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verted to being a K-drama genius RAW novel - Chapte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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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관문
래원이 편의점을 먼저 자원하자 유찬은 안도하는 듯했고,
최 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래원에게 회사 카드를 내밀었다.
‘오냐. 눈치 꽝, 너 잘 걸렸다.’
래원은 카드를 두 손으로 받아들고는 최 부장의 지령을 기다렸다.
“황 피디네 ‘청춘 런웨이’ 팀이 오늘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줄줄이 회의거든. 방금 대본 미팅 시작했고, 끝나면 바로 FD랑도 또 회의고.”
최지철은 흡사 덫에 걸린 사냥감을 보는 듯 래원을 훑었다.
“요깃거리 좀 사와.
연출에 황 피디, B팀에 변 피디, 조연출 하인혁. 일단 이렇게 셋에다가, 진행 스텝이 몇이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 알아서 사와 봐.”
부하 직원 입장에서는 ‘알아서’가 가장 어려운 말이다.
잘 해야 본전이고 못 하면 ‘피디가 센스가 없다’며 욕먹기 일쑤기 때문이다.
래원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지하 1층을 누르려다가 1층을 누른다.
SBC 건물 지하 1층에도 편의점이 있지만, 밖에 있는 대형 편의점을 이용할 생각이다.
이 시간에 내부 편의점에 가면 핫바는 동나고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 밖에 있는 대형 편의점은 직접 핫바를 구워주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막내 노릇도 재밌네.’
딸랑-
편의점 종을 울리며 들어서자마자, 래원은 바구니를 들고 과자 코너 부터 훑는다.
빠른 손놀림으로 몇 가지를 챙긴 후, 청포도 맛 껌과 젤리, 초콜릿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곤 냉장 코너로 가서 펩시콜라와 얼음 컵을 먼저 집었다.
몇 가지 음료를 더 챙기고, 맥스봉과 견과류, 군밤을 고른 다음은 컵밥 코너.
래원의 손은 지체없이 불닭맛, 제육볶음맛, 참치마요맛, 김치알밥맛을 차례로 쓸어 담은 후 계산대로 향했다.
“핫바 5개요.”
숨을 고르며 시계를 보니 7분이 지나있었다.
“그리고.
말보로 레드 하나, 에쎄 수 하나도 같이 주세요. 영수증도 주시구요.”
래원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다시 SBC 건물 안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봉지 안에 내용물을 다시 확인해본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황 선배, 변 선배, 하인혁의 입맛과 회의 상황을 고려한 픽이다.
편의점 심부름.
조연출로 삼을 만한 센스가 있는지 테스트하고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조연출은 모름지기 연출가의 손이 되어주는 존재다.
말하지 않아도 연출가 선배의 호불호와 습관을 전부 파악하고, 취향대로 움직여야 한다.
드라마 연출에는 정답이 없다.
선택의 연속이다.
그저 선장 역할을 하는 연출가의 결정을 최선의 답이라고 믿고 팀원들 다 같이 달려가는 것이다.
때문에 조연출로서 팀의 성공을 위해 연출가가 내린 답에 힘을 실어주려면, 그의 취향이 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입 입장에서 처음 몇 달은 당연히 깨진다.
이같은 심부름을 반복하며 점차 팀 내 일원으로, 조연출의 자질을 갖추며 거듭나는 것.
“다녀왔습니다.”
래원은 최지철에게 카드와 영수증을 반납한 후, 그의 턱짓대로 사무실 가운데 테이블에 간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최지철의 손가락은 컴퓨터 마우스와 키보드 위에서 까딱였지만, 눈으로는 래원의 손과 테이블을 쫓고 있었다.
‘어쭈···?’
드라마국 PD들 누구나 좋아하는 핫바와 맥스봉.
회의 때 냄새 안 나게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군밤과 견과류는 물론.
과자 역시 초코 과자, 감자 과자 골고루.
그것도 회의 중에 손에 안 묻히고 먹을 수 있게 소포장 된 막대 과자로 사 왔다.
‘보통 이 시간에 신입을 보내면, 센스없게 냄새나는 도시락을 사 오곤 하는데··· 컵밥? 맛도 꽤 센스있게 골라왔네.’
편의점 심부름은 보통 뭘 사 오든 트집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과거의 래원 역시 몇 달 내내 잔소리를 들었었다.
‘센스하고는···. 작가들 대부분 여자인 거 몰라? 초콜릿이나 젤리 같은 거 없어?’
‘왜 이리 굼떠!’
‘편의점에서 어떻게 핫바를 안 사와?’
‘이걸로 누구 코에 붙일래!’
혹은
‘드라마국 살림 거덜 내려고?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냐?’
등등···.
최지철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잠시 할 말을 잃고는 입술을 일자로 오므렸다.
