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Opened a Matchmaking Agency in 18th Century London RAW novel - Chapter (153)
18세기 런던에 결혼정보회사를 차렸다-153화(153/217)
153화. 신의 목소리
◈ 1781년 6월 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집.
“떠나기 전에 패트릭 경 좀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려고 들렀습니다.”
패트릭의 첫 수업 날.
태오는 패트릭과 함께 바흐의 연습실을 찾았다.
“제가 도리어 잘 부탁드려야 할 처지입니다. 패트릭 경은 제 곡을 불러줄 소중한 분이시니까요, 허허.”
태오는 오늘 출발해, 한 달 일정으로 맨체스터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맨체스터에 있는 방직 공장 확장 문제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패트릭이 화장실에 간 사이 태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바흐 선생님?”
“네.”
“저도 처음에 분명 패트릭 경의 목소리를 듣고서 노래를 잘하지 않을까 하고 여기긴 했지만, 선생님 말씀처럼 그렇게 천재적이라고 까지는 못 느꼈거든요.
과연 선생님의 오페라 곡을 경력도 기본기도 부족한 패트릭 경이 소화해 낼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살면서 오페라 관람은커녕 노래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친구인데요.”
태오의 질문에 빙긋이 웃는 바흐였다.
“샌더슨 경, 세상에는 정말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천재들이 가끔 튀어나오지요. 십여 년 전에 모차르트라는 어린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요.”
“아,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초기 음악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지금 태오 앞에 앉아 있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였다.
1764년 모차르트 가족이 유럽 투어 중에 런던을 방문했는데, 8살의 모차르트를 바흐는 궁전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런던에서 유명한 음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바흐는 어린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고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성껏 가르쳤다.
초기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와 교향곡에서 바흐의 음악적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난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이 어려운 오페라 곡을 만든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입니다.
신성로마제국(지금의 독일) 지역에서 헨델 선생과 같은 해에 태어나셨지만, 헨델 선생에 비해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 이름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하지만 전 세상 그 누구보다 우리 아버지가 훌륭한 음악을 하셨다고 자부합니다.”
바흐 선생의 아버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대중적인 음악보다는 교회 음악을 주로 작곡했고, 종교 사역과 일에 매여 독일을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독일 내에서는 그의 음악적 깊이와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대중적이지 못한 성향 때문에 같은 나이의 헨델에 비해 국제적인 명성은 거의 얻지 못했다.
물론 20세기가 지나면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며, 헨델보다도 훨씬 높은 평가를 받게 되지만, 18세기에는 아들 바흐의 말대로 독일을 제외한 유럽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같은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 아들 바흐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요즘 들어 왜 자꾸 아버지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한 번도 만드시지 않은 오페라 곡을, 정말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만드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심정으로 밤잠을 설치며 써 내려갔지요.”
‘순례자의 여정(The Pilgrim’s Journey)’이라는 오페라 곡이었다.
주로 종교적 성향이 강한 곡을 만들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면서 바흐가 심혈을 기울여 나름의 역작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어렵게 만든 이 곡을 부를 사람이 없었다.
오래간만에 의욕적으로 오페라 작업을 하면서 지나치게 열정에 휩싸인 나머지 인간이 부를 수 없는 곡을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바흐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수많은 가수를 찾아 다녀봤다.
하지만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절망으로 꺾여버렸다.
결국 공연을 위해서는 원곡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수정을 하려 하면 할수록, 아버지를 위한 오페라 곡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 샌더슨 경이 패트릭을 데리고 오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 정말 전율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세상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던 이 곡이… 인간이 아닌 신의 목소리가 필요했던, 아버지를 위한 이 오페라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세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으니까요.”
목이 마른 듯 연거푸 차를 들이켠 바흐 선생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정말 많은 테너와 소프라노들을 가르쳐 보았고, 최고의 카스트라토들과도 작업을 해 봤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탈리아나 다른 유럽에서 크게 성공해 엄청난 인기를 얻고 큰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요.
하지만 그들과 수많은 공연을 하는 동안 전 한 번도 전율로 벅차올랐던 적이 없습니다. 그저 좋은 공연과 제 곡을 잘 수행해 준 것에 대한 기쁨과 고마움을 느꼈을 뿐이죠. 저들이 프로인 만큼 저도 프로이니까요. 그런데….”
“…….”
“그런데, 그저 피아노로 음정을 맞춰봤을 뿐인데, 패트릭 경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에… 후후… 어이없게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에서 전율이 일더군요.
고작 테스트로 흥얼대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엉터리 같은 그 소리에 40년 넘게 음악을 한 내가 그렇게 감동을 받다니… 허허.”
다시 그때의 감정이 올라오는지 잠시 벅찬 가슴을 내리누르는 바흐였다.
“샌더슨 경. 걱정 마십시오. 많은 가수를 지도해 본 제가 장담하건대, 패트릭 경은… 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의 목소리요?”
“네,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소리를 내는 방법을 몰라 저 보석 같은 목소리를 바로 끄집어내지는 못할 겁니다.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한 달 뒤 후작님의 생일잔치에서의 공연 정도야 전혀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12월 크리스마스에 있을 오페라 공연도 반년간 연습과 준비만 잘한다면 크게 성공하리라 보고요. 그날 참석하셔서 제 말을 꼭 확인해 주세요, 허허.”
