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became the greatest Russian crown prince of all time RAW novel - Chapter (171)
#171
이름: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출생: 1690년 2월 28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사망: 1780년 3월 15일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재위: 제국의 황제 (1725년 5월 17일~1756년 5월 17일)
배우자: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의 샤를로테 크리스티네/프로이센의 프리데리케 소피 빌헬미나
자녀: 나탈랴, 표트르, 미하일, 이리냐, 빅토르, 이고르, 드미트리, 예레나
아버지: 표트르 1세
어머니: 예브도키아 로푸히나
별칭
어답알: 어차피 답은 알렉세이 대제
[제국사와 세계사 시험 치다 잘 모르겠는데 엄청 대단하다 싶으면 알렉세이 대제를 적으면 열 문제 중 여덟 문제는 정답이라고 한 말에서 나온 드립.]조선 황제
[조선 문화를 유난히 사랑함. 현재 세계 제일의 식품회사인 차리나 쿠흐냐의 주력 상품 중 하나가 고추장과 김치인 것은 알렉세이 대제 덕분.]괴식 황제
[새로운 음식에 대한 편견이 없어, 당시 넓어지는 제국의 영토와 새롭게 받아들인 원주민들의 식문화를 접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고···. 지금이야 없어서 못 먹지만, 당시만 해도 대다수 유럽인이 꺼리는 음식 재료였던 나물이나 생낙지를 최초로 먹은 제국민이라고···.]딸바보
[요리를 매우 좋아한 예레나 황녀였지만, 기록에 따르면 실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덕분에 예레나 황녀의 손길이 닿은 요리는 종종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맛을 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알렉세이 황제는 그 모든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어주었다고 한다. 황제의 먹방에 혹한 이들이 예레나 황녀의 레시피를 재현했다 피눈물을 흘린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동안 황제
[기록에 따르면 30대부터 거의 늙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들과 함께 거리에 나서면 형제 취급을 받기도 했다고. 78세 때 빌헬미나 황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하룻밤 새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90세 때 갑작스러운 일로 폐렴에 걸리기 전까지 아침 운동으로 말을 타고 나가 사냥감을 잡아 올 정도로 매우 정정했다고 알려져 있다.]대지신
[알렉세이 대제 시절 황실에 편입된 토지들은 대개 당시만 해도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었다. 그러나 대제의 사후 그 땅 밑에서 각종 귀금속, 희토류금속, 석유 등 온갖 자원이 발굴되면서 금싸라기 땅이 되었다. 19세기 중순 연이어 터지는 자원 대박에 그때까지 버려두다시피 했던 황실 소유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조사했는데, 유난히 알렉세이 대제 시절 사들인 땅에서 비싸고 귀한 자원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1. 개요
제국의 2대 황제.
표트르 대제의 뒤를 이어 제국을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지도자로 현재 제국과 러시아 연방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다.
선황인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그대로 이어받아 현재까지 이어지는 제국의 토대를 완성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아버지 표트르 대제와 모후인 예브도키야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인 성향 모두 맞지 않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알렉세이 대제가 태어난 지 8년만인 1698년 예브도키야는 폐위되어 수도원에 감금된다.
그러나 당시 표트르 대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알렉세이 대제는 당시 제국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독일의 작센 제후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알렉세이 대제는 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뜻에 따라 샤를로테와 결혼하여 황도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악적 멘시코프와 예카테리나 황후의 이간질로 두 부자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생기고 만다. 그리고 그와 같은 틈새를 파고든 것은 당시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반하고 있던 보야르 일파였다.
보야르 일파의 모략에 알렉세이 대제는 이탈리아의 나폴리까지 납치당하지만, 이내 기지를 발휘하여 황도로 무사 귀환한다.
2-2. 키예프 시절
황도로 귀환한 알렉세이 대제는 황태자의 지위를 내려놓고 당시 접경지역이었던 키예프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알렉세이 대제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유서 깊은 제국의 교육과정을 최초로 확립한다.
키예프 시절 황태자의 업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농업혁명의 기초를 닦은 일이라 할 수 있다.
