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became the greatest Russian crown prince of all time RAW novel - Chapter (170)
#170
“뭐, 뭐라? 호환?”
로서아의 상황제를 모시고 금강산으로 떠났던 세자의 소식에 영조는 놀라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갑자기 집채만 한 산군이 나타났는데···.”
귀빈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그만 변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뜻밖의 소식에 한양은 물론이고 조선팔도가 슬픔에 잠겼다.
일시적이나마 로서아의 귀빈인지 뭔지 하는 작자들 때문에 귀한 세자 저하가 횡액을 당했다면서,
“빌어먹을 로서아 놈들.”
“어허, 말조심하게나.”
“산군이 나타난 게 어디 사람 탓인가?”
“아니, 그놈들 아니면 저하가 궁이 아니라 그곳에 가실 일이 무어 있다고.”
“아이고, 아이고.”
“우리 불쌍한 세자 저하.”
우리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형성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나와 빌헬미나가 진짜 신분을 밝히고 세자의 장례에 참석하면서 이는 금세 가라앉았다.
“상황제 폐하와 태후마마시라고?”
“세, 세상에.”
“그래도 세자저하의 빈전에 직접 오셔서 용맹을 치하하시고 또···.”
“그래?”
거기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하일 또한 세자의 용맹을 칭찬하며 조문단을 보내왔다.
물론 그들의 양손이 아주 무거웠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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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을 당한 세자의 시신은 제대로 수습되지 않아 장례에는 로서아의 상황제 일행이 챙겨온 피 묻은 의복을 놓고 치러졌다.
세자 이선의 시호는 사도장헌으로 정해졌으며, 그의 장례는 로서아의 요청으로 군왕의 예에 준하여 치러진다.
장지는 수원 화산으로 그의 발인에는 아버지 영조와 아들 세손 이산은 물론 로서아 황제의 사절, 상황제 모스크바 대공 부부가 함께 하였다고 한다.
-영조실록 번역본 발췌-
발인이 끝나고 한양으로 다시 돌아온 직후, 난 영조에게 세손을 하룻밤 데리고 있고 싶다고 청했다.
“세손을요?”
내 말에 영조는 이리 되물을 뿐,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싫다는 의미일 터였다.
그런 그에게 다가간 난 귓가에 속삭였다.
“자네와 조선이 나와 러시아에 크게 빚진 것을 알잖나?”
“그게 무슨?”
나의 유창한 조선말에 영조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왕인 자네가 아들을 죽이는 패륜을 막아준 것은 물론, 미치광이로 죽을 아들을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으로 둔갑시켜주었잖나.”
“!”
“떠나는 아들에게, 그리고 남아있을 손주에게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알겠습니다. 여봐라.”
그제야 뒤에 선 상선에게 세손의 차비를 명하는 영조를 보며 난 혀를 찼다.
“쯧.”
아비들이란, 아니 왕들이란 본래 비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제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찌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겠다는 말을 안 하는지.’
잠시 기다리자 후에 정조가 되는 세손이 유모 상궁의 손을 잡고 도착했다.
“네가 그리 똑똑하다던 산이로구나.”
내 무르팍을 간신히 넘긴 아이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으, 으. 귀빈을 뵈씁니다.”
낯선 외양의 내가 두려운 듯 멈칫거린 아이가 뒤에 선 할아비의 눈치를 살피더니 제법 또렷한 발음으로 인사를 해왔다.
귀여운 모습에 난 그만 너털웃음을 터드리며 몸을 숙였다.
“이리 와 보거라. 응?”
팔을 벌린 날 보며 몇 번 눈을 끔벅거리던 아이가 폭 안겨 왔다.
세자가 죽었으니, 이제 유일한 후계자가 된 세손을 여염집 아이 대하듯 하는 내 모습에 몇몇 조선 신료들이 불편한 헛기침을 했지만 무시했다.
그렇게 세손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온 난 인상을 쓰고 말았다.
“뭐?”
“생각해보니 죽었다는 이가 나타나는 것도 우습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차피 궁으로 돌아간 세손이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고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터였다.
그저 어린 아이가 아버지가 보고 싶어 헛소리를 한다고 치부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래서 난 사도세자가 마지막으로 부자의 정을 나눌 수 있게 세손을 데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사도세자가 세손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쯧. 네 뜻이 정 그렇다면야. 후회하지 않겠느냐?”
“이제는 버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저는 더 이상 이선이 아니라 아나스타시오이니까요.”