* * *
태오는 바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1층으로 내려와 모자를 챙기는데, 마침 화장실에서 나온 패트릭과 마주쳤다.
“샌더슨 경? 지금 맨체스터로 가시는 겁니까?”
“네, 지금 바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바쁘신데 이렇게 일부러 신경 써주셔서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흐의 찬사 때문인지 태오는 패트릭이 이제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패트릭 경. 그럼 그동안 열심히 연습하고 계세요. 바흐 선생님께서 아주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열심히만 하면 올리비아 양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주게 될 테니까요.”
패트릭이 평소답지 않게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게 남자답게 말씀하시니까 자신감 있고 참 보기 좋네요. 바흐 선생님의 칭찬에 용기를 얻으셨나 보군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여전히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계신 것 같아서 미안할 지경입니다.”
“네? 그런데 왜 이렇게 의욕적으로 바뀐 것 같죠?”
“지난번 샌더슨 경께서 올리비아 페리 양이 스미스 부인이 될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이 제게 정말 큰 자극이 된 것 같습니다.”
“아… 그건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혹시, 스미스 경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으신가요?”
“모르겠습니다. 사실 아놀드 스미스 경은 참 사내답고 멋진 친구임은 틀림없지만, 어릴 적부터 유독 저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던 것 같습니다.
변성기가 지나도 굵어지지 않은 제 목소리를 가지고 놀리고 상처 입는 말들을 참 많이 했었죠.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의 악몽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곤 합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친구 때문에 제 목소리가 더 부끄러워 입을 닫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태오는 이런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 무슨 용기가 생겨 결혼 상담을 하러 왔을까 내내 궁금했었다.
단순히 짝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느꼈었는데, 오늘 그 의문이 풀렸다.
아놀드 스미스라는 친구가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접근하자 용기를 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그 친구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그 친구도 어려서 철이 없었을 테고, 저 역시 사내답게 싫은 건 싫다고 맞서 싸우지 못하고 계속 피한 잘못이 있으니까요.
그 친구의 도 넘은 놀림과 저의 못난 성격으로 인해 즐거워야 할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올리비아 양까지 그 친구에게 뺏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반드시 제가 올리비아 양의 마음을 빼앗을 겁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이신 바흐 선생님이 저를 인정해 주시고… 무엇보다 영국 최고의 지성이신 샌더슨 경이 뒤에서 저를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시니까 든든하고 용기가 생깁니다.”
바흐에게 인정받자, 평생 열등감으로 작용했던 목소리가 긍정적인 자신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하. 네, 맞습니다! 맨체스터에서도 제가 열심히 응원을 보내고 있겠습니다. 제가 돌아오면 꼭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세요.”
“네, 남작님!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
* * *
따그닥. 따그닥.
맨체스터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태오는 바흐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신의 목소리라….’
바흐는 누가 뭐래도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천재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칭송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바흐의 오페라 중에 그렇게 대단한 곡이 있었나?’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바흐라고 하면 아버지나 아들 모두 음악계에서는 거장 중의 거장.
그런 사람이 이렇게 감탄할 정도의 소질이라면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태오의 머릿속에 없을 리가 없다.
미술을 몰라도 모네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이름을 알듯이, 신의 목소리라고 극찬할 정도라면 역사의 기록에도 남아 있어야 했다.
‘혹시 이것도 달라진 역사 때문일까? 내가 18세기로 온 것부터 달라졌을 테고, 패트릭 보가트를 만나 우연히 바흐 선생님께 소개해 준 것도 역사와는 다른 전개가 되겠지.
어쩌면 바흐 선생의 ‘순례자의 여정’이라는 곡도 결국 부를 사람이 없어서 세상에 등장하지 못한 곡일 수도 있겠네….’
페리 후작의 생일잔치에 선보일 패트릭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해지고 기대가 되는 태오였다.
◈ 며칠 뒤. 맨체스터, 폴 오스본의 저택.
정말 오래간만에 들른 오스본 씨 댁에서 태오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특히 콜린 피터슨 경과 캐서린 피터슨 부인의 정다운 모습은 두 사람을 연결해 준 장본인으로서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오스본 씨는 든든한 사위와 딸, 그리고 사랑스러운 손주들과 함께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태오는 피터슨 경과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 오스본 씨와 새롭게 확장된 공장을 둘러봤습니다. 피터슨 경이 너무나 잘 준비하셨더군요?”
“새 공장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운송의 효율성을 위해서 운하 가까운 곳에 있는 공장을 중심으로 살폈는데, 운 좋게도 마침 좋은 곳에 물건이 나왔더군요.”
“운도 운이지만 경제를 보는 안목이 남다르시다고 생각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피터슨 경이 일 처리를 잘해주시니 저로서는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매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입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대표님의 투자가 없었다면, 전 이런 공장의 운영을 꿈도 못 꾸고, 지금쯤 클럽이나 전전하면서 경제 토론이나 하고 있었겠지요, 하하.”
