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Opened a Matchmaking Agency in 18th Century London RAW novel - Chapter (47)
18세기 런던에 결혼정보회사를 차렸다-47화(47/217)
47화 크리스핀의 사연
크리스핀의 어린 시절 얘기를 자세히 들려달라는 태오의 요청에 백작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두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집안의 장남이었던 다니엘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어요. 걸음마를 뗄 때부터 걸음걸이도 이상했고요.”
그렇게 기다리던 첫아들이었건만, 약한 몸에 다리를 절고 이유 없이 병치레를 자주 했다고 한다.
2년 뒤에 둘째 아들 크리스핀이 태어났고, 그 뒤 몇 년 차이를 두고 세 딸이 태어났다.
다행히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백작 부부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던 큰아들 다니엘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안 찾아간 의사가 없었고, 용하다는 약제사가 있다면 거리와 비용을 마다치 않고 달려갔다.
(** 이 당시 약제사는 의사처럼 진찰도 하고 약을 직접 짓고 처방했다. 영국에서 약제사가 의사와 구별하여 면허가 생긴 것은 19세기인 1815년 이후이다.)
백작 부부의 노력이 통했는지 10살을 넘기기 힘들 거라던 의사의 말과는 달리, 다니엘은 20대 중반이 훌쩍 넘어서까지 꿋꿋이 버텨냈다.
천성이 착했던 큰아들은 아픈 자신을 위해 애쓰는 백작 부부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그래서인지 고달픈 치료 과정도 군말 없이 따랐고, 쓴 약도 마다하지 않고 잘 먹었다고 한다.
눈에 눈물이 고인 백작 부인이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천사 같던 우리 다니엘이 3년 전에 눈을 감았어요. 처음엔 작은 감기였는데, 갑작스레 고열이 심해지더니··· 사경을 헤매다··· 영영 눈을 못 뜨고 그만··· 흐흑.”
제대로 된 약도, 의사도, 치료법도 없는 이 시대에서 자식이 죽는 일은 계층을 불문하고 아주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식의 황망한 죽음은 18세기의 부모에게도 가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태오가 물었다.
“크리스핀과 다니엘은 어릴 때 서로 친했나요?”
“네. 다니엘을 똑 닮은 둘째 크리스핀은 형과 친구처럼 정말 잘 지냈지요. 서로를 살뜰히 잘 챙겼고요.
어느 날 외가댁에 처음 놀러 갔다가 절뚝거리는 형을 동네 아이들이 놀린 적이 있었는데, 6살밖에 안 되는 크리스핀이 어찌나 소리를 지르고 덤벼들었는지··· 그 이후론 동네 아이들도 함부로 놀리거나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죠.”
백작 부인은 그때 일을 회상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크리스핀은 형이 치료받으러 가는 날이면 바닥에 드러누워 온종일 떼를 쓰며 울곤 했어요. 아직 어린 나이라 형이 그 고달픈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그저 아빠와 형이 자기만 집에 놔두고 간단한 진료만 받고 시내에서 놀다 온다고 생각했었나 봐요.”
크리스핀은 형 다니엘이 치료를 받으러 나가고 없을 때는 창가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곳이 어린 크리스핀의 지정석이 되다시피 해서 거기서 책도 읽고 놀이도 하면서 형을 기다렸어요. 식사조차도 창가에 걸터앉아 먹곤 했는데, 그러다가 들어오는 마차를 보면 맨발로 정원까지 뛰어나와 방방 뛰며 좋아했었죠.”
다니엘은 그런 동생에게 미안했던지 치료를 마치고 오면, 늘 몇 시간이고 재밌게 놀아주었다고 한다.
“힘든 치료를 받으려 먼 거리를 오간 다니엘이 얼마나 몸이 피곤했겠어요? 우리도 큰애를 쉬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죠. 하지만 말릴 수가 없었어요. 세상 행복한 두 형제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아름답게 들려서였죠.”
하지만 다니엘이 9살이 되던 무렵, 몸이 급격히 나빠졌다고 한다.
백작 부부는 의사의 강력한 권유로 다니엘의 치료와 요양을 위해 프랑스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 당시 영국 사람들은 섬나라 특유의 습한 기후와 부족한 햇빛, 좋지 못한 공기를 피해, 바다 건너 유럽대륙에서 건강을 돌보곤 했다.
