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Opened a Matchmaking Agency in 18th Century London RAW novel - Chapter (51)
18세기 런던에 결혼정보회사를 차렸다-51화(51/217)
51화 조지 왕의 선물
주위의 귀족들과 고위 관리들이 고개를 숙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뚜벅. 뚜벅.
또각. 또각.
이내 힘차게 걸어들어오는 조지 왕과 샬롯 왕비의 모습이 보였다.
‘···!’
그런데 조지 왕을 슬쩍 훔쳐본 태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아니,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아지셨는데?’
조지 왕의 표정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랐다.
일반인들이야 혈색이 좋아졌다 정도겠지만, 태오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이 느껴졌다.
“오, 다윈 경!”
걸어 들어오던 조지 왕이 이래즈머스 다윈을 보더니 밝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국왕 폐하.”
공손히 예의를 표한 이래즈머스 다윈 역시 놀란 모습이었다.
“아니, 그런데 폐하? 몇 달 사이에 어찌 안색이 이리도 좋아지셨습니까?”
“허허, 그래요?”
“네, 폐하. 몇 달 전 뵈었을 때와는 얼굴색 자체가 다르옵니다.”
이래즈머스 다윈은 의사였다. 그래서 조지 3세의 변화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다윈 경은 아직도 알코올 중독자들 치료에 여념이 없다면서요?”
“제 힘이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윈 경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럼 제 주치의가 돼 달라는 부탁은 여전히 못 들어주시겠군요?”
“죄송하옵니다, 폐하.”
‘두 분이 서로 잘 아는 사이였구나.’
태오는 다윈 경이 의사인 줄은 알았지만, 조지 3세와 친분이 있는지는 몰랐다.
“샌더슨! 테오 샌더슨 왔는가?”
다윈 경과 정답게 인사를 나누던 조지 왕이 느닷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태오의 이름을 외쳤다.
태오가 황급히 앞으로 나가 머리를 조아렸다.
“국왕 폐하, 부르셨나이까?”
“허허, 그래 왔구만, 왔어. 아주 잘 왔네. 혹시나 해서 찾았네. 만약 안 왔다면 당장 잡아 오라고 했을 걸세. 껄껄.”
흐뭇한 표정의 조지 왕이 고개를 돌려 시종무관에게 물었다.
“정찬 준비는 다 된 건가?”
“물론입니다. 폐하.”
“좋아, 그럼 들어가지.”
접객실에서 대기하던 귀족들과 고위 관료들이 조지 왕과 샬럿 왕비를 따라 정찬이 차려진 방으로 이동했다.
태오도 그들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데, 옆으로 이래즈머스 다윈 경이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샌더슨 씨도 국왕 폐하와 안면이 있으셨군요?”
“네. 사실 지난번에 초대받아서 처음으로 뵈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한 번 뵙고 또 초대한 것도 그렇고, 아까 폐하께서 샌더슨 씨를 쳐다보는 눈빛이 남다르시던데요? 제가 모르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폐하 앞에서 샌더슨 씨의 혜안을 펼쳐 보이시기라도 한 건가요? 허허.”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는데···.”
“허허, 네. 아무튼 들어갑시다.”
태오의 심리치료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래즈머스 다윈은 조지 왕의 태도가 그저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
‘와··· 이게 뭐지?’
조지 왕과 샬럿 왕비를 뒤따라 들어간 방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음식이 식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로마인들만큼이나 영국 귀족들이 먹는 거에 진심이라더니··· 정말 먹기 위해 살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네.’
중세 때부터 영국의 왕실이나 지체 높은 귀족들의 만찬에는 각종 고기를 이용한 음식을 준비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이는 만찬을 통해 그 지위와 위세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코 많은 양의 고기였다.
30여 명의 귀족과 고위 관리들은 이미 익숙한 듯 각자의 지위와 신분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오는 눈치껏 적당히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샌더슨, 테오 샌더슨!”
조지 왕이 또다시 태오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네, 국왕 폐하.”
조지 왕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손짓했다.
“자네는 자꾸 어딜 그렇게 피해 다니는 겐가? 어서 이리로 가까이 와 보게.”
“네? 아, 네. 폐하.”
태오가 예의를 차려 조심스럽게 조지 왕 앞으로 다가갔다.