표트르 대제 시절 처음 도입된 감자는 그때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에서나 간신히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이를 전국적으로 도입한 것이 바로 알렉세이 대제이다.
또한 농사일을 도와줄 새로운 쟁기를 만들고, 지력을 올려줄 콩과 작물의 보급에도 힘썼다.
보급한 콩으로 짠 기름에 감자를 튀겨 만든 차르 프라이가 탄생한 곳이 바로 키예프이다. 참고로 키예프의 중앙광장에는 차르 프라이 조형물이 서 있다.
2-3. 상트페테르부르크로의 귀환.
1720년 대북방전쟁 승전식을 기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알렉세이 대제는 군공이 없었음에도 주량으로 모든 이를 압도하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현재까지 유행하고 투구주의 원조가 바로 알렉세이 대제라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표트르 대제와의 사이를 이간질한 멘시코프를 쳐낸 대제는 이후 제철, 시멘트, 종두법, 면직물 등 다방면에 관심을 보이며 제국 산업혁명의 기틀을 닦는다.
2-4. 페르시아 전쟁부터 대관식까지.
1722년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반다르아바스를 얻은 것은 물론, 페르시아와 아프간을 비롯한 아랍 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한다. 후에 알렉세이 대제가 이슬람 세계에서 파디샤의 호칭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부터 시작된 이슬람권 공략 덕분이었다.
다시 귀환한 알렉세이 대제는 아버지 표트르 대제와 함께 지금까지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양대 사상 능력주의의 기틀을 다진다.
다름 아닌 관등제의 시행이다.
관등제가 표트르 대제 시기에 시행되었기에 알렉세이 대제의 업적이 아니라고 깎아내리는 이도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포인트가 되는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는 모두 알렉세이 대제에게서 나왔다. [기술 문화 분야 도입, 경매를 통한 판매 등등. 자세한 내용은 {관등제} 문서 참고]
이후 개혁에 반발하는 보야르들의 반란을 진압한 알렉세이 대제가 다시 반다르아바스로 가게 된 것은 당시 제국에 귀화 의사를 밝힌 나디르 샤 [조선과 함께 러시아 연방의 의장국을 주고받는 아프샤르 왕국을 건국한 인물]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행보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는 의견이 분분한데, 이는 이후 일어난 반란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눈엣가시였던 보야르 일파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황권을 안정시키려고 일부러 황도를 비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체로 그 근거로 쓰이는 것이 당시 어린 나이였던 나탈랴와 표트르 남매를 데려갔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황제였던 표트르 대제의 황권은 유례없이 강력했고, 반란 이후 그에 관여한 이들을 처벌을 주도한 것은 알렉세이 대제가 아니라 표트르 대제였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두 남매가 몰래 짐에 숨어들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여하튼 반란을 진압하고 황위에 오른 알렉세이 대제는 본격적으로 제국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2-5. 알렉세이 대제
그가 재위 시기 세운 업적은 한 마디로 너무도 많다.
어지간한 제국의 모든 시작은 그의 치세에 있다고 보면 된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국민교육 과정부터 산업, 문화, 경제 등 전 분야에 대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제국의 강역 또한 80%가 대제의 치세에 넓어진 곳인데, 뉴홀랜드와 아프리카만이 대제의 치세 이후 황제들이 새로이 추가한 영토이다.
그러나 뉴홀랜드는 알렉세이 대제 시절 이미 발견하고 관리 중이었다고 한다.
자세한 업적은 분야별 문서를 확인하는 것을 추천한다.
2-6. 제국유람기
1756년 재위 30년을 채운 대제는 둘째 아들인 미하일 대제에 선위하고 그날로 바로 여행을 떠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표트르 하벤에 도착해 아메리카로 향할 예정이었던 대제는 뜬금없이 조선으로 향했다. 불행한 사고를 겪기도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그로 인해 조선과 제국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질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알렉세이 대제의 조선 방문이 약 45년 후 조선과 아프샤르 왕국이 손을 잡고, 프로이센을 비롯해 아랍과 아시아의 친제국파 국가를 모아 러시아 연방을 설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선을 시작으로 십 년에 걸쳐 제국 구석구석을 돌아본 대제의 유람을 수행한 이가 그 유명한 아나스타시오이고, 그가 대제의 사후 그간의 기록을 모아 출판한 책이 바로 대제의 제국견문록이다.
