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Opened a Matchmaking Agency in 18th Century London RAW novel - Chapter (28)
18세기 런던에 결혼정보회사를 차렸다-28화(28/217)
28화 11번째 사냥감
“이것 좀 드셔보세요.”
탁.
남작 부인이 과일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 머레이 남작 옆에 앉았다.
태오와 남작 사이에 계속 엉뚱한 얘기만 오가는 것이 답답했는지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다.
“샌더슨 씨, 우리 아들과 어울릴만한 집안의 아가씨를 찾으셨나요?”
“아, 네. 그게··· 아직 알아보는 중입니다.”
태오의 대답에 남작 부인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개할 좋은 아가씨가 생겨서 여기까지 오신 줄 알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아드님과 조금 더 깊이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야 아드님께 가장 어울릴 만한 상대를 고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직접 찾아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백작 부인이 난감해했다.
“이런, 어떡하죠?”
“네?”
“개빈은 어제 오핑턴 무도회 참석차 미리 출발했습니다. 돌아오려면 빨라야 5일은 걸릴 텐데.”
태오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개빈 머레이의 과거 동선을 캐물어 보려면 그가 없는 편이 훨씬 낫다.
“뭐 괜찮습니다. 아드님 성향이야 부모님들이 더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아드님 얘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아들의 결혼 문제로 런던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태오가 기특했는지 남작 부인은 호의적으로 대했다.
“호호. 샌더슨 씨의 중매는 섬세하고 특별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군요. 성향까지 맞추려 하시는 걸 보니. 좋아요, 아들에 관련된 건 뭐든지 물어보세요.”
태오는 개빈 머레이의 성격이나 어린 시절 관련 얘기를 물어보다, 인근 살인 사건의 발생 시기와 슬쩍 비교해 보기로 했다.
“하하. 아드님 성격을 들어보니, 저처럼 집 안에 머물기를 좋아할 것 같은데요? 늦은 저녁에는 잘 안 나가는 편이죠?”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어릴 때부터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다 커서도 마찬가지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베케넘은 물론이고 인근 크로이던이나 브롬리의 살인 사건 전부 늦은 저녁 시간대에 발생했다.
게다가 주도면밀한 사건 결과를 보면 여러 번의 예행연습을 거쳤을 것으로 보였다. 집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범행을 저지를 수 없다.
“그 정도인가요? 가끔 나가지 않나요? 저녁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든가, 바람을 쐬러 간다든가.”
백작 부인이 손사래를 쳤다.
“아유- 아니요. 저녁 식사 한번 빠진 적이 없습니다. 다른 또래들은 도박과 술에 빠져 살아 걱정이라는데, 우리 애는 그 반대죠.”
남작 부인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과장해서 설명하고 있거나, 몇 번 안 되는 외출이라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거··· 부정확한 기억에만 의존해서는 알 길이 없겠는데?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참, 골치 아프네.’
그때였다.
“큭큭큭-”
“킥킥-”
남작의 딸들이 입을 막고 키득거렸다.
“너희들 왜 웃는 거니?”
“아니에요.”
남작 부인이 정색하고 따져 물었다.
“손님 앞에서 교양 없이 뭐 하는 행동들이야?”
둘째 딸이 억울할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어머니가 괜한 걱정을 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괜한 걱정이라니?”
“어머니. 정말 오빠가 밖에 나가지 않아 걱정이세요?”
“그럼, 당연히 걱정되지? 너희들은 집에만 있는 오빠가 걱정도 안 돼?”
“정말 그게 걱정이시라면 그럴 필요 없으세요.”
“무슨 소리야?”
“오빠가 저녁마다 얼마나 자주 나갔는데요.”
태오의 두 눈이 번쩍 치켜 떠졌다.
“저녁마다 나갔다니? ”
“뭐 물론 자주는 아니지만, 한 달에 몇 번씩 저녁 먹고 나면 창문으로 몰래 나갔다 와요. 답답해서 말을 타고 동네를 돈다면서, 몇 시간이나 있다 돌아오곤 했어요.”
“그게 정말이니? 그럼 그냥 현관으로 나가면 되지, 왜 도둑처럼 창문으로 나가?”