“허허허. 자, 어서 여기 앉게나. 여기.”
조지 왕은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귀족과 고위 관료들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정찬 자리에서 국왕의 옆자리에는 원래 왕족이나 가장 높은 신분의 고위 관료가 앉는 것이 보통의 관례였다.
그런데 오늘은 국왕 바로 옆자리에 태오를 앉히려 한 것이다.
태오가 당황스러워했다.
“아니옵니다, 국왕 폐하. 제가 어찌 감히···”
“어허, 시간 끌지 말고 어서 앉게. 이러다 음식 맛이 다 달아나겠어.”
“···폐하.”
더 이상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었다.
태오는 마지못해 예의를 차려 조지 왕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조지 왕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경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2주 전 모임에 함께 한 사람들도 여럿 보이는 구만. 그럼 그때 내가 샌더슨과 했던 약조를 똑똑히 기억하겠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조지 왕이 말하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날 참석했던 귀족이나 관리들에 의해 이미 입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뭐, 구태여 내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오늘 내 모습을 보면 그날 샌더슨이 약조했던 대로 일이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탁-
차를 한 모금 마신 조지 왕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난 며칠 전에 아주 기쁜 소식도 하나 들었다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샌더슨이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맥스웰 백작의 아들을 치료해줘서 무사히 결혼식까지 치르게 했다더군, 허허. 맥스웰 백작 큰아들이 그렇게 세상을 뜨고 나도 참 마음이 안 좋았었는데, 그 얘기를 듣고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허허허.”
결혼을 얼마 앞두고 심한 불안증으로 결혼식 행사 여부도 불투명했는데, 태오의 치료 덕분에 결혼식을 무사히 마쳤다는 이야기는 조지 왕을 크게 기쁘게 만들었다.
맥스웰 백작의 얘기에 귀족들 사이에선 작은 속삭임이 오갔다.
-아니, 맥스웰 백작의 아들이라면 이상한 광기 때문에 베들레헴 병원에 감금될 거라는 소문이 돌던 아이 아니요?
-쉿, 조용히 하시오. 다른 사람들 듣겠소.
-듣는 게 뭐가 대수요? 1년 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구만.
-허, 신기하군요. 그런 광기 걸린 자를 대체 어찌 치료했다는 거지?
조지 3세는 맥스웰 백작의 아들이 그저 자신보다 조금 더 심한 불안증에 걸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선 백작의 둘째 아들이 곧 베들레헴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8세기 후반,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최악이었다.
정신질환자는 귀신이 들렸거나 더는 제대로 된 인간의 구실을 할 수 없어서 버릴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병증이 심해지면, 런던의 경우 베들레헴 병원에 감금되었는데, 그때부터는 더 이상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런던 베들레헴 병원은 정신병자들의 집합소였지만, 치료를 위한 정신병원이라기보다 ‘인간동물원’에 가까운 곳이었다.
주말이 되면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 사람들이 표를 사서 창살 안의 환자들을 구경하러 오는 일이 공공연히 벌어졌다.
심지어 묶여 있는 환자에게 작은 창을 던져 맞추는 내기 스포츠가 성행하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다 보니 육체적으로 큰 병을 얻는 것보다 정신병을 얻어 병원에 감금되는 일이 훨씬 더 두려운 일이 돼 버린 지도 오래였다.
그래서 이런 시절의 귀족들에게 백작 아들의 광증이 치료됐다는 사실은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샌더슨?”
“네, 폐하.”
“약속대로 내 몸의 상태를 호전시킨 자네에게 사례와 함께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네.”
“폐하, 선물이라니요, 소인이 크게 한 일도 없는데 가당치도 않습니다.”
조지 왕이 시종무관에게 손짓하자, 한 시녀가 손에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태오에게 다가왔다.
“그 뚜껑을 열어 보거라.”
왕의 명령에 따라 시녀가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는 꽤 큰 식물의 뿌리가 몇 개 담겨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사람의 몸과 같은 기괴한 형상이었다.
상자 안의 물건을 본 귀족과 관리들이 웅성거렸다.
-어허, 저게 뭐지요?
-저거 북아메리카에서 들여오는 야생 식물 뿌리 같은데···.
-그렇긴 한데, 식민지에서 들여온 야생 ‘삼’과는 모양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조지 왕이 하사한 선물의 정체에 대해 다양한 말이 오갔다.
