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became Napoleon's genius son RAW novel - Chapter (7)
나폴레옹의 천재 아들이 되었다-6화(7/547)
(6) 베르사유는 평화롭고 파리는 혁명전야다
서기 1788년, 프랑스 궁정은 매우 평화롭다.
그러니까, 베르사유 말이다.
-주르륵.
분수가 눈부시게 햇살 아래 흘렀다.
“아, 커피 맛 좋네.”
마치 지상의 낙원 같은 공간 속에서, 왕비는 커피를 마신다.
꼭 약간 고전풍 광고 같다는 생각을 하며, 유진은 부동자세를 취했다.
어쨌든 [시동]이란 결국 시종의 한 사람이다.
비록 하인은 아니라도, 왕실 가족들의 심부름은 해야 한다.
현대로 따지면 재벌가 개인 비서와 비슷하달까.
다만 다른 점도 있다.
문득 커피를 마시던 마리 앙투와네트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유진을 보았다.
“어머, 계속 서 있었니? 우리 시동, 한 잔 할래?”
이렇게 재벌가 사모님, 아니 로열 클래스 왕비가 커피를 권한다는 거다.
“예, 왕비 폐하.”
그럼, 이렇게 봉사하는 대가는 뭘까?
놀랍게도 무척 자본주의적이다.
왕실 시동도 시종원의 시종 중 한 사람으로, 왕실재정에서 급료를 받는다.
특별히 유진이 받게 된 급료는 월 30리브르.
일곱살 어린애가 받기에는 매우 큰 돈이다.
물론 보아르네 가문의 빚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살짝 그 사실을 떠올리며 유진은 다가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프랑스 커피답게 원액에 가까워 꽤 쓰다.
순간, 분수가 이번에는 창공으로 뿜어졌다.
-쏴아아!
프티 트리아농, 자신의 궁전 분수가 쏘아지는 광경을 보다 왕비가 미소지었다.
“참, 평화롭지 않니? 유진?”
이것은 당연히 왕비가 행해야 할 일은 아니다.
본래 지금 시간, 왕비는 한창 베르사유를 방문한 귀족들 앞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
마치 관광객에게 전시라도 하듯, 왕실의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루이 14세가 만든 규범이다.
그러나 이곳 프티 트리아농을 따로 만든 후, 왕비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14살에 프랑스 왕실에 처음 왔을 때부터 베르사유 궁을 싫어했다던가.
어쨌든 옷 입는 하나부터, 실은 화장실 가는 것까지 귀족부인들이 따라다니니 좋을 리가 없다.
이제 왕비 경력 14년차, 32세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곳에만 있는 이유다.
한낮, 직접 가꾼 정원, 그 안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본다.
실로 평온한 광경이다.
문득 마리 왕비가 분수를 보며 속삭였다.
“베르사유 궁전은 말야. 전쟁터 같은 곳이란다.”
“예? 아, 사교계가 복잡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 네 엄마도 그래서 소문이 나빠졌을 거야. 신대륙에서 왔으니, 프랑스 궁정문화를 잘 몰랐겠지. 네가 참 착실한 모습을 보면, 네 엄마 소문이 다 루머였단 생각이 들어.”
이런 내밀한 얘기를 이제 막 들어온 시종에게 말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유진이 관찰한 바, 마리 왕비는 의외로 소탈한 여자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일개 어린 시종이니, 더 안심하고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누구에게 말하든 약점이 될 얘기를 마리 왕비는 씁쓸히 읊조렸다.
“나도 그랬지. 처음 이 궁전에 왔을 때는.”
새삼 유진은 눈앞의 여자가 ‘이방인’임을 되새겼다.
지쳐서 이렇게 내궁에 틀어박히는 일, 유진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이 서기 1788년, 루이 16세 시대라는 거다.
왕비가 처음 시집온 루이 15세 시대가 아니라.
그때 분수 쪽에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꺄! 분수 시원해!”
“공주님, 분수 들어가시면 안 돼요! 감기 걸려요!”
“어때서? 어, 유진이다!”
분수대에 들어가 뛰놀던 공주, 마리 테레즈가 유진을 보더니 달려왔다.
“유진, 너도 들어와! 여기 물 맑아! 바깥에 있는 큰 정원 분수랑은 다르거든.”
“음, 공주님. 일단 지금 하시는 행동은 품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분수의 물은 어차피 이 근방의 강물을 끌어온 거라, 썩 깨끗하지는.”
“얘는 얼굴은 귀여운데, 하는 소리는 왜 이래? 잔말 말고, 시동답게 들어와!”
