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Opened a Matchmaking Agency in 18th Century London RAW novel - Chapter (31)
18세기 런던에 결혼정보회사를 차렸다-31화(31/217)
31화 추적
◈ 매너스 공작 저택
그날 저녁.
보통 ‘러너스’ 형사들은 특유의 복장을 착용하고 현장에 투입되지만, 오늘은 일반 귀족처럼 차려입고 있었다.
더구나 무도회 참석차 런던이나 지방에서 온 많은 귀족이 매너스 공작의 저택에 묵고 있다 보니, 형사들의 모습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태오는 혹시나 해 깊은 모자와 안경으로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저기가 온실인가 보네요.”
저택 주위를 산책하듯 걸으며 공작의 산책로를 따라가 보던 형사들 앞에 커다란 식물 온실이 나타났다.
이곳은 원래 건강이 좋지 못했던 부인을 위해 매너스 공작이 특별히 제작한 온실이었다.
유달리 꽃과 식물을 좋아했던 공작의 아내는 한겨울에도 이곳을 거닐며 큰 위안을 삼았는데, 처음에는 작은 꽃밭 수준이었던 곳이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온갖 다양한 꽃과 나무, 희귀 식물로 꽉 들어찼고, 건물도 더 크게 확장되면서 지금의 거대한 온실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수년 전 아내가 죽은 이후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다가, 작년 공작이 낙상사고를 당한 이후로 재활 운동을 위해 재정비되면서 다시 이전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있었다.
식물 온실로 들어온 태오는 여기저기를 주의 깊게 살펴봤다.
‘습하고 어둡고 가려진 곳. 개빈이 지금까지 살인을 저지른 곳과 아주 유사한 분위기다. 온실을 관리하는 하인도 낮에만 있다가 저녁 이후에는 없고. 이 거대한 온실은 개빈 머레이가 노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가 될 법 한데.’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들은 적당한 사냥감을 찾게 되면 자신만의 ‘의식’을 단행할 장소를 물색한 후, 살인에 착수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온실은 개빈 머레이의 의식을 치를 최적의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
온실을 살피고 나온 형사들이 한데 모였다.
타운센드 반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온실이 생각 이상으로 너무 넓은데? 거기다 나무가 크고 빽빽한데다 저녁이 돼서 해까지 지고 나면 너무 어두워 시야 확보도 제대로 안 될 거야. 고작 우리 4명으로 커버할 수 있을까?”
태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반장님. 괜찮다면 저도 현장에서 돕고 싶습니다.”
“샌더슨 씨가요?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형사님들이 옆에 계시는데요, 뭘. 그리고 아직 제니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혹시나 오늘 얼굴 확인을 못 하는 일이 생긴다면 제가 투입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행여나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빈 머레이를 ‘제니’, 매너스 공작을 ‘제임스’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잠깐 고민하던 타운센드 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주변을 둘러보던 힐 형사가 걱정스레 의견을 냈다.
“그나저나 저는 과연 제니가 온실에서 사냥을 할까 싶어요. 온실은 출구도 한 곳뿐이고, 너무 어두워 제임스를 노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콜링우드 형사도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임스가 온실에서 산책 할 시간이 되면 더 어두워질 텐데요. 온실에서 제니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멀찌감치에서 제니의 뒤를 밟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온실 밖에서 일을 저지르더라도 우리가 바로 덮칠 수가 있으니까요.”
형사들의 의견에 태오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건 안 됩니다. 제니는 눈치가 매우 빠릅니다.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금방 알아챌 거에요. 그럼 절대 움직이지 않고 숨으려 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됩니다.”
현대 시대와 같은 CCTV나 각종 전산화된 장비가 없는 18세기. 아직 개빈 머레이를 연쇄살인범으로 잡기 위한 결정적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
며칠 남지 않은 번즈 자작을 교수형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범행을 저지르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그를 잡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죠?”
