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became Napoleon's genius son RAW novel - Chapter (9)
나폴레옹의 천재 아들이 되었다-8화(9/547)
(8) 혁명전야, 안전금고는 영국에 있다
금화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그저 굴러다니는 금속일 뿐이다.
“10만 리브르, 상당한 돈이지. 이제 어쩔 건가?”
막대한 돈은 나라를 뒤엎을 수 있다.
소량의 돈은 그 날의 굶주림을 해결해준다.
적당한 돈은 어떨까?
유진은 흥분한 표정으로 묻는 레카미에를 보다 피식 웃었다.
“투자해야죠.”
지금은 대혁명이 1년도 안 남은 시기다.
10만 리브르는 큰 돈이지만, 이것만 갖고 뭔가 하기는 어렵다.
혁명이 일어나도 은화니까 휴지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물가폭등으로 가치가 떨어질 것은 뻔한 일.
혁명도 난세다.
난세에 재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니, 규모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문득 레카미에가 나이답지 않게 눈을 반짝였다.
“어디에? 혹시 우리 레카미에 은행인가?”
“무슈 레카미에, 정신 차리세요. 지금 왕국은 파산 직전이에요. 프랑스에 투자해서 어쩌게요? 당장 이 돈도 따지고 보면 오를레앙 공작이 미국에 투자하기 위해 준 거라구요.”
“흐음, 그럼 어떤 투자를 생각하고 있나? 혹시 미국에 재투자?”
물론 후세 원역사에서 최후의 승자는 미국이다.
단지 200년 뒤의 일이라는 게 문제다.
사실 장기에는 인간은 모두 죽기 마련.
당장 코앞에 닥쳐온 혁명을 가늠하며,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초장기투자인 것 같군요. 당장 내일 파산 선언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시국인데요. 물론 투자한다면 외국에 해야죠. 가깝고, 언제든 돈을 뽑을 수 있고, 또 사업을 잘하는 곳.”
“그런 나라가 요새 있었나? 지금 유럽 전체가 불경기야. 자네는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왜 없어요? 우리 옆에 있잖아요.”
유진은 살짝 손가락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영국.”
지금껏 꽤 놀랐던 레카미에는 다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영국은 프랑스 적국인데?”
“전쟁 끝난지가 언젠데요. 게다가 미국 독립전쟁 후, 영국 금융가들도 살짝 하락세잖아요? 지금이 투자 적기죠. 영국의 최고 시장인 인도는 아직 멀쩡하다구요.”
“흐음, 그럴 듯 하군. 하긴 나도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투자하고는 있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 못 따라가지.”
7년 전쟁은 벌써 25년 전 일이다.
신대륙의 독립전쟁도 이제 5년 전 일.
언제나 서로 경쟁하는 사이지만, 18세기 유럽은 적국 사이에서도 교역을 하는 시대다.
당장 레카미에도 영국에 살짝 손을 뻗어 투자하는 라인이 있다.
그럼 누가 좋을까?
역시 후일의 승자다.
유진이 눈을 빛냈다.
“베어링스 은행에 투자해 주세요. 아마 받을 겁니다. 지금이라면.”
베어링스 형제 은행.
사실 원역사 미래에는 불량직원의 파생상품 투자로 파산해 유명해지는 곳이다.
그러나 18세기 말, 이 시대는 그야말로 세계 최대은행으로 도약하기 직전 단계다.
저 유명한 로스차일드 일족도 베어링 가문이 건재할 때는 2인자였다.
바로 그 도약 시기가 프랑스대혁명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한창 유망한 은행으로 손꼽힐 성장단계랄까.
현대로 치면 초고속 성장 벤처기업이라 할 것이다.
레카미에도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어디서 그걸 또 들었나? 그 친구들이라면 괜찮지. 신대륙에도 지점이 있고, 암스테르담에도 협력자가 있고. 여차하면 네덜란드 쪽에서 자금 끌고 올 수 있지.”
“해주실 거죠? 수수료는 지불할게요.”
“좋아. 하면 수수료는 다른 걸로 받기로 하지.”
문득 레카미에가 진지하게 유진을 보았다.
“줄리에의 미래를 지켜주게.”
이번에는 유진이 놀랄 차례다.
“저 아직 7살인데요?”
“아니, 무슨! 나도 줄리에를 자네에게 시집보낼 생각은 없어! 어딜, 방탕한 알렉상드르의 아들 따위가!”
“아, 네. 그럼 뭡니까?”
살짝 억울한 얘기다.
알렉상드르와 달리 유진은 원역사에서도 바람둥이가 아니다.
오히려 줄리에는 파리 제일의 미녀이자 연애가로 손꼽힌다.
그렇지만 부친의 행실에 단단히 편견이 있는 레카미에는 절대 유진을 ‘사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명목상 법적으로 레카미에는 줄리에와 아무 상관도 없기도 하지만 말이다.
레카미에가 10만 리브르, 은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는 정말 성공할거야. 특히, 이런 난세라면 더욱 자네 같은 신동이 성공하기 쉽지.”
“과찬이시군요.”
“만약 성공했을 때, 오늘의 도움을 기억한다면 줄리에가 무사할 수 있지 않겠나?”
유진은 슬쩍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 듯한 말이다.