애석하게도 아직 유진은 7살이고, 마리 테레즈는 벌써 10살이다.
옆에 있던 가정교사 폴리냑 부인도 마리를 말리지 못했다.
결국 유진은 프티 트리아농의 유명한 [용분수]에 처박혀야 했다.
“푸웁!”
엄숙하게 서 있다가, 오히려 나이에 걸맞게 허우적대는 꼴이 꽤 우스워 보인 모양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깔깔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러다 왕비는 커피를 함께 마시고 있던 ‘수양아들’을 돌아보았다.
“깔깔! 아, 귀여워. 정말 평화롭지 않니, 아르망?”
수양아들, 아르망은 표정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그렇네요. ‘바깥’과는 정말 다르게.”
확실히 바깥과 전혀 다르다.
평화롭고, 풍요롭고, 또한 여유롭다.
물론 공주에게 당하고 있는 유진은 별로 그런 생각이 안 들었지만 말이다.
간신히 유진이 마리 공주의 손에서 벗어나, 분수에서 나왔을 때다.
-철컥!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트리아농으로 들어서다 다 젖은 유진을 보았다.
“오, 유진이냐? 응? 꼴이 그게 뭐냐?”
유진은 황급히 물을 털며 예를 취했다.
돌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는 것도 프로 겜블러의 자세다.
또한 이 시대 시종의 덕목이기도 하다.
“폐하. 잠시 공주님의 놀이에 동참해 드리고 있었습니다.”
국왕 앞에서는 공주도 살짝 얌전해지는 모양이다.
“어머, 제가 언제? 유진이 혼자 실수로 분수에 떨어졌나봐요.”
보통은 악의에 찬 공주가 장난치는 상황이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게다가 공주가 낯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 모른 체 하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국왕도 피식 웃다, 유진을 보았다.
“그래. 짐이 공주를 좀 타이르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얘기 들었다. 어제 프로방스 백작을 이겼다며?”
“폐, 폐하? 그건 그냥 아르투아 백작님이 하시던 게임을 장난으로 들어간 겁니다.”
“하하! 그게 실력이지. 어디, 기왕 본 김에 선물이나 하나 줄까?”
시동이 된지 3개월.
유진은 벌써부터 베르사유 궁전의 왕실 게임에 가끔씩 불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겜블을 놀이로 생각하는 귀족들이 유진의 상대가 될 리 없다.
그러나 애가 겜블을 하는 게 썩 좋아 보일리는 없는 법.
잠시 국왕이 화를 낼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웃고 있었다.
문득 국왕 루이가 아까부터 격철음을 내고 있던 물건 하나를 슥 내밀었다.
고급 회중 시계다.
“이거, 내가 만든 거다. 태엽 잘 감아야 한다?”
유진은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가 다시, 예를 취했다.
이 시대, 휴대용 회중시계는 집 한채 값이다.
아무리 시계가 국왕의 취미라도, 그리 간단히 하사할 물품이 아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말하면, 사실 일개 시종에게 생각 없이 물건을 준다는 뜻이다.
이 왕실 전체가 지금 그렇듯이.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서기 1788년 8월.
베르사유 속, 프티 트리아농은 실로 평화롭고, 또 생각이 없다.
***
베르사유에서 파리 생 제르맹 거리까지는 약 20킬로미터다.
“아이고, 죽겠다. 무슨 시동 퇴근을 내가 도와야 하는 거야?”
그러니 7살 어린애가 혼자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당연히 말이나 최소한 노새를 타야 한다.
아직 어린 유진은 일단 조랑말을 타고 있었다.
그것도 꽤 힘겨웠지만.
유진을 데리러 온 이폴리트 샤를이 투덜거리는 꼴을 보다, 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잖아. 난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만큼 나이가 차지 않았다고. 그렇다고 하인 방에서 잘 수도 없고.”
“그래서 매일 출퇴근이라니. 차라리, 그냥 방 하나 달라고 해. 거, 궁전 엄청 크더만.”
“그게 더 위험할걸? 벌써부터 시종과 하인들의 질시가 장난이 아니던걸.”
오늘도 분수 놀이를 할 때 노려보던 아르망의 시선이 있었다.
질투, 분노, 원망.
여러 감정이 뒤엉킨 눈빛이었다.
그게 강제로 왕비의 수양아들이 된 아르망만의 감정이 아니다.
갑작스레 왕실 시동이 된 유진을 질시하는 시종, 시녀, 하인들이 수도 없다.
“곧, 다 헛것이 될 텐데 말야.”
유진은 터덜거리며 가는 조랑말을 탄 채, 투덜거렸다.