“온실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온실에서요?”
“네. 저는 온실에서 일을 저지를 거라고 장담합니다.”
“장담하다니요?”
“제니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환경을 선호할 겁니다. 특히 여기 온실처럼 주변이 모두 가려지고 어두운 곳에서의 사냥은 아주 환상적이고 아늑한 느낌이 들게 할 거예요.”
힐 형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 안에서의 사냥이 환상적이고 아늑해서 매력적인 장소라고요?”
“네. 제니에게는 그렇습니다. 거기다 제니는 워낙 주도면밀해 우리가 뒤를 밟는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바로 숨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게 허사가 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예상 장소에 잠복하고 움직임 없이 기다리는 방법이 가장 최선일 겁니다.
거기다 제임스는 주로 저택 안의 정원과 식물 온실만을 돌아다니니, 공개된 정원보다는 숨기 쉬운 온실에서의 사냥을 계획하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고요.”
그러나 형사들은 반대의 의사를 내비쳤다.
“말이 저택 정원이지 웬만한 작은 공원만 한 넓이입니다. 온실뿐만 아니라 저기 큰 나무가 우거진 100여 미터도 상당히 위험스럽고요. 우리는 온실에 잠복해 있는데, 제니가 야외 정원에서 사냥하면 어쩔 겁니까? 제임스가 산책하는 시간에는 해까지 져서 어두우니 그냥 처음부터 제니의 뒤를 밟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골똘히 고심하던 타운센드 반장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샌더스 씨 말을 듣기로 한다. 아무리 넓은 정원이라지만, 사방이 트여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뒤를 밟으면 금방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고. 그렇다고 너무 거리를 두고 쫓다가는 어둠 속에 사라지면 놓치기 십상이고.
내 판단에도 온실이 제임스를 노리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 같아. 온실에 미리 잠복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제니를 덮친다.”
어떻게 할지 방향이 결정되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운센드 반장이 형사들을 재촉했다.
“자, 이제 온실을 나가자고, 곧 저녁이 되고 제임스가 산책을 하면 제니가 동태를 살피려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어서 제니의 얼굴을 확인하러 가야지?”
*
해가 지자, 흐린 날씨 때문인지 주위가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식물 온실의 관리자는 퇴근했고, 외부와 온실을 연결하는 산책로에 등불이 하나둘 밝혀졌다.
태오와 형사들은 내일부터 열릴 무도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처럼 정원 주위로 흩어져 곳곳을 몰래 살폈다.
다행히 정원에는 저녁을 먹고 나온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어서 형사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제임스가 나옵니다.”
근처에 있던 콜링우드 형사가 나지막이 전달했다.
그의 말대로 저 멀리 뒷짐을 쥐고 천천히 산책하는 매너스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태오의 눈에 아직 개빈 머레이는 잡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태오뿐이기 때문에 보이는 즉시 형사들에게 알려야 했다.
처음에는 무도회장으로 함께 들어가 명확히 알려줄까도 했었다.
하지만, 살인을 준비하고 있을 개빈 머레이의 신경은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을 것이고, 그런 그의 눈에 태오나 형사들의 움직임은 분명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따라서 개빈 머레이와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 누구보다 경험치가 많이 쌓여 학습된 사이코패스다. 절대 공작 가까이 다가서지는 않겠지만, 분명 공작의 주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야. 거기다 대단한 신분의 사냥감이니 주변 경계도 이전보다 더 치밀하게 할 테고.’
하지만 정원이 너무 넓었다.
거기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그의 모습을 포착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점도 문제였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개빈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니···.’
현대처럼 사진이나 동영상이 있었더라면 범인 인지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럴 수가 없는 시대라 무척 답답한 느낌이었다.
태오는 초조한 기분으로 주위를 살폈다.
혹시 낌새를 차리고 도망가 버린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밀려왔다. 그러면 모든 것이 허사가 돼버리고 만다.
