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Opened a Matchmaking Agency in 18th Century London RAW novel - Chapter (132)
18세기 런던에 결혼정보회사를 차렸다-132화(132/217)
132화. 태오의 소망
◈ 다음 날, 오후 2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
펑- 퍼벙- 펑-
탕-탕- 타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주위로 무시무시한 포격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영국 국왕의 대관식과 결혼식, 장례식 등이 열리고, 역대 국왕 및 영국의 주요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이곳이 가진 특별한 상징성 때문에 하우 장군은 포격을 주저했었다.
정확하게는 런던 시민의 반발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사원 안에 버티고 있는 정부군으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면서 포격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결국, 하우 장군의 최종 지시가 내려지면서 포격이 결정됐다.
오늘 아침 반란군 포병부대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속속 집결했고, 정오를 기점으로 무차별 포격이 가해졌다.
펑- 퍼벙- 펑-
콰쾅- 쾅- 쾅-
태오가 이끄는 정부군은 퇴로가 완전히 막혀있었다.
마지막까지 죽을힘을 다해 항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몬태규 백작이 지원군을 이끌고 곧 도착한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한때 떠돌기도 했지만, 정오가 지나면서 그마저도 사그라들고 있었다.
* * *
웨스트민스터 사원 꼭대기 층.
피융- 피융-
파바박- 팍- 파박-
태오가 몸을 숨긴 벽으로 총탄이 박히고 튕겨 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때렸다.
“오웬! 이리로 와! 이리로!”
“네! 연대장님!”
“밑에 유리가 잔뜩이야! 무릎으로 기지 말고!”
“알겠습니다!”
빠직- 빠지직- 빠직-
총탄 수천 발이 창문을 모조리 박살 내면서 산산조각이 난 유리 파편들이 모래알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헉- 헉-”
“괜찮아, 오웬?”
“네, 연대장님!”
태오는 벌써 몇 시간째 반란군 포병의 움직임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끝없이 쏟아지는 반란군의 총탄에 점점 지쳐갔다.
쓱-쓱- 푹-푹-
저격조 오웬 일병(Private)이 구슬땀을 흘리며 총열 안에 탄환이 맞물리도록 꽂을대로 다져 넣었다.
그리고는 화약 접시에 화약을 채운 총을 태오에게 넘겼다.
“여기 있습니다! 연대장님!”
태오는 발사한 총을 넘겨주고 재장전한 총을 받았다.
그때 망원경을 통해 적의 동태를 살피던 오웬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
“왜 그래? 상황이 안 좋아?”
“네… 놈들이 오늘 여기를 완전히 부숴버리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뒤에… 더 많은 포병부대가 들어오고 있고, 소총수도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버티기에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오웬이 희망 꺾인 목소리로 울먹였다.
맨눈으로 보기에도 점점 더 많은 반란군이 끝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
하우 장군 수하의 부대가 모조리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끝인 건가….’
태오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손을 천천히 펴보았다.
얼마나 긴장하고 힘을 줬던지 손에 남은 힘이 다 빠져버린 것 같았다.
포 사격을 저지시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지체하려 했지만, 이제는 탄알도, 힘도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와아아-
사원 왼편으로 반란군의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집중 포격을 받은 왼쪽 지역은 건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그곳이 점령당한 것 같았다.
그나마 저들의 포탄이 이곳까지 닿지 않아 아직 살아 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꽈쾅쾅-
우르르르- 쿠쿠쿵-
세상을 뒤엎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울림이 또다시 건물과 창틀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오웬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마지막 탄알을 총열 안에 쑤셔 놓고 있었다. 최후를 직감한 표정이었다.
현대 시대였다면 고등학생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군에 왔다고 했었다.
이번 반란이 끝나 큰 포상을 받게 되면, 어머니의 치료비를 대고 어린 동생들에게 맛있는 음식과 옷을 사주고 싶다면서 수줍게 웃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 작은 소망을 이루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못한 태오였다.
“연… 연대장님…!”
총을 받아들고 마지막 화약 접시를 확인하고 있는데, 망원경으로 상황을 살피던 오웬이 떨리는 목소리로 태오를 찾았다.
“왜 그래? 포들이 전부 우리 쪽을 향해 있어?”
“그… 그게….”
오웬은 반란군의 포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한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태오는 손을 뻗어 오웬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괜찮아, 오웬. 정말 힘들겠지만, 우리 마지막을 함께 하자. 너의 용기, 희생을 사람들이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하지만 오웬은 대꾸가 없었다.