그런데, 반년을 계획하고 갔던 프랑스 요양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4년이 지난 13살이 다 되어서야 다니엘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프랑스로 떠나는 날 아침. 겨우 7살밖에 안 된 크리스핀에게 형이 반년이나 떠나있어야 한다는 말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분명 마차가 움직이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잡고 늘어졌을 테니까요.”
“···네. 그랬겠죠.”
“그래서 이번에는 형의 다리를 고치러 멀리 간다고 말하고, 보통보다 며칠 정도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만 말해 줬죠. 우리도 다니엘이 4년이나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그때는 정말 꿈에도 몰랐거든요.”
태오가 말을 끊고 물었다.
“백작 부인, 잠시만요. 큰 아드님이 프랑스로 요양을 떠나기 직전, 크리스핀과 다니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나시는 대로 최대한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둘의 마지막 모습이요?”
“네. 마지막 순간에 보인 크리스핀의 행동과 감정을 알고 싶습니다.”
백작 부인이 최선을 다해 그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 네. 그러니까 떠나는 그 날 아침에서야 저희가 크리스핀에게 말을 했어요. 형이 치료를 위해 평소보다 오랫동안 가 있어야 한다고. 크리스핀은 몇 밤이나 자야 형이 오냐며 울먹였죠. 저희는 몇 밤만 자면 금방 온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이 인사를 나눴나요?”
“네. 울고 있는 크리스핀을 형한테 데리고 가서 억지로 인사를 시키게 했더니, 크리스핀은 몹시 우울한 얼굴로 형한테 쭈뼛거리며 다가가서는 귀에다 입을 대고 뭐라 속삭였어요. 아마도 갖고 싶은 선물을 말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빨리 돌아와서 그걸 가지고 같이 놀자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죠. 어른스러웠던 다니엘은 동생이 말한 선물을 사 들고 금방 올 거라고 다독였고요.”
그렇게 떠난 형은 며칠, 몇 달,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년 가까이 크리스핀의 지정석이었던 창가 자리는 1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비어 있었다.
그렇게 또 봄과 겨울이 세 번이 지나서야 다니엘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10살 정도까지만 살 수 있을 거라던 소리에 치료받으러 간 것이었는데,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어졌어요. 그래도 효과가 있었는지 다니엘은 예전보다 몸 상태가 훨씬 좋아져 저희는 참 기뻐했었죠.
하지만 치료를 받느라 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어요. 저는 그사이에 가끔 집으로 와 아이들을 보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다니엘은 집으로 가지 못해서 늘 동생들을 그리워했어요. 특히 크리스핀을 많이 보고 싶어 했죠.”
백작 부인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나라로 가버린 맏아들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4년이나 지나 프랑스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다니엘은 무척 들떠 있었어요. 시내 상점들을 하루 종일 돌며, 크리스핀과 여동생들의 선물을 챙기느라 무척 신나있었죠.
특히, 크리스핀의 선물은 몇 개나 더 챙겼어요. 4년 전에 크리스핀이 귀에 대고 말한 선물을 사면서, 이제는 이런 게 유치할 수 있다며 고심 끝에 다른 선물을 두 개나 더 사기도 했죠.”
그렇게 몇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온 집안 식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듯한 크리스핀만은 예외였다.
형을 향해 환하게 짓던 예전의 미소도, 들뜬 목소리나 장난스러웠던 몸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4년 만에 형을 보고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어요. 눈빛이 너무 차가워서 다들 놀랐었죠. 이제는 조금 커서 이해할 나이가 됐으니 그간의 사정을 말해 주면 예전처럼 다시 좋은 사이가 될 줄 알았는데··· 별 소용이 없었어요. 그저 형을 피할 뿐이었죠.”
다니엘은 유일한 남동생인 크리스핀과 얘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자신을 피하기만 하는 크리스핀을 보면서 많이 씁쓸해했다. 이젠 동생이 자기를 창피하게 여긴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 후 다니엘이 죽는 그 날까지 둘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12살이 넘어 훌쩍 성장한 크리스핀은 명문 이튼 스쿨에서의 생활로 새로운 재미와 활력에 넘쳐 있었고,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다니엘은 예전보다 더 멀어진 느낌에 매우 서글퍼했다.