하지만 태오는 그것이 뭔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니, 저건 인삼?’
그랬다. 조지 3세가 태오에게 자랑스레 가져온 선물은 ‘인삼’이었다.
유럽에 동양의 인삼이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반 동인도회사를 통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온갖 전염병과 전쟁 등으로 인해 약해진 신체를 치료하는 약재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동양의 신비한 인삼 역시 큰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달여 먹은 후의 놀라운 효능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인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 보니 그 가격이 금만큼 비싸, 왕실이나 아주 특권층 일부만이 접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약재였다.
이에 1740년 영국 학자들에 의해 인삼을 키워서 약재로 만들어보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에서 야생 삼이 발견되었고, 마치 서부의 금광개발과 비슷한 ‘삼 찾기’ 광풍이 불면서 유럽 약재 시장에 북아메리카산 삼이 무더기로 나오게 됐다.
하지만 북아메리카에서 나온 삼은 아시아에서 나온 삼에 비해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약효도 그만큼 떨어진다고 보아 약재로써 인식도 썩 좋지 못했다.
“샌더슨, 이게 뭔지 아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태오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이것은 동양에서 약으로 달여 먹는다는 ‘인삼’이 아니 옵니까?”
동양의 인삼이라는 말에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허허, 역시 잘 알고 있구만. 그래 맞아. 동양의 인삼이지. 하지만 청나라에서 온 것은 아니야. 조선이란 곳에서 온 ‘고려인삼’이지. 아주 귀한 약재일세.”
“네? 조선의··· 고려··· 인삼이요?”
‘고려인삼’이란 말에 주위가 시끌벅적해졌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매우 비싸서 구경도 힘들었던 ‘삼’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이제는 보기가 어렵지 않았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해졌다.
하지만 신비하고 매우 값비싼 약재로 불리는 동양의 삼, 그것도 ‘고려인삼’을 직접 본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이거 참··· 전생으로 와서 고려인삼을 보다니.’
18세기 영국으로 환생한 태오로서는 조지 왕의 입에서 ‘조선’과 ‘고려인삼’이란 단어가 나오자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지 왕은 놀란 표정의 태오를 보고 흡족해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 고려인삼은 교활한 청나라 놈들에게서 사들인 게 아니야. 만주라는 곳에 들른 왕립학회의 필립 경이 조선이라는 곳의 정직한 상인들에게 힘들게 구매해서 내게 가져다준 것일세. 진짜배기 고려인삼이라는 것이지.”
이 당시 중국에서 인삼을 구매할 때는 뿌리를 일일이 잘라봐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불신이 깊었다.
중국 상인들은 무게로 인삼값을 매긴다는 것을 이용해, 인삼 안에 납 조각 같은 것을 교묘하게 집어넣어 무게를 늘려 팔았기 때문이다.
또한 벌레 먹은 인삼의 구멍에다가는 노란색 가루를 채워 넣어 정상품인 것처럼 속여서 비싼 가격에 팔곤 했다.
하지만 만주 지역에 있는 조선 상인들의 고려인삼은 그러한 야비한 짓이 없었다. 조선 상인들은 늘 품질 좋은 인삼을 판매함으로써 수입상들에게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샌더슨. 내가 정말 아끼는 고려인삼이지만, 자네가 내 건강을 위해 신경 써준 것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하사하는 것이네.”
지금 태오가 받은 고려인삼 정도라면, 당시 최고급 마차 몇 대는 살 수 있을 정도의 가치 있는 물건이었다.
“···폐하. 이 은혜를 제가 어찌 다 갚겠습니까···.”
감격해하는 태오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던 조지 왕이 이래즈머스 다윈에게 물었다.
“다윈 경. 의사로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를 이렇게 건강하게 만든 샌더슨의 치료실력이 말이오.”
옆에 앉아 있던 고위 관리에게 그간 있었던 얘기를 대략 전해 들은 다윈 경은 무척 놀라워했다.
“폐하, 정말 놀랍군요. 저도 환자들을 치유하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치료에 임하기는 하지만, 국왕 폐하나 맥스웰 백작 아들의 마음 병을 며칠 안에 눈에 띄는 치료를 했다니요,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다윈 경이 태오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테오 샌더슨이 한 것이라면, 이상하게 저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아직은 저도 어떤 치료법을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꼭 한번 직접 들어보고 싶습니다.”