‘눈치 꽝 폭탄치고는 나쁘지 않은 시작이네.’
마지막으로 래원이 봉지를 툭툭 털어내자 떨어지는 담배 두 갑.
이에 최지철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선배님께서 아까 담배 피우러 나가실 때 꺼내시는 거 봤습니다.”
최지철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래원이 내민 말보로 레드를 받았고,
눈짓으로 래원의 반대 손에 있는 다른 담배를 가리켰다. 그건 뭐냐는 눈빛.
“아, 이건··· 저기 황 선배님 책상에 빈 곽이 있더라구요.”
래원은 곧장 황태수 피디의 책상으로 가더니 에쎄 수를 올려놓는다.
피식-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지철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이놈 봐라? 그 사이에 그걸 봤다고?
눈치는 꽝이지만 눈썰미는 있으시다···?’
그때, 변덕규 피디가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이야, 펩시! 얼음 컵도 있네!”
펩시콜라를 얼음 컵에 부어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핫바를 뜯어 한 입 베어 문다.
눈으로 테이블을 한 차례 스캔한 후 묻는 변덕규.
“거기 신입, 이거 다 네가 사 왔냐?”
“네. 잘 몰라서 골고루 사 왔습니다.”
‘골고루’ 이상의 부연 설명은 굳이 필요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게 되어 있으니까.
“너도 펩시파냐?”
“네? 네. 콜라는 펩시 아니겠습니까?”
“캬. 드디어 콜라 맛을 아는 놈이 들어왔구만.”
변덕규가 흡족하게 래원의 등을 두드렸다.
“태수 놈은 뭐 이리 대본 회의를 길게 해.”
최지철 부장은 괜스레 목소리를 높이고는, 래원과 래원이 완벽하게 셋팅해둔 야근 간식 테이블을 번갈아 보며 할 말을 찾다가 이내 포기한다.
“도래원, …수고했다. 퇴근해.”
“네!”
래원은 백팩을 메고는, 작은 트레이를 든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가며 각종 과자와 주전부리를 담았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사무실을 빠져나와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복도 끝에 있는 회의실로 향하는 래원.
조심스레 문을 두드린다. 똑똑똑.
– 네.
회의실 안에서 들린 황 선배의 대답에 문을 열어 꾸벅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간식 트레이를 올려두고 나온다.
이것으로 출근 첫날의 업무가 드디어 끝났다.
집으로 향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래원의 발걸음이 가볍다.
한편, 회의실 안.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혹시 신입 피디? 올해는 드라마국에도 새 피디님들 오신댔죠.”
명희경 작가가 먼저 관심을 보이며 빼빼로를 깠다.
“당 떨어지던 참에 잘 됐네!
먹으면서 하죠, 황 피디님.”
보조 작가들도 저마다 젤리와 초콜릿을 입에 넣어 오물거렸고,
황태수 피디는 청포도 맛 껌을 집으며 래원이 나간 문 쪽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 * *
“이거 뭐예요? 내 담배네.”
기나긴 두 개의 회의를 마치고 자기 자리로 돌아온 황태수는, 책상 위에 놓인 새 담배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집어 들었다.
“신입이 사 왔대요.”
변덕규의 대답에 다시 물음표를 띄우는 황태수.
“신입? 덕규가 시켰냐, 에쎄 수?”
“아뇨.”
“그럼 형님이?”
“너 나 몰라? 내가 힌트를 줬겠냐.”
그렇다. 최지철 부장이 그랬을 리가 없다.
친해지고 나면 내 사람 챙기기로 유명하지만 초장에는 신입들 태우기로 악명 높은 그다.
지금 그와 같은 팀에서 형님 아우하는 황태수와 변덕규 역시, 신입 시절에는 호되게 당했을 정도.
“네 책상 위에 빈 답뱃갑보고 사 왔단다.”
혀를 내두르는 최지철.
“그 신입, 이름이 뭐예요?”
“도래원.”
황태수가 담배를 까서 한 개비 입에 물고 묻는다.
“도래원? 형님이 고르셨어요?”
“아니. 이 국장이 나한테 떠민 놈. 신입 셋 중 최하점이라는데?”
변덕규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고,
“정말요? 최하점? 이상하네, 눈빛 보면 꼴찌 할 애는 아닌 거 같던데···.”
황태수는 물었던 담배를 다시 갑에 넣고는, 최지철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사실여부가 어떻든 이 국장님은 꼴찌로 알고 우리 팀에 넣은 거네요?”
“그렇지. 태수야, 이거 내가 기분 나빠야 하는 거 맞지? 이 국장 새끼, 유치하게 대놓고 차기 국장 후보 견제하는 거야 뭐야.”
최지철은 씩씩대며 테이블 위의 맥스봉을 집어 까더니 우걱우걱 씹기 시작한다.