사실 ‘마담 레카미에’, 그러니까 줄리에는 말년이 불행하다.
왜?
나폴레옹과 틀어져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레카미에로서는 프랑스가 반란이라도 일어났을 때, 목숨을 구해달라는 얘기겠지만.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죠. 제가 성공했을 때, 줄리에는 무사할 겁니다.”
레카미에가 씩 웃었다.
“좋아. 그럼, 베어링 형제와 거래를 트러 가볼까?”
18세기 말, 영국 제일의 은행가가 될 이들에게 유진이 손을 뻗친 순간이었다.
레카미에의 중개를 통해서.
***
1788년 9월, 본래는 수확의 계절이다.
-화르륵!
하지만 파리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8월 말, 결국 왕실 정부는 국가 지불불능 사태를 선포했다.
밀값이 폭등하고, 민심은 불안해졌으며, 곳곳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불만에 가득 찬 파리 시민들도 들고 일어났다.
요컨대 ‘폭동’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다 때려부숴! 빵을 내놓으란 말이야!”
“배고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라는 거야?”
“브리엔과 라무아뇽을 처단하라!”
왕의 수석고문이자 재정 총괄 대신 로메니 드 브리엔.
정부 2인자로 법무대신이었던 기욤 크레티앙 드 라무아뇽.
둘 다 지금 정권의 요직을 지냈지만,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지금 민중은 그들을 때려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태워버려!”
문득, 카페 2층 밖에서 날뛰는 소란을 듣다 모자를 쓴 신사가 유진을 돌아보았다.
“와우, 프랑스는 정말 화끈하군. 안 그런가, 어린 신동 친구?”
프랑스 귀족들과 확실히 다른 복식이다.
현대의 양복에 더 가까운 캐주얼한 옷차림.
18세기 말, 런던의 신사들이 입는 옷이다.
유진은 영국신사, 프랜시스 베어링을 보며 웃었다.
“어쩔 수 없죠. 지금 나라는 파산 직전입니다. 미스터 베어링.”
“8살쯤 됐나? 정말 조숙하군. 후후, 파리 사교계에서 자네 이름이 유명하단 얘기는 들었네.”
“그냥 왕실 인사들의 카드 게임을 해줬을 뿐이기도 하죠.”
유진은 흘깃 옆을 돌아보았다.
“저 돈도 그렇게 얻은 돈이구요.”
그곳에 이폴리트 샤를이 긴장한 채, 돈을 지키고 있었다.
10만 리브르.
자루에 꽁꽁 묶어 눈에 띄지 않게 했지만, 밖의 폭도가 된 시민들이 알면 강탈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유진은 이 위험한 자리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진짜 거물이 직접 파리로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어링, 베어링스 뱅크의 창시자.
형, 존 베어링과 함께 은행을 창업해 은행 정식 명칭은 [베어링 형제의 은행]이다.
그러나 실제 사업을 했고, 후세 유명한 베어링스 뱅크를 만든 장본인은 프랜시스다.
이미 미국 신대륙 전쟁에도 투자해 막대한 돈을 쓸어담은 남자다.
심지어 영국은 패전했지만, 프랜시스는 돈을 벌었다.
문득 프랜시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은총으로 획득할 수 있는 자금은 아니지. 10만 리브르쯤 되면. 미스터 레카미에에게 들었네. 오를레앙 공작에게 아직 탄생하지도 않은 미국 채권을 팔았다고?”
“운이 좋았죠. 오를레앙 공작 전하가 관대하신 덕분입니다.”
“미국 채권, 혹시 더 있나?”
시대를 풍미할 모험 은행가, 프랜시스가 묘하게 눈을 번뜩였다.
“내가 앞으로 정말 미국에 팔아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은행의 수수료는 그걸로 하고 싶군.”
보통, 이런 제안은 사기가 많다.
그러나 유진은 프랜시스가 사기를 당했으면 당했지, 사기를 칠 타입이 아니란 걸 안다.
당대의 유명한 정치가들도 모두 프랜시스를 믿는다.
나아가 프랜시스는 그 모두에게 신의로 답한다.
피트, 폭스, 그리고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도.
그렇기에 오히려 이상하다.
사기가 아닌데, 왜 이런 위험한 거래를 해준다는 걸까?
신대륙 채권은 사실 아직 탄생하지도 않은 미국 정부의 채권인데 말이다.
유진이 눈을 깜박이다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과연, 신대륙 사업을 유망하게 보고 계시는군요.”
“물론이지. 또한 프랑스의 유망한 신동에게도 같이 투자한다고 생각하겠네.”
“저요? 저야 그저 조금 조숙하고, 도박에 재능이 있을 뿐인데요.”
프랜시스 베어링이 껄껄 웃어 제쳤다.
“푸하핫! 카드 게임은 나도 좋아해. 아니, 우리 집안이 여기까지 온 게 전부 도박에 가까운 승부 때문이지. 그렇지만 도박은 그냥 운으로 하는 게 아니야! 머리지!”
그렇잖아도 밖은 소란스럽다.
키가 커다란 영국 신사가 껄껄 웃자, 불안하게 밖을 보던 카페 손님들이 쳐다볼 정도다.
그러나 남의 나라, 그것도 잠재적국에 온 주제에 프랜시스는 대담했다.
