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became the youngest disciple of the martial god RAW novel - Chapter 587
무신의 막내제자가 되었다 587화(587/587)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대사형은 항상 착용하고 있던 마왕으로서의 투구를 벗은 채로 있었다.
어쩐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그 눈빛이 조금 더 탁해진 듯한 느낌이었는데, 잿빛이었던 인상이 만날 때마다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다.
대사형을 만나기 전, 나는 이제야 이 사람을 이해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마주한 순간 그러한 생각은 싹 사라졌다.
메마른 얼굴로 나를 보는 대사형의 얼굴에서부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인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마음이야말로 자만일지도 몰랐다.
나는 당황하는 한편, 이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오늘 대사형 앞에 선 내 마음가짐은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회귀하러 온 건가.”
기억 속 목소리보다 훨씬 건조했다. 툭 건드리면 그대로 바스러질 낙엽 같다.
곧바로 본론을 꺼낼 줄은 몰랐지만.
나는 이상하게 차분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고 있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긴 합니다.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무책임한 발언이구나.”
“책임을 제대로 진다면 무책임한 발언이 아니게 되겠죠.”
대화를 나누며 생각했다.
내가 대사형과 언쟁을 빚었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한 번 있긴 하다.
탕타타 때문에 지옥에 끌려갔을 때 말이다. 그때 대사형은 내 경솔함을 지적했고, 백노광에 대해선 날 선 반응을 보였다.
백노광의 정체를 알게 된 지금은, 나도 대사형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대사형은 차분하고 온화해 보여도, 사실 사형제 중 자존심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스승으로 모셨던 유일한 인물이 백노광이었는데, 그 백노광이 실은 인공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대사형이 받았을 충격의 크기는, 나로선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
‘하지만…….’
대사형이 마왕이 된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사형에 대해 아직 잘 모른다.
어쩐지 이 사람이 마왕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히 백노광의 정체만이 아니라…….
무명 제국을 세웠던 무명왕으로서의 일생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또 다른 예감도 들었다.
어쩐지 지옥에서의 언쟁은 우습게 느껴질 만큼, 오늘 나는 대사형과 부딪치게 될 것 같다는 예감 말이다.
“제가 궁금한 건 하나입니다. 대사형. 시간을 되돌린다면 마왕은 어떤 상태가 됩니까?”
“살아난다.”
“…….”
“그리고 살아나는 건 킨가로드투스만이 아니지. 루안. 나는 네가 가장 바라던 걸 이뤄 줬다.”
“예?”
“하덴아이하르를 죽였다.”
“…….”
나는 당황한 얼굴로 대사형을 보았다.
하덴아이하르. 핏빛 달의 마왕.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앙신이며, 현재는 셋째 사형이 달의 표면에서 간신히 붙들고 있는 악마.
그 마왕이 이미 죽었다니.
“대사형이 죽였습니까……?”
“그래.”
“혼자서요?”
“아니.”
“그럼 누구랑…….”
대사형은 대꾸하는 대신 먼 곳에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안개에 둘러싸인 장소를 한동안 직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그들을 되살린다면 마왕조차 다시 토벌해야 한다.”
“그렇겠죠.”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토록 단기간에 마왕 둘을 잡는 기적이 또다시 일어날 것 같으냐.”
“한 번 일어난 일이니 두 번 못 일어날 것도 없죠. 전보다 더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억지를 부리는군. 궁지에 몰린 인간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대사형이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말의 의도가 짐작이 가지 않아 그 얼굴을 빤히 보았으나, 타버린 잿더미처럼 퍼석한 얼굴에선 감정이랄 게 존재하지 않았다.
대사형은 지독한 무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죽은 이들 중 연인이라도 있었나?”
“네?”
나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지만, 당연히 농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없었는데요.”
“그러면 네 심장을 나눌 만큼 소중한 친구가 죽었다든가. 혹은 목숨의 빚을 진 은사가 있었나.”
“그것도 아니고요.”
사실 내게 그 정도로 각별한 친구는 없었다. 물론 에반이나 미르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도 있고, 그 녀석들 또한 그러겠지만.
어쩐지 대사형이 말한 ‘심장을 나눌 만한 친우’라는 개념과는 조금 엇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사도 마찬가지.
여러모로 신세를 진 타온이나 란페로 같은 존재가 있지만, 딱히 그들에게 큰 빚을 진 적은 없다.
참전한 자들은 어디까지나 나와 대등한 자들에 불과하며, 내 성격상 일방적으로 신세를 졌다면 진작 갚아냈을 거다.