물론, 계속 추적하면 꼬리야 잡을 수는 있겠지만, 번즈 자작은 이미 교수형에 처하고 난 뒤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태오는 알 수 없는 싸늘한 기분에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
저택 2층의 널찍한 발코니 쪽. 저녁 공기를 즐기며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개빈 머레이였다.
그는 산책 중인 매너스 공작의 움직임을 눈으로 조용히 따라가는 중이었다.
‘아···’
재빨리 돌아선 태오는 2층 발코니에 개빈이 있음을 형사들에게 은밀히 전달했다.
다행히 발코니에는 환한 횃불과 등불이 여러 개 놓여 있어 개빈의 얼굴을 비교적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형사들은 웃는 척하거나 코를 푸는 척 연기를 하면서 개빈 머레이의 얼굴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
무도회 셋째 날.
그렇게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무도회가 열리고부터 그레이 형사가 매너스 공작인 양 정원과 식물 온실을 오가며 산책을 했다.
매너스 공작과 체형이 엇비슷한 그레이 형사가 공작의 옷을 입고 절뚝거리며 같은 시간마다 산책 코스를 돈 것이다.
태오와 나머지 형사들은 식물 온실에 몸을 숨기고 산책을 모두 마칠 때까지 잠복했다.
그러나 이틀 동안 개빈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눈치를 챈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고, 어쩌면 살인 계획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으로 조금씩 불안해질 무렵. 무도회 분위기가 한창 고조된 셋째 날 늦은 저녁이었다.
온실 입구에 숨어있던 힐 형사가 급히 수신호를 보냈다.
-제니가 움직인다!
매너스 공작으로 변장한 그레이 형사가 야외 정원을 거쳐 식물 온실로 입장한 직후,
어둠이 깔린 정원 벤치에 숨어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그레이 형사 뒤를 따라 재빨리 온실로 들어섰다.
개빈 머레이였다.
온실에 십여 미터 간격으로 잠복해 있던 형사들이 차례로 수신호를 보내 개빈의 등장을 전달했다.
개빈 머레이가 그레이 형사 뒤를 쫓아 온실 깊숙이 들어가자, 입구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형사가 소리 없이 입구 문을 걸어 잠갔다.
행여나 있을지 모를 도망에 대비해 퇴로를 차단해 놓기 위함이었다.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조용한 식물 온실은 다리를 절며 걷고 있는 그레이 형사의 발소리만 이상하리만치 크게 울렸다.
저벅. 저벅.
잠복해 있는 태오와 형사들에게 일분일초가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섣불리 나설 수는 없었다. 현장 증거 없이 잡았다가는 산책 나온 것뿐이라고 둘러댈 것이 뻔했다.
최대한 기다렸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잡아야 한다.
‘······.’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콜링우드 형사가 태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위급한 상황이 곧 닥칠 것 같다는 신호였다.
신호를 받은 태오와 형사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숨죽인 채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여차하면 바로 달려 나갈 태세를 취했다.
*
공작의 뒤를 소리 없이 따르다 거리가 십 미터 이내로 좁혀지자, 개빈 머레이는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스윽-
날 선 작은 사냥용 칼이 온실 등불에 반사돼 번쩍였다.
개빈 머레이가 주위를 두어 번 살피더니, 갑자기 공작의 목을 겨누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타다닥-
그 순간,
삐이이익- 삐이이이익-
어디선가 들리는 길고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에 공작 행세를 하던 그레이 형사가 잽싸게 뒤돌아섰다.
그레이 형사는 모자를 집어 던지고, 뾰족한 창이 달린 지팡이를 번쩍 쳐들었다.
“개빈 머레이! 그 자리에 가만있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형사의 모습에 개빈 머레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듯한 모습이었다.
“뭐···뭐야? 너··· 누구야?”
“누구긴 이 새끼야! 널 잡으러 온 귀신이지! 왜? 공작님이 아니라서 실망했냐?”