베르사유 궁전은 거대하고, 궁전 주위의 근위병은 철통같고, 시종들은 천 단위다.
당장 유진의 손에 들린 회중시계부터 지극히 귀한 귀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고작 1년 안에 모조리 무너져 버린다.
아니, 1년까지 갈 것도 없다.
벌써 8월이다.
당장 프랑스는 이번 달에 비상 사태를 맞이한다.
국가지불불능 사태.
언제 이 사태가 벌어졌는지 유진이 기억을 더듬을 찰나였다.
“아아악!”
유진과 이폴리트가 서로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모른 척해. 파리에서 노상 강도가 한 둘이야? 괜히 골목에서 마주쳤다가 우리, 골치 아프다.”
“저번에 소매치기 잡을 때는 빛이 어쩌구 하더니.”
하지만 이폴리트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다.
파리는 지금 곳곳이 약탈과 강도, 살인으로 얼룩져 있다.
사실 국가가 지불불능 사태가 발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흉년, 기근, 한파.
국가 경제 상태가 엉망진창이니, 재정도 파탄나는 거다.
그렇다고 18세기 프랑스가 무슨 복지국가도 아니고 국민복지에 신경쓸리 없다.
결국 굶주린 시민들이 걸핏하면 폭동을 일으키는 와중이었다.
강도야 말할 것도 없는 일.
그때였다.
-철퍽!
파리 시내, 오물이 뒤섞여 진창이 된 길이 막아섰다.
이 시대 파리는 당연히 청소부도 없고 엉망이다.
거리에 오물과 쓰레기를 그대로 버리니, 더러울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유독 심해 조랑말조차 걷기 어려웠다.
이폴리트도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 길 엉망 진창이구만.”
유진은 조랑말의 기수를 간신히 잡아채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골목 돌아서 가야겠는데.”
“너희 집은 왜 또 포부르 생제르맹인 거냐? 기왕이면 베르사유 근처에 좀 살지.”
“아, 우리 엄마가 부탁했잖아. 1년만 도와줘.”
유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어차피 1년 뒤면, 도와줄 일도 없어.”
뭔가, 이상한 말에 이폴리트가 눈을 깜박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
그때, 다시 비명이 거리 전체를 울렸다.
“살려주세요!”
이번에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살려!”
“맙소사! 피해! 달아나!”
“총! 누구 총 가진 사람 없어? 포수!”
수십 명이 뛰쳐나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면 일개 강도 때문에 도망가는 게 아니다.
뭔가 폭동이나 재난 수준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다.
유진과 이폴리트가 주춤거리며 말머리를 멈출 찰나였다.
이폴리트가 입을 쩍 벌리며 군중 뒤편을 가리켰다.
“맙소사. 저거, 늑대 아냐? 혹시 [제보당]의 야수라도 되나?”
그 순간, 유진도 아연해 입을 벌렸다.
늑대다.
양치기 소년도 아닌데, 지금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니, 애초에 파리에는 양도 없다.
그런데 왜 늑대가 도시 한복판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시발, 여기 18세기 말, 파리 아니었나?”
자신도 모르게, 유진이 욕설을 뱉을 찰나였다.
-아우우!
늑대가 울부짖는 울음이 파리를 직격했다.
맹수가 인간을 위협하던 시절은 의외로 20세기까지 존재했다.
특히 파리는 의외로 유럽 제1의 대도시 주제에 늑대습격이 빈번하다.
서기 1776년에도 거대늑대, 이른바 [제보당]의 야수가 출현했다는 보고서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치안이 엉망이란 얘기다.
아무리 그래도, 왕궁에서 수도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늑대와 마주칠 줄, 유진도 몰랐다.
-타타닥!
이럴 때 말을 타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유진과 이폴리트는 황급히 말을 달렸다.
당장 뒤에서 늑대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뭐 빠지게 달려, 유진! 이건, 내가 못 도와줘!”
“누가 몰라? 난 7살이야!”
“고, 골목으로! 어억!”
파리의 길은 복잡하다.
그만 이폴리트가 늑대를 피하려다, 다른 길로 뛰어가 버렸다.
유진도 뒤에서 달려오는 늑대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을 채찍질했다.
늑대는 결코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도 떼로 흩어져 인간을 습격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피해야 할까.
그때였다.
“아아앙!”
눈앞, 오른쪽 골목 구석에서 아이 하나가 도망치다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갈림길이 유진의 앞에 나타난 찰나였다.
등 뒤는 늑대.
길은 오른쪽과 왼쪽.
오른쪽에는 아이가 울부짖고 있고, 왼쪽은 길이 뻥 뚫려 있다.