2-7. 죽음
유람을 마치고 돌아온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키예프에서 머무른다.
당시 대제의 공식 직함은 모스크바 대공. 그러나 일 년 중 모스크바에 머무르는 날은 채 열흘도 되지 않았다.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켜 모스크바 대공이라고 칭하는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여하튼 키예프에 머무르던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방문하는 경우는 대개 막내딸 예레나 황녀를 보기 위해서였다. 일설에 예레나 황녀가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된 것은 대제의 유별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한다. (상황제가 도끼눈으로 째려보면 누가 감히 청혼을···.)
1780년 3월 7일.
그날 역시 대제는 막내딸은 예레나 황녀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황녀와 함께 발트해 연안에서 산책하던 대제가 바다로 뛰어든 것은 물에 빠진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대제가 구해낸 아이가 바로 후에 아프리카 장군, 사막의 여우로 불리게 되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다.
3월이라고 하나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례없는 꽃샘추위가 닥쳤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대제의 나이는 아흔.
그날 밤 열이 오르고 기침을 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걱정을 늘어놓았지만, 알렉세이 대제는 감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사이 급격히 악화한 병세는 폐렴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3월 15일 대제는 미하일 대제, 예레나 황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다.
다른 대제의 자식들은 뒤늦게 연락을 받고 미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대제의 강력한 요청으로 그의 임종을 지킨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이다.
기록에 따르면 대제는 당시 11살이었던 나폴레옹에게 이리 말했다고 한다.
“네가 나를 죽게 한 게 아니라, 너를 살리고 죽었다고 후세에 전해지게 해다오. 네가 장차 어떤 인물이 되느냐에 따라 난 바보가 될 수도, 또는 죽는 순간까지 위대했던 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살아다오.”
대제의 바람대로 나폴레옹은 대제의 사후 길었던 평화로 방만해진 제국의 군제를 개혁하고, 이후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제1차 세계대전은 1746년 일어난 제2차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다]에서 제국을 승전국으로 만드는 1등 공신이 된다.
3. 논란
3-1. 저급 계몽요 논란
알렉세이 대제가 키예프 아카데미 학생들을 데려와 만들었다는 계몽요는 세계 최초의 계몽요로 유명하다.
가장 대표적인 곡의 가사가 다음과 같다.
검은 때 낀 손가락 쪽쪽 빨다가 피 토하고 뒈진다. 진짜 뒈진다. 검은 때 낀 손가락 쪽쪽 빨다가 피똥 싸고 뒈진다, 진짜 뒈진다.
(현재 동요로 쓰이는 학교 종이 땡땡땡 과 같은 가락)
이보다 더 충격적인 가사를 가진 곡들도 많다. 또한 이와 같은 가사는 18세기인 당시에도 매우 저급하고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죽했으면 키예프의 신부님들이 노래 듣고 단체로 뒷목 잡고 드러누웠다가 항의하러 찾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2. 개혁이냐 개악이냐.
알렉세이 대제시기 제국어와 문자는 대대적인 개혁이 진행된다.
현재 제국어가 쉽고 배우기 쉽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개혁 덕분이다.
당시 알렉세이 대제는 조선의 훈민정음과 비교하여 어렵다며 여러 번 역정을 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렇지만 훈민정음은 넘사벽. 그러나 조선어는 매우 어려운 편이라 훈민정음이 세계를 정복하지는 못할 듯.)
그러나 일각에선 아름다운 제국어의 전통을 말살했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나 당시 제국의 품 안에 들어온 여러 원주민의 말과 글을 보존하는 데는 그토록 큰 노력을 기울였으면서, 정작 제국의 말과 글은 난도질해서 파괴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쉬운 말과 글이 넓은 국토와 다양한 민족, 종교를 가진 제국을 하나로 묶은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의 언어 개혁은 필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쉬운 게 좋은 거 아님?)
3-3. 종교 관련 논란
3-3-1. 종교의 자유냐 고도의 계산된 탄압이냐.