숨어있던 형사들도 자리를 박차고 개빈 머레이를 향해 달려 나갔다.
“꼼짝 마! 경찰이다!”
“움직이지 마!”
여기저기 고함치며 튀어나오는 형사들의 모습에 개빈 머레이가 당황해했다.
그레이 형사가 소리쳤다.
“개빈! 넌 이미 끝났어! 빨리 그 칼 버려!”
그러나 개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칼을 마구 휘두르며 그레이 형사에게 엉겨 붙었다.
“죽어!”
“엇! 이 미친 자식!”
휙- 휙-
푹-
쭈욱-
지팡이 끝에 달린 창이 개빈 머레이의 옆구리를 찌르는 순간, 그레이 형사의 허벅지가 칼에 깊이 베였다.
“으아악-”
“크악!”
개빈 머레이가 창에 찔린 배를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태오와 형사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타운센드 반장은 쓰러진 그레이 형사에게 달려가 상처를 살폈다.
“그레이! 괜찮나?”
“저는 괜찮습니다! 빨리, 빨리, 저쪽으로 도망쳤어요! 놈도 배를 찔려 상처를 입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 끝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알았어. 금방 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참고 있어.”
“네, 반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타운센드 반장이 헐레벌떡 부하들의 뒤를 쫓아갔다.
*
타운센드 반장이 물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놈 어딨어?”
온실 구석을 살피던 힐 형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 개구멍이 있었습니다. 피 묻은 나뭇잎도 보이고요. 아마도 이 구멍을 통해 도망친 듯합니다.”
태오가 구멍 주위를 만지작거리면서 안타까워했다.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저희 실수였어요. 놈이 며칠 전에 도망갈 구멍을 미리 파놓았던 것 같습니다.”
구멍은 겨우 사람 하나가 빠져나갈 정도의 크기였고, 나뭇가지와 풀잎 등으로 위장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아, 이거 큰일이네. 이 구멍으로 빠져나가 뒷산으로 간 것 같은데요? 그저께 보니 뒷산이 제법 크던데··· 벌써 멀리 달아났을 겁니다.”
이틀 뒤가 안토니 번즈 자작의 마지막 선고가 있는 날이다.
그런데 결정적 범인인 개빈 머레이가 사라졌다면 선고를 뒤집을 만한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현대사회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정황이 참작되어 어떻게든 교수형 진행을 막아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18세기.
행여나 이 어둠 속에서 개빈 머레이를 놓치고 계속 찾지 못한다면, 사형 선고는 확정되고 더불어 교수형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다.
“어쩌죠?”
콜링우드 형사가 타운센드 반장을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없었다. 개빈 머레이를 어서 잡아, 머레이 남작 집에서 증거물까지 압수해야 번즈 자작의 누명을 벗길 수가 있다.
“이러고 있지 말고, 일단 뒷산을 수색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빨리 쫓아가 보죠?”
태오의 말에 힐 형사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허, 이 어두운 저녁에 고작 4명이 저 큰 산을 어떻게 뒤집니까? 어디로 도망간 지도 모르는 판에. 당장 지역 경찰의 지원을 구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태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개빈 머레이가 이대로 도주해 자기 집으로 달려가 증거 물품을 모두 없앨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머레이 남작 집으로 무작정 쳐들어가 증거품을 뒤질 수도 없고요. 무조건 놈을 현행범으로 잡아들여야 합니다.”
“그거야 저희도 알지만··· 어두운 산으로 도망가버린 놈을 무슨 수로 잡을 수 있겠어요?”
“잠깐만요!”
탈출 구멍에 머리를 넣고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던 태오가 온실 밖의 오른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뒷산 오른쪽 길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타운센드 반장이 되물었다.
“오른쪽이요?”