선택의 기로다.
그 순간 [백은문자]가 유진의 앞에 새겨졌다.
[오른쪽과 왼쪽, 갈림길.]실로 찰나라고밖에 할 수 없는 쏜살같은 사이, 글자가 바뀌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생존.]전생의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글자다.
이 시대의 세상으로 유진을 전생시킨 초월자로 추정되는 힘이다.
따르면 항상 겜블에서 이겼고, 유진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분명 오른쪽으로 가면 살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 될까?
말에 짓밟히거나, 혹은 늑대에게 먹힌다.
유진은 이를 악물다 말고삐를 잡아챘다.
“이럴 때, 프로 겜블러는······.”
아직 어린 손길이지만, 익숙한 고삐질에 조랑말은 멈췄다.
동시에 유진은 말 위에서 간신히 안장을 밟고, 뛰어내렸다.
눈앞에 늑대가 달려온다.
동물원에서나 봤던 늑대와 달리, 삐쩍 말랐고 송곳니는 흉악했다.
유진은 있는 힘껏, 조랑말을 늑대 앞으로 밀어냈다.
“판을 엎는다!”
애꿎은 조랑말이 넘어지는 찰나, 늑대가 조랑말을 물어 뜯었다.
-아우우!
동물 애호가들이 보면 비명을 지를 순간이다.
그러나 유진에게는 어린애가 먼저다.
동시에 유진이 골목 구석에 굴러다니던 나무막대기를 들어 늑대를 내리쳤다.
-콰지직!
그러나 유진의 손힘이 아직 약하다.
나무가 흩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늑대가 이를 드러냈다.
비틀거리면서도 유진에게 다가왔다.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왜냐면 늑대는 더 이상 제대로 사냥을 못할 정도였으니까.
다만 유진이 다칠 정도로는 힘이 남았다.
유진은 부러진 막대기를 휘두르며 외쳤다.
“저리, 가! 이익! 망할 늑대놈!”
그때 늑대 뒤에서 누군가가 ‘막타’를 쳤다.
-퍽!
이미 죽어가던 늑대가 픽 쓰러졌다.
사실 굶어 죽어가는 신세였으니 당연했을지 모른다.
한데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늑대를 머스킷 총으로 내리친 군인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근위병 라자르 오슈였다.
“너,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
“오슈? 당신이 여기 왜?”
“나야 퇴근 중이었지. 나 근위병인 거 몰라? 하여간 빨리 도망가야지 왜 싸우고 있어?”
그때서야 비로소 유진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덕분에, 살았네요. 저 꼬마도.”
꼬마는 와들와들 떨며 여전히 울고 있었다.
한숨 돌리고 나니 파리 거리가 유진의 눈에 들어왔다.
오슈만 퇴근하고 있던 게 아닌지, 곳곳에서 늑대가 잡혔다.
주로 왕실 병사들의 솜씨다.
하지만 늑대에게 물리거나 죽은 사람들이 거리에 즐비했다.
당장 쓰러진 이들이 비명과 신음을 토한다.
그런데 아무도 돕지 않았다.
거리는 집으로 가득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누구도 부상자를 도와줄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 광경을 보다 유진이 불쑥 말을 뱉었다.
“정말 아무도 안 도와주는군요.”
“응? 아니, 당연하지. 파리는 눈 뜨고 코 베어가는 곳이야. 누가 누굴 돕겠어? 게다가 상대는 늑대라고? 나야 원래 옛 기사의 풍모를 가진 남자니까 널 도운 거지.”
“아, 네. 잘 알겠습니다. 어머니의 애인님.”
오슈가 껄껄 웃으며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곧 나도 새로 결혼해야 할 판인데. 너무 그러지 마라, 유진. 응?”
문득 난장판이 된 거리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 위에 쓴 ‘가발’이 도드라진 남자다.
이를 악문 채 참극의 현장을 노려본다.
문득 남자가 아무도 나오지 않는 광장을 향해 외쳤다.
“이, 참극을 보라! 시민들이여! 어떻게 이런 비극이!”
유진이 눈을 깜박였다.
“뭐야, 저 사람? 갑자기 연설 모드?”
“어, 막시밀리앙 아냐? 저 양반, 법정 다녀오는 길이었나 본데.”
“예? 막시밀리앙이라구요?”
그 순간 유진은 뭔가 귀에 익숙한 이름이 들린 감각을 느꼈다.
막시밀리앙.
결코 이 시대 프랑스에서도 흔한 이름은 아니다.
순간, 오슈가 아주 심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늑대를 방금 잡은 용맹한 병사답지 않게.
