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01
제101화. 산 자와 죽은 자
메렐로프 거리 곳곳에 검은색 리본이 묶여 휘날렸다. 백작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노예에게 피살당했다고 하니, 슬픔보다는 뒤숭숭한 분위기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다.
“살다 살다 귀족이 노예한테 찔려 죽었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듣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
“듣자 하니, 백작님이 마님을 매질하려는 걸 노예가 말리다가 사달이 일어났다던데.”
“아니, 뭐부터 지적을 해야 하는 거야? 백작님이 마님한테 매질을? 애지중지 닳을까 봐 싸고도신 분 아닌가? 완전히 반대로 잡혀 사는 것 같았는데.”
“이래서 부부 일은 아무도 모른다니까.”
“근데 노예는? 죽었나?”
“처형식이 따로 없는 거로 봐서 즉결심판 당했겠지. 하여간, 미친놈. 어떻게 주인을 죽일 수가 있담.”
“이건 진짜 떠도는 소문인데, 마님이 그 노예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 봐.”
“아하하하! 좀 웃겼다. 하하!”
“진짜라고! 저택에 일하는 친구의 친구가 알려준 거란 말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노예가 부인을 감쌀 이유가 없지 않나.”
“그놈의 친구는 참나. 왜? 황제도 친구라 하지.”
삼삼오오, 모였다 하면 죽은 백작과 그 부인 그리고 노예인 클라크의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저택에서 공식적인 입장이 없으니,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 * *
리엔 부인은 어두운 침실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 하루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무력감과 박탈감 따위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마님. 식사를 올릴까요.”
“아니. 되었네.”
“어제저녁에도 거르셨습니다.”
“…집사. 참 이상하지?”
부인의 물음에 사먼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턱을 괸 채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상하다라. 사먼은 차마 부정하지 않았다. 삼기사의 죽음과 다이브의 구금으로 메렐로프를 완벽하게 통솔하고 있는 부인 아니던가.
하지만…….
“이상하기보다는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사먼의 대답에 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바로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질하던 남편이 죽었는데, 기분이 깔끔하지 않았다. 제 어미의 나무를 베고 도망쳤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다이브를 토올룬으로 보낼 상단은 정해졌나?”
“체알 상단이 이번에 가는 곳이 토올룬이라 합니다. 시기도 제일 알맞고요. 당장 다이브 님을 보내만 준다면 출발하겠노라, 전서구가 왔습니다.”
리엔 부인은 사이드테이블을 더듬거리며 궐련을 찾았다. 남편이 죽었던 날 이후로, 하루에 열 개는 거뜬하게 태우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비용은?”
“선수금 금화 100닢. 착수금 금화 100닢입니다.”
“생각보다 괜찮네. 천 단위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부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궐련 연기를 후, 붙어내며 중얼거렸다.
“집사. 체알 상단에게 일을 맡기겠노라 전해.”
“네. 마님.”
“대신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갈 거라고.”
“두 명이요?”
리엔의 침묵으로, 사먼은 나머지 한 명이 클라크인 것을 알아챘다. 이안이 말한 감시역으로 붙일 사람을 그로 정한 것이었다. 최선의 선택이라 믿고 싶다.
‘어차피 황궁에서 조사가 나오면 피해야 하니까, 그편이 좋겠어. 그리고 토올룬으로 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다이브를 정리하고 돌아와서…….’
돌아와서, 함께 살 수 있을까?
부인은 안개 낀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당장 한 치 앞은 보이지만, 저 먼 목적지까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기분.
“다이브의 하인은 저택에 남는다지?”
“네. 부인.”
혼자 남겨진 사용인 따위야 처리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부인은 침대에 누워서 한참이나 궐련 연기를 들이마셨다.
“이안 경이 중앙으로 떠나는 날짜는?”
“다음 주입니다. 그리고 오늘,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방문하실 겁니다.”
“그게 오늘이었나? 시간 참.”
“식사를 하시는 게 좋겠지요?”