하긴 원역사에서 베어링 은행은 늘 대담하다.
그러다 결국 로스차일드에게 뒤처지는 거지만 말이다.
아직은 최전성기에 이르려면 30년은 넘게 남은 은행의 창업자, 프랜시스가 눈을 번뜩였다.
“난 말이야. 누구나 다 신대륙에서 철수하는데도 계속 투자했어. 또, 지금은 이 불안하기 그지 없는 프랑스까지 왔지. 왜 그럴까?”
“글쎄요? 위험을 좋아하시나요?”
“바로 그거야! 위험, 모험! 리스크!”
그야말로 흥분된 어조로 프랜시스가 부르짖었다.
“약간만 벌려면 위험은 피해야지. 하지만 거대한 돈을 벌려면 도박을 걸어야 해. 아주 커다란 리스크에!”
실로 맞는 말이다.
눈앞의 상대가 만약 레카미에쯤 되는 거물 은행가라면, 더욱 맞는 말이다.
문제는 레카미에가 중개하긴 했지만, 사실 프랜시스의 상대는 유진이란 거다.
이제 막 8살이 되려는 어린애다.
그런데 모험을 걸다니, 이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유진은 이런 종자를 아주 잘 안다.
그러니까, 유진과 똑같은 부류의 인간.
도박사다.
“망하기 직전인 나라, 그곳에서 내게 돈을 맡기는 어린 천재. 이거야말로 도박을 걸어볼 만한 리스크 아닌가?”
“왜죠?”
“간단하지!”
프랜시스는 이번만은 목소리를 낮췄다.
“프랑스가 망하면, 이 채권은 이 프랑스의 귀족들도 앞다투어 사지 않겠나.”
유진은 눈을 크게 떴다.
역사를 아는 유진에게는 사실 도박이 아니다.
그러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이들에게, 이것은 도박이 맞다.
그것도 수십만 리브르, 혹은 수십만 파운드가 걸린 도박이다.
프랜시스가 활짝 웃었다.
“어때. 나와 거래하겠나? 미국 국채로!”
생각해보니, 원래 도박 사업은 프랑스보다 영국이 더 성행한다.
나아가 도박에 대한 열광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 법.
48세, 중년의 도박 신사를 빤히 보던 유진이 빙긋 웃으며 손을 덥썩 잡았다.
“좋습니다.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군요.”
한쪽은 크고, 한쪽은 작다.
그러나 도박에 대한 열정만은 같다.
요컨대 한탕 대박을 꿈꾸는 방탕아들이랄까.
이 순간 유진과 프랜시스는 프랑스는 망해도, 미국은 안 망한다는 도박에 건 셈이다.
나아가 프랑스가 망했을 때, 이 채권을 환가할 수 있다는 도박이다.
물론 유진은 이길거라 확신했다.
역사를 아니까.
그때였다.
“국왕 폐하의 포고령이다! 폭도들을 제압하라! 쏴라!”
흠칫 놀라 밖을 보았을 때였다.
-탕! 탕! 탕!
마치 프랑스의 몰락을 알리듯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유혈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왕실 근위대와 스위스 용병 근위대가 투입되어 시민들을 때려 눕히는 모습이 보였다.
프랜시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저거, 정말 오래 못 가겠군.”
아직, 왕실은 굳건하다는 것처럼 달리는 근위대를 보면서 한 말이었다.
그것은 도래할 미래다.
***
유혈의 피비린내는 평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멀다.
“와, 우리 시동. 대단해! 그걸 팔았다구? 어디에?”
정작 처음 채권을 거론했던 이는 따로 있다.
바로 공주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다.
물론 유진은 굳이 마리에게 수수료를 지불할 생각은 없지만.
유진이 마리를 수행하다 간명히 답했다.
“모험을 좋아하는 귀족 어르신과 은행가에게요.”
“돈 많이 벌었어? 나한테 선물도 사줄 거지? 아야. 나, 코르셋 때문에 맛난 거 못 먹었는데. 고급 브리오슈는 어때?”
“공주님, 가난한 시동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마리는 이제 막 코르셋을 차는 나이인지, 바짝 조인 허리로 뒤뚱거리는 중이었다.
이 18세기 말은 이른바 로코코 패션의 막바지다.
아직 시대가 바뀌기 직전이라, 마리도 코르셋을 열심히 차는 훈련중인 셈이다.
물론 19세기가 되어도 한동안은 코르셋을 풀지 못하긴 한다.
공주와 유진이 가볍게 노닥거릴 찰나였다.
“맙소사, 또 네케르라니! 그 신교도를!”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격분해 프티 트리아농의 복도로 들어섰다.
그 뒤를 아르투아 백작이 긴밀히 따르고 있었다.
놀란 유진과 공주가 멈칫거리는 사이 두 사람이 언쟁하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쫓아내야 합니다, 왕비 폐하.”
“어떻게? 지금 전임 국무대신이 스스로 사임했어요. 지불불가 선언이 일어났다구요. 왕실 재정을 폭로한 그 자 말고는 대안이 없대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불경한 놈을 수석고문으로 올리다니! 그 자는 심지어 불온한 무리와 아주 친하게 지낸단 말입니다! 심지어!”
왕의 막내동생, 왕당파 아르투아 백작이 이를 드러냈다.