“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나랑 같은 독서클럽에 가입한 변호사지.”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대명사가 길거리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유진은 새삼 실감했다.
1788년 8월 파리.
이미 혁명은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
이 시대, 혁명을 일으킨 것은 민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혁명에는 개인의 얼굴이 있다.
누군가 선두에 서 세상을 뒤엎을 구호를 외치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혁명가.
프랑스 대혁명을 대표하는 자.
그게 눈앞의 남자다.
“시민이여, 분노하라! 공정하지 못한 법과 통치에!”
아직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유명한 초상화와는 다르다.
상당히 젊고, 가발 아래로 드러난 머리칼도 꽤 검다.
그러나 눈빛은 형형해 실로 불온해 보인다.
역사의 격동기를 이끌지 모를, 혁명가를 뚫어져라 유진이 볼 찰나였다.
옆에서 오슈가 커다란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
“흐음, 오늘 화가 많이 났나 본데.”
“원래 저래요? 생각보다 연설을 잘 못하는데?”
“그런 것도 꼬마 눈에 보이냐? 신동이라더니.”
오슈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원래 저 친구 변호사잖아. 변호사는 문서로 일하는 직업이라고. 우리 군인처럼 말로 명령하는 게 아니라. 하핫.”
사실 격렬한 말에 비해, 그 울림은 생각보다 약하다.
말이 추상적이거나, 동떨어져 있다거나, 이상적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당장 목소리가 별로 우렁차지 않다.
마이크가 없는 시대, 연설가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우선 목청인데 말이다.
“알고 있습니까? 지금 세금은 모두 평민들에게만 부과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지금 로베스피에르의 즉석 연설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는 의외로 토론과 논쟁, 연설의 시대다.
카페, 살롱, 궁정의 복도 곳곳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물론 그게 힘을 가지는 시대는 아니다.
그저 가십과 불만, 함성으로 이어질 뿐.
그러나 가끔, 거리에서 격분한 사람들이 즉석연설을 할 때가 있었다.
때로 폭동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일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지금 행하는 게 바로 그 즉석연설이다.
늑대가 격퇴당한 파리의 거리.
참상을 본 변호사 로베스피에르가 참지 못하고 외치는 것이다.
아무도 나오지 않지만, 거리를 주시하는 시민들을 향해서.
“곡물의 교역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왜 굶주리고 있습니까? 곡물은 농민이 생산합니다. 하지만 자금을 가진 대상인, 대귀족, 대주교들이 모두 강탈합니다. 싸게 사서 해외로 모두 팔아버리고 있지요!”
어쩐지 잡혀갈 것 같은 소리다.
하지만 5년 전이라면 당장 총을 들이댔을 병사들도 눈치를 본다.
골목의 구석에서, 오두막의 문 틈으로, 오물 속 도로 위에서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드는 탓이다.
불온한 기운이 감돈다.
사람들의 눈빛, 숨소리, 동작 모든 것에서.
꼭 폭발할 것 같은 불안한 감각이다.
마치 불을 지르듯, 새된 소리로 로베스피에르가 외쳤다.
“신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프랑스에 공정이 있습니까? 정의가 있습니까? 아니면 하물며 안전이 있습니까!”
순간, 로베스피에르가 유진을 가리켰다.
“저 아이들을 보십시오!”
유진은 깜짝 놀랐다.
골목, 문틈, 거리의 모든 시선이 순식간에 유진과 쓰러져 있던 아이에게 쏠렸다.
아무래도 로베스피에르는 아까부터 늑대를 보고 달려왔던 모양이다.
바로 법원 쪽에서.
그러나 빈약한 체격처럼 힘은 없어 돕지는 못했던 것이다.
울분을 토로하듯 로베스피에르가 유진과 아이를 보며 외쳤다.
“한 아이가 늑대에게 물릴 뻔했습니다. 또한 다른 아이는 말을 희생해, 늑대에게서 아이를 구했습니다. 아무도 돕지 않을 때 서로 도와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로베스피에르가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이 아이들이 죽음의 위기를 당할 때까지, 대체 파리의 군대는 무엇을 한 것입니까!”
사실 엄밀히 말하면, 파리의 치안은 경찰이 지킨다.
무려 루이 14세 시절에 경찰국이 탄생한 탓이다.
물론 경찰이든 군대든, 늑대가 침입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한 것도 맞다.
오슈처럼 퇴근 중이던 근위병들이 직접 나서서 처리할 때까지.
하지만 유진은 놀란 와중에도 로베스피에르의 묘한 언행을 깨달았다.
시민에게는 일절 비난을 토하지 않았다.