“그 새끼 밀어주던 선배들도 다 퇴사했겠다, 임기 끝나면 곧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놈이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둘의 대화와 상관없이 계속 도래원에 대해 생각하던 변덕규가, 이윽고 자기 생각을 내뱉는다.
“근데요, 성적은 별론데 실무에 능한 애들 있잖아요. 그런 타입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더 지켜봐야지.”
최지철이 턱을 긁적이며 답했다.
“퇴근들 안 하냐?”
“저는 대본 좀 더 봐야겠습니다.”
“그럼 저도요. 이번에 태수형 확실히 서포트 하기로 해놓고, 혼자 먼저 퇴근할 순 없죠.”
“살살들 해라. 먼저 간다.”
집에 가서 야식으로 먹을 컵밥 몇 개를 챙기고는,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최지철의 뒷모습.
“들어가십시오, 형님!”
황태수와 변덕규는 큰 소리로 인사한 뒤 대본을 펼쳤다.
“출출하네. 형은 매운 거죠? 불닭? 제육?”
“불닭.”
변덕규가 컵밥 두 개를 전자레인지에 돌려왔고, 둘은 맛있게 비벼서 핫바 하나씩을 반찬 삼아 먹으며 대본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 여진 선생역. 아직 공석이죠? 명희경 작가는 계속 엄하늘 원한대요?”
“고집불통이야.”
“엄하늘이 30대 중반이죠? 나잇대는 맞는데 너무 동안 이미지가 강하지 않나?”
“그걸 떠나서, 제목부터 면 누가 봐도 20대 애들이 주연인 패션물, 청춘 드라마인데···. 엄하늘이 이걸 하겠냐고.”
“엄하늘도 웃겨요. 드라마 원 투데이 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기획안 받고 바로 오케이하거나 애매하면 1,2화 대본 달라하잖아요. 왜 아무 연락이 없대요?”
“알아서 커트해달라고 가만히 있는 거지. 명희경 껀데 먼저 거절은 못 하겠고, 하기는 싫고.”
“엄하늘 나가리면···. 그 밑에 후보들은 너무 화제성이 약한데. 작가가 포기 못 할 만하네요.”
그때, 다가오는 발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돌아간다. 하인혁이다.
“넌 어디 처박혀있다 오냐?”
“얼굴 썩은 거 보니까 편집실이네.”
“네.. 예능국 동기가 파일럿 종편 좀 도와달래서요.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하아···.”
하인혁은 오만상을 찌뿌리며 테이블 위의 초코파이를 하나 까서 입에 넣는다.
“인혁아, 이번 신입 꽤 잘 들어온 거 같다. 2년 만에 막내 벗어나네. 축하한다.”
변덕규의 상기된 목소리.
“신입..이요?”
첫날부터 잘 들어왔다는 말이 나온다? 하인혁의 얼굴이 묘하게 경계의 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의 물음에 변덕규가 신나서 말을 이었다.
“어. 선배들 담배 취향까지 파악 완료에, 이미 완전 피디 입맛이던데?
최 선배가 출근날부터 카드 쥐여준 건, 대놓고 맛 좀 보라 한 건데, 걔가 사 온 거 보고 암말도 못 하더라니깐.”
하인혁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는 현재 드라마국 최연소 PD로 연출 선배들의 최애 조연출이다. 뿐만 아니라 CP들에게는 최고의 기대주.
정확히는 신입들이 들어오기 전인 어제까지 그랬다는 소리다.
하인혁은 후배 PD들에게, 최고의 기대주 자리만큼은 양보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딴 신입은? 편집실로 보냈다며.
인혁아, 편집실에서 봤냐?”
황태수의 물음에 하인혁은 의식적으로 표정을 풀고 답했다.
“네. 두 명 봤어요.”
“두 명 다?”
“어떻디? 문 선배네 팀 애는 여자라던데.”
“네.”
“ ··· 걔, 이쁘냐?”
“뭐, 봐줄 만했습니다.”
“진짜? 아, 씨··· 우리 지철이 형님은 영 실속이 없으시네. 시커먼 남자 놈들만 둘씩이나 떠맡고.”
“다른 한 놈은 어땠냐?”
“음.. 걘 왠지 서울대 출신 같던데요?”
“푸하하. 하는 짓이 서울대 출신? 뭔말인지 안 봐도 비디오다.”
“서울대. 후배 사랑하면 또 우리 지철이 형이지.”
하하거리는 황태수, 변덕규와는 달리 하인혁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 두 명은 문제없을 거 같고.
오늘 내가 못 본 나머지 한 명이,
첫날부터 선배들 눈에 들었다는 소리네?’
래원이 사 온 간식을 집어 먹는 하인혁.
