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Opened a Matchmaking Agency in 18th Century London RAW novel - Chapter (55)
18세기 런던에 결혼정보회사를 차렸다-55화(55/217)
55화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
여행에 관해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자, 알렉 파커가 비웃듯 재촉했다.
“샌더슨 씨, 내 말 못 들었소? 뭐야··· 이거 혹시 무역선도 타보지 못한 건 아니겠죠?”
그런데 그때, 가벼운 코웃음이 들리나 싶더니 태오의 입에서 도시 이름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도버해협을 시작으로, 프랑스 투렌 지방의 도시, 파리, 사보이, 몽스니, 스위스 알프스, 이탈리아의 제노바,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디종, 스트라스부르···.”
“···?”
“유럽은 대충 이렇게 여행을 다녀봤습니다.”
“!”
이미 관련 역사책을 통해 18세기 그랜드 투어의 세세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태오는 이 당시 가장 부유한 영국 귀족이 다닐 수 있는 여행 코스를 죽 나열해 읊어주었다.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알렉 파커였다.
그러나 그는 애써 여유롭게 받아쳤다.
“험, 샌더슨 씨는 사업가라면서 일을 안 하고 그렇게 많이 놀러 다닐 정도로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가 봅니다?”
“뭐, 잠시 쉬면서 세계 여행할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
사실 알렉 파커는 그랜드 투어는커녕 영국 앞바다조차 건너보지 못했다.
그저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의 얘기를 귀동냥하고서 떠들고 있는 것뿐이었다.
한때 이름 있는 백작 가문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버지의 도박과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운 지도 한참이었다.
독이 바짝 오른 알렉 파커가 물러서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뭐··· 그런 식으로 도시 이름만 입으로 나열하면 여행 다녀온 건가요? 그렇게 따지면 저는 전 세계를 다 돌아본 셈이 되는 겁니까? 하하하.”
그러나 곧 태오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좋은 여관에는 깃털이 가득한 베개와 이불이 잘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탈리아나 기타 좋지 못한 숙박시설에는 짚으로 채운 침구류를 내놓더군요. 어찌나 축축하고 속에 살을 물고 피를 빠는 빈대 같은 벌레가 많은지 너무 고생했습니다.”
“······.”
“그 침대에 이전에 누가 묵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찝찝하더군요. 그래서 마침 준비해 온 침대보를 여러 개 깔고, 동물 가죽으로 두껍게 만든 깔개를 그 위에다 깔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죠. 파커 경도 물론 그렇게 하셨겠죠?”
단순히 들었다고 하기엔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태오의 입에서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좋지 못한 숙박시설의 빈대 때문에 다른 값비싼 여관으로 옮겼다던 친구의 얘기가 불현듯 떠오른 알렉 파커로서는 태오의 방법이 정말 경험을 통해 우러나온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그···그랬죠. 저도 이제야 생각나네요. 이탈리아가 건물만 보면 정말 휘둥그레지는데, 빈대가 극성이라 그렇게 여러 깔개를 깔고 잤던 것 같습니다. 아하하···.”
캐서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까 파커 경께서는 제가 여관이 더럽지 않냐고 했더니, 여행지의 숙소는 전염병 문제로 나라에서 관리해 너무 깨끗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네. 그거야··· 음··· 전 고급 숙소를 말한 거고요. 허름한 숙소는 빈대도 많고, 아주 고생입니다. 깔개가 꼭 필요해요. 험.”
변명하느라 진땀을 흘리는 알렉 파커는 심사가 몹시 뒤틀렸다.
이런 사정을 알 길 없는 캐서린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자는 방법이 다 있군요. 호호. 신기해요. 정말 여행하려면 별걸 다 챙겨 다녀야겠어요?”
“그렇습니다. 정말 많은 걸 들고 다녀야 했지요. 심지어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에서는 건강증명서까지 가지고 다녀야 하거든요.”
“정말이요?”
알렉 파커가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이탈리아로 여행 갔을 때 어느 도시에서도 건강증명서 따위는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해외여행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자기에게 집중되던 관심이 태오에게로 쏠리자 알렉 파커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가 친구에게 들었던 내용이 나오자 다시 아는 척을 하면서 딴지를 걸고 있었다.