오직 국왕의 군대에게 책임을 돌렸다.
아주 묘한 일이다.
지금이 아직 혁명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때다.
“들으십시오, 모두! 곧 삼부회가 소집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유진만 놀란 게 아니었다.
삼부회.
프랑스의 3대 계급 대표자들이 모이는 대회의.
그러나 원역사에서는 이렇게 불린다.
프랑스대혁명을 탄생시킨 마지막 삼부회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파리 시민들도 놀라운지 서로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삼부회라니? 그런 게 있었나?”
“어, 명사회를 잘못 말한 거 아니고? 그 삼부회라면 뭐라더라, 평민들도 모이는 회의인가?”
“아니, 그거 거의 100년 넘게 없었던 옛날 제도 아뇨?”
로베스피에르가 들고 있던 법전을 머리 위로 쳐들며 답하듯 외쳤다.
“그렇습니다! 174년! 그동안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를 국왕 폐하가 소집할 것입니다. 왜? 세금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유진은 전생에서 썼던 논문 기록 한 줄을 떠올렸다.
1788년 8월 말, 프랑스는 국가지불정지 사태에 직면한다.
쉽게 말해 프랑스 정부가 외부에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얘기다.
국무대신, 브리엔이 새로운 세금을 거두기 위해 삼부회 소집을 요청하는 이유다.
하지만 정작 삼부회가 최종적으로 소집된 것은 이때가 아니다.
약 1년 후, 1789년 5월이다.
왜?
루이 16세가 우유부단하게 결단을 미뤘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베스피에르는 이 삼부회 소식을 미리 입수한 모양이었다.
그럼 브리엔 대주교는 왜 삼부회를 소집하자고 왕에게 청했을까?
삼부회가 본래 새로운 세금을 동의받는 회의라서다.
“재정이 파탄났으니, 빵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니 병사들이 파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돈이 없습니까? 이 프랑스에 돈이 많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여전히 새된 소리였지만 포효하듯 외쳤다.
“성직자와 대귀족! 교회와 대저택을 보십시오!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사람들!”
누구나 볼 수 있을 만큼 우뚝 선 교회의 종탑.
도시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는 거대한 대저택의 배후.
성직자와 귀족들이 사는 곳.
그들은 또한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 특권층이기도 하다.
“그들이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저 아이들이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울림통은 적어도 제법 먹히는 연설에 시민들이 박수를 쳤다.
“옳소! 늑대를 막자!”
“돈 많은 자들이 세금을 내야지. 저 사람, 말 시원하게 잘하네!”
“누구야? 변호사 같은데.”
문득 오슈가 유진을 쿡 찌르며 웃었다.
“확실히 똑똑하지 않냐? 저 친구?”
유진은 가만히 있다 어깨를 으쓱였다.
“시대의 선동가답군요.”
지금은 아직 유진만 아는 얘기지만.
***
그러나 아직 선동가 혹은 혁명가는 자신의 운명을 모른다.
“여, 막시밀리앙. 어쩌다 아라스에서 여기까지 온 겁니까?”
오슈가 연설을 마친 로베스피에르에게 다가가 웃으며 인사했다.
본래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북동부 소도시, 아라스의 변호사다.
아라스에서는 꽤 유명하지만 파리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오슈는 마부의 아들답지 않게 지식인과 교류하기를 즐기는 남자였다.
나름 최근 유행하는 카페 독서클럽에 가입했던 것이다.
서로 책을 빌려주며 독서 토론을 하는 클럽이랄까.
오슈를 알아본 로베스피에르가 눈을 크게 떴다.
“라자르? 그대가 웬일이오? 국왕의 침전이나 지키느라 바쁠텐데.”
“말단 병사에게 너무 그러지 마시죠. 아까, 변호사님이 잘 이용하던 소년입니다.”
“응? 아, 용감한 소년이군. 몸은 괜찮고?”
유진은 공손히 로베스피에르에게 인사했다.
“예, 인사드립니다. 유진 드 보아르네입니다. 뮤슈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일순, 7살짜리 답지 않게 정확한 인사에 로베스피에르는 살짝 놀라다 웃었다.
“후후, 난 무슈라 불릴 신분은 아닐세. 나에 대해서 여기 라자르에게 들었나 보지?”
“그게 아니라도 조금은 알죠. 아라스에서는 유명한 법률가이신데요.”
“그래봐야 시골 변호사일 뿐일세. 어린 친구가 세상 소식에 꽤 정통한데. 가만있자, 보아르네면. 후작가인가? 후후, 내 말이 좀 불편했겠는걸.”