망원경으로 분주히 뭔가를 열심히 살피기만 했다.
“오웬, 인제 그만 살피렴. 더 무섭기만 할 뿐이야.”
“그게 아닙니다, 연대장님! 적군이 아니에요! 아군입니다, 아군! 팔에… 팔에 붉은 띠가 없어요! 그리고 엄청나게 많아요! 엄청나게! 지난번 페인 백작 병력에 3~4배는 더 되는 것 같습니다!”
“뭐… 뭐야?”
놀란 태오가 망원경을 뺏다시피 받아 앞을 살폈다.
포격으로 자욱한 연기 사이로 오웬이 말한 군사들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
태오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하늘 높이 나부끼는 깃발들에서 익숙한 가문의 문양이 여럿 보였기 때문이다.
“아… 몬태규 백작, 매너스 공작… 그리고 켄트 가문도 있어!”
수도 방위를 담당하는 몬태규 백작과 함께 최소 다섯 개의 가문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함께 진군해오고 있었다.
반란군의 몇 배는 더 많은 병력이었다.
그리고, 오웬의 말대로 그들의 팔에는 붉은 띠가 보이지 않았다.
“으하하- 연대장님! 반란군들이 도망가고 있습니다! 엄청난 지원군에 놀라 내빼고 있어요! 하하하!”
정말이었다.
대규모의 지원군에 놀라 도망치는 반란군의 모습이 여기저기 잡혔다.
그런데 그때.
“악! 연대장님! 위험해요!”
오웬의 외침에 놀란 태오가 망원경에서 눈을 뗀 순간, 포탄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높은 위치라 이 당시 대포로는 닿지 않을 거리라고 여겼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휘이이익- 휘익-
포탄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태오가 숨어있던 아래를 때렸다.
꽈광- 쿵- 콰쾅-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의 큰 충격과 동시에 머리 위로 크고 작은 돌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곧 건물 갈라지는 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쩌저적- 쩍쩍- 쩌저적-
위험을 직감한 태오가 오웬을 와락 감싸 안았다.
꽈꽝- 쾅쾅-콰콰쾅-
우르르르- 콰광-
휘이이익- 콰쾅쾅-
둔탁한 충격에 이어 머리와 옆구리로 뜨겁게 달구어진 칼이 들어온 듯 화끈거렸다.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리나 싶더니 주위의 모든 소리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연대장님! 연대장님!”
몸을 붙잡고 울부짖는 오웬의 모습을 태오가 멍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연대장님! 정신 차리세요! 연대장님!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희뿌옇던 세상이 빠르게 어두워져 갔다.
◈ 2주 뒤
“으….”
끔찍한 통증에 태오가 번쩍 눈을 떴다.
‘…….’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렸다.
‘…어떻게 된 거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태오는 자신이 메이페어 자택에 누워있음을 알아차렸다.
‘집? 내가 어떻게 집에 와 있는 거지? …아, 맞아. 포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었는데.’
마지막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자기의 몸을 붙잡고 울부짖는 오웬의 모습이었다.
태오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이렇게 죽었다가 눈을 뜨면, 다시 21세기로 돌아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여전히 18세기였다.
덜컹-
“어머! 주인님!”
물수건을 들고 들어온 하녀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 자지러졌다.
“루이자… 집사 좀 불러 줄 수 있겠어?”
“네, 네! 금방 데리고 오겠습니다!”
하녀가 헐레벌떡 뛰어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황급히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섰다.
덜컹-
그런데 집사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달려왔다.
알고 보니 바로 옆방에서 24시간 대기 중이던 의사였다.
“폐하께서 명하신 일입니다. 사태가 진정된 후, 열흘 가까이 제가 매일 샌더슨 경의 상태를 체크해 보고드리고 있었습니다.”
태오는 반란사태의 결과부터 물었다.
“반란은… 반란은 어떻게 됐죠?”
“몬태규 백작과 다른 많은 가문이 힘을 합쳐 런던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면서 상황은 싱겁게 정리됐지요.
하우 장군은 생포 전에 자결했고, 페인 백작은 구금된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 전쟁부(War Office) 장관실.
장성과 고위 관료, 의원들이 캐널 스트리트(Canal Street)에 있는 전쟁부 건물 장관실에 모여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행정과 병참을 담당하는 전쟁 장관(the Secretary at War)이 태오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소식 들으셨지요? 어제저녁 테오 샌더슨 경이 깨어났다는 얘기를요.”