“네. 여기 사람들이 다닌 샛길이 나 있습니다. 왼쪽 샛길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쪽 샛길은 아래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여기 묻어 있는 피를 보면 꽤 상처가 깊어 보이잖아요? 산 위로 올라가는 샛길로는 아무래도 상처 입은 배 때문에 힘들 거예요. 길도 없는 산으로는 더더욱 올라가지 못했을 거고요. 그렇다면. 오른쪽 내려가는 샛길이 가장 유력해 보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타운센드 반장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그럼 빨리 오른쪽 길로 쫓아가 봅시다!”
*
“헉, 헉.”
개빈 머레이를 뒤쫓느라 모두 숨이 턱까지 올라와 있을 무렵.
눈앞에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바위와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표식이 많아 보이는 소위 ‘영혼의 거주지’로 불리는 동굴로 연결되는 길이었고, 오른쪽은 그대로 평지가 연결된 길이었다.
갈림길의 중간에서 콜링우드 형사가 횃불을 바닥에 대고 무언가를 살폈다.
“왜 그래? 뭐라도 있어, 콜링우드?”
타운센드 반장이 묻자, 콜링우드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장님. 여기 오른쪽으로 연결되는 길에 피가 많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 그럼 빨리 오른쪽 길로 가자. 왼쪽 길은 ‘영혼의 거주지’니까, 거기로는 안 들어갔을 거야.”
“네!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18세기의 사람들에게 산은 신과 악마가 거처하는 신성하고도 사악한 장소였는데, 특히 동굴이나 숲은 신들과 악마가 사는 영혼의 거주지라고 믿고서 각종 종교적 표식을 걸어두고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등산의 개념도 19세기 중엽이 넘어서야 등장한다.
따라서 흉악범들조차 그런 신성시된 장소에는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믿음이었다.
거기다 때마침 핏자국도 오른쪽 길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러너스 형사들이 재빨리 오른쪽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순간.
“잠깐만요! 잠깐!”
태오가 소리쳤다.
“왜 그러십니까, 샌더슨 씨? 시간이 없습니다. 더 도망가기 전에 빨리 따라잡아야 해요!”
“제 생각에는 왼쪽 길로 간 것 같습니다.”
“네? 왼쪽이라니요? 그럼 동굴 쪽으로 갔다는 말씀이세요?”
신에 대한 믿음이나 영혼에 대한 영향력이 현대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시절이다.
때문에 러너스 형사들은 개빈 머레이가 그 금기를 깨고 동굴로 숨어 들어갔을 거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은 활성화 되어 있는 편도체로 인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에 지배되어 망설임이 생기지만, 편도체가 비정상적으로 작은 사이코패스는 그런 판단에서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 바로 실행에 나서게 된다.
18세기의 일반적인 범죄자라면 이와 같은 두 갈래의 길에서 신성한 동굴로 숨을 것인지 아니면 오른쪽의 평지로 나갈 것인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다 결국, 절대다수의 범죄자는 신의 저주가 두려운 나머지 오른쪽의 길을 선택하게 되면서 그만큼 시간을 지체하기 쉽다.
하지만 사이코패스 개빈 머레이는 근대시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지지 않는다.
그저 자기 몸 상태에서 가장 숨기 좋은 곳으로 찾아 들어갈 뿐이다.
이제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분명 숨을 곳이 많은 왼쪽 동굴 방향으로 향했을 겁니다. 오른쪽 길에 뿌려진 핏자국은 그 인위적 모양으로 볼 때, 일부러 속이기 위한 술책일 가능성이 더 크고요.”
태오의 말에 타운센드 반장은 의아해했다.
“왜 동굴로 갔다고 그렇게 자신하는 거죠? 저긴 영적인 존재들의 구역입니다. 죄를 지은 개빈이 오히려 그곳을 피하려 들텐데요?”
“아니요! 개빈 머레이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습니다!”
“···?”
“우리와는 다른 비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 오히려 동굴 쪽으로 갔을 거라는 말입니다!”