그의 눈에 경계심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 * *
집에 도착한 래원은 기분 좋게 씻고 래미와 저녁 상 앞에 마주 앉았다.
래미가 먼저 해둔 밥과 미역국. 그리고 래원이 퇴근길에 사온 고등어를 구웠다.
“잘 먹겠습니다!”
소박하지만 래원이 나름대로 영양에 신경을 쓴 식탁이다.
혼자라면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면 그만이나, 아직 성장기인 래미를 생각하면 이래야 했다.
식탁 위에서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분주히 나다가, 래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신입 환영 회식 같은 건 안 했어?”
“어. 아직 교육 기간이라.”
“교육? 저번에 수원 가서 몇 주 받고 왔잖아.”
“어. 이번 1주일 동안 현장 직무교육이 또 있어.”
“빡쎄네···. 방송국은 어땠어?”
“그냥 회사랑 똑같지 뭐.”
“오빠가 감독으로 연출한 드라마 빨랑 보고 싶다!”
과거에도 이런 말을 했었지.
래미는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연예인에 관심이 없었다.
오빠가 방송국에 입사했다고 하면 보통은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배우에 관해 물어볼 텐데,
래미는 그저 래원이 언제쯤 드라마를 찍게 되는지가 궁금했나 보다.
이때는 아무도 몰랐었다.
래원이 메인 연출로 입봉하는 데에 10년, 12년씩이나 걸릴 줄은.
물론 이번 생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오래 걸릴 거야.”
“그렇겠지. 드라마 감독이 어디 쉽게 되겠어. 도래원 할 수 있다! 아자 아자!”
까르륵 웃는 래미.
“래미야, 넌 꿈이 뭐야?”
“응?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지. 너도 이제 중3이잖아.
오빠는 피디가 꿈이어서 방송국에 들어갔으니까, 너도 이젠 니 꿈을 찾아서 준비해야지 않겠어? 뭐든 오빠가 도와줄게.”
“꿈? 난 오빠가 더 잘 됐으면 좋겠어.”
“나 말고. 너.”
“··· 나? 글쎄. 딱히 생각해 본적이 없네.”
“어른이 되면 되고 싶은 거 없어?”
래미가 쓴 웃음을 지었다.
“어른? 난 어른이 되면··· 엄마가 되고 싶어.”
“··· 엄마?”
“응. 우리 엄마 같은 엄마.”
“래미야, 그건···. 되고 싶은 게 아니야. 엄마가 보고 싶은 거지.”
그 말에 래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젓가락질이 멈췄다.
“······.”
“오늘 밤 꿈에서 엄마 아빠 만나면, 오빠 안부도 대신 전해줘. 드디어 피디 돼서 첫 출근도 잘 했다고.”
래미의 눈에 물기가 핑- 돈다.
래원은 이제는 안다.
6년 전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로. 래미는 매년 두 번씩, 래원과 래미의 생일마다 엄마와 아빠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꿈에서지만 말이다.
“··· 내가 오빠한테 말 한 적 있었나?”
“오빠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딨냐. 네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 엄마 아빠랑도 같이 고민해봐. 급하지 않으니까 천천히.”
“··· 응. 그럴게.”
꿈은 무의식적 욕망의 표출이라고 했다.
어린 래미에게 ‘엄마’는 꿈이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쳐서 꿈으로 나타나는 욕망.
그것을 래미는 ‘되고 싶은 욕망’과 착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속도위반으로 남보다 일찍 엄마가 됐던, 서른을 앞두고는 돌아온 싱글이 되어버린 과거의 래미.
‘이번에는 책임지고 래미의 진짜 꿈을 찾아주고 오빠로서 서포트 해줄 거다.’
예전의 래원은 방송국 일에만 쫓겨 래미에게 신경을 못 썼지만, 이번 삶은 다르다.
“밥 다 먹었으면 우리 모카 케이크 꺼내 먹을까?”
이 말에 래미가 빨개진 코 끝을 찡긋하며 금방 다시 빙긋 웃었다.
“응. 우유랑 같이! 드라마 보면서 먹자!”
* * *
잘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설거지는 자기가 하겠다며 에이프런을 두른 래미.
싱크대 앞에서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래원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귀엽고 기특했다.
피식, 웃으며 지켜보다가
빨래 바구니를 챙겨서 세탁기 앞으로 갔다.
래원이 빨래를 하나씩 세탁기에 넣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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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감 더미 사이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쪽지.
래원은 이를 주워들어 펼쳐본다.
[To. 도래미]라고 시작하는 쪽지.
“뭐야? 우리 래미 또 고백받았네.”
히죽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쪽지를 읽어 내려가던 래원의 얼굴이,
마지막에 적힌 이름 석 자를 확인한 순간 차갑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쪽지를 쥔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하나.
그때는 이 쪽지를 무심코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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