“네, 들었습니다. 정말 목숨까지 질긴 사람이군요. 그 무지막지한 포격에서도 살아남다니.”
해군부 소속의 한 장군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이번 반란 사건으로 샌더슨 경에게 많은 감동을 받은 모양입니다. 남작 작위 수여는 물론이고, 중장 계급을 하사해 어느 한 지역의 총사령관직을 맡길 거라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이 당시 중장(Lieutenant General)은 복수의 사단을 지휘하는 장군이었다. 또 지방에서는 총독의 지위이자 총사령관직에 해당하는 매우 높은 직급이었다.
“허허- 이거 근본도 없는 장사치를 갑자기 그렇게 큰 직책을 맡기신다니… 우리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원.”
그때 퇴역 군인 출신의 하원 의원이 비웃듯이 말했다.
“근본이 없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람이 적진에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가,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반란군을 괴롭히고 결국 국왕 폐하를 보호한 것 아닙니까?
폐하 입장에서 앞으로 누굴 믿으시겠습니까? 반란군 앞에서도 몸을 사리는 사람들 천지인데, 큰 전쟁이라도 나면 아마 제일 먼저 외국으로 도망갈 사람들이라고 여기시지 않을까요?
여기 계신 누구라도 샌더슨 경에 대한 국왕 폐하의 의지에 반대하고 나선다면, 그날로 목이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매일같이 샌더슨 경의 몸 상태를 체크하셨던 폐하의 정성을 보십시오.”
하원 의원의 말을 불편한 표정으로 듣던 한 장군이 투덜거렸다.
“의원께선 램버스 궁에서 샌더슨 경과 며칠 함께 있었다고 정이라도 드셨나 봅니다? 험, 험. 샌더슨 경이 반란군을 맞아서 했던 노력이야 우리도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공을 치하할 때도 적정선이라는 게 있는데, 지금의 폐하께서는 너무 과하십니다. 저희는 그런 모습이 우려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말이 남작 작위 수여지, 곧 백작을 주기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거기다 샌더슨 경이 원한다면 대장(General) 자리라도 만들어서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도록 두실 모양새이니 그것이 신하된 입장에서 걱정이 되는 거지요.”
반란군을 상대한 태오의 대활약은 권력층에게는 강력한 위험신호로 작용했다.
태오에 대한 조지 왕의 신뢰가 너무나 큰 이때, 자칫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는 눈치였다.
특히 태오가 군권을 손에 쥘 경우 발생할 여러 가지 수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폐하는 지금 큰 실수를 하시는 겁니다. 샌더슨 경은 폐하가 생각하시는 그런 충신이 절대 아니에요.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그자가 어떻게 나올지. 폐하를 등에 업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샌더슨 경에 대한 대비를 치밀하게 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연하지요. 이번 하우 장군의 일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또다시 그런 내란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철저한 대비가 반드시 필요해 보입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대비’를 외치는 이들이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권력이 흔들릴까 두렵고 불안한 눈빛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수완 좋은 사업가 정도인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영웅이 되어 있었고, 민심과 국왕까지 등에 업고서 절대 권력을 쥐게 될 판국이었다.
타협이 통하지 않고,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해 사사건건 부딪칠 게 뻔한 인물.
반란군에 맞서 싸워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지만, 반란군이 사라지고 난 지금은 권력 유지에 가장 위협적인 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열흘 후, 윈저성(Windsor Castle).
“샌더슨 경, 내 자네를 런던 근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이네!”
조지 왕의 말에 주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미 소문은 파다하게 돌고 있었지만, 조지 왕의 입으로 직접 듣자 충격에 빠진 듯했다.
이것은 단순한 임명이 아니었다. 테오 샌더슨이 권력의 중심부로 올라선다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일부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고, 또 일부는 환영한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태오가 머리를 깊게 숙여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의 높으신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고개를 든 태오가 말을 이었다.
“하나, 폐하. 제게는 그런 큰일을 맡을 자격이나 능력도 그리고 그런 바람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과분한 훈장과 남작 작위를 수여하신 것만으로도 분에 차고 넘치옵니다.”
조지 3세는 며칠 전, 태오를 비롯하여 큰 공을 세운 군지휘관들에게 바스 훈장(The Most Honorable Order of the Bath)을 수여했다.
이 훈장은 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한 공로자에게 주었는데, 군인이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이례적으로 태오만을 위한 특별한 남작 작위 수여식까지 거행했다.
“어허- 겸손도 정도가 있는 법일세. 자네는 그럴 지위를 가질 충분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이번에 똑똑히 증명하지 않았나?”