태오의 얘기를 어떡하든 틀린 것으로 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태오의 구체적인 반박이 나왔다.
“운이 참 좋으셨네요. 어떤 분은 로마 교황령의 지역에서 건강증명서를 비롯한 여행 관련 증명서가 없어서 감옥에 두 달 가량이나 갇혀 있으셔야 했습니다. 게다가 감옥에 갇힌 사이에 여관에 맡겨 두었던 많은 짐들은 모조리 다 도난당한 뒤였고요.”
“······.”
태오는 책에서 읽었던 인상적인 내용을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알렉 파커로서는 그랜드 투어를 다녀온 친구들로부터도 듣지 못한 얘기가 술술 나오자, 태오가 정말 여행을 다녀온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태오는 실제로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여행을 다녀보았고, 전생으로 와서는 18세기의 지도를 통해 이 시대의 유럽의 지형도 상당 수준으로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그러니 그랜드 투어를 귀동냥으로 들은 알렉 파커와는 유럽 지형에 대한 기초적 이해부터 비교가 안 되었다.
태오는 유럽 곳곳의 자연경관과 유명한 역사적 유물에 관한 얘기들을 특유의 입담으로 흥미롭게 풀어나갔다.
태오의 여행 이야기는 캐서린은 물론 오스본 씨도 넋을 잃고 들을 정도로 재밌었다.
‘뭐지··· 도대체 이 자식 정체가 뭐야···?’
알렉 파커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조금만 아는 척하려고 해도 저 기이한 녀석이 자기 머리 위에 올라타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곤혹스러웠다.
그렇다고 대충 아는 지식을 떠벌렸다간 바로 또 창피를 당할까 봐 어느 순간부터는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려 꺼냈던 해외여행 이야기가 오히려 태오만 더 돋보이게 하고 말았다.
심한 우월 콤플렉스를 가진 자들은 극단적인 서열 의식을 가지고 상대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서열이 낮다고 여기는 대상은 철저히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면서 서열이 낮은 상대의 의견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는 타고나는 거라고 착각하고, 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불쌍한 인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깨지는 순간, 심한 열등감에 직면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자신의 아래라고 여겨졌던 사람이 뭔가 잘난 모습을 보이면 굉장히 불편해하면서 견디기 힘든 치욕으로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러한 내적 갈등 속에 빠져있는 알렉 파커의 모습은 고스란히 태오의 눈에 들어왔다.
태오는 속으로 알렉 파커에 대한 점수를 매겼다.
‘매겨볼 것도 없이 최악의 결혼 후보자다.’
건전한 열등감은 그 사람을 발전시킨다.
남과 비교하면서 서열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와 비교하면서 자신을 독려하고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열등감이 되어 그 사람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알렉 파커와 같이 상대에 대한 존중 없이 끊임없이 비교질하며 우월감을 느끼려는 사람은 아무리 지금이 18세기라고 하더라도 배우자를 한없이 피곤하게 만들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이제 곧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19세기로 가까워질수록 산업 자본주의의에 의해 귀족에 대한 시선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돈 많고 능력 있는 신흥 자본가가 귀족 위에 서는 세상이 펼쳐진다.
돈도 없고 혼자 살아갈 능력도 없으면서도, 그저 고귀한 신분이라는 우월감에 도취해 사는 알렉 파커와 같은 세습 귀족은 이제 더는 설 자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태오의 판단이 완전히 끝났을 즈음에 알렉 파커 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본 양, 오늘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네, 파커 경.”
그는 애정 가득한 눈으로 캐서린의 손에 입맞춤하고는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
“파커 경이 어떠셨습니까, 오스본 씨?”
태오는 배웅을 마치고 들어오는 폴 오스본에게 알렉 파커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굉장히 사내답고 거침이 없네요. 그렇게 모난 구석도 보이지 않고,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역시 걱정했던 대로의 대답이 나왔다.
만약 현대였다면 알렉 파커의 부족한 인성은 금세 티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인 폴 오스본 씨가 누구보다 가장 먼저 눈치채고 결혼을 앞장서 반대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18세기의 영국에서 평생을 천한 서민으로 무시 받으며 살아왔던 오스본 씨였다.