‘경제 토론’이라는 말을 듣자 문득 생각이 난 태오가 물었다.
“참, 피터슨 경. 제가 몇 년 전 처음 경을 만나 얘기할 때, 학문적으로 무척 아까운 지식인이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클럽 토론 때 항상 돋보였다면서, 누군가가 그분의 후원자가 돼준다면 정말 좋겠다고도 하셨는데….”
태오의 얘기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피터슨이 금세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스키피오 마셜 박사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스키피오 마셜… 그런데 그분이 박사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에서 강의도 하셨지요.”
말끝을 흐리는 피터슨의 표정이 어두웠다.
“지금은 대학에 있지 않으신가 보죠?”
“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피터슨의 입에서 마셜 박사의 안타까운 사연이 흘러나왔다.
스키피오 마셜은 흑인 노예 출신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영국 상인에 의해 노예선을 타게 되었는데, 카리브해나 북아메리카 쪽의 식민지로 가지 않고 잉글랜드 남부의 어느 백작에게 선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흑인 노예였지만 어리고 잘생긴 외모와 영특해 보이는 눈매를 눈여겨본 선장이 그를 식민지에 팔지 않고, 잉글랜드 남부의 영향력 있던 마셜 백작에게 생일 선물로 그를 넘긴 것이다.
그의 똘똘한 외모를 관심 있게 살핀 당시 마셜 백작은 자신의 성 ‘마셜’을 부여하고, 그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공부까지 시켰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마셜 백작의 호기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흑인도 교육을 받으면 백인과 같이 지식을 깨우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던 백작이 직접 실험을 해본 것이다.
당시 백인사회에서는 흑인이나 유색인종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지능을 가졌다고 여겨, 교육을 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마셜 백작의 이 엉뚱한 호기심 덕분에, 스키피오는 보통의 흑인 노예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타고난 머리와 끈기가 있었던 스키피오 마셜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짧은 시간 안에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그리스어, 독일어, 라틴어까지 수준급으로 익혔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기회를 주었던 마셜 백작이었지만, 도박과 유흥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들들과 비교해, 영특하고 열정적인 스키피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마셜 백작은 그의 공식적인 후원자가 되었고, 그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까지 전적으로 지원하였다.
결국 스키피오는 흑인 최초로 지금의 수학과 물리학 등이 포함되어 있던 자연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아 대학 강단에 섰고, 경제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경제 동향과 관련해 각종 논문을 집필하고 토론도 자주 즐겼다.
매우 보수적인 이 당시 대학에서 흑인 노예 출신 스키피오는 각종 인종차별과 따돌림을 당해야 했지만, 그래도 영향력 있던 마셜 백작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서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를 지원해 주었던 마셜 백작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면서 그의 행운도 거기서 끝이 났다.
항상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마샬 백작의 아들들은 백작이 숨을 거두자마자 스키피오에게 했던 모든 지원을 끊어 버렸고, 대학에서는 수업을 할당해 주지 않았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스키피오는 맨체스터로 일자리를 찾아서 왔고, 지금은 피터슨 경의 도움으로 작은 공장의 관리업무를 맡아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는 내내 태오는 역사적인 한 인물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신기하네. 안톤 빌헬름 아모의 인생과 너무 닮았잖아?’
안톤 빌헬름 아모(Anton Wilhelm Amo).
1703년 현대의 아프리카 가나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노예선을 탔다가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지역의 한 영주에게 팔렸다.
당시 독일의 영주는 그를 다른 흑인 노예와 달리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대학에서 법대를 다니고, 흑인으로서는 첫 철학 박사학위까지 받아 대학에서 강의까지 했다.
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각종 차별과 공격에 시달리다, 후원하던 영주가 죽자 결국 1747년 자기의 고향인 아프리카 가나 지역으로 떠나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대에 있을 때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안타까워했었는데, 그와 매우 비슷한 사연이 영국에도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혹시 역사가 바뀌어서 독일의 안톤 빌헬름 아모가 지금 영국에 등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는 스키피오 마셜 씨가 정말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있는 공장주도 마셜 씨가 흑인이라는 것 때문에 처음에 소개해 주었을 때는 싫어했다가, 공장 수익이 획기적으로 늘어나자 이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지요.”
“스키피오 마셜 씨는 이 근처의 공장에서 근무하나요?”
“네, 마차로 10여 분 떨어져 있는 공장입니다.”
“혹시, 내일 시간 되시면 그분을 제가 직접 좀 뵐 수 있을까요?”
“남작님께서요? 네! 물론 가능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마셜 씨를 보려고 하는지요?”
태오는 교육사업 구상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 학교에서 교장을 맡을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태오의 말에 피터슨이 크게 반색하였다.
“그렇다면, 학교장으로 마셜 씨가 정말 딱입니다. 내일 만나보시면 아실 거예요.”
경제에 해박한 피터슨이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사람이고 대학에서 강의까지 한 박사이다.
게다가 그저 이론에만 해박한 학자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실용적으로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 보였다.
어쩌면 태오가 구상하는 새로운 전문교육 기관의 수장으로 최적화된 인재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