오후에 해가 걸릴 때까지 누워있었지만, 부인도 나름 사안의 마무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안에게 약속했던 사례금 준비를 비롯해, 영지의 전반적인 경비 감축 등등.
“다이브 여전히 별관에서 기도 중이신가?”
“예. 뭐.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는 것 같더군요.”
일어나면 먹고, 기도하고, 다시 먹고, 기도.
자택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별관에 구금된 현실 자체를 고난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놈의 지하신인지 지상신인지에게 자신을 구해달라 밤낮으로 울부짖어 댔다.
“지랄도.”
그녀는 로브만 대충 걸친 채로 침실을 나섰다. 복도를 오가던 하인들이 헉, 하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궐련을 입에 문 채, 부인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끼익.
클라크는 기사에게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여실했다. 하지만 피딱지는 아물었고, 안색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멍하니 앉아만 있던 클라크가 부인을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창살을 두고 서로를 쳐다만 봤다.
“며칠 후.”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부인이었다.
“다이브와 함께 하완 왕국으로 가. 그리고 체알 상단과 함께 토올룬으로 향해.”
“토올룬…….”
“토올룬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 뜻은, 굉장히 먼 곳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는 거다. 부인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수많은 말을 가다듬으며 침묵했다.
“훗날 황궁에서 조사가 나올 것을 대비해, 다이브가 무사히 그곳에 도착했다는 증언이 필요해. 그러니까, 다이브를 그곳까지 잘 데려다주고…….”
리엔 부인은 창살을 잡고 있는 클라크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처음으로 닿는 두 사람이었다. 부인은 한숨을 삼키며 나지막이 명령했다.
“돌아와.”
클라크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부인은 돌아오라 하지만, 클라크는 알고 있다. 그가 돌아오면 그녀에게 어떤 부담이 될지. 클라크는 가볍게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 * *
“마차 바퀴 무너지지 않을까?”
베릭이 차곡차곡 쌓인 상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안이 서너 번이나 더 박살 내어 적당한 크기로 다듬은 루론 조각이 가득 담긴 상자였다.
“상자는 다섯 개밖에 안 되는데, 무게는 무슨 바윗덩이보다 더한 것 같아.”
“마차를 열 대 정도 끌 생각이니, 더 나누면 된다. 광산 정리는?”
이안은 코트를 챙겨 입으며 물었다. 평소보다 더 격식을 차려 정복을 꺼낸 참이었다. 오늘은 메렐로프로 넘어가 다이브의 뒷정리를 비롯해 계약을 갈무리하는 날이었으니까.
“관리자가 계속 담당하는 중. 흙이랑 섞인 가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묻던데.”
“따로 보관해 두어라 일러.”
가루로 떨어져 나간 마력석도 자체의 힘을 잃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다 챙겨두면 분명 나중에 쓸 일이 있을 터였다. 이안은 베릭을 힐끔거리며 지시했다.
“베릭, 너는 오늘 나 따라오지 말고 숲으로 가봐.”
“숲? 아아. 필리아?”
이안의 생모인 필리아를 만나보라는 뜻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이안이 이곳을 떠난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겠다만, 안 그럴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나. 필리아의 입장으로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래. 나 떠나는 걸 알려주고, 원한다면 함께 내려와라.”
“알겠어. 그런데 메렐로프는 혼자 가게?”
“로만드로 님과 부하들이 함께할 것이다. 그중 여기 남을 부하들은 리엔 부인과 자주 업무를 봐야 하니, 미리 친분을 쌓아두면 좋겠지.”
영지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지만, 이안은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곳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도, 그렇다고 확실히 챙기는 것도 무리였기 때문이다.
“하아.”
이안은 잔뜩 쌓인 서류를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없더라도 당분간 영지가 무리 없이 돌아가려면, 저걸 다 검토하고 진행시킨 채로 떠나야 했다. 베릭은 굴라 씨앗을 와드득 씹으며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똑똑.
“이안 님. 마차 준비됐습니다.”
“로만드로 님은?”