그에게는 알렉 파커의 가식적이고 잘난척하는 행동이 백작 가문의 아들로서 당당하고 품위 있는 ‘귀족의 고결한 인품’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이것은 오스본 씨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깔린 귀족에 대한 삐뚤어진 환상이기도 했다.
“오스본 양은 어떠셨어요?”
“음···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다른 사람도 봐야 알 것 같아요.”
다행스럽게도 캐서린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결혼하고 싶다고 찾아온 남자가 이상한 얘기와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모습이 그녀에게 좋아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상이 급격히 변하면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결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자리 잡아가고 있다.
캐서린에게 파커 경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번에는 오스본이 태오에게 의중을 물었다.
“샌더슨 씨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당장은 대답해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나머지 후보자들도 모두 보고, 제 의견을 말씀드리죠.”
“그렇죠. 두 사람이 더 남았으니까요.”
폴 오스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래도 알렉 파커에 대한 미련이 큰 듯했다.
남아있는 나머지 두 후보는 모두 장남이 아닌데다가 가문도 남작 집안이었다.
답답한 일이었지만, 계급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는 오스본 씨는 비록 가세가 많이 기울었더라도 백작 가문의 장남에게 딸을 보내고 싶은 심정인 것 같았다.
**
오후 3시에 방문한 에릭 라우더 남작의 아들인 존 라우더 경은 굉장히 우울하고 무능해 보였다.
그는 부모의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들른 것이 분명했다.
그의 감정은 비관적이고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느낌이 오스본 씨나 캐서린 양에게 그대로 전달될 정도였다.
차라리 알렉 파커가 그랬던 것처럼 돈에 대한 열망이라도 있었다면, 활기 있는 느낌이라도 주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표와 야망 없이 우울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기운 빠지게 했다.
내일 당장 목을 매달았다는 소식이 들려도 별로 놀라울 것 같지 않은 젊은이였다.
그는 대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침울한 얼굴로 방어적인 대답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우더 경에 대해서는 태오의 판단도 필요 없었다.
오스본 씨나 캐서린 양 모두 무척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오는 어이가 없었다.
‘수많은 중매쟁이와 인맥을 동원해서 고르고 고른 사람들이 겨우 이 모양이라니···.’
런던의 매파들만 해도, 집안이 신흥 귀족인지 200년 넘은 전통 세습 귀족인지, 도박 빚은 없는지, 정부를 두고 있는지, 좋은 교육을 받았는지, 사냥을 잘하는지 등을 꼼꼼히 따지는 편인데,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지금은 정보가 그야말로 입을 통해 전해 들은 것이 절대적인 사회인데다가 아직도 정략결혼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18세기.
그만큼 백수 귀족 아들의 실제 모습보다는 그 부모의 영향력이 큰 시대였다.
더구나 맨체스터 지역은 급속히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전국의 귀족이나 자본가들이 모여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머무른 귀족 가문이 많았다면 그동안 쌓여온 정보가 있어서 매파들이 판단을 내리는데 쉬울 수 있겠지만, 이곳은 그러기가 힘든 지역이었다.
또한 매파들은 당사자에 관한 판단보다는 그들 부모를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마도 존 라우더 경도 그 아버지 에릭 라우더 남작의 위세가 이곳 맨체스터에서는 그런대로 통했고, 그런 것이 아들을 최종 후보자에 들게 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한 사람인데··· 흠, 만약 내일 올 그 사람도 별로라면 시간을 들여서 내가 좀 알아봐야 할 텐데, 쉽지 않겠어.’
맨체스터 지역의 귀족들은 태오로서도 생소했다.
그들과 친분을 쌓고 데이터를 모으려면 최소한 몇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
차라리 여기보다는 런던 중심부에 사는 귀족과 연결하는 것이 태오에게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폴 오스본 씨와 그런 아버지를 걱정하는 캐서린 양은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을 심적으로 꺼리고 있어, 런던 중심부의 귀족과 연결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제발, 내일 제대로 된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