“삼부회를 열자고 얘기를 꺼낸답니다. 그것도 평민들을 2배로 늘려서라도!”
아직 아이들은 알 필요가 없고, 또 알지도 못하며, 알아서는 안 될 이야기다.
바로 왕국 재정파산 위기로, 재상이 교체된 이야기다.
유진에게 채권을 내준 브리엔 대주교는 사임했다.
대신 전임 수석고문이자 재정 총괄이었던 자크 네케르가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네케르는 본래 왕실 사람들이 낭비로 파산 직전이란 걸 폭로해 유명해진 작자라는 거다.
왕실 사람들은 모두 네케르를 좋아할 수가 없다.
어쨌든 아르투아 백작이 빚으로 파산 직전이고, 왕비가 드레스 4천벌에 돈을 퍼부었다는 걸 외부에 알려지게 만든 장본인이니까.
그렇지만 지금 프랑스 왕실은 대안이 없다.
네케르만큼 유능한 재정 전문가도, 다른 채무 해결책도 없다는 얘기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입술을 깨물다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요. 이러다 왕실이 위험해지겠어요.”
유진은 그 얘기를 듣다 눈을 굴렸다.
왕비의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네케르의 조언을 따른 결과, 결국 왕실은 파국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바로 삼부회 개최다.
그러나 열지 않았다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유진이 어제 보았던 유혈극을 생각할 찰나였다.
유진과 마리 테레즈를 발견한 왕비가 다가왔다.
“응? 어머, 우리 샤를로트. 여기서 시동이랑 뭐하니?”
“예, 마망. 유진이 재미있는 일을 했다고 해서요. 미국에서 받아온 채권 종이 있잖아요? 그걸 팔았대요!”
“뭐, 어디에?”
눈을 동그랗게 뜬 왕비에게 유진은 예의바르게 말했다.
“예, 왕비 폐하. 네덜란드의 은행가를 통해 환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실은 왕실에는 비밀일 수도 없고, 비밀이어서도 안 되고, 비밀도 아니다.
어쨌든 브리엔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실행한 일이다.
게다가 향후 후임자 네케르에게 [미국채권]을 받아내려면 역시, 왕비의 승인이 좋다.
그때 옆에서 듣던 아르투아 백작이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우리 도박 신동이 그런 재주도 있었나? 나도 좀 자금을 맡겨볼까.”
“풋, 빚이나 다 갚고 얘기해요. 백작. 폐하도 이제는 더 이상 탕감시켜주기 어려워요.”
“아, 그거야 품위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왕비 폐하.”
서기 1788년, 왕실 정부의 총 재정은 5억 300만 리브르, 지출은 6억 2900만 리브르다.
적자, 1억 2600만 리브르가 왕실을 짓누른다.
그중 왕실이 직접 쓰는 경비는 3500만 리브르, 나머지는 주로 군비와 국채이자다.
그런데 왕족 아르투아 백작이 진 빚이 무려 2천만 리브르다.
거의 왕실 1년 경비에 육박하는 빚을 진 셈이다.
물론 사냥과 연회, 도박에 물 쓰듯 돈을 쓰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정도로 빚을 지면 10만 리브르는 우습게 보이기 마련이다.
마리가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 꼬마 은행가에게 내 쌈짓돈도 좀 맡겨볼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새로운 국무대신이 [공채]를 발행했거든. 그걸 이리저리 팔아치워서 재정을 해결한다는데, 참 어렵구나. 어떠니? 너도 한 번 팔아보는 게? 수수료는 이자만큼 챙겨주마. 음, 3프로?”
유진은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프랑스 국채다.
당연히 왕실이 발행했으니 대혁명이 발발하면 휴지가 된다.
그러나 사실, 이 국채는 알고 보면 원역사에서 프랑스 혁명정부의 골칫거리가 된다.
왜냐하면 국채를 상환하라는 국내외 채권자들의 요구가 빗발친 탓이다.
한 마디로 그저 휴지로만 끝날 채권이 아니다.
환가해서 보유할 수 있는 자금주가 있다면.
이를테면 베어링스 은행이라든가.
“맡겨만 주신다면, 기꺼이 해보겠습니다.”
가볍게 깔깔 웃으며,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고개를 까딱였다.
“좋아. 우선 100만 리브르, 한 번 해보렴.”
100만 리브르, 웬만한 대귀족 1년 수입이다.
여기서 3프로의 수수료면, 1건당 3만 리브르.
일개 시동이 다루기에는 엄청난 돈이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 왕실 재정은 한계상황.
45억 리브르의 채무를 진 상황에서, 3만이든 100만이든 별 차이 없다.
그저 골치아픈 상황에서 시동에게 장난감을 하사한다는 기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유진은 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힘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문득 뒤뚱거리며 아주 날씬한 코르셋을 둘러찬 마리 공주가 다가와 손뼉을 쳤다.
“와, 잘 됐다. 그치, 시동?”
“글쎄요. 이미 45억 리브르의 빚이 있는 나라에서 그게 별 의미가 있을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문득 유진이 공주를 보다 속삭였다.
“공주님도, 마음 굳게 먹으셔야 할 시대가 곧 올 거예요.”
유진보다 3살 많은 아이.
이제 막 11살을 맞이할 마리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밝게 웃었다.