아나스타시오 알렉세예비치 보리소프
사도세자의 새 이름이었다.
부활을 뜻하는 아나스타시오, 그리고 성인 보리소프는 전쟁이 영광, 즉 승리를 뜻하는 보리슬라브에서 따온 것이었다.
중간 이름인 알렉세예비치는….
‘제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은 대공전하가 아닙니까? 그러니 저는 이제 대공전하의 아들이라고 칭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아나스타시오는 몰랐는데 꽤 뻔뻔한 성격이었다.
여하튼 아나스타시오의 고집에 난 졸지에 어린아이 육아에 투입되어야 했다.
그날 저녁.
“잠들었다. 유모의 말로는 낮잠도 안 잤다 하니 아마 깨지 않을 게다.”
“네?”
“가서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거라.”
그제야 붉어진 눈시울로 방 안으로 들어가는 아나스타시오를 보며 난 혀를 찼다.
다음날.
난 어제처럼 내 앞에 세손을 태우고 궁으로 향했다.
“저, 대공 전하.”
“응.”
“로서아는 많이 춥다던데….”
“뭐, 북쪽에 있으니 좀 춥지.”
“그러면 저가 궁에 가서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세손이 저를 마중 나온 상궁나인들을 재촉해 가져온 것은 모자였다.
“어머니가 아직 수를 다 놓지 못해서… 그래도 수만 안 놓였지….”
다른 부분은 완성된 것이라 머리에 쓰면 아주 따뜻할 것이라고 말하는 세손의 모습에 난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이 휘항을….”
울먹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세손의 모습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잘 전해주마.”
그렇게 조선 유람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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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장헌(思到壯獻)세자
1. 개요
조선의 왕세자, 추존 국왕(장종).
영조의 차남으로 생모는 영빈 이씨.
아내는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왕후), 아들은 정조.
1757년 정월 호환으로 생을 마감함.
2. 시호
흔히 사도세자라고 불리는 그의 정확한 시호는 사도장헌이다.
생각할 사, 이를 도, 장할 장, 바칠 헌
그를 떠올려 생각하면 장함이 하늘에 이르렀기에 헌사를 바친다는 뜻의 사도장헌(思到壯獻)이라는 시호는 러시아의 알렉세이 대제가 내린 것이다.
한자의 순서가 어색하다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알렉세이 대제가 손수 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러시아인인 대제가 한문을 얼마나 알았겠는가.
3. 그의 죽음과 조선의 개혁
1757년 정월 당시 왕세자였던 이선은 호환을 당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당시 겨우 스무 살이었다.)지만 조선에는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한다.
당시 미하일 대제에게 황위를 넘기고 모스크바 대공이었던 알렉세이 대제가 조선까지 오게 된 것은 박지원을 비롯한 삼인방을 이르쿠츠크에서 만난 것이 계기라고 알려져 있다.
후에 로서아 학파의 시조로 불리는, 조선 최초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한 삼인방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과의 인연으로 조선에 오기는 했으나, 알렉세이 대제는 자신의 신분을 비밀에 부쳤다.
그러던 그가 은근히 신분을 밝히고 조선의 정국에 관여한 것은 당시 영조가 일으킨 선위 소동 때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함께 조선에 왔던 빌헬미나 대공비가 홍역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석고대죄를 청하는 세자의 상황에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에 애처가로 이름 높은 알렉세이 대제는 은근히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정국이 끼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대제의 신분이 밝혀지자, 당시 조선 정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세자였던 이선은 알렉세이 대제 부처를 모시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갑작스럽게 호랑이의 습격을 받으면서 유명을 달리하고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린 나이에 죽은 사도세자의 짧은 생애가 지극히 가엽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 덕분에 조선이 얻게 된 이득을 생각하면,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앞서 언급했던 로서아학파의 시조 격인 삼인방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 갈 수 있었던 조선유학생 제도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이 조선 유학생 제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로서아 학파는 조선의 개혁에 일등 공신이 된다.
또한 그의 아들인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할아버지 영조는 물론이고 대소신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젊은 로서아 학파의 학자들과 어울리며 조선의 개혁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의 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갓 세 돌이 지난 어린 나이에 아비를 잃어버린 세손에게 알렉세이 대제를 비롯한 러시아 황실은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덕분에 세손은 성년이 되기도 전에 몇 번이나 러시아 황실의 초청을 받아 황도를 오갔고, 그 결과 러시아 황녀인 알렉산드리아 황녀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 황실의 사위가 된 세손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년이 되자마자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선위를 받아 조선 국왕이 된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정조와 로서아 학파의 개혁으로 강력해진 국력, 그리고 황실의 사위라는 지위 덕분에 정조 30년에 설립된 러시아연방에서 조선이 첫 번째 의장국이 될 수 있었다.