어린 시절 치료받으러 가는 다니엘을 동생 크리스핀이 기다렸듯이, 이제는 형이 동생이 집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크리스핀이 집에 오는 날에는 서먹한 모습으로 서로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백작 부인의 눈에 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느 날 기숙사에서 오랜만에 집으로 온 크리스핀이 형의 인사도 무시하고 자기 방으로 그대로 들어가 버렸어요. 참다못한 제가 크리스핀을 혼내려고 쫓아가자 다니엘이 절 말렸어요. 동생을 혼내면 자기도 마음이 불편할 것 같으니 뭐라고 하지 말라면서 씁쓸하게 웃더군요. 그날 다니엘의 그 쓸쓸한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으흑.”
두 형제는 이후 10여 년을 그런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3년 전 다니엘이 죽던 날, 크리스핀은 다른 지역에서 열린 무도회에 친구들과 함께 있었죠.
감기로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던 다니엘이 고열로 의식을 잃기 전, 갑자기 동생을 데려와 줄 수 있냐고 저희에게 간청하듯 물었어요.
그때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다니엘이 직접 저에게 크리스핀이 보고 싶으니 데려와 줄 수 있냐고 물은 건 난생처음이었거든요. 아마도 자기가 죽을 줄을 알고 그랬던 건가 봐요. 흐흑···.”
무도회에서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크리스핀은 자기를 찾아온 집사를 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맥스웰 백작은 크리스핀이 오지 않겠다고 하면 강제로 끌고서라도 오라고 집사에게 당부했는데, 의외로 크리스핀은 집사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을 타고 집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그러나 집까지 급히 온 보람도 없이, 형 다니엘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얕은 숨은 붙어 있었지만,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형의 모습을 크리스핀은 냉정히 내려다봤다고 한다.
“크리스핀이 도착하고, 30분 정도 지났을까요. 흐흐흑··· 약하게 내뱉던 숨마저 쉬지 않고 심장도 더는 뛰지 않더군요. 의사로부터 이제 운명을 다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온 가족이 통곡했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아프기만 하던 오빠였지만, 자기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았던 여동생들은 한없이 슬피 울었고, 백작 부부의 가슴도 무너져내렸다.
집안의 하인들 역시 너그럽고 착했던 주인집 큰아들의 죽음에 모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울지 않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 크리스핀이었다.
“남편이나 저나 크리스핀의 행동이 정말 이해가 안 가고 화도 났어요. 남편은 형이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다고 지금껏 그따위 태도를 보이냐고 역정을 부렸죠. 그리고 설사 아무리 미워도 형이 죽었는데 어떻게 동생이 그럴 수 있냐며 불같이 화를 냈고요. 하지만 크리스핀은 차갑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늘 그랬듯 자기 방으로 그냥 들어가 버리더군요.”
그렇게 며칠 후 다니엘의 장례식이 끝나고 백작 집안은 슬픔을 잊고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 건 다니엘의 1주기 추모식이 끝난 저녁부터였어요.”
평소 말수는 적었지만 밝은 성격의 크리스핀이었는데, 형의 1주기 추모식을 다녀온 그 날 저녁부터 조금씩 이상해졌다고 한다.
예배당을 들어가기 전부터 상당히 어두운 얼굴이었고, 추모식이 끝난 저녁 식사 시간에 별것도 아닌 일에 굉장히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렸다고 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난폭한 행동에 가족 모두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었죠.”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에 보지 못하던 거친 행동에서부터 방에서 혼잣말로 크게 떠드는 기이한 행동까지 다양한 돌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던 아들의 이상 행동은 두 달이 지나도록 낫지 않았고, 도리어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밝고 똑똑했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이상하게 변하자 백작 부부는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석 달이 지나자, 아들은 정신이 나간 광인(狂人)의 모습 그 자체였어요. 눈빛도 달랐고 험한 말을 가족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마구 내뱉었죠. 마치 다른 사람이 몸 안에 들어온 것처럼 변해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무척 어둡고 침울한 얼굴로 그대로 입을 닫아버리고 어떤 말도 하지 않더군요.”
영문을 몰랐던 백작 부부는 큰아들에 이어 작은아들까지 문제가 생길까 봐,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주위의 용하다는 의사나 약제사를 찾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지만,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몸이라 그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어떤 의사가 그러더군요. 머리에 병이 든 것 같다고. 저렇게 평소와 다르게 소리를 지르고 포악하게 변하면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변한 경우는 머릿속이 망가져 정신에 질병이 든 것이라 치료가 무척 힘들다고 했어요.”
백작 부부는 큰아들에 이어 소중한 둘째 아들마저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고, 이런 분위기를 알게 된 딸들도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큰아들의 신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부부는 이제 둘째 아들의 정신병을 고치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18세기의 정신병 치료는 상상 밖의 수준이었다.
