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0
제10화. 브로치
“간청이란 게 무엇입니까?”
“벌써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나 되었으나, 저택을 오고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외출을 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데르가는 저도 모르게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모두가 뒤에 따라올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안은 아랫입술을 살포시 깨물며 쾌재를 삼켰다.
“하여, 허락만 하신다면 이안 도련님께 영지 소개를 부탁드리고 싶군요. 백작님과 부인은 바쁘신 일이 많은 줄 알고 있으니, 차마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하.”
옆에서 가만히 듣던 맥과 드고르가 거들며 나섰다.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오찬도 함께 하시지요. 학식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 드고르?”
“저기…….”
부인이 끼어들까 고심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내 셋을 안내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드고르는 부인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일세. 게다가 이안 님은 얼마 전까지 바깥에서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저희가 모르는 재미있는 것들을 알고 계실 겁니다.”
드고르의 ‘저희’는 이방인인 그들을 포함하여 데르가 백작 가문 사람을 뜻했다. 서민의 골목을 너희가 아는가? 오직 이안 만이 가능한 일이니 끼어들 생각일랑 말라는 의도가 짙었다.
“크흠.”
데르가는 심히 당황한 모양새였다. 입안의 와인을 차마 넘기지도 못한 채 눈을 굴려댔다. 어떤 명분으로 거절할지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갓난쟁이도 아니고, 다큰 사내아이를 바깥에 못 보낼 이유가 무엇 있단 말인가? 게다가 학식 토론이라는 아주 건전한 모임 목적까지 덧붙여졌다.
“저택에 자주 찾아오는 것은 손님의 예가 아니지요.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희 거처로 모시겠습니다. 고용한 마부가 아주 친절해요.”
몰린이 종지부까지 찍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앞에서 끌어주려 하니, 뒤에서 밀어줄 수밖에.
“몰린 경, 거처가 어디십니까?”
“포트로가 3구역 공원 근처입니다.”
“아. 포트로가요?”
“잘 아시는가 보군요.”
“아무래도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까요.”
이도 저도 아닌, 해석하기 나름인 대답이었다. 실제 서자 이안이 그리했더라도, 황제 이안은 포트로가가 어떤 구역인지 감도 안 왔다. 다만 몰린이 공원이라 콕 짚어주었기 때문에 대충 둘러댈 수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더더욱 잘 되었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며 사색하는 것도 좋겠어요. 요즘 볕이 참 따뜻하지 않습니까? 보아하니 작은 호수에 놀잇배도 뜨는 것 같던데, 노인인지라 차마 타지 못했답니다. 이안 님이 도와주시면 용기 내 보겠습니다.”
몰린이 눈썹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이들도 뭔가 속셈이 있구나.’
이안은 백작의 표정을 살폈다. 데르가 역시 어색하게 쓴웃음을 내걸었으나, 표정은 딱딱했다. 안 그래도 거절한 명분이 없는데, 그럴듯한 이유는 자꾸만 생겨났으니.
“백작님?”
“이안. 네 의사가 중요하단다.”
결국, 백작은 최후의 카드를 썼다. 결정권을 이안에게 넘긴 것이다. 입은 자비롭게 웃고 있지만, 눈은 냉랭하기 그지없다.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잔뜩 담겨 있었다.
‘재밌네.’
변경백인 데르가와 중앙 관리 출신 몰린이 아이 하나를 두고서 기 싸움하는 장면이라. 황궁에서도 심심치 않던 것이나, 위가 아닌 아래에서 보니 색달랐다.
“글쎄요.”
이안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에 말을 얹었다. 당연히 바깥으로 나가는 게 이득이지만, 승부가 나기 전에 크게 흔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안내가 서투르면 오히려 방해만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직 어린 터라 경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뜻밖의 대답인지, 몰린 경 일행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데르가는 와인 잔으로 미소를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수도에서 오신 분들의 식견을 엿듣는 자리가 흔한 것은 아니니. 안내가 아니라 학식 겸한 오찬이라면…….”
이안이 데르가를 힐끔거렸다. 와인을 음미하듯 씹어대는 턱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러자 드고르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백작님. 혹여 저희가 부족하여 그러신 것이라면, 민망한 말을 꺼냈습니다.”
대화 주도권을 가져오는 솜씨가 일품이다. 놀랄 만큼 능숙한 화법이었다. 서로의 처신을 올려주며 긍정적인 대답을 이끄는.
저 물음에 데르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럴 리가요. 당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언제가 좋으시겠습니까?”
“그것은 이안에게 물으시지요. 이안?”
다시 이안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이번엔 몰린이 기품있게 나섰다.
“백작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이니, 백작님이 날을 잡아주심이 좋겠습니다. 브라츠의 모든 일은 백작님이 행하시는 거니까요.”
황제 이안마저 감탄할 만큼 훌륭한 화술. 중앙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아주 기민했다. 변방의 거만한 귀족 데르가는 절대 저들을 말로써 이길 수 없으리라.
‘속내가 뭘까.’
처음에는 그저 몰린 경의 사소한 견제인 줄 알았다. 자주 보고 대화할수록 서자의 흠을 잡아내기 수월할 테니까.
근데 셋이서 치고 빠지는 걸 보니,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부수적인 기회를 위한 것치고는 힘을 많이 들이고 있었다. 데르가는 알아챘을까?
‘알아챘군.’
수염을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도르륵 굴러가는 눈동자는 또 어떠하고? 어차피 거절할 명분이 없는 이상, 협조하여 그들의 의중을 알아보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 점심 어떠십니까?”