알렉세이 대제 치세, 제국은 다종교사회의 기틀을 확실히 다진다.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고, 정교회가 국교의 지위에서 내려온 것은 표트르 대제 치세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정착된 것은 알렉세이 대제의 치세였다.
정확히는 이전까지 러시아 왕국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정교회가 그 자리를 황가에게 빼앗겼다고 볼 수 있겠다.
중세시대 배움이 일어나는 곳은 모두 종교의 그늘 아래였다. 학교는 대부분 수도회의 후원 아래 만들어졌으며, 어느 지역이든 가장 존경받는 식자는 대부분 종교인이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이 글자를 배우면서 가장 먼저 읽게 되는 것은 성서와 같은 본인이 믿는 종교의 경전이었다.
그러나 알렉세이 대제가 학교를 세우고 보통교육을 실시하면서 달라진다. 제국의 모든 어린아이들은 국가가 세운 학교에서 종교 경전이 아닌 역대 황제들의 일대기, 위대한 제국의 역사를 먼저 배운다.
그리하여 종교는 삶, 배움, 학문 그 자체가 아니라 단순한 삶의 동반자 정도의 위치로 격하되고만 것이다. 대신 그 절대적인 믿음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황실이 된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 불합리한 종교 계율에 의문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종교의 위치를 끌어내리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 것이다.
특히 1756년 세제 개혁으로 종교세를 기부세와 통합하여 운영하면서 각 종교의 종단은 알렉세이 로마노프 재단보다 낮은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그에 영향을 받은 것은 정교회만이 아니었다. 당시 기독교와 달랐던 유대교, 이슬람교의 휴일이 통일된 것이나, 매일 5회 메카 방향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이슬람교의 계율이 유명무실해진 것, 코란을 여러 언어로 번역하게 된 것 등등의 종교적 변화가 모두 그 연장선상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각 종교의 몇몇 종파에서는 알렉세이 대제 시기 시작된 제국의 종교 정책이 실상은 종교탄압이나 다름없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제국 각지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알렉세이 대제에 대한 여러 민간 신앙을 들먹이며, 황실이 기존의 종교를 말살하고 황제의 신격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싸우던 이슬람교가 지난 1833년 극적 타협을 통해 당시 파디샤인 황제에게 칼리파 칭호를 바친 것을 두고 정교회 쪽의 비난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그러나 종교란 결국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고 존재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람들이 더 편하게 믿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해야 한다는 황실의 주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3-3-2. 알렉세이 대제를 추종하는 이들.
18세기 당시 수많은 원주민은 그들이 만난 제국민들을 신의 사자로 오인했다.
대표적인 것이 올론족과 하와이 원주민들이다.
그리고 당시 원주민을 평화적으로 포섭하고 싶었던 제국은 이와 같은 오해를 해명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 알렉세이 대제는 아메리카와 태평양 일대에서 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리고 그 지역의 원주민들이 제국 전역으로 흩어지면서 그들의 전통 종교인 일명 알렉세이 교가 널리 퍼지게 된다.
일설이 따르면 1756년 종교 세제 개혁은 이 알렉세이 교의 부흥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4. 자녀 교육법
일명 로마노프 교육법이라는 불리는 제국 황가의 자녀교육법은 알렉세이 대제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세이 대제의 아버지인 표트르 대제 또한 자식 교육에 꽤나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알렉세이 대제가 어린 시절 어떤 이를 가정교사로 두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학습한 내용을 직접 확인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특히 당시 기준으로는 선진국이었던 독일로 조기 유학을 자신의 최측근인 멘시코프를 교육담당관으로 삼아 황태자로서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고 한다. 물론 멘시코프를 교육담당관으로 임명한 것은 큰 실수였지만 말이다.
여하튼 표트르 대제 또한 자식 교육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관심은 18세기의 일반적인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알렉세이 대제의 자식 교육은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특별한 구석이 많았다.
먼저 어린 자녀들에게 매일 같이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준다던가, 어린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그림이 잔뜩 들어간 짧은이야기, 흥미로운 노래 등은 당시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특히나 대제는 자식 교육에서 아비의 역할을 강조하고, 폭력적인 체벌을 극도로 혐오했다고 알려져 있다.