“뭐래, 이 꼬마 시동이! 풋!”
유진은 마주 웃다가 시선을 돌렸다.
1788년 9월, 평화로운 베르사유 궁전에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파국이 시작될 때까지 3개월이 남은 때.
도박사 유진도 겜블을 시작한 것이다.
***
서기 1788년 12월, 시대는 실로 빠르게 흐르고 있다.
“그래서, 대체 얼마나 번 거야?”
평시라면 그저 유진은 평화롭게 자라면 그 뿐이다.
문제는 이 시대가 미증유의 전란기라는 것이다.
일개 소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격변기랄까.
유진의 주위도 부쩍 빠르게 바뀌었다.
예컨대 8개월 전만 해도 투덜대며 수행하던 이폴리트가, 충실한 수행원이 된 것처럼.
-쩔렁!
바로 방금 유진이 튕기듯 건넨, 은화 주머니 때문이다.
“글쎄, 이자율은 낮아. 1프로? 돈을 암스테르담의 호프 은행에 맡겨놓고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허공에서 잽싸게 잡아채는 게, 이폴리트의 뛰어난 반사신경을 보여준다.
이제 곧 16살을 맞이할 한창 때 소년이라도 뛰어난 육체적 능력이다.
당연히 유진도 이폴리트를 그냥 수행원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이폴리트는 주머니 속 은화를 눈이 휘둥그레져 세며 말했다.
“이야, 많은데? 아니, 이자가 문제야? 그 미국 국채인가 우리 프랑스 공채인가를 팔아 넘기는 게 중요한 거지. 수수료 받고 있잖아.”
“뭐, 대충 이자의 10배 정도.”
“엉? 잠깐, 그럼. 배, 백만?”
헤아림을 하던 이폴리트를 보다 유진이 손가락을 입에 댔다.
“쉿, 이폴리트.”
다행히 파리의 시민들은 다들 힘겨워 이쪽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
어쨌든 노새와 말을 타고 베르사유에서 돌아오는 두 소년을 신경 쓸 만큼 여유있지 않다.
왜냐하면 겨울 가뭄에 시달리는 중이니까.
반면 유진의 ‘채권중개업’은 아주 성황이다.
사업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유진은 미국 독립의회 국채와 프랑스 공채 중 팔리지 않는 부분을 왕실에서 얻는다.
매각처는 베어링스 뱅크.
프랑스 은행가 레카미에를 보증인으로 하고, 네덜란드의 대표은행 호프 은행에서 거래한다.
이 과정은 당연히 현물이나 증서가 실제로 이동해야 한다.
그 심부름을 하는 게 바로 이폴리트다.
제법 눈치 빠르고 기민하지만 신뢰성이 있기에 맡긴 일이다.
물론 은화쯤 되면 이폴리트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호송대가 따로 움직인다.
바로 레카미에 은행의 호송대다.
그래도, 심부름만 하느라 규모는 몰랐던 이폴리트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너 진짜 좀 있으면 정말 부자 되겠다. 아니, 부자구나.”
“그건 안 중요해. 이폴리트. 곧 세상이 뒤집어질 테니까. 단지 돈이 있으면 대처하기 편하고, 또 사람 쓰기 좋으니까 벌어둔 거야.”
“예전부터 그 얘기 하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사람은 또 어떻게 모아?”
유진은 보아르네 저택 앞에 노새를 세우다,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은 오슈 씨를 이용해야지. 그 아저씨가 아는 군인들이 있지 않겠어? 내가 봉급을 더 많이 줄 수 있을 걸. 아마 내 계산으로는 반년쯤은 아직 시간이 있을 거고.”
“오슈 씨라면 사람들이 잘 따르긴 할 테지. 근데 무슨 시간 얘기야?”
“그야 세상이 뒤집어지고, 다들 목이 달아날 시간.”
유진은 슬쩍 생 제르맹 거리를 돌아보다 낮게 말했다.
“부르주아든, 귀족이든, 성직자든.”
그 말은 어쩐지 섬뜩하게 들려, 이폴리트는 잠시 몸을 떨었다.
이 꼬마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파리는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 어둡기 그지 없다.
어둠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잠시 이폴리트가 두려워할 찰나였다.
갑자기 보아르네 저택 안, 집주인이 펄쩍펄쩍 뛰며 뛰쳐나왔다.
“맙소사! 정말 삼부회가 선언됐어!”
이폴리트는 깜짝 놀라 말 위에서 떨어질 뻔 했다.
바로 보아르네 가문의 차남이자 이 저택의 주인, 알렉상드르다.
흥분한 알렉상드르를 보며 유진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가 얘기했잖아요. 아버지.”
“그래! 왕실에서 그런 얘기 돈다는 정보야 네가 알려줬지. 하지만 그걸 정말 결단하는 건 또 다른 문제야!”
“그렇게 놀라우세요? 물론 175년만에 일어날 일이긴 하죠. 내년에 모이면.”
삼부회, 곧 성직자와 귀족과 평민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신분의회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의회 문화가 있다.
지방 영주들과 도시들이 서로 힘을 겨루던 봉건주의 시대 산물이랄까.
막 중앙집권형 절대왕정이 태동하던 시절, 왕들은 신분의회를 모아 귀족을 견제했다.