이러니 결국 이 조선이 지금과 같은 성세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결국 당시 사도장헌세자의 죽음 덕분이라는 주장에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것이다.
4. 아나스타시오 알렉세예비치 보리소프는 과연 사도세자인가?
아나스타시오가 사도장헌세자라는 주장은 단언컨대, 결코 사실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대하드라마 정조대왕을 보고 이를 사실, 혹은 숨겨진 비사로 생각하지만, 이는 그릇된 추측일 따름이다.
이는 학계의 정설과 무관한, 오롯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작가는 그것이 지난해 발견된 정조의 서간문을 근거로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는 그 서간문을 작성할 당시 정조의 나이는 세 살에 불과하다.
이것만 봐도 작가를 비롯한 이들이 주장하는 아나스타시오의 사도세자 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
물론 한때 이와 같은 주장이 진지하게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때도 있다.
아나스타시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가 사도세자의 죽음 직후라는 점, 또한 그가 등장한 장소가 표트르하벤이라는 점, 전해오는 그의 외양에 대한 묘사가 순수 조선인이라는 점, 그의 예법이나 학식 등이 일반적인 서민 출신이 아니라는 점, 마지막으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극도로 증오하여 학대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 근거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왕세자가 죽음을 가장하고 타국으로 도주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를 당시 왕인 영조를 비롯한 조선 정부가 묵인했다는 점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이 주장의 구멍은 다름 아닌 알렉세이 대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의 주장대로 아나스타시오가 사도세자가 되려면, 알렉세이 대제가 그와 같은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선 답이 안 나온다.
그런데 그가 그런 일을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간 알렉세이 대제가 조선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조선의 음식을 비롯한 여러 문화를 좋아하고 즐긴 것은 맞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가 조선의 왕세자를 빼돌리고, 그 대가로 조선에 갖가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은 알렉세이의 성격이나 행동 방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그와 같은 주장은 이미 오래전 학계에서 낭설로 취급받고 있다.
조선위키 사도장헌세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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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오 알렉세예비치 보리소프
1. 기본
알렉세이 대제의 마지막 시종장.
출생 년도 불명. 1807년 2월 17일 사망
1757년 이후 알렉세이 대제가 죽을 때까지 곁에서 보필한 대제의 마지막 시종장.
2. 생애
1757년 갑자기 대제의 곁에 등장한 아나스타시오가 조선 출신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가 비슷한 시기 죽은 사도장헌세자라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사실 대제에게는 여러 명의 시종장이 있었고(황제쯤 되면 기본적으로 대여섯 명의 시종장과 세자릿수의 시종을 부린다고 함), 가장 오래 대제를 보필한 이는 황태자 시절부터 쭈욱 옆을 지킨 키킨 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종들과 달리 아나스타시오가 유명세를 치르게 된 것은 그가 그 유명한 대제의 제국견문록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대제의 죽음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문 아나스타시오가 1780년부터 십 년에 걸쳐 출간한 대제의 제국견문록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명작이다.
3. 사도장헌세자 논란
-이 부분의 본문은 아나스타시오와 사도장헌세자 동일 인물설입니다.-
아나스타시오가 사도장헌세자라는 주장은 19세기 중반부터 꾸준히 제기된 이야기이다.
그에 지난 2021년 러시아 황실의 허가를 받은 문화재청(아나스타시오는 결혼도 하지 않고, 후손도 없기에 그의 사후 유산과 무덤을 황실이 관리하고 있다)이 그의 시신에서 머리카락을 채취해 조선 왕실과의 혈통적 관계를 밝혀 보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무덤을 파본 결과 관 안에 기록과 달리 그의 시신이 안치된 것이 아니라 연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참고로 그의 시신이 어디로 사라졌는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고, 그 때문에 더더욱 최근 들어 그가 사도장헌세자라는 설이 힘을 받고 있기도 하다.
특히 조선에서는 최근 유행한 사극에서 이 주장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더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밝혀진 바 없다.
조선위키 아나스타시오 알렉세예비치 보리소프 발췌
[루스 위키] 알렉세이 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