알렉세이 대제에게는 무려 여덟 명의 아들딸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아비인 대제에게 맞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막내로 사랑을 독차지했던 예레냐 황녀의 일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기껏해야 딱밤 정도나 때리셨지. 그나마도 아주 살살. 아버지를 놀리려고 괜히 우는 체를 하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던 모습이 얼마나 재밌던지.’
요즘에는 그게 뭐 별것이냐 싶겠지만, 당시 영국만 해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가죽 허리띠로 때리는 것이 일상적인 시대였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심지어 동시대 프로이센의 왕자였던 프리드리히가 아비에게 어떻게 훈육받았는가를 기억하면 더더욱 비교될 것이다.
그 외에도 로마노프 황실의 황자와 황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일반 학교에 다녔다. 물론 정규수업을 마친 후 가정교사를 통한 특별교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독특한 것은 황녀가 황자가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는 황후나 황제의 결정이었지만,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스스로가 결정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알렉세이 황제의 큰 딸인 나탈랴의 경우 주로 활쏘기와 사격, 승마 등을 배웠고, 표트르 황자는 항해술 등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참고로 막내 황녀였던 예레나가 관심을 보인 분야는 요리였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로마노프 황가의 교육법은 변화하지만, 오랜 세월 변하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매일 저녁 동화책 읽어주기와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는 것을 황가는 대대로 강조했는데, 이는 제국이 ‘저녁이 있는 삶’을 제국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3-5. 인재수집병
일명 알렉세이 대제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두꺼운 인명록이 존재할 정도는 대제의 치세에 제국엔 수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다.
18세기의 지성 볼테르,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의 어머니 헨델, 사계의 비발디, 산업혁명의 선구자 가브리엘, 문학의 여제 에메렌시아, 면직물의 아버지 존 케이, 예방접종의 어머니 몬태규 부인 등등
대부분 각자의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세운 위인들이다. 당시 제국에 그토록 많은 위인이 등장한 것을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이제까지는 당시 제국이 강국이었고 다른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여러 신학문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인재들이 모여들었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이는 현재 의사 면허 시험의 모태가 된 의학인증제나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발간되고 있는 저널 등의 존재를 보았을 때 가장 신빙성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힘을 얻고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다름 아닌 알렉세이 대제의 인재 욕심이다.
얼마 전 대제 시절 증기기관 불도저를 비롯해 수많은 기계설비를 발명한 것은 물론, 내연기관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유명한 보캉송의 일기장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난 사기를 당했다. 물론, 제국민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프랑스에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취를···.-
그 외에도 사기를 당했다거나 납치 등으로 러시아에 오게 된 이들에 대한 기록도 꽤 있다. 물론 황실에서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일축하고 있다.
3-6. 적수리단과 관련된 논란
18세기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적수리단이 과연 지금과 같은 순수 의료봉사 단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주장이 분분하다.
특히나 적수리단의 설립과정에서 알렉세이 황제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각종 기록이 나옴에 따라 봉사단체로 알려진 것과 달리 제국과 황실의 숨겨진 정보단체라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
따라서 그와 관련한 음모론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각종 문학작품부터 영화,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적수리단을 스파이로 그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적수리단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3-7. 아포칼립스물의 창시자
알렉세이 대제가 관심을 가지고 부흥시킨 분야는 너무 많아서, 그가 관심을 안 보인 분야를 찾는 것이 더 빠르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당연히 대제는 출판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제의 치세에 있었던 각종 전쟁 및 정치적인 사건에서 대제가 당시 발달한 제국 출판업계를 이용해 세계여론을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근래 들어 관심을 받는 것은 각종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의 생존을 다룬 장르인 아포칼립스 물의 창시자가 바로 대제라는 사실이다.
대제의 치세에 유럽에는 지진, 해일, 태풍 등의 재난이 잦았는데, 당연히 18세기에 그와 같은 재난에 대응하는 방법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대제는 자연 재난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피해를 줄일 수는 있다며 적극적인 재난방지 대책을 주문한다. 그중 하나가 일반인들에게 재난 대비 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아포칼립스물을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당시 그와 같은 아포칼립스물에서 익힌 지식으로 생존한 이들에 대한 기록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리고 그 아포칼립스물은 꾸준히 명맥을 이어나가, 현재 우리 제국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아포칼립스물 명가가 될 수 있었다.