그런데 영국은 귀족들이 아예 승리해, 이 신분의회가 근대형 의회로 탈바꿈했다.
반면에 프랑스는 왕이 절대권력을 쥐어, 신분의회를 소집할 이유가 없어졌다.
때문에 무려 170년이 넘도록 삼부회는 소집된 적이 없다.
이제 마지막 삼부회 이후, 170년만의 삼부회다.
사유는 신설 세금 징수를 위함이다.
그렇지만 정작 모이는 이들, 삼부회 의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문득 알렉상드르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당연히 놀랍지! 이 알렉상드르가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떨칠 때가 왔지 않니?”
이번에는 유진도 조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삼부회 의원으로 나가시게요?”
“그럼! 우리 보아르네 가문도 나름 이 왕국을 움직이는 300개의 귀족 가문 중 하나야. 형님은 파리 귀족으로서 나가겠지만, 나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어!”
“어느 지역으로 나오시게요? 아, 블루아 지역 대표로 나오시겠군요.”
블루아는 파리 인근의 지역이다.
보아르네 가문이 대대로 가져온 영지가 이 지역에 있다.
삼부회도 결국 의원이고, 지역 명사들의 추천을 받아 선임된다.
차남인데다 재산이 부족해 늘 빚에 시달리는 남자, 알렉상드르도 나름 명문 끄트머리쯤은 된다.
명사들의 추천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제는 삼부회 의원이 되는 게, 이 시대에 꼭 좋은 게 아니란 거다.
물론 출세에 목마른 남자, 알렉상드르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래! 이럴 게 아니지. 라파예트 장군을 뵈러 가야겠다. 그 분이 상황을 가장 정확히 아실 거야!”
옛 신대륙 원정군 상관, 라파예트를 찾아 알렉상드르가 뛰쳐나갔다.
유진은 한심하게 알렉상드르의 뒷모습을 보았다.
후세 원역사를 안다면 당연한 일이다.
알렉상드르는 한때, 삼부회 이후에 설립되는 국민공회 의장을 지냈다가 군에 차출되어 전장에 나간다.
그 후 형편없는 지휘 끝에 책임을 물어 사형당한다.
요컨대 능력도 없으면서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다 망한 전형적인 하급귀족인 셈이다.
반면 삼부회 의원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이폴리트는 감탄했다.
아마 현대로 따지면 국회의원 출마하는 중견기업 2세를 보는 평범한 시민쯤 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귀족 집안은 다르긴 하군. 근데 라파예트 장군이면, 미국 독립전쟁 영웅이잖아?”
“뭐, 그렇지. 프리메이슨 회원이기도 하고.”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프리메이슨이라면, 모여서 이상한 토론하는 사람들?”
21세기, 세계를 지배한다는 음모론에 휘말려 있는 비밀결사.
프리메이슨.
그러나 18세기에는 활동은 비공개라도 사회적 명사들이 다수 가입한 단체다.
조지 워싱턴, 라파예트, 모차르트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다.
그야말로 유럽 서구문명권, 전반에 회원을 가진 세계적 명사 클럽이랄까.
다만 이들은 각국 왕실에서는 경계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위험한 불온사상, 곧 [자유]를 외치는 결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프리메이슨의 프랑스 수장이 오를레앙 공작이야. 그리고 프리메이슨은 미국 독립혁명을 지지하기도 했지.”
“어, 그, 그런데?”
“머리를 굴려봐. 프리메이슨이 원하는 세상이 뭘지.”
어처구니 없게도 프랑스 프리메이슨 본부 수장은 지금 오를레앙 공작이다.
국왕의 사촌.
조금 멀지만 왕위승계권을 가진 왕국 제일의 귀족.
예전부터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선호한다고 외치며, 불온한 사상을 가진 이들을 초대해 토론하는 자.
꼭 이들 때문에만 혁명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인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최소한 왕정을 뒤엎을 혁명이 벌어질 거야. 우리는 그 혼란기를 대비해야 해.”
유진은 그 점을 헤아리다 어깨를 으쓱였다.
“다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겠군.”
“뭔데?”
“어머니. 위험해지기 전에 모셔와야 해.”
바로 조세핀의 귀국 문제다.
***
이제는 베르사유 궁전도 더 이상 조용하지 않다.
“삼부회라니, 대체 왜 평민들에게 숙여야 하는 건가요!”
프티 트리아농의 주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국왕 루이 16세를 닦달하고 있는 모양이다.
반면 부모가 싸우는 게 싫은 아이, 공주 마리 테레즈는 투덜거렸다.
“아이, 시끄러. 왜 이렇게 어른들이 소란스러운 거람? 그렇잖아도 [루이]가 아픈데.”
루이.
루이 16세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원역사에서 감옥사로 유명해진 루이 17세도 아니다.
마리 테레즈의 바로 아랫동생, 왕의 장자인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
사실 유진과 동갑내기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결핵을 앓아, 지금도 침대에 누워 있다.
이 시대에는 손쓸 수 없는 불치병이다.
결국 이 작은 루이는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 죽는다.
어찌 할 수 없는 비극을 잠시 떠올리다, 유진이 옆에서 답했다.
“정부가 빚을 많이 져서 그래요.”