“가족, 인연, 정情. 인간의 판단을 그르치는 것들이지. 루안. 넌 지금 이성적이지 못해.”
“제법 깊게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그것마저 착각이겠지. 왜냐하면, 정말로 제법 깊게 생각했다면 결코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
“…….”
아. 이거구나.
이게 그때 빚었던 언쟁과의 차별점이다.
그때의 대사형은 나를 배려했다. 설득하려고 했다. 타인의 생각에 다짜고짜 고개를 젓는 무례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다.
대사형이 나의 사상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회귀를 줄곧 회피했던 또 다른 이유일지도 몰랐다.
회귀를 마음먹는다면 대사형을 만나게 될 것이다. 순서상 그렇단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지금의 나와 대사형이라면 분명, 이런 대화가 피어날 것이란 걸 모종의 예감으로 느꼈기 때문에.
…왜냐하면 우리 사형제는 애초부터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가 지닌 가치관이란 이름의 원이 워낙 커다랬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교집합은 있었다.
하지만 결국 각자의 원은 완전히 겹치지 못했다.
실은 아무리 죽이 잘 맞는 사람이라도 그럴 순 없었을 터다.
그리고 우리들, 백노광의 제자들은…….
겹치지 않았던 부분을 굳이 주목하지 않았다.
각자의 사견을 존중했고, 배려했다.
가장 먼저 대사형이 그랬다.
무공을 가르치는 게 백노광이었다면, 사형제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 보여 준 건 대사형이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이 더 불편했다.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줬던 인물이 그걸 부정하는 것 같아서.
이것은 귀중한 물건이니까 잘 간직하라고 내 손에 쥐어 준 물건을, 다음 순간 헌신짝 버리듯 취급하는 모습을 몰래 엿본 듯한 느낌이다.
대사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 전쟁은 제국의 완승이다. 너희는 최소한의 피해로 마왕을 토벌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영웅이, 죽은 자들은 수백 년 후 신화가 되겠지. 참전자들은 모두 저마다의 각오를 마쳤을 텐데, 회귀하겠다는 것은 그런 자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껏 모욕당하라죠. 셋째 사형이 자주 말했잖습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죽어서 영웅이 되는 것보단 욕을 처먹더라도 추하게 살아남는 게 낫다가 제 지론입니다.”
“그 전제 조건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 정도 피해로 마왕을 죽일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지?”
“…….”
“천 번에 한 번이다. 마왕이란 존재가 우스워 보이나? 재차 싸운다면 별 탈 없이, 전보다 훨씬 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래. 그렇다고 치자. 이보다 더 잘 싸워서, 기적적으로 희생자의 수가 줄었다고 가정해 보겠다.”
대사형이 고개를 기울였다.
시커먼 눈동자가 내 속을 살피려는 것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전의 전쟁에서 1,318명이 죽었었지. 이번엔 1,000명쯤으로 줄었다고 가정해 볼까. 희생자가 300명 줄어든 셈이다. 결과만 봤을 때 네 회귀는 성공이겠지.”
“예.”
“하지만 너와 특히 가깝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사람인 만큼 모든 참전자를 공평하게 대할 순 없지. 너는 300명을 살렸지만, 네 형제와 친우, 동료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
“반대는 어떨까? 당초보다 훨씬 많은 사람- 이천 명에 가까운 참전자가 죽었지만, 반대로 너와 친밀한 자들이 모두 살아남는다면? 너는 그 회귀를 성공이라 여기며, 원래 죽지 않았을 자들의 죽음엔 눈을 돌린 채 성공을 자축할 수 있겠는가.”
“그건…….”
대사형의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네게 몇 번이고 회귀를 반복하게끔 할 수 있다, 열 번, 백 번, 천 번, 혹은 그 이상도. 하지만 그게 네게 이로운 일이라 생각하나?”
“…….”
“이 사람은 죽을 만했으니까 이번엔 회귀하지 않겠다. 반대로 이 사람은 죽으면 안 되니 회귀하겠다. 그렇다면 전장에서 참전자의 생사를 결정하는 건 마왕인가, 아니면 너인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직 모르겠나? 지겹도록 반복되는 지옥의 굴레는 견고한 자아를 천천히 무너뜨리며, 그것은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개인의 의지란 영원하지 않고, 모든 맹세와 결심은 언젠가 허물어지지. 제아무리 강철 같은 정신력의 소유자라도 마찬가지……. 영겁토록 반복되는 회귀란 의지의 형태를 바꾸는 담금질이며, 그 제련은…….”