“저희도 우연히 봤어요. 뭐 오빠 말로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걱정할까 봐 그런다는데··· 하여간 솔직히 오빠 성격이 좀 이상하긴 하잖아요?”
“정말 그랬단 말이야?”
“네.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새언니가 생기면 저녁마다 산책하러 잘 나갈걸요?”
남작 부인은 정말 몰랐는지 당황스러워 보였다.
“흠, 뭐···그러면 다행이지.”
옆에 있던 막내딸도 참견했다.
“오빠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요.”
“또 뭐가 문제야?”
“무도회에 가서도 도망간다는 거예요.”
“무도회에서 도망가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막내딸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거 오빠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몇 달 전 번즈 백작님이 열었던 무도회에서도 오빠는 재미없다면서 중간에 도망쳐서 보이지도 않았거든요.”
순간 태오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번즈? 프랜시스··· 번즈 백작?’
태오의 놀란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남작의 딸들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그날 가뜩이나 남자가 부족해서 진짜 기회 중의 기회라 오빠를 그렇게 찾았건만, 진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라니까요. 다음 날은 그 무서운 사건 때문에 무도회가 전격 취소되는 바람에 기회가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뻔하지, 뭐. 또 어디로 도망가서 쭈그려 앉아 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있었겠지.”
첫째 딸이 남작 부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인품 좋으신 백작님을 다른 사람도 아닌 후계자 안토니 번즈 자작이 그랬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번즈 자작을 첫날 봤을 때는 그렇게 잔혹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너희들도 항상 조심해야 해.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다가 아니니까.”
안토니 번즈 자작의 이름까지 오르내리자, 태오는 몸이 굳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전혀 상관없을 줄 알았던 개빈 머레이와 번즈 백작의 확실한 연결점이 발견된 것이다.
‘켄트 가문의 무도회가 열리는 날··· 개빈 머레이가 거기에··· 있었다고?’
번즈 백작이 죽은 그날 저녁, 무도회장에 개빈 머레이도 참석했고, 심지어 살인 사건이 벌어진 그 시각에 무도회장 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놀라운 정보였다.
남작 부인은 복잡한 태오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작 가문의 이름을 연신 입에 올리며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연결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듣고 있던 태오의 귓가로 남작 딸들의 소곤거리는 대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데이비드 매너스 공작님이 오핑턴(Orpington)에서 무도회를 여시면 당연히 그랜비 매너스 후작님도 오시는 거겠지?”
“공작님 몸이 안 좋으시니, 큰아들인 매너스 후작님이야 당연히 무도회에 참석하는 거 아니겠어?”
이 시대의 귀족 젊은이들에게 무도회장은 재미는 물론이고 결혼 상대자를 찾기에 최적의 장소였기에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오핑턴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꽤 이름 있는 가문인 매너스 공작의 무도회는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 못지않은 화려함과 많은 볼거리로 인근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연례 행사였다.
갑자기 남작 부인이 딸들을 나무랐다.
“너희들! 이번에는 제발 너희 오빠 좀 제대로 챙겨봐. 이러다 좋은 집안의 숙녀들 다 놓치고 노총각으로 늙어 죽게 생겼어!”
남작 부인의 성화에 둘째 딸이 투덜거렸다.
“오빠가 무도회 자체를 싫어라 하는데 무슨 소용이겠어요? 거기다 춤도 못 추고 말도 못 하는 그런 남자와 어떤 여자가 어울리고 싶겠냐고요?”
태오는 홀로 무도회 참석차 오핑턴으로 갔다는 개빈 머레이가 자꾸만 걸렸다.
‘이번에도 개빈 머레이가 무도회에 참석한다고?’
머레이 남작이 심각해진 태오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샌더슨 씨, 왜 그러시죠?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세요?”
“···네?”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번쩍 든 태오는 머레이 남작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녹색···!’
남작의 홍채 색상이 초록색이었다.
‘잠깐만··· 피해자 9명 중 7명의 홍채 색깔이 녹색이었잖아?’
윌슨 경의 살인 사건 자료에는 피해자의 홍채 색상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피해자 9명 중 7명은 초록색, 나머지 2명은 검갈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검갈색으로 기록된 2명 역시, 사망 후 며칠이 지나 발견된 경우이므로 홍채 색상이 초록색에서 변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살해당한 프랜시스 번즈 백작도 분명 녹색의 눈이었어.’
