교사였다 해도 떠나는 게 맞다.
그러나 캉팡 부인은 눈을 부릅뜨며 단호히 말했다.
“난 폴리냑과 다릅니다. 왕비님.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아직 베르사유 궁전이 흥청망청하던 1788년, 3명의 여자가 왕실을 지배했다.
시녀장 폴리냑 부인.
가정교사 캉팡 부인.
그리고, 한때 왕비의 총애를 받았던 랑발 공비.
폴리냑은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스위스로 망명했고, 랑발은 감옥에 갇혔다.
지금 왕비의 곁에 남은 것은 캉팡 부인 뿐이다.
왕비는 눈물이 흐를 것 같은 표정으로 보다, 생긋 웃었다.
“고마워요. 그래도 위험해요. 참, 랑발 공비는 살아있다던가요?”
“예, 아직 감옥에 갇혀 있지만. 라파예트 장군이 간신히 살렸다고 해요.”
“정말 고맙군요. 한때는 그 사람이 원수 같았는데.”
랑발 공비.
루이 14세의 증손 랑발 공작의 부인이었지만 남편이 일찍 죽어 과부가 된 여자다.
딱히 사치스럽지도 않고, 나쁜 짓을 한 것도 없지만, 왕비의 시녀장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본래는 원역사에서 1792년 9월에 죽는다.
국왕과 왕비에게 증오를 맹세하라는 재판장에게 이렇게 거부했다.
「자유와 평등은 찬양할 수 있지만, 왕과 여왕은 증오할 수 없습니다.」
그 대가로 랑발은 능욕당한 후, 목이 잘리고, 시체는 전시된다.
원역사에서 그랬다는 얘기다.
아직 랑발은 감옥에 갇혀 있긴 하지만 죽지 않았다.
왕실에 대한 민중의 증오가 극도로 높지 않고, 라파예트가 발미의 영웅이 된 덕이다.
“랑발 공비님은 괜찮겠지?”
마리 테레즈가 오트밀을 한 술 뜨다, 걱정했다.
사실 원역사에 비하면 훨씬 다행스러운 결과지만, 그래도 감옥이 좋은 곳은 아니다.
그때 캉팡 부인이 오트밀을 루이에게 내놓으며 말했다.
“참, 여기 생활비도 라파예트 장군이 도와주고 있어요. 물론 그 돈은 보아르네 집안에서 온 것 같지만요.”
그 순간 마리는 스푼을 그만 자기도 모르게 던져 버렸다.
-땡그랑!
앙투아네트가 놀라 마리를 향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니? 샤를로트!”
“나 안 먹어.”
“샤를로트! 이젠 우리는 왕실 사람이 아니야! 음식 하나가 소중한 서민이야!”
하지만 마리는 오히려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유진이 준 돈으로 산 거라며! 배신자라고, 유진은!”
이 집에서 마리만 아는 게 있다.
그때 재판에서 유진이 ‘마망’, 앙투아네트를 구해준 것은 고맙다.
그래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문득 앙투아네트가 마리를 향해, 무릎을 꿇고 뺨을 감싸쥐었다.
“샤를로트, 유진은 엄마를 살렸어.”
“그래도!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버렸어! 게다가, 유진은······!”
“그 대가로 유진은 죽으러 가게 될지도 몰라.”
뭔가 말하려던 마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숟가락을 조심스레 스카프로 싸서 들어 올리며, 캉팡 부인도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공주님. 보아르네 소자작은 곧 전쟁터에 끌러갈 거예요.”
귀족 작위가 모두 없어진 지 4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 구왕실의 인사인 캉팡에게 유진은 보아르네 자작가의 장남이다.
그러니까 캉팡 부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유진이 전쟁터에 끌려간다고.
마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쟁터? 왜? 유진이 뭘 잘못했다고!”
“잘못한 건 없죠. 하지만 왕비님을 살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됐어요. 그래서 끌려간대요.”
“말도 안 돼! 유진은!”
마리가 소리치자, 앙투아네트가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이 혁명이란 건 그런 걸거야, 아마. 샤를로트, 그러니 유진을 미워하지 말렴. 그 아이는 정말 목숨을 걸고 우리를 구한 거야.”
그러나 마리만 알고 있는 게 있다.
하여, 유진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유진이 전쟁터로 끌려간다고 한다.
바로 앙투아네트를, ‘마망’을 살렸다는 이유로.
공주였던 15세 소녀, 마리는 주저앉아 낮은 비명을 터뜨렸다.