어쨌든 로베스피에르의 즉석연설은 귀족들을 겨냥한 것이다.
무려 프랑스 전체 인구의 1.5프로쯤 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발로 채일 정도로 많다고 하긴 어렵다.
특권층의 어린 자제.
얼마나 알아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또한 알아들었다면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런데 유진은 침착하게 답했다.
“아뇨,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험한 말이죠.”
로베스피에르가 눈이 동그래지는 걸 보며, 오슈는 피식 웃었다.
애인 조세핀의 아들.
그래서 친해졌지만, 분명 이 유진이란 아이는 비범하다.
그저 카드 게임을 잘해서가 아니다.
아직 7살인데, 벌써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비범함이 있다.
이게 신동이란 걸까?
로베스피에르도 관심이 생겼는지 유진에게 물었다.
“왜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지금 이 나라가 위험해. 어린 친구는 모르겠지만, 지금 재정파탄 직전이거든.”
“들었습니다. 요새 왕실에 시동으로 출입하고 있거든요. 이달 말에 파산선언이 나온다죠?”
“아, 그래. 지금 전국 각지의 [명사]들에게 소식이 오고 있지. 왕실에서도 얘기가 나온 모양이군.”
그 순간 오히려 오슈가 놀라 물었다.
“정말 파산을 선언한다고? 그럼 내 월급은?”
정부 파산 선언이 나오면 당장 군인 월급부터 위험해진다.
이건 근위병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물론 로베스피에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닐걸, 라자르.”
“그럼 뭐가 문제요? 사람이 돈 없이 살 수 있나?”
“자네는 병사답게 다른 걸 걱정해야지.”
즉석연설을 한 용자답지 않게 로베스피에르가 낮게 말했다.
“대폭동, 아니 어쩌면 [레볼루숑]이 일어날 수도 있어.”
레볼루숑(Revolution).
아직, 혁명이란 의미가 탄생하기 전, 이 단어는 대반란의 강조어처럼 쓰였다.
단지 폭동 수준이 아니라, 정권 탈취를 위해 무력을 쓰는 것.
반란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진다.
식은땀을 흘리며 오슈가 다급히 물었다.
“무슨 말이지? 누가 반란이라도 준비한단 얘기요?”
“그럴 힘을 가진 자가 있나? 루이 14세 이후, 왕실이 모든 군권을 가진 시대야. 귀족 중에도 성직자 중에도 반란을 일으킬 힘은 없지.”
“그런데?”
문득 로베스피에르가 씁쓸히 말했다.
“지금은 그저 소규모 폭동만 일어나는 정도지. 그렇지만, 민중이 언제까지 버틸 거라 생각하나? 내가 아까 한 연설은 현실이야, 라자르.”
프랑스는 본래 풍요로운 국가다.
드넓은 대지, 온화한 기후, 풍부한 물산이 넘쳐난다.
비록 기후가 썩 안 좋더라도 식량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대귀족이나 혹은 상층 대상인들이 해외로 수출하니 남는 게 없다.
게다가 농민을 구휼해야 할 정부는 재정 파탄 직전이다.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돈이 있는 자에게서 세금을 걷어야 한다.
로베스피에르가 다시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이번에 정말 삼부회가 열리면 그 문제를 해결해야지. 잘 될지는 모르지만.”
사실 원역사에서 삼부회는 이때 열리지 않는다.
또한 열린 후에도 사태는 해결되기는커녕 파국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다만 아직 ‘혁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도, ‘혁명의 명장’ 오슈도 그 사실을 모른다.
로베스피에르가 바삐 법전을 들고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다, 오슈가 고개를 돌렸다.
애인, 혹은 ‘전’ 애인에게 부탁받은 신동 유진이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정말 좋은 사람 아니냐, 유진? 나라 걱정에, 백성 걱정에, 애들 걱정까지.”
“정작 저 말고 저 꼬마애는 버리고 갔잖아요?”
“어, 그건 우리보고 알아서 하란 거겠지.”
바로 늑대에게 습격받다 기절한 꼬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게, 어디가 집인지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오슈는 아주 작은 오두막에 살기 때문에, 데려가는 건 무리다.
오슈가 멀뚱거리던 이폴리트를 돌아보았다.
“일단, 저 꼬마가 기절했으니 데려가야겠는데. 이폴리트?”
이폴리트가 눈치를 살피다, 투덜거리며 쓰러진 꼬마를 일으켰다.
“아이고, 알겠어요. 제가 업고 갈게요? 어라?”
문득 이폴리트가 눈을 크게 떴다.
“얘, 여자애네?”
진창에 더러워졌지만, 분명 드레스다.