데르가는 몰린을 향해 물었지만, 시선은 이안에게 가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다 마쳤는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굳은 얼굴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오. 감사합니다. 백작님.”
“대신 저도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한 뒤, 첼을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이 데르가를 따라 아이에게 집중됐다. 스테이크를 한입에 넣으려던 첼이 멈칫거리며 굳었다.
“이안의 말대로 중앙에서 내려오신 분들이니 분명 훌륭한 선생님이 되시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하니, 첼 역시 함께하여 학식을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귀찮긴 하지만 곤란한 부탁은 아니었다.
맥과 드고르 그리고 몰린이 재빠르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그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이뤄진 소통이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학교를-”
“좋습니다. 첼 도련님 역시 총명하기 이를 데가 없으니. 오찬 토론이 아주 기대되는군요.”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첼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어른들끼리 결론을 내버렸다. 첼은 질색하듯 이안을 힐끔거렸다. 안 그래도 껄끄러운데, 종일 붙어있으라고? 그것도 백작저 밖에서?
“그럼 슬슬 디저트를 내올까요?”
“네. 아주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이안 역시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얻고자 한 걸 모두 얻은 식사 자리. 먹지 않았어도 배가 불렀을 것이다.
“오늘 식사, 영광이었습니다. 데르가 백작님.”
“다음 주에 또 뵙도록 하지요.”
“이안 님. 내일 점심에 맞춰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이후의 대화는 실로 영양가가 바싹 빠진 잡담이었다. 의례적으로 오고 가던 하하호호 웃음도 없었다. 모두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대화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몰린과 그 일행은 디저트를 반쯤 남기고서 일어섰다.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부인. 다음에 또 뵙지요.”
메리에게 작별의 손등 키스를 남긴 세 손님은 마차에 몸을 싣고 사라졌다. 식사 자리가 정리되고 이안도 저택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데르가가 두 아들을 불렀다.
“첼. 이안.”
“네. 아버지.”
“저들이 뒤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내게 전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고 가야 할 것이야.”
아주 당연한 단속이었다. 첼과 이안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데르가는 냉랭한 눈빛으로 이안을 주시했다.
“그리고 너는 집무실로 따라와라.”
메리와 첼이 의아하다는 듯 돌아봤지만 그뿐이다. 둘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로 사라졌고, 이안은 데르가의 뒷모습을 보며 집무실로 올라갔다.
끼익.
그제 봤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집무실 풍경. 서류가 더 늘어난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데르가는 앉으라는 말도 없이, 서랍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아댔다.
드르륵.
“음.”
그가 꺼낸 것은 작은 브로치였다. 범과 월계수 인장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분명 브라츠 가문의 문양이었다.
“내일 갈 때 이걸 차고 가거라.”
어미의 주머니를 던진 것과 달리, 데르가는 친히 앞으로 다가와 아이의 가슴팍에 브로치를 달아줬다. 이안은 단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녹음과 위치 추적이 가능한 마력석이구나.’
이안이 살던 시대에서는 빈번하게 쓰였지만, 백여 년 전 변경에서는 쉬이 구하기 어려웠을 터. 분명 가문 대대로 신변의 위협이 있을 때 은밀히 쓰던 물건이겠지.
데르가는 가슴팍을 가볍게 털어주며 경고했다.
“잃어버려서는 절대 아니 된다. 흠 하나 나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야. 네 보잘것없는 몸뚱이보다 수십 배는 귀한 것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두 아이의 전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물며 잔뼈가 굵은 중앙처의 세 남자다. 어벙한 첼 하나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분명히 첼을 따돌리고 이안에게 접근할 것이다.
“사람 또한 붙일 것이니 섣부르게 문제 일으킬 생각 하지 말거라. 다녀오면 바로 집무실로 올라와.”
그렇다고 이안이 온전하게 데르가의 편인가? 어미의 목숨줄을 잡고 흔들며, 저를 국경 밖으로 팔아치우려는 작자인데? 어쩔 수 없이 가문의 귀한 마력석 브로치를 꺼낼 수밖에.
“네. 아버지.”
하지만 이안은 제 가슴팍에 달린 마력석을 보며 혀를 찼다. 그가 필담은 하지 못할 거라 단언하는 태도였다. 하등 쓸모없는 걸 붙여두고서 안심하는 꼴이라. 웃기지도 않았다.
끼익.
이안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나갔고, 방으로 돌아와 브로치를 자세히 살폈다. 마력을 불어넣자, 금방 막히고 말았다. 담아내는 힘이 적다는 뜻이다.
지잉. 지이잉.
‘하급 중의 하급이로다.’
이 정도면 이안이 마음먹고 제어 가능했다.
‘위치 추적은 동질의 마력석으로 하는 거니 상관없고.’
아마 데르가는 집무실에서 나침반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자침이 아닌 브로치와 동질의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방향과 빛의 세기 따위로 목표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
‘녹음만 어찌하면 되겠어.’
이안이 다시금 집중하며 마력을 흘려보내자, 보석이 더욱 붉게 발하였다. 그의 금빛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차.”
그러다 문득, 까먹을 뻔했다. 그가 바깥으로 나가려 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생모를 만나기 위해서 아니었는가. 이안은 종을 흔들며 시종을 불렀다.
띠링!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간식을 들여라.”
방금 오찬을 마쳐놓고서 간식을?
시종은 고개를 숙이며 놀란 표정을 숨겼다. 하지만 이안은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깥을 쳐다봤다. 그는 간식보다, 그걸 갖고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