“유진······!”
꼭 마리, 자기 때문인 것 같았기에.
***
그 시각, 유진은 아주 중요한 인사를 만나러 갔다.
-탁.
문이 열린 순간, 책상에 앉아 서신을 쓰고 있던 방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왔나?”
단정한 외모, 강박적일 정도로 깔끔한 옷차림, 무엇보다 엄정한 표정.
혁명의 화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사람일지 모른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이 방의 주인이자 국민공회의 최고 실권자다.
그런데 방에는 유진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유진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무슈 오슈가 먼저 와 있었군요.”
“애초에 오슈는 내 친구지. 자네 협력자이기에 앞서서.”
“설마요. 오슈 대위님도, 저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일 뿐입니다.”
그 순간 로베스피에르가 차갑게 말했다.
“정확히 말해야지. 소년. 자네는 아직 성인 시민이 아냐. 그런데도 참 위험한 짓을 했더군.”
굳이 로베스피에르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다.
아마도 유진을 변호하러 먼저 왔을, 오슈도 살짝 눈치를 주고 있었다.
유진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저, 혈기가 앞서서.”
“혹시 말이야, 사랑인가?”
“예?”
너무 불시의 습격이라, 미처 유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랑.
지금 연애를 하고 있냐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왜 왕비의 재판에 끼어들어, 산악파의 공작을 망쳤는지 묻고 있는 거다.
정말 사랑 때문이었을까?
유진 스스로도 미처 답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허나 로베스피에르는 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어 버렸다.
얼굴에 다 써 있다는 투다.
“왕비는 아닐 거고, 공주로군. 후후.”
“아니, 그건. 저는 단지 제 양심과 혁명정신에 맞춰 행동했을 뿐입니다.”
“이런, 설마 자네도 내가 사랑도 모르는 [처형악마]로 보이나? 이해하네, 소년. 풋사랑은 아주 강렬한 거지.”
비로소 로베스피에르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처음, 아직 혁명이 일어나기 전 일개 변호사였던 시절처럼 보인다.
그때 로베스피에르는 유진을 보며 유망한 소년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꽤 골치아픈 ‘금융신동’이 되어 버렸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해하진 않겠지. 자네를 본보기로 기요틴에 보내라는 목소리가 많아.”
“이해하고 있습니다, 무슈 로베스피에르.”
“이해? 자네가 죽는 걸 아나? 건방진 소리 말게!”
로베스피에르는 낯을 굳혔다.
눈앞의 유진은 아무리 똑똑해도 아직 12살, 소년이다.
소년의 머리를 기요틴으로 베라느니, 감옥에 가둬야 한다느니, 심지어 전쟁터에 보내라는 말까지 돌고 있다.
아무리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을 명분으로 많은 사람을 이미 죽였어도, 아이는 얘기가 다르다.
마음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런데 죽음을 이해한다며 운운하다니.
지극히 오만한 소리다.
순간, 유진이 로베스피에르를 정시했다.
“무슈 로베스피에르, 난 포탄으로 사람을 쏴죽여 봤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유진은 정말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바로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오던 항해, 이슬람 해적들과 교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했던 일행을 돌아보며 유진이 말했다.
“저기, 내 협력자이자 당신의 친구. 오슈 대위님이 증언해줄 겁니다. 내가 얼마나 용감한 수병이었는지.”
오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명했다.
“맞아, 무슈 로베스피에르. 대서양에서 마담 파제리를 데려올 때, 해적과 만났거든.”
“그때 직접 싸웠다고? 저 소년이?”
“그 정도가 아니야. 거의 배의 조타를 지휘했지. 게다가 포도탄을 쏘아서 해적 두목까지 수장시켜버렸다고.”
살짝 과장을 보태며, 오슈는 빙그레 웃었다.
“아주 용감한 소년 군인이지. 이미.”
로베스피에르는 눈을 감았다.
유진이 차라리 전쟁터에 가고 싶어한다는 얘기는 오슈에게 들었다.
이미 산악파에서도 소년병으로 보내 골칫거리를 없애자는 얘기도 있다.
그렇지만 혁명이라는 게, 이런 어린 소년을 전쟁터로 보내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로베스피에르는 긍정할 수 밖에 없었다.
눈을 뜬 로베스피에르가 말했다.
“좋아. 기요틴보단 전쟁터가 더 영광스럽겠지? 전장은 선택할 수 있게 해주겠네.”
애초에 이 문제로 로베스피에르를 찾아온 것이다.