태오는 이제 서야 이 사실을 발견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만큼 홍채 색상의 일치는 사이코패스 살인범을 쫓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만약, 정말 개빈 머레이가 백작까지 죽인 사이코패스라면, 사냥 대상자 선정에서 홍채의 색깔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건데.’
그것은 개빈 머레이의 적대적 대상이 초록색 눈의 색상을 가진 아버지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남작 부부가 숨기고 있을 뿐, 개빈 머레이는 부모로부터 학대 경험이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그나저나,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놈이 먼저 무도회에 참석한다고 냉큼 떠나다니. 근데 괜히 매너스 공작님께 예의 없이 구는 거 아닌지 몰라. 사흘 뒤에 애들이랑 당신이 갈 때 꼭 가서 제대로 챙기고 인사시켜.”
태오는 개빈 머레이의 다음 사냥감이 ‘매너스 공작’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공작이라는 백작보다 높아진 신분, 나이가 있는 데다 몸이 불편해 왜소한 개빈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고, 그리고 초록색의 홍채를 가진 자라면···.
태오가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매너스 공작님이라면, 저도 언제 한번 뵌 적이 있는 분 같은데···.”
거짓말이었다. 태오는 매너스 공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머레이 남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을 보였다.
“샌더슨 씨가 매너스 공작님을 뵀다고요?”
“아, 네···. 런던에서 예전에 한 번 뵌 것 같습니다. 체구는 작았지만 인상이 아주 좋으셨죠. 참, 눈 색상이 남작님처럼 멋진 녹색이었던 것 같은데요?”
남작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맞아요. 매너스 공작님도 녹색의 눈을 가지셨죠. 하하하. 샌더슨 씨도 아시는 분이셨군요?”
태오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추정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태오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하게 다가왔다.
죽어 가는 피해자의 초록색 홍채와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빨간 피···. 이것이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개빈 머레이의 판타지를 충족시켰던 것이 분명했다.
이전 9번의 연쇄살인과 번즈 백작의 살인 사건까지.
그 퍼즐의 중심에 개빈 머레이를 놓고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연결되었다.
**
머레이 남작 집에서 나온 태오는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젠 개빈 머레이가 번즈 백작을 살인한 사이코패스라는 것에 강한 확신이 들었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유년기의 학대 경험을 특별히 찾을 수 없었단 말이야.’
남작 부인을 통해 들은 개빈 머레이의 성장기는 여느 평범한 귀족 집안 아이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시대적 배경으로 조금은 방임에 가까웠고 제대로 교육이 안 된 면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신체적 폭력이나 정신적 학대의 정황은 찾을 수 없었다.
명랑한 세 딸을 미루어 봐서도, 남작 부부가 개빈을 심하게 다루었을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개빈 머레이가 가지고 있는 사이코패스의 성향이 연쇄살인으로까지 나가려면, 반드시 유년기의 극단적 학대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가정환경이었다면, 연쇄살인까지 나가긴 무리일 것 같은데···.’
심리학 전문가로서의 고집일 수도 있겠지만, 태오는 완벽한 퍼즐 완성을 위해 유년 시절의 학대 경험을 꼭 찾고 싶었다.
따각. 따각.
고민하는 사이 마차가 도착했다.
“나리? 타시죠?”
태오가 마차에 막 올라서려는데, 머레이 남작의 집에서 중년 여성 하나가 바구니를 들고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거실에서 보았던 부엌일을 하는 가정부였다.
그런데 왼쪽 다리가 불편한지 뒤뚱거림이 무척 심했다.
마차를 타려던 태오가 돌아서서 가정부에게 물었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아, 네. 장을 좀 보려고요.”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거기까지 태워드릴까요?”
“아이고, 아닙니다. 어찌 감히.”
“아닙니다. 제법 길이 먼데, 같이 타고 가죠?”
“아, 이거, 죄송스러워서.”
따각. 따각. 따각.
마차를 탄 가정부가 태오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다리가 너무 힘들었는데.”
“아닙니다. 어차피 나가는 길이었는데요, 뭘.”