3-8. 제국차별 주의의 시작
다민족, 다종교 국가인 제국에는 차별이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18세기 알렉세이 대제 치세 이전까지 제국에선 종교, 출신, 성별에 따른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었고, 대체는 치세 내내 이와 같은 차별을 일소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차별이 사라진 대신 제국에는 또 다른 차별주의가 싹텄으니 다름 아닌 제국민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다.
그리고 이 뿌리 깊은 차별의 시작이 바로 알렉세이 대제의 치세이다.
전국규모의 인구조사를 여러 번 실시하며 출생신고와 신분증 발급률이 80%를 넘어선 대제의 치세 후기, 러시아 국적 소유자와 외국인에 대한 각종 차별 조치가 시작된다.
동일 범죄에 대한 다른 처벌부터, 황실 지원금을 이유로 하는 각종 생필품 가격의 차등, 면세혜택과 범위의 조정 등 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차별이 이뤄진다.
다만, 대제의 강력한 주장으로 미성년자에 대한 무상교육은 제국민이든 아니든 제국에 거주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제국민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만연해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가 1756년에 개최된 상트페테르부르크 박람회이다.
여하튼 이와 같은 차별주의는 친제국파 국가들이 똘똘 뭉쳐 러시아 연방을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또한 제국민들이 오랜 세월 갈라지지 않고 하나의 제국민으로서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었지만, 작금에 와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부 제국민들이 보여주는 선민사상 때문이다.
단순히 운이 좋아 제국민으로 태어났을 뿐인 이들이 자신들이야말로 1등 지구인이며, 연방 출신은 2등, 기타 국가 출신은 3등이라는 차별주의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가 잦다. (최근엔 아이돌 그룹멤버 중 하나가 콘서트에서 비슷한 발언을 하며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다.)
때문에 인류애의 러시아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처음으로 만들고 노예 해방, 각종 차별 철폐에 앞장선 알렉세이 대제의 유일한 잘못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는 대제의 업적 중 하나이며, 문제는 위대한 러시아 제국민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소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제국민이라면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1등 신민이며, 지위에 맞은 의무를 다하여 이 지구를 바르게 지켜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지구를 우리 제국이 안 지키면 누가 지키나? 맨날 불법 포경하는 쪽파 놈들? 아니면 원자력 발전소를 세워보겠다는 위험하고 말도 안 되는 발상을 하는 바게트 놈들?)
3-9. 황실 소유 재산 관련 논란
3-9-1. 부동산 투자의 귀재?
올론 족이 대제를 칭한 바위의 신에 빗대 대지의 신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
대제 치세 황실에 편입된 토지들은 당시만 해도 황무지, 쓸모없는 땅 취급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그의 사후 90% 이상(말이 그렇지, 사실상 거의 100%)의 토지에서 금, 은 같은 귀금속, 그보다 더 비싼 각종 희토류금속, 석유 등 온갖 자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황실 소유지라 정확한 매장량과 가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추산한 바에 따르면 황실이 지금(2021년)과 같은 지출을 이어나가더라고 앞으로 천년은 끄떡없을 거라는 주장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
또한 대제 시절 필요한 각종 자원 예를 들어 증기기관을 위한 석탄이나 철광석 등의 채취를 위해 광맥을 찾을 때, 대제가 찍어둔 곳을 파면 백발백중이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해군 제독 골로빈의 회고록 참조]
3-9-2. 황실 소유 문화재
현재 러시아 황실이 소유한 막대한 문화재의 많은 부분이 알렉세이 대제 치세에 수집된 물품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기간 황실에 다양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후원하며 얻게 된 각종 작품의 양 또한 엄청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300년 가까이 되는 황실의 수집품과 비등할 정도의 양과 질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알렉세이 대제의 컬렉션이다.
알렉세이 대제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당대의 예술품은 물론 고문화재(18세기에 문화재 취급받았으니 지금은 그 가치가···.) 구매에 열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예술품 사랑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일화가 바로 리스본 대지진이다.