“아래에서 기다리셔요.”
“금방 내려가지.”
해나의 부름에 이안이 바쁘게 문을 나섰다. 해나 역시 마찬가지로 돌아서려고 하는데, 베릭과 눈이 딱 마주쳤다.
“베릭 님? 왜 그러세요?”
“너도 메렐로프로 가?”
“네. 오늘은 밤 늦게나 올 것 같습니다.”
해나는 얼마 전부터 메렐로프로 건너가 집사에게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글공부는 이쪽에서 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예절이나 저택 관리 요령 따위는 확실히 가르쳐 주는 사람이 필요했으니.
“무슨 일이세요?”
“아니. 별건 아니고. 이안 좀 피곤해 보이지 않냐?”
뜻밖의 말에 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요즘 들어 일이 많긴 했다. 며칠 연속으로 밤에 잠자는 걸 못 본 것 같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식사도 계속 남기시고.”
해나는 곰곰이 되새겨 보더만, 이내 충격 먹은 표정으로 제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베릭의 당황스러운 시선에도, 해나는 중얼거리기만 했다.
“헉! 주인의 건강과 편의를 살피는 게 집사의 근본이자 미덕이라 했거늘. 세상에. 제가 그걸 놓치고 있었나 봅니다.”
“…해나. 너 괜찮아?”
“바쁘면 얼마나 바쁘다고, 이안 님보다 바쁘겠어요?! 제가!?”
“야아. 너 왜 그래. 무섭게.”
“당장 오늘 저녁부터 이것저것 좋은 것 좀 챙겨드려야겠어요. 베릭 님. 감사합니다! 완벽한 집사가 되는 그날까지 열심히 해볼게요!”
해나는 눈에 불을 켜며 파이팅의 뜻으로 주먹을 들어 보였다. 얼떨떨하게 화답하는 베릭. 이내 해나가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 벌러덩 누웠다.
‘바쁘니까 확실히 미쳐들 가는구나.’
한편, 해나는 정문으로 내려가기 전. 바로 식당으로 달려가 주방장을 찾았다.
“맨더 아저씨! 저 메렐로프 갈 건데요, 내일부터 이안 님 올라가실 때까지 무조건, 무조건 영양가가 높은 것들로 차려주세요.”
“해나? 갑자기? 무슨 일 있냐?”
“이안 님이 체력이 떨어지신 것 같아요. 피곤해 보이시고, 아무튼 돼지, 오리, 소! 아시죠? 다녀오겠습니다!”
우당탕탕!
태풍이 휩쓸고 간 것 같은 주방. 안쪽에서 설거지하던 하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해나가 뭐래요?”
“마을에서 고기 좀 떼와야겠다. 이안 님 건강 때문에.”
“네? 이안 님이요? 어디 아프시대요?”
“이안 님이 아프다고? 어디가?”
소문이 불어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안이 피곤해 보인다’가 어느새 ‘이안이 아프다’, 혹은 ‘시름시름 앓는다’로 변질해 버린 것이다. 저택 밖으로 나간 하인이 정육점 주인에게 한 말이 쐐기를 박아버렸다.
“이안 님이 요즘 무리하셔서 그만…….”
“뭐어어!?”
다그닥다그닥!
그 시각, 메렐로프로 향하던 마차 안. 이안은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베릭, 내 욕하고 있나?’
괜히 귀만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리자, 맞은편의 로만드로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나?”
“아닙니다. 잠시 불편해서.”
“참. 그러고 보니 다른 건 대충 서신으로 정하였는데, 백작의 장례식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더군.”
전체적인 일정 조율은 쉬이 맞춰졌지만, 백작의 장례식만큼은 미정이었다. 이안은 창밖을 쳐다보며 턱을 괴었다. 저 멀리, 메렐로프가 보였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쏟아낼 것처럼 우중충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리할 생각이겠지요.”
“응? 아무도 모르게?”
“부인이 결혼을 올렸던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요. 그러니 겨울을 기다린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오지 않는, 오지 못하는 장례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