그런데 가정부를 마차에 태운 태오는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머레이 남작 정도의 부유한 귀족 집안이라면 개빈 머레이도 당연히 보모의 손을 통해 키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빈 머레이의 성향을 그 보모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보모를 통하면 개빈 머레이의 마지막 퍼즐을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태오가 가정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머레이 남작님 댁에서 얼마나 계셨어요?”
“한 15년 가까이 됐습니다.”
“그럼, 혹시 어린 시절 개빈 머레이를 돌보았던 보모가 아직도 남작님 댁에서 일하고 있나요?”
“보모요?
“네.”
가정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머레이 도련님의 보모는 왜 찾으세요?”
“아, 별건 아니고요. 제가 중매 일을 한다는 건 알고 계시죠?”
“네.”
“저는 의뢰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상담하는 것이 원칙이라서요. 그런데 보모와 상담하는 것을 그만 깜빡했네요. 남작님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싶어서요.”
가정부가 머리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베이커 부인은 남작님 집에 없습니다.”
보모의 이름이 베이커 부인인 것 같았다.
“없다니요?”
“작은 문제가 있어서 오래전에 그만두셨어요. 도련님이 10살 때까지 돌봤을 거예요. 제가 이 집으로 오고 몇 달 안 돼서 나갔으니까요.”
“그래요? 그럼, 혹시 그 보모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직 이 마을에 산다고 들었는데, 어디에 사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보모가 이 마을에 있다는 얘기에 태오의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렸다.
개빈 머레이가 진범이라는 심증을 굳혔지만, 심리학자로서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는 확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어린 시절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 싶었다.
‘보모였던 사람을 찾아가 보자.’
정보를 찾기 힘든 폐쇄적인 사회이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을 찾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가정부를 내려주고 마을 입구로 들어선 태오가 지나가는 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혹시 머레이 남작님을 아니?”
“그럼요, 이 동네에서 남작님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래, 잘 됐구나. 그럼 그 남작님 댁에서 머레이 도련님 보모로 일했던 분은 알고 있니?”
“베이커 부인 말씀이세요?”
태오는 동전을 하나 꺼내 들어 소년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맞다. 그 베이커 부인이 어디에 사는지도 알고 있니?
아이의 눈동자는 반짝이는 동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럼요! 베이커 부인을 잘 알고 있어요. 제가 부인의 집을 알려드릴까요?”
*
따그닥. 따그닥.
베이커 부인의 집은 생각보다 멀었다. 머레이 남작의 집에서 마차를 타고도 최소 30분 가까이 걸리는 거리였다.
“나리, 여기인 것 같은데요?”
집을 알려준 소년의 말처럼 마차가 오가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 두 개의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오른쪽 오두막이라고 그랬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오는 것으로 보아 집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가니 근처에 늪지대가 있는지 날벌레와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후우-”
태오는 길게 심호흡을 한 후,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덜컹-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노년의 부인이었다.
“누구세요?”
“혹시 이곳에 머레이 남작님 댁에서 일하셨던 베이커 부인이라고 계십니까?”
순간 움찔 놀란 듯한 부인은 태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댁에서 무슨 일로 날 찾는 거요?”
“아, 안녕하세요. 베이커 부인? 저는 그 집과 관련해서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베이커 부인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 집과 관련해서 내가 해줄 말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부인께는 어떤 해도 없는 일입니다.”
“시끄러워요. 해가 있든 없든 난 상관없는 일이니 그만 돌아가라고요!”
“제발, 부인!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개빈 머레이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억울한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문을 닫으려던 베이커 부인이 멈칫거리더니 태오를 노려봤다.
“억울한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들어가서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베이커 부인이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
오두막 안은 좁고 어두웠지만, 집 안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탁-.
베이커 부인이 값싼 차를 탁자에 놓고 앉자, 태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부인께서 개빈 머레이 씨의 보모로 일하셨다고 들어서입니다.”
순간, 베이커 부인의 양쪽 어깨가 미세하고 들어 올려졌고 목은 움츠러드는 자세가 되었다.
보통 피하고 싶은 대화 주제나 불안하게 만드는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나오는 몸짓이었다.
“오, 주여, 부디 용서하소서.”