대사형은, 무채색의 마왕은 어쩐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자신을 마왕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니 난 허락할 수 없어. 너만큼은 결코 마왕이 돼선 안 되니까.”
결심을 세운 채 이곳에 왔다.
설득당하지 않고, 대사형을 오히려 설득할 결심을 굳힌 채 말이다.
하지만 대사형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실로 오랜만에 내 의지가 흔들리는 걸 느꼈다.
하나부터 열까지 반박할 거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의미다.
그 순간, 내 내심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한번 안개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잠깐…….”
나는 당황한 채 대사형에게 손을 뻗었으나, 안개는 침몰 직전의 편주片舟에 차오르는 물처럼 순식간에 내 몸을 뒤덮었다.
내뻗은 손마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잠깐만요, 대사형! 나는-!”
입은 열렸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움찔거리던 주둥이를 결국 닫은 채, 의식이 아득히 멀어짐을 느꼈다.
그 너머로 대사형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이걸로 된 거겠지.”
* * *
“소가주님? 괜찮으십니까?”
“…….”
눈을 떴을 때, 아르잔의 얼굴이 보였다.
“뭐냐…….”
나는 다소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침실에 누워 있는 상태가 묘하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근데 아르잔은 여기 왜 있는 거야?
게다가 방 내부 풍경도 크게 달라져 있었다.
분명히 난 제도 숙소에 혼자 머물고 있었는데, 지금 여긴 누가 봐도 영락없는 귀족 가문의 침실이다.
설마 첫 번째 회귀 때로 돌아온 건가?
아르잔한테 처맞은 채 누워 있었던 그때로 말이다.
그게 아니란 걸 단전의 상태와 아르잔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이 녀석의 표정에 염려가 가득했기 때문.
회귀 초기 이 녀석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런 태도는 부자연스럽다.
“…여기가 어디야?”
“예? 소철당 침실입니다만……. 아.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침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부득이 허락도 받지 않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건 괜찮은데… 아오.”
왠지 모르게 머리가 무겁다.
나는 양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내가 언제 소철당으로 온 거야?”
“전쟁이 끝난 뒤에 곧바로 복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쟁이 끝나고……?”
나는 그 말을 중얼거리며, 문득 침실 옆에 놓인 창문을 보았다가.
“……!”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창문 바깥 연무장에서 말도 안 되는 무언가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빠득 이를 갈고 그대로 침실을 뛰쳐나갔다.
“소가주님?”
신발을 찾을 여유도 없어 맨발로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내려가, 이윽고 배드니커 가문의 연무장에 이르렀다.
새벽녘의 연무장엔 누군가 서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남자.
배드니커의 제일가는 노력파이자 근성가.
하지만.
“루안?”
이미 죽었던.
죽었던 게 분명했던 남자.
내 눈앞에서 죽었고, 그 시신이 담긴 관이 묻히는 것까지 보았다.
그런데 지금, 헥토르 배드니커는 놀란 눈을 한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렇게 놀란 얼굴로.”
“…뭐야.”
“뭐?”
“뭐냐고, 대체!”
헥토르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으나, 나는 심장이 쿵쾅거려서 제대로 그놈의 모습이 눈에 담기지 않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 * *
바위산에 홀로 남은 무채색은 절벽의 끄트머리에 선 채 중얼거렸다.
“…이걸로 된 거겠지.”
무채색은 얼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하였다.
루안이 오기 직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한 남자와 나눴던 대화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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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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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회귀하면 되겠군.”
철혈공이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무채색은 그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왜. 불가능한가? 어차피 회귀는 본래 네가 갖고 있던 권능에서 파생된 힘이라고 했을 텐데, 누구에게 부여할지도 네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시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낮지는 않지.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지금 우리가 거둔 성과도 기적에 가깝다는걸.”
델락이 낮게 웃었다.
“입조심해라. 무채색. 자식을 셋이나 잃은 기적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러면 이번 회귀는, 네 가족만이 살아남은 결과를 찾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인가?”
“아니.”
“그러면.”
“전쟁 참전자의 전원 생존.”
“…….”
무채색은 잠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숨을 깊게 내쉰 채 말한다.
“완전히 미쳤군. 네가 이토록 이상주의자일 줄은 몰랐는데.”
“물론 내 성향과는 맞지 않는 일이지.”
“그런데 왜.”
“그 결과가 아니면 납득 못 할 인물이 있으니까.”