꼬마의 정체는 소녀였던 것이다.
***
결국 기절한 소녀는 보아르네 자택으로 오게 되었다.
“이야, 우리 자랑스런 시동 아들! 벌써부터 여자애를 데리고 다니는구나!”
마침 집에서 술을 마시던 알렉상드르가 휘파람을 불었다.
당연히 유진에게는 기가 막힐 소리다.
유진이 이폴리트가 소파에 놓고 간 여자애를 흘깃 보며 대꾸했다.
“아니거든요. 늑대한테 습격당했다가, 같이 살아난 아이에요.”
“아이라기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예?”
알렉상드르가 쓰러진 여자애를 슥 훑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대충 12살은 넘었겠군. 몸이 굴곡이 있지 않니? 후후.”
기가 막힌 유진이 입을 쩍 벌렸다.
이 방탕한 귀족은 확실히 괴상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여자애 체형만 보고 나이를 알아본단 말인가?
“와, 바람둥이 귀족쯤 되면 그런 것도 보여요?”
“이 녀석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 꼬라지 봐라. 하여간 옷차림을 보니 귀한 집 애 같은데, 깨어나면 집에 보내줘야겠다. 어이, 얘 좀 돌보고 있어.”
“예, 주인 어른.”
하녀가 다가와 분주히 쓰러진 여자애를 눕히며 보살폈다.
한숨 돌린 유진은 옆의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아까운 조랑말을 잃은 것도 덤으로.
내일부터 어떻게 출근해야 할지 난감한 일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흐음, 로베스피에르와 우리 아버지 알렉상드르라.”
원역사, 미래에 알렉상드르는 혁명기에 기요틴에 목이 달아난다.
누가 날렸을까?
다름 아닌 로베스피에르다.
사실 유진이 굳이 로베스피에르와 대화를 한 이유기도 했다.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이 달아나기 딱 좋은 페어로군. 그냥 손 놓고 있으면 잘리실 텐데. 이혼이야 시켜야겠지만.”
본래 원역사에서 유진은 로베스피에르와 직접 관련은 없다.
그러나 보아르네 가문이 날벼락을 맞은 건 모두 로베스피에르 때문이다.
애초에 조세핀이 감옥에 갔다가 겨우 살아나는 것도 로베스피에르 탓이다.
게다가 나폴레옹도 로베스피에르 때문에 출세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출세하는 과정에서 조세핀을 만난다.
그러나 사실 유진은 나폴레옹을 만나기 전까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미약한 어린애일 뿐.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모를 방탕한 부친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힘이 없다.
“이래저래, 나폴레옹 만나기 전까지는 딱히 답이 없나?”
그때다.
불쑥 소녀가 놀라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은 상태다.
“헉, 헉, 헉. 느, 늑대!”
“음, 벌써 깼어? 여긴 우리 집이야. 일단 안심하고, 이름이 뭐야? 집에 데려다줄게.”
“응? 아, 아까 날 구해준 ‘꼬마’구나. 정말 고마워.”
유진은 눈을 깜박이다 피식 웃었다.
“꼬마가 꼬마라고 하니까 웃기는데. 넌 몇 살인데? 이름은 뭐고?”
언뜻 보기에 유진과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이런 애를 12살 운운한 알렉상드르는 역시 변태가 틀림없다.
그런데 소녀가 입술을 뗀 순간, 유진은 알렉상드르가 맞았음을 깨달았다.
“12살. 난 줄리에 베르나르라고 해. 지금, 레카미에 씨 집에서 지내고 있어. 우리 아빠가 레카미에 씨와 채권거래를 하다가 좀 어려워졌거든.”
이번에는 유진은 로베스피에르 때와는 좀 다른 의미에서 깜짝 놀랐다.
레카미에.
물론 이 이름은 알렉상드르에게 막대한 빚을 지운 금융가의 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레카미에라는 이름이 여자에게 붙으면 좀 다르다.
이 시대 프랑스인들에게는 오히려 [아이돌]처럼 더 유명하게 될 이름.
왜?
프랑스 혁명기, 최고의 미녀라서.
유진은 아직은 그저 평범한 소녀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마담 레카미에?”
“응? 난 레카미에 씨 신세는 지지만 부인은 아냐. 기분 나쁘네. 흥.”
“아니, 그게. 음.”
뭔가 변명을 하려던 유진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레카미에 부인, 아니 줄리에가 말한 단어 중 귀에 박힌 말이 있었다.
채권.
“잠깐, 채권이라고? 좀 자세히 말해볼래?”
어쩌면,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방탕한 부친의 목을 지켜줄 힘을 가질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