당시 재난 이후 피해 수습에 관심이 많았던 대제 덕분에 리스본에 진출한 러시아 상단은 포르투갈 왕실과 귀족을 대신해 대지진을 수습한다.
그때 러시아가 수습한 것 중에는 사람들도 있지만, 각종 문화재도 적지 않았다.
그 당시 가져온 문화재의 면면을 살펴보면 티치아노, 루벤스, 카라바조의 작품뿐 아니라 약 4만 권의 장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근세의 해상왕국 포르투갈 영광의 시기에 대한 기록들로 그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다. [포르투갈 사학과 학생들이 러시아로 유학하러 오는 이유 중 하나임. 자세한 내용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포르투칼 학과 참조]
그 양이 너무 엄청나다 보니 일각에서는 지진피해 수습을 핑계로 문화재 약탈을 하러 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으며, 한때 포르투갈은 이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 국왕[동 주제]의 소유권 이전 허가문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에 러시아 황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1981년 이후 이와 같은 주장은 자취를 감췄는데, 이는 당시 황실 문화재 관리를 맡고 있던 나탈랴 황녀의 발언 때문이라고 한다.
“너네 자꾸 그러면 진짜 이거 수장고에 처박아두고, 안 보여준다? 한 이삼백 년 묵혀둘까?”
여하튼 현재 키예프,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이르크추크, 표트르하벤, 올론, 하와이, 스쿼미시, 잭슨빌에 있는 황실 박물관에 전시 중인 유물과 문화재는 황실이 보유한 문화재의 30%에도 못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아홉 곳의 박물관 중 규모가 가장 작다는 하와이 박물관도 전시품을 모두 한 번씩 보려면 최소 삼일은 필요하다고 하며, 가장 규모가 큰 상트페테르부르크 박물관은 한 달은 잡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3-10. 중세의 순수 선언의 시작점?
18세기 중반 유럽은 물론이고 아메리카의 식민지까지 휩쓸며,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순수 선언이 실은 알렉세이 대제의 작품이라는 주장한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최초의 순수 선언인 순수영국선언을 발표한 제임스 8세를 러시아가 후원했다는 점, 이후 순수 선언의 여파로 유럽의 여러 국가가 나라가 쪼개지거나 식민지를 잃어버리는 등의 손해를 볼 때 오로지 러시아만이 이득을 얻었다는 점, 당시 러시아 출판 산업이 발달했고 대제가 이러한 출판업계를 활용해 유럽과 세계의 여론을 좌지우지했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주류학계에서는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종의 야사에 불과하다.
4. 철인 황제
19세기 초 상식의 저자 토머스 페인은 ‘어리석은 군중들의 합의보단 위대한 철인의 통치야말로 이 세계를 가장 효율적이고 바르게 발전시킬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이 시대의 진정한 철인은 바로 알렉세이 대제’라고 말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계승한 신철인 정치론을 펼친, 상식에서 페인은 각 국가의 황실이나 왕실의 가장 큰 의무는 바람직한 지도자, 즉 철인을 찾아 보관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구현한 것이 황실의 가계도를 따져 황위 계승순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황제가 지목한 이가 후계자가 되는 제국 황실의 계승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미하일 대제는 알렉세이 대제의 세 번째 자식으로 차남이었고, 제국의 5대 황제인 빅토르 대제는 데릴사위였다.
빅토르 대제 이외에도 황가의 사위나 며느리로 들어와 공동 황제가 된 이는 현재까지 3명이나 되고 그들 모두 대제의 칭호를 받은 명군들이었다. (참고로 제국 황가에는 내가 황제가 될 상이 아니면 배우자를 황제가 될 상으로 구해오면 된다는 격언이 내려온다고.)
5. 사랑받는 위인
알렉세이 대제는 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다.
그는 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삶을 이전보다 몇 단계 끌어올린 인물이다. 그 때문에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에서도 자신들에게 대제 같은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을 슬퍼할 정도이다.
러시아에서 대제의 이름인 알렉세이는 지난 270년간 가장 인기 있는 이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