“응석이지. 혹은 투정이고. 루안은 아직 철부지인 면이 있으니까.”
“그래. 하지만 응석 한둘쯤은 받아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더군.”
“한둘 정도가 아니다. 전원 생존이라고? 그 가능성에 닿기까지, 너는 그야말로 무한無限에 가까운 회귀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내 설명이 부족했나?”
“아니.”
“네 정신력은 분명 견고하다. 어쩌면 나 이상으로. 하지만 그 반복되는 회귀의 끝에서, 네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무채색이 물었다.
“자아가 서서히 깎여 나가 결국 감정을 잃는 게 두렵지 않은가?”
“그게 나쁜 일일까?”
델락이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는 철혈의 가호를 받았다. 감정을 지우는 권능이었지. 내가 원한 일은 아니었다.”
“…….”
“당시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어. 그건 끔찍한 경험이었다는 걸. 많은 걸 잃었고, 후회했다. 되돌리고 싶은 일이 한두 개가 아니야. 하지만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째서.”
“만약 철혈의 가호가 없었다면 내가 자식을 낳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
“감정이 사라졌기 때문에 많은 걸 잃었다. 하지만 자식을 낳게 되었지. 가족이 늘었다고. 그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어. 인생은 늘 그렇다. 좋은 방향으로든, 좋지 않은 방향으로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이번에도 그래. 이 과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델락이 무채색의 마왕을 보며 말했다.
“마왕은 물론이고, 신조차도.”
“…….”
“네가 경고했지. 지겹도록 반복되는 지옥의 굴레는 견고한 자아를 천천히 무너뜨리며, 그것은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개인의 의지는 영원하지 않고, 모든 맹세와 결심은 언젠가 허물어진다고……. 하지만 내겐 관계없는 일이다.”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이냐. 겪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철혈鐵血이니까.”
델락이 자신감 섞인 미소를 지으며 한번 더 말했다.
“감정이 사라지더라도 맹세는 사라지지 않아. 나는 가족을 위해 인정人情을 버린 이 맹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왜냐면, 내가 살면서 내린 그 어떤 선택보다도 오늘의 선택이 만족스러우니까. 이런 선택을 한 나를 처음으로 좋아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그것도 감정의 영향이지. 감정이 사라진다면 그 맹세 또한 감흥이 없어질 것이다. 잊힘이 아니다. 그저 변화지.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이 어느 순간 역겹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래. 하지만 무채색. 어차피 모든 인간은 태어나고서부터 쭉 바뀐다. 생김새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지. 인간관계나 신념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태어났을 때의 나와 죽기 직전의 내가 같은 존재란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라면, 직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다는 사실조차 실은 증명하지 못할 문제가 아닌가.”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으로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는 있을 것이라고.”
무채색의 마왕은 멈칫하고 말았다.
문득 델락의 발언이 기억 속 백노광의 목소리와 겹친 듯한 느낌이 든 건 어째서일까.
드물게도 당황하는 무채색을 보며 델락이 말을 이었다.
“이것만큼은 변하지 말자. 기억하자. 모든 걸 잊더라도,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더라도 이것만큼은 지켜내자. 그것은 기억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다. 혹은 가치관일 수도 있지. 나는 어쩐지 신념이라 부르고 싶군.”
“…….”
“그렇게 한 명의 인간이 마음에 어떤 가치를 세우고, 죽기 직전까지 그것을 지켜낼 수 있다면, 사람은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고유한 존재란 걸 증명할 수 있다. 그러니 네 역할 또한 이 순간 정해진 것이지.”
“무엇이지.”
“네가 나의 산증인이 되어 줘야겠다.”
무채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다.
반복되는 회귀의 끝에서, 델락이 여전히 고유한 존재인지 알 수 있는 건 자신뿐일 테니까.
“…여정의 끝에서, 네가 철혈의 마왕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델락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핏줄이 나를 기꺼이 처단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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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철혈공은 길지만 짧은 여정을 떠났다.
그 여정은 별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세월만큼 길 테지만, 아득히 먼 곳에서 봤을 땐 그저 찰나의 반짝임으로만 비칠 터다.
떠나기 전의 철혈공은 한 가지 당부를 더 했다.
이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말라고.
‘누구에게도’라고 말했으나 철혈공이 가리킨 인물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게 네 속죄라면.”
존중해야겠지.
그러니 무채색의 마왕은 이곳에서 쭉 지켜볼 것이다. 수십억 개의 별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그리고 그 모든 게 끝나게 되면.
그때는,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