“황송하옵니다만, 폐하. 저는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분수에 맞는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조지 왕이 언성을 높였다.
“샌더슨 경은 왜 늘 자기 생각만 하는가? 내가 단순히 자네의 공적 때문에 이러는 것인 줄 아는가? 모두 대영제국(Great Britain)을 위한 나의 결정일세! 이번만큼은 절대 자네 고집대로 되지 않을 거니 그리 알게!”
“죄송하옵니다, 폐하. 부디 이 미천한 자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제가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적진에 뛰어든 공은 있겠으나, 결국 폐하를 구한 것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지켰던 정부군과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올라온 다른 많은 귀족과 민병대의 힘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그들이 오기 전에 시간을 끈 다리 역할을 했을 뿐이고, 제가 가진 힘과 능력도 딱 그 정도라고 여기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은 제 옷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이 조국을 위해서도 절대 적합하지 않은 인사이니,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참 동안 태오를 노려보던 조지 왕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허, 역시 자네의 고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좋아. 그럼 원하는 거라도 말해보게. 그런 것이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 국왕을 모독한 죄로 바로 감옥에 넣어 버릴 것이니.”
자기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조지 왕의 진심이 느껴졌다.
태오도 더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폐하.”
“그래, 뭔가? 어서 말해보게.”
“이번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끝까지 항전한 병사들에게도 최고의 포상과 대우를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지. 내가 이미 큰 포상을 하라고 지시 내렸으니, 그런 것 말고 자네를 위한 것을 말해보래도? 그게 땅이든 금화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내 들어줄 테니 말이야.”
정적이 흘렀다. 적당히 겸손을 떨었으니 이제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어떤 요구를 할 것인지, 그리고 그에 따른 파급력이 자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바빴다.
태오가 짧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폐하, 사실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나 있긴 있사옵니다.”
“오, 그래 그것이 무엇인고? 빨리 경이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하지만, 그것이 폐하께 상당한 부담을 드리는 일이라….”
“어허- 그 판단은 내가 할 테니, 어서 말이나 해보래도?”
기대에 찬 조지 왕이 몸까지 앞으로 숙여 태오의 대답을 기다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대신들과 장군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태오의 말에 집중했다.
그들의 고조되는 감정을 느끼면서 태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하수구 정비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
순간 모두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조지 왕은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수구? 방금 하수구 정비를 원한다고 말한 겐가?”
“그러하옵니다.”
“하수구 정비가 자네를 위한 것과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고위 관료와 귀족들도 웅성거렸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엉뚱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런던 악취의 원인 중 하나가 더러운 하수도 환경 때문입니다. 인구가 갑자기 늘면서 런던을 중심으로 매일같이 많은 오물과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지만, 제대로 된 하수도 시설이 없다 보니 여기저기 쌓이고 막히면서 심한 악취가 도시 전체에 진동하고 있습니다.
저도 평소에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번 반란군과의 전투 중에 지하 통로를 다니면서 이 문제점을 정말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운영하는 사업체 주위에도 많은 하수도관이 있지만, 밖으로 드러난 노상 하수도관에 각종 오물과 쓰레기가 범벅이 되어 좋지 못한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또한, 이 더러운 하수구의 물이 템스강으로 흘러 들어가 수질도 그만큼 나쁘게 만들어 런던 시민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태오의 입에서 하수도 환경의 문제점에 대한 설명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일은 결국 런던 전체의 지하 설비와 연결되는 문제라 국가에서 나서서 정비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힘만으로는 절대 효과를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저로서도 제가 있는 켄싱턴 주변의 하수관이 잘 정비된다면 훨씬 좋은 사업환경으로 인해 간접적인 이득을 볼 수 있는 일이니,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하옵니다.”
황당한 표정으로 태오의 설명을 가만히 듣던 조지 왕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다들 이 사람 얘기하는 것 좀 보게. 원하는 금은보화를 얘기하랬더니, 저렇게 진지하게 하수관을 개선해 달라고 청을 넣고 있는 저 모습을…. 허허허. 자기의 이득을 전체의 이득으로 연결하는 이 현명함을 내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요구를 할지 숨죽이고 있던 대신들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치적 입지나 자신의 보은에 관련된 얘기는 일절 없이, 기껏 시민의 건강과 환경을 위한 하수구 정비사업이 요구의 전부라니.
몇 주 동안 태오가 가질 권력의 위험성에 대해 갖은 설전과 대비책을 논의했던 대신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