타운센드 반장은 이상하리만치 확신에 찬 태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곧, 결심한 듯 형사들에게 큰 소리로 다그쳤다.
“좋아! 샌더슨 씨 말을 따라 보자! 빨리 왼쪽 동굴 쪽으로 가면서 핏자국을 찾아보자고!”
그러나, 반장의 지시에도 형사들은 주저했다.
아무리 최고의 형사들이라지만, 그들 역시 18세기 사람들일 뿐. 정령의 표식이 있는 숲속과 동굴이라는 생각에 묘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따라오세요.”
태오가 횃불을 들고 동굴 쪽 길로 성큼성큼 진입하자, 눈치를 보던 형사들도 슬금슬금 따라붙었다.
잠시 후, 태오 뒤를 따르던 힐 형사가 외쳤다.
“어! 여기 핏자국이 있는데요! 여기요!”
“진짜네? 일렬로 뚝뚝 떨어져 있는데?”
태오도 얼른 다가가 흔적을 확인했다.
핏자국은 일정한 방향으로 떨어져 동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열심히 주변을 수색하던 태오가 소리쳤다. 동굴 입구에 피 묻은 손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 입니다! 여기 동굴 안으로 숨어 들어간 것이 확실해 보여요!”
그런데, 태오의 외침에 달려온 형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정말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을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면··· 혹시 영혼이 잡아 먹힌 게 아닐까요?”
“우리도 그렇게 되면 어떡해요?”
동굴을 ‘신들과 영혼의 거주지’라고 굳게 믿고 있는 18세기 형사들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태오는 실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다들 미신을 너무 믿으시네요. 죄 지은 사람이 동굴로 도망치면 못 잡겠어요?”
“아니..그게 아니고요. 여기는 정령이 있다는 특별한 표식이 있는 동굴이니까 그렇죠.”
“아무튼 제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네? 괜찮겠어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태오는 횃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다행히 동굴은 깊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동굴 안을 살피던 태오가 거무스름한 뭔가를 발견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있습니다! 사람이 정말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정···정말입니까?”
그제야 뒤따라 들어온 타운센드 반장이 소리쳤다.
“엇! 진짜 있어! 여기에 숨어있다! 다들 들어와!”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니, 피범벅인 옆구리를 부여잡고 헐떡이고 있는 개빈 머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타운센드 반장이 꾸짖듯 소리쳤다.
“개빈 머레이! 당장 나와! 번즈 백작과 수많은 사람을 살해한 살인죄, 그리고 매너스 공작 살인미수죄 등으로 너를 체포한다!”
그러나 개빈은 태연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병신들! 너희들은 이 나라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려는 날 막은 거야!”
뚱딴지같은 소리에 형사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황당해하자 개빈은 더 악을 쓰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마지막에 너희가 막는 바람에 매너스 공작의 범죄와 부도덕을 심판하려는 나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 돼 버렸어! 너희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될 거라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그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거짓과 관련한 어떤 미세 표정도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범죄가 목격되고 밝혀진 상황에서조차 사이코패스들은 현실을 거부한 채 거짓말을 해댄다.
그리고 그 거짓말로 연결된 사실들을 진실처럼 망상으로 연결하면서 자신의 영웅담을 짜 맞추어 가는데 개빈 머레이도 그런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상한 헛소리 그만해! 야, 저놈 칼 뺏고, 당장 체포해! 당장!”
“네!”
“잡아!”
“가만있어, 새꺄!”
“반장님? 이놈 상처는 어떡하죠?”
상처를 살짝 들어본 타운센드 반장이 말했다.
“괜찮아, 옆구리가 살짝 찢어진 것뿐이니까, 밖에 나가서 물로 깨끗이 씻고 천으로 감싸 지혈만 하면 돼.”
손에 든 칼을 압수당하고 거칠게 포박당한 개빈 머레이는 간단한 처치를 받은 후, 자기 집이 있는 베케넘으로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