“얼마나 졌길래 그래? 요새 우리 시동이 열심히 채권 팔아주고 있잖아? 원래 수석고문 책상만 차지하고 있는 종이더미였는데.”
“그거 갖고 택도 없어요. 또, 유사시 쓸 수 있을지도 아무도 모를 일이고.”
돈은 만능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도, 그 돈을 보증하는 정부가 무너지면 돈은 휴지가 된다.
하물며 지금은 18세기다.
무엇보다도 차라리 하층민이라면 돈을 마음껏 써도, 왕실쯤 되면 혁명기에 돈이 소용없다.
돈이 있어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대신, 유진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고용주, 공주에게 알려야 할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님. 혹시, 제가 갑자기 안 보이게 되더라도 놀라시면 안 돼요.”
공주는 깜짝 놀라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마망이 유진을 자른대?”
“아뇨. 당장은 아니고 여름쯤 해외에 나가봐야 할 일이 있어요.”
“왜? 싫어. 어디 가는 거. 이 브리오슈 같은 뺨을 못 보다니!”
달라붙어 유진의 뺨을 꼬집는 공주를 떼어내며, 유진이 투덜거렸다.
“아야야! 그 브리오슈 타령은 제발 그만하시고. 솔직히 말할게요. 어머니를 모시러 가야 해요.”
만약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왕비 입장에서 유진의 어머니, 그러니까 조세핀은 신대륙의 방탕녀니까.
굳이 파리로 데려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
그러나 어차피 이제 귀족사회 평판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온다.
오히려 방탕한 게 자유의 상징이 되는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조세핀이 활개칠 수 있는 무대다.
물론 이런 사정 따위 모르고, 또 알아도 신경쓰지 않을 마리 공주는 눈을 초롱초롱 떴다.
“아, 보아르네 부인 말이구나. 지금 신대륙에 있다고 했지? 거긴 예쁜 거 많아?”
“엄밀히 말하면 대륙은 아니고 카리브 해의 서인도제도 중 하나긴 한데. 하여간, 마르티니크라는 섬에 살아요.”
“그런데 왜 데려오려고? 파리가 더 위험하지 않아? 요새 소란스럽다던데.”
유진은 살짝 놀랐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어린 공주도 파리의 소요를 들었다는 얘기다.
그만큼 소요 사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얘기를 듣는 게 있긴 하시군요.”
“응? 그야 폭도들이 맨날 난리라고 하던걸. 어른들이 숨기려고 하지만 나도 다 듣는단 말야.”
“그래요. 파리는 위험하죠. 앞으로 더 위험해질 거예요.”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
단순 소요나 폭동이 아니라,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대가.
귀족들의 목을 베고, 왕실을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끌고 와버리는 시대가.
나아가 결국 이 모든 사람들을 감옥에 넣었다가 기요틴 위로 올려버리려 할 시대가.
유진은 새삼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전과 아늑한 트리아농을 보았다.
이 모든 게 단 한 순간에 무너진다.
지금은 철벽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간과 권력과 체제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치며 유진이 말했다.
“하지만 마르티니크는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해요. 영국이 공격해올 수 있으니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영국보다는 혁명이 문제다.
혁명은 프랑스 국내만이 아니라 식민지에도 번지게 된다.
그 때문에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왕실은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세핀은 자칫 그 와중에 위험해질 수도 있다.
원역사에서는 혼란 와중에 무사히 귀국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적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유진이 전생자라도, 조세핀은 엄연히 친모다.
기적에 목숨을 맡기게 할 수는 없다.
어쨌든 프랑스 제일적국, 영국이란 말에 납득한 공주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알겠어. 마망을 데리러 가는 건 어쩔 수 없지. 대신, 빨리 와야 해!”
유진은 공주를 보다 귀여워 피식 웃었다.
“그럴게요. 당장 가는 건 아니니까. 너무 심려치 마세요.”
가능하면, 이 공주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 미래가 바꾸기 어려운 역사의 흐름이라 해도.
반년 넘게 보아오며 생각한 일이다.
그때, 저 멀리서 아르투아 백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주아 의원을 2배로 늘리다니, 절대로 안 될 말입니다!”
삼부회, 평민 의원들을 성직자, 귀족을 합친 것과 동등한 숫자로 맞추자는 요구 얘기다.
아마도 네케르가 지식인들의 요구에 따라 주장하는 것일 터.
국왕은 고민하고, 왕비와 동생인 백작은 거부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왕은 허락하고 만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지금 나라가 파산 직전이야. 새로운 세금을 결의해야 해.”
지금은 실로 강고해 보이는 국왕의 권력이 무너지는 전초.
유진은 그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
파리는 오히려 더욱 들끓고 있다.
“보시오! [애국자]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프랑스 시민들이여!”
수없이 많은 팜플렛, 곧 소책자들이 거리에 뿌려졌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한달 10만종이 넘는 팜플렛이 찍혀나오고 있다.
아마도 현대 프랑스에서도 이 정도로 책이 많이 팔리진 않을 것이다.
시민들은 글자를 아는 자는 직접 읽고, 모르는 자는 팜플렛을 뿌리는 연사의 말을 듣는다.
거리 곳곳에서 삼부회 개최를 주장하는 변호사, 의사, 작가들이 외쳤다.
“프랑스가 위기에 처해 있소! 우리 시민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국자]들과 함께 해야 하오!”