아직 신체 질병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시대다 보니 정신병에 대한 치료는 원시 수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많은 의사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악한 생각’이 정신병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고, 그 해결책으로 머리에 일부러 큰 물집을 만들어 터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소독약도 없던 시절에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 물집은 각종 염증을 일으켰고, 정신병을 치료하려다 오히려 더러운 균에 감염돼 사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또 머릿속에 들어간 ‘악한 생각’을 죽이기 위해서는 강한 약을 먹여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독극물을 약으로 만들어 처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의사들의 처방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어요. 너무나 끔찍해 보이는 방법들을 크리스핀에게 도저히 쓸 수 없겠더군요. 약도 몇 번 먹여보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구토해서 그마저도 중단했고요.”
태오는 속으로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의사의 말만 믿고서 말도 안 되는 정신병 치료를 계속 받게 했다면, 아마 완전히 미쳐버리거나 신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입을 닫고 흐느끼는 부인을 대신해 맥스웰 백작이 입을 열었다.
“어느 날 어떤 고명한 의사분이 우리에게 말하길, 사람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면 다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주면 좋아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결혼할 나이도 된 크리스핀이니 결혼상대자와 만남을 가지면 새로운 기분이 들면서 좋아질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크리스핀은 한 여자를 소개받았고, 신기하게도 의사의 말처럼 나빴던 증세가 상당히 좋아졌다고 했다.
“결혼할 여자를 만나고부터 갑자기 이상 증세들이 거짓말처럼 줄어들었어요. 예전처럼 밝게 웃고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졌죠. 우리는 정말 기뻤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에 서둘러 결혼 날짜까지 잡았지요.”
그렇게 모든 게 좋아졌다고 여길 때쯤 다시 일이 터졌다.
“어제 말씀드렸듯이, 두 달 전에 다니엘의 2주기 추모식이 끝난 저녁부터 이전 같은 비슷한 기이한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 가까이 혼잣말로 떠들고 욕설과 폭력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더니··· 일주일 전부터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누구하고도 대화를 안 하고 있습니다.”
맥스웰 백작이 두렵고도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샌더슨 씨··· 이런 우리 아들을··· 과연 고칠 수가 있을까요?”
태오는 크리스핀이 어떤 해소되지 못한 깊은 감정으로 인해 이 상태까지 왔음을 직감했다.
사람은 나쁜 기억을 잊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뇌는 이러한 본능에 따라 안 좋은 기억을 머리에서 빨리 지워버리도록 작동한다.
문제는 이 기억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지워져 희미해지지만, 그 기억에 붙어 있던 감정들은 지워지지 않고 남게 된다는 점이다.
기억이 다 지워졌다고 여겨졌지만, 어느 날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괴롭혔던 감정들이 되살아 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발작 버튼’이 바로 이런 경우.
어떤 이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격하게 감정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데, 지워져 버린 기억 속에 남아있던 감정들이 그 사람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끓어오르게 하는 셈이다.
이렇게 기억으로 인식하는 사실은 지워졌지만, 남아있던 감정들은 지워지지 않고 사람의 무의식 속에 남아서 그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그리고 이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어느 순간 신체로 발현되어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신병을 발생시킬 수 있다.
‘크리스핀의 해결되지 않고 상처받은 감정을 정확하게 찾아내 발작 버튼을 꺼버려야 해.’
그렇지만, 고도로 훈련받은 임상심리학자라도 환자의 상처받은 감정을 제대로 읽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담 치료 때는 잠시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정확한 감정의 골을 잡아내지 못해서이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태오는, 환자의 무의식 속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포착해 낸 후, 상처받은 감정을 신속하게 치유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효과적이고 빠르게 치료해내는 것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비록 임상심리학자를 그만둔 지도 10년 가까이 흘렀고, 거기다 지금은 18세기이지만 태오는 크리스핀을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백작 부인이 낙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샌더슨 씨라도··· 우리 아들같이 심한 정신병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힘들겠죠?”
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물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아드님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망 섞인 태오의 대답에 백작 부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 치료··· 치료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다행히, 병의 진행 상태가 제가 고칠 수 있는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체됐더라면 치료가 상당히 힘들었을 겁니다.”
“아··· 그게 정말인가요?”
“네. 며칠간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아드님의 병을 치료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태오가 자리에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올라가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