부인은 잠시 기도를 하듯 읊조렸는데, 그러자 불안했던 그녀의 몸짓도 곧 평온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아까, 당신이 머레이 도련님 때문에 누군가 억울하게 죽는다고 그랬죠?”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됩니까?”
“죄송하지만, 아직 의심만 하고 있을 뿐이지 개빈 머레이 때문인지 확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막은 자세히 들려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머레이 도련님이 또 어떤 끔찍한 거짓말이나 무서운 짓을 하고 다니는가 보죠?”
“······.”
“그래서,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이 뭡니까?”
“딱 한 가지입니다. 개빈 머레이의 어릴 적 모습.”
“어릴 적 모습을 왜 알려고 하는 거죠?”
“개빈 머레이의 진짜 모습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억울한 한 사람의 죽음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베이커 부인이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는 개빈 머레이 도련님을 악마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네? 악마라니요?”
“태어나면서 남작님과 마님한테 버림받듯이 살았고, 이후에도 어떤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는 모습이 너무 측은해 보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악마는 결코 사람과 어울릴 수 없으니까요.”
“···!”
베이커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남작의 저택에서 오늘 느꼈던 평화로움은 사실 개빈 머레이가 자라왔던 환경과는 전혀 달랐다.
머레이 남작은 개빈 머레이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시절부터 사내다움을 강조하면서 윽박질렀고, 어떤 날에는 술에 잔뜩 취해 나무에 개빈을 매달아 놓고 체벌을 가했다고 한다.
아이는 그런 남작을 두려워해 복도에 아버지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경기를 일으켰고, 6살이 넘도록 소변을 가리지 못해 심한 욕설과 꾸지람을 달고 살았다.
당시 산후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던 남작 부인은 둘째 딸을 낳자마자 어린 개빈을 남겨두고 이탈리아로 떠나버렸다.
폭력적이고 무관심한 아버지와 여동생들만 데리고 떠나버린 어머니 사이에서 개빈 머레이는 점점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베이커 부인은 일화 하나를 기억해냈다.
“7살 때 인가, 농작물 창고에 누군가가 불을 질러 전부 태워 버린 적이 있었죠. 그런데 개빈 머레이 도련님의 얼굴과 손에는 온통 불장난한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누가 봐도 불장난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격노한 남작님이 왜 불을 질렀냐고 물었더니, 도련님은 평소에 그렇게 무서워하던 아버지 앞에서 도리어 당당하게 화를 내면서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표정은 정말 억울해 죽을 것 같았어요.
화가 난 남작님이 나무에 매달아 채찍까지 가했지만, 끝까지 안 했다고 우겼죠. 샌더슨 씨도 그날의 모습을 봤더라면 도련님의 몸 안에 다른 악령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않지만, 유년 시절 보여주는 동물 학대나 방화, 조작 행동을 통한 뻔뻔한 거짓말은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여줄 수 있는 신호 중의 하나이다.
“그걸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악마가 씌운 행동을 끊임없이 벌였어요. 오랫동안 키운 애완견도 두 마리나 죽이고, 남작님에게 사냥을 배운 뒤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망아지 새끼의 목을 칼로 베기도 했어요. 그때 온몸에 망아지 피를 뒤집어쓰고 기괴하게 웃고 있는 도련님의 모습은··· 정말이지···.”
계속되는 개빈 머레이의 기행과 끔찍한 행동을 참지 못한 베이커 부인은, 남작 부인이 영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작 부인은 자기 애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운다고 오히려 노발대발했고, 성격을 이상하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베이커 부인 탓이라면서 난리를 떨어 큰 곤욕을 치렀다.
그 일로 남작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오고, 일도 구하지 못한 채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이곳으로 와서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개빈 머레이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라는 확신이 드는 데 필요했던 결정적 요소인 어린 시절의 학대는 이제 확인이 된 셈이었다.
‘지난 3년간 런던 남동부 지역에 있었던 9건의 연쇄살인과 10번째의 프랜시스 번즈 백작 살인 사건의 범인은 바로 개빈 머레이였어. 그리고 개빈 머레이는 곧 11번째 살인을 저지를 거야.’
십자가 밑에 놓인 싸구려 수지 양초의 불꽃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