“미라보, 콩도르셰, 시예예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우리를 이끕니다. 에기용 공작 각하도 함께 해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모두에게 공평한 과세를!”
그 중에는 어처구니 없게도 알렉상드르도 있었다.
“시민의 영웅, 라파예트 장군이 우리의 요구를 왕에게 전할 것입니다!”
미라보, 콩도르셰, 시예예스.
모두 혁명 초기 거물들이다.
에기용 공작이나 독립전쟁의 영웅, 라파예트도 마찬가지다.
아직 삼부회가 열리기 전, 겨울인데도 벌써부터 들썩이는 중이다.
유진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퇴근하다가 그 모습을 구경하던 찰나였다.
“부숴! 지금 우리가 세금 내게 생겼어!”
거리 한쪽에서 시민들이 세관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파리로 들어오는 외곽 거리에 설치된 통행세 출납소다.
밀값이 폭등하는 이유 중 하나가, 파리 밖에서 들어오는 밀에 붙이는 통행세다.
부족한 밀에 화가 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이유다.
곳곳에서 싸움도 빈발했다.
“아아, 제발 빵을 주세요! 애가 죽어가요!”
“시끄러! 우리집에는 애가 없는 줄 알아?”
“야, 거기 서! 저 소매치기 잡아!”
그 순간 유진은 낯익은 광경을 멀찍이서 보았다.
-퍽! 퍽! 퍽!
거리에서 빵을 들고 도망가던 아이가 잡혀, 맞는 꼴이다.
황급히 유진이 이폴리트와 함께 노새를 몰고 다가가자, 시민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이미 아이는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끔찍하군.”
유진이 침울하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흥, 시동 주제에 뭐가 끔찍하다는 거지?”
유진의 뒤에서 누군가 툭 쏘았다.
돌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왕비의 수양아들, 아르망 가네다.
유진은 아르망을 보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아르망?”
“내가 어딜 가든! 귀족 나부랑이에게 알려줄 일은 아니야!”
“설마 애국자 당파 사람들 보러 가는 건가?”
어쩐지 아르망의 발길이 연사들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국자들.
꼭 국가주의자들 같은 이름이지만, 실은 혁명 전 평민 유력자들이 모였던 당파다.
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이들 중 다수가 저 유명한 [자코뱅]이 된다.
한 마디로 혁명 추동세력이랄까.
지금 시민들을 선동하듯 연설하는 이들도 다를 [애국자] 파벌 소속이다.
그 뒤에는 단연 오를레앙 공작이 있을 것이다.
아르망이 흠칫 놀라자,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친하게 지내지마. 위험해.”
“하! 누가 귀족 나부랑이 아니랄까봐. 두고 봐, 삼부회가 세상을 바꿀 거니까!”
“그게 아니라, 그 바뀐 세상에서 네가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유진은 아르망을 정시하며 말했다.
“넌 그들에게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의 수양 아들이야, 아르망.”
사실 이건 오를레앙 공작이 들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왕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미쳐서, 혁명가들을 지원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혁명이 일어나면 후원자 따위는 아무 소용 없다.
폭풍우 속에서는 폭풍을 탈 줄 아는 자만 살아남기 마련이다.
대귀족 오를레앙도 위태로운데, 고작해야 왕비 수양아들인 아르망은 어떨까?
시민들에게 악명 높은 마리 왕비의 아들로 찍혀, 죽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무리 아르망이 실은 왕실에 불만이 많더라도, 수양아들이 된 게 싫더라도, 왕비를 증오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얘기다.
아르망이 부들부들 떨다 소리지르며 돌아섰다.
“닥쳐!”
그 뒷모습을 보다, 옆에서 이폴리트가 투덜거렸다.
“참, 호의를 갖고 얘기해줬더니. 저 녀석도 어지간히 꼬였구만.”
“이 꼬마, 옛날에 나랑 부딪쳤던 그 꼬마 맞지?”
“응? 여기 죽은 애? 어, 그런가? 그런가 보군.”
옛날, 유진과 부딪쳐 때리려다, 이폴리트 때문에 도망갔던 소년이다.
그 소년은 거리에서 계속 소매치기를 했던 모양이다.
결국 이렇게 맞아죽을 줄 알았다면, 과연 그래도 소매치기를 했을까?
가만히 소년의 시체를 보던 유진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이런 아이도 살리지 못하는 나라가 버티는 건 불가능하겠지.”
왕실의 화려함, 채권의 막대함, 유쾌한 귀족가.
이 모든 것에 취해있던 것은 어쩌면 유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은 엄혹하다.
프랑스는 지금 한계다.
연사가 드높이 저 멀리 광장에서 외쳤다.
“프랑스의 시민들이여! 함께 일어나, 왕과 삼부회에 전하자! 지금 이 나라의 위기를!”
아주 온건해 보이는 소리다.
그러나 들끓고 있는 사람들의 분노와 원한과 열망은 곧 폭발할 것이다.
역사기록에서 보았던 현실이 유진의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유진은 이폴리트에게 명령했다.
“곧, 엄마를 찾으러 가야겠어. 이폴리트. 배를 준비해놔. 오슈 씨에게도, 만나자고 해.”
1789년 1월.
삼부회가 발표되던 때.
유진은 신대륙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