전장을 선택하기 위해서.
유진이 정중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툴롱으로 보내주십시오.”
“툴롱? 거긴, 이미 불온한 반란자들이 점령한 곳인데. 영국놈들과 합세해서.”
“그러니까 가겠다는 겁니다. 제 조상은 해군이었습니다. 무슈.”
일부러 거창한 명분, 소년다운 생각을 입에 담으며 유진이 눈을 빛냈다.
“해군을 되찾아 공화국의 승리를 가져오고 싶습니다.”
툴롱.
마르세유의 부근에 있는 프랑스 남부의 군사항구.
이곳은 지금 왕당파가 궐기해 차지하고, 영국 함대를 끌어들인 상태다.
국경지대나 심각한 반란이 있을 방데 대신 유진은 이곳을 선택한 것이다.
쉬워서?
아니다.
이곳에 반드시 오게 될 예비 장군이 한 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를 로베스피에르는 빤히 유진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혁명의 진정한 방해자는 사실 합스부르크가 아니지. 영국이야.”
짐짓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왕비를 살린 것을 용서하는 얘기를 뱉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게 로베스피에르의 위치다.
문득 로베스피에르가 책상 위에서 아까부터 쓰던 문서에 서명을 했다.
-슥, 슥, 슥.
바로 유진을 [소위]로 임명하는 임명장이었다.
“전장으로 가게, 신동. 가서 도박만 잘 하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게.”
유진은 의외의 선물에 살짝 놀랐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래에 유진의 부친을 죽이게 될지도 모를 남자다.
그러나 또한 프랑스와 시민들을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을 혁명가이기도 하다.
어쩌면 로베스피에르가 실패한 것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상념을 누르며, 유진은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공화국에 승리를.”
그러나 그 승리의 끝에 공화국은 결국 사라지게 될 것이다.
***
파리에서 툴롱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차를 타야 한다.
“미친 놈들! 12살짜리를 전쟁터에 보내다니!”
군용마차에 올라탄 이폴리트가 연신 욕설을 뱉었다.
물론 이미 파리 시내를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새롭게 입은 소년용 군복을 만지작 거리며, 유진이 가볍게 대꾸했다.
“어차피 원래는 난 오슈 대위를 따라 방데로 갔을걸.”
“응? 방데에 뭐 있어?”
“아주 불온해.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지금은 1793년 2월.
곧 공화국은 30만 동원령을 선포한다.
농민들이 살고 있는 땅, 프랑스 서부 방데에서는 이 징집령에 반발해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은 왕당파 귀족들의 세력과 합쳐져, 10년을 넘게 방데를 휩쓰는 내전으로 번진다.
최소 30만이 넘게 학살당했다고 기록에 남은 방데 반란이다.
오슈는 국경지대로 갔다가, 방데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 왜 유진이 오슈를 따라가게 될 거라고 말할까?
실은 원역사에서 오슈가 유진을 시동으로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애를 전쟁터에서 끌고 다닌 걸 보면 오슈도, 결국 보낸 조세핀도, 허락한 알렉상드르도 다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하다.
물론 가장 제정신이 아닌 것은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가는 유진일지도 모르지만.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내며 유진이 다른 쪽을 보았다.
“그건 그렇고, 마르소. 당신은 이렇게 따라가도 되겠어요?”
프랑수아 세베랭 마르소, 본래는 방데 내전의 승장 중 하나.
그런데 보아르네 은행의 부행장이 되었다가, 엉뚱하게 유진과 함께 가게 된 것이다.
바로 툴롱으로.
마르소가 껄껄 웃었다.
“후후, 우리 고용주가 간다는데. 같이 가야지! 한데 공주님의 환송은 없나? 하하핫!”
“잠깐, 난 왜 안 묻냐?”
“이폴리트, 넌 이미 나 따라온다며? 게다가 넌 어차피 남아 있으면 죽을걸. 내 심부름 한 거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공안위원회에서 말이지.”
저 유명한 국민공회의 기요틴 결정자, 공안위원회가 이제 막 발족한 시기다.
누구든 혁명에 반할 것 같은 자들을 잡아들여 죽이는 게 그들의 첫 임무랄까.
눈의 가시인 유진의 비서, 이폴리트는 아마 첫 사형 대상일 것이다.
부르르 이폴리트가 몸을 떠는 모습을 구경하다, 유진이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툴롱에서 볼 수 있으려나.”
“응? 누구 볼 사람 있어? 혹시 미녀냐?”
“아니, 남자야.”