“허허. 다윈 경도 샌더슨의 놀라운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구려.”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 시절 의사에 대한 인식은 현대와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글을 못 읽는 양복 재단사가 치료실력이 좋다는 이유로 여왕의 안과의사 주치의로 임명되던 시대였다.
특히 내과나 정신과적 치료에서는 기존의 대학 교육을 받은 의사들의 성과가 워낙 미미하다 보니, 실력만 좋다면 의사보다 경험 많은 돌팔이를 더 선호하기까지 했다.
“샌더슨, 내 자네한테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는가?”
“네, 폐하. 미천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받들겠습니다.”
조지 왕은 이래즈머스 다윈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예전에 내가 다윈 경에게도 이와 똑같은 부탁을 한 적이 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었지. 과연 자네는 어찌 나올지 한 번 두고 봐야겠네.”
“···?”
“샌더슨. 자네 궁에서 내 주치의를 해볼 생각이 없는가?”
“폐···폐하···.”
국왕의 주치의라니···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태오에게 조지 왕의 주치의는 솔직히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단조로운 일보다는 다양한 의뢰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평생의 동반자를 찾아주는 일이 훨씬 행복하고 보람찼다.
하지만 국왕이 간곡히 부탁하는 상황에서 단칼에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
태오가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조지 왕이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다윈 경처럼 거절하려는 마음이구만. 그래, 그래. 하긴, 재주 많은 사람이 궁에 묶여 사는 것만큼 답답한 게 없겠지.”
부탁을 거절하면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줄 알았건만, 의외로 조지 왕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폐하··· 죄송하옵니다.”
조지 왕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네, 괜찮아. 대신, 자네는 절대 런던에서 벗어나지 말게나. 내 곁에 살면서 다윈 경보다 더 자주 나를 보러 와야 할 걸세. 자네의 말마따나 마음의 병이라는 것은 자주 발병하니 자네가 잘 살펴보고 치유해줘야 하지 않겠나?”
“네, 폐하. 소신이 도움이 된다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달려올 것이옵니다.”
조지 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러면 됐어···.”
***
따그닥. 따그닥.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정찬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마차 안.
조지 왕이 하사한 고려인삼 상자를 손에 꼭 쥐고 있는 태오는 기분이 묘했다.
전생으로 떨어져 정신없이 보낸 2년여의 세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많은 인연을 만나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18세기 영국인으로서의 삶에 깊이 동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선조의 땀이 들어간 고려인삼을 18세기 영국 국왕에게서 선물로 받고 나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자신의 존재가 다시금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와 조지 왕까지 만났어. 그럼 지금 내가··· 역사를 변화시키고 있는 건가?’
많이 좋아진 조지 3세를 보면서 태오는 안심이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역사의 변화에 관한 생각이 깊어졌다.
‘내 기억으로는 정신 질환이 심해진 조지 3세를 대신해서 조지 4세가 10년간 대신 섭정을 하다가, 1820년 즈음에 돌아가셨던 것 같은데···. 그런데 만약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거나 최소화된다면 조지 3세가 계속 집권하게 되는 걸까?’
역사책 속에 조지 3세는 상당히 오랜 기간 집권을 하다, 정신병이 심해진 말년에 아들 조지 4세가 10년 정도 대신 통치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조지 3세가 정신병이 없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궁금증이 들곤 했는데, 과연 내게 치료를 받아 건강해진 조지 3세로 인해 역사가 바뀌게 되는 걸까?’
후세 기록에 따르면, 조지 3세는 유럽 왕실의 근친혼으로 인한 포피리아 병을 앓았고 이 때문에 정신병이 생겼을 수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조지 3세에게서 포피리아 병이 가진 특징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심리적인 불안증세가 상당히 심했고, 그에 대한 치유는 시급해 보였다.
앞으로 조지 3세의 부탁대로 시간이 된다면 자주 들러 살펴볼 생각이었다.
‘내가 18세기로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역사의 변화가 시작된 것일 텐데···. 과연 조지 왕의 정신이 멀쩡하면 역사가 어떻게 변할지.’
어두워진 마차 안에서 태오의 생각은 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