이번에는 이폴리트가 야릇하게 유진을 놀려댔다.
“어이, 설마 너 남자 좋아하냐, 컥!”
물론 유진은 이폴리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이폴리트를 데려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조세핀 옆에 두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성적 농담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
평소처럼 아랫도리를 걷어찬 유진이 차갑게 을러댈 찰나였다.
“이 자식이 뭐래. 너나 아랫도리 잘 간수해. 가서 성병이라도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응?”
그때다.
유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말을 멈췄다.
아니, 마차가 멈춰 버렸다.
왜냐하면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발굽 소리가 교외 숲속에 요란하다.
-타다닥!
그 모습을 보다, 마르소가 농담하듯 진실을 말했다.
“오, 이런. 진짜로 공주님이 와버리셨는걸.”
구왕실의 공주,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드 부르봉.
지금 말을 타고 달려온 소녀다.
숨을 헐떡이며 소녀가 말 위에서 뛰어 내렸다.
멍하니 그 광경을 보던 유진을 이폴리트가 쿡 찔렀다.
“야, 뭐해? 안 가?”
정신 없이 유진이 마차에서 내려 마리에게 다가섰다.
“유진.”
“공주님.”
“그렇게 부르지마. 난 공주 아냐. 마리라고 불러.”
마리는 유진을 빤히 보았다.
벌써 15살, 이제는 여자가 된 티가 확 난다.
살짝 낯이 붉어진 유진은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잠시 쩔쩔맸다.
그 순간, 마리가 또 다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나, 사실은 봤어.”
무엇을 봤단 이야기일까?
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진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깨달았다.
국왕자결.
유진이 눈을 크게 떴다.
“고, 공주님. 설마.”
“그래서 정말 원망했어. 너무 미웠어. 그런데.”
“그건 말이죠, 공주님.”
마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나도 알아! 나 때문이라는 거! 그래서 더 미웠어!”
그때 탕플 탑에 유진과 이폴리트만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필 그날, 공주는 부친, 루이 16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마침 그날, 탕플 탑의 경비는 유진 때문에 너무나 허술했다.
바로 그날, 반가운 마음으로 국왕과, 그리고 유진에게 인사하려던 공주는 벽을 돌지 못하고 보았다.
국왕이 자결하는 모습을.
그때부터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아마도 공주를 지키기 위한 유진 나름의 결정이었을 것을 알았기에 더욱 그랬다.
공주 때문에 국왕이 죽은 것이다.
공주 때문에 유진은 국왕을 죽인 것이다.
공주 때문에 유진은 왕비를 살렸고, 이제 전쟁터로 간다.
마리는 입술을 깨물다, 간신히 다시 입술을 뗐다.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안 돼. 다시 돌아와, 아니면.”
유진의 모습을 단 하나라도 잊지 않을 것처럼, 또렷이 눈에 새기며 마리가 말했다.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갈 거야.”
그 모습을 보다 유진이 싱긋 웃었다.
“난 공주님을 구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공주님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돌아올게요.”
“마리라고 부르라니까!”
“알겠어요, 공주. 아니, 마리. 읍!”
너무 빨라 미처 대응하지 못할 찰나, 유진은 입술을 빼앗겼다.
눈을 깜박이다 어느새 유진은 마리가 말 위로 뛰어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야 했다.
아주 새빨개진 얼굴로 마리는 어느새 말을 튕기듯 달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요란하다.
이폴리트, 마르소, 그리고 보안이었고 같이 군대를 가는 루이 투르네다.
“와우! 멋진데!”
“이야, 전장터를 환송하는 가장 멋진 장면이야!”
“휘유! 우리 사장 언제 신방 가나? 하하핫!”
문득 말을 달리던 마리의 목소리가 숲속에 메아리쳤다.
“꼭, 돌아와!”
유진은 멍하니 마차로 돌아왔다.
“정말, 죽여줬어!”
이폴리트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유진은 그 웃음을 보다 쓰게 마주 웃었다.
죽을 길로 가는 와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셈이다.
“진짜 죽는 건 전쟁터라고.”
물론 유진은 죽을 생각은 없다.
애초에 툴롱으로 가는 것도 살기 위해서다.
왜?
그곳은 바로 다름아닌 나폴레옹의 전쟁 데뷔 무대다.
“이제, 전설의 전장으로 간다.”
전설의 전장, 나폴레옹 전설이 시작된 장소.
툴롱으로, 유진이 달려가고 있었다.
공주의 입맞춤을 입술에 담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