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02
제102화. 떠난 자와 돌아온 자
“이안 경.”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리엔 부인이 이안을 반겨줬다. 평소보다 더 화사하고 풍성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채,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인은 당당하게 손등을 내밀었고, 이안은 가벼이 입을 맞췄다.
“오랜만입니다. 부인. 잘 지내셨나요?”
“그럼요. 덕분에요. 로만드로 님도 잘 계셨죠?”
“물론입니다.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오늘 만찬 기대하세요. 메렐로프에 축복인 날인지라, 열심히 준비했답니다.”
리엔 부인은 앞장서며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그날,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와 같은 곳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광이 나는 복도였다. 이안은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우선, 일부터 빠르게 처리하도록 하지요.”
부인은 가죽 서류 받침을 내놓으며 웃었다.
“말씀하셨던 금화 5,000닢의 증서입니다. 병사 수 역시 현재보다 절반 이하로 줄였으며, 이를 계속 유지할 서약서입니다.”
“예산을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바로 뒷장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이안은 메렐로프의 연간 예산을 천천히 살폈다. 아마 로만드로의 보좌관과 실무진이 열심히 짜준 것 같은데, 확실히 내년 사병 유지에 들어가는 예산이 깔끔하게 반토막 나 있었다.
“보좌관이 무어라 안 하던가요?”
“어머. 영지 팔아먹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하시는군요?”
“걱정은 아니고, 궁금하긴 하네요.”
이안과 부인의 거리낄 것 없는 대화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움찔거렸다. 로만드로의 부하들은 당황해서 서로 시선만 주고받았다. 이거, 괜히 남겠다고 한 것 같단 말이지.
“예산 빼서 이안 경한테 빼돌리는 것도 아니고, 영지민들한테 돌아갈 거라 괜찮아요. 그 돈으로 굴라 산 거 충당하려 하거든요.”
“아하. 그러시군요.”
“사례금 금화 5,000닢, 받기 불편하시면 뭐. 제 사비라 생각하세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요. 정당한 대가로 주고받는 거니까요.”
이안의 말에 로만드로가 안주머니에서 황궁 보고서용 서신을 꺼냈다. 그녀는 우아하게 집어 들더니, 날카로운 눈매로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내렸다.
사락,
“거짓말도,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될 만한 것도 없네요. 마음에 들어요. 이대로 보고서 올려주세요. 황궁에서 조사관이 따로 내려올 일도 없다, 그렇죠?”
백작이 어쩌다 죽었는지와 후계 절차에 대해서는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으나, 딱히 쓰지 않아도 될 것은 깔끔하게 도려냈다.
예컨대, 노예와 부인의 관계, 노예의 처벌, 후계자인 다이브가 메렐로프를 떠난 시기 따위 말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럼 인장을 찍겠습니다.”
“네. 여기, 준비 좀 해주겠나?”
로만드로는 보란 듯이 싸인을 적어 넣고, 실링왁스를 부었다. 그의 공식보고서임을 뜻하는 인장이 찍혔다.
“좋은 이웃을 얻은 것 같아 참으로 기쁩니다. 메렐로프 영지민들도 브라츠, 아차.”
“새로운 이름을 얻기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실례했어요. 자중하죠. 아무튼, 음. 메렐로프 영지민들도 그쪽에서 굴라를 비롯해 많은 식품을 얻을 수 있어 감사하고 있답니다.”
“다행입니다. 겨울은 추우니, 온기를 모아야지요.”
“자, 마지막입니다.”
이안과 리엔 부인은 모든 거래 사항에 통용되는 우선협상권을 체결하는 것으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상세 부분은 미리 조율해 두었기에, 굉장히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이리 쉬운 것을, 남편은 대체 하루 종일 양피지 붙잡고 무엇 했답니까?”
부인은 잉크 묻은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때는 그저 꼼꼼하다 여겼던 게, 지금 보니까 여간 깐깐하고 비효율적인 성격이었던 것이다.
“다이브 님은?”
“별관에 계셔요. 이제 슬슬 출발하라 해야겠습니다.”
리엔 부인의 미소에는 한 치의 티끌도 없었다. 다이브를 메렐로프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시간이니, 그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안 역시 마찬가지로 시계를 확인했다.
“상단은 정하셨다고요?”
“체알 상단입니다. 확실히 뭔가 큰일은 항상 잘 맞아떨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가격도 가격이지만, 상단 자체의 믿음이나 실력이 우수하여 선정했지요.”
“메렐로프에서 보낼 책임자는?”
이안의 물음에 리엔 부인의 눈매가 더더욱 휘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빛이다. 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분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 슬퍼 보이는 것이…….
“사병 다섯 명과 보조 보좌관 둘, 그리고 클라크를 보낼 예정입니다. 클라크를 제외한 자들은 하완 왕국에서 다이브 님이 떠나는 걸 보고 다시 돌아올 거예요.”
역시 그렇군.
클라크를 보호하면서 알뜰히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안은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선정하셨으니, 어련히 잘 하겠습니까? 다만,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다시 한번 확인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게, 솔직히 저희도 위험을 감수하는 부분이 있는 터라.”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들 실력이 뛰어나서요.”
특히 클라크는 맹목적인 믿음과 사랑으로 묶여있는 자 아니던가. 다이브가 토올룬에 도착했다는 흔적을 만들자마자 그의 숨을 앗아들으려 할 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다이브 님을 배웅하러 나가 볼까요?”
“집사. 마차는 준비되었는가?”
“네. 바로 내려가셔도 됩니다.”
집사 사먼의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정문으로 나갔다. 겨울용 로브를 뒤집어쓴 다이브가 이안과 부인을 보자마자 흥분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사악한 것들 같으니!”
로브 아래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외부의 시선을 인식해 최대한 점잖은 방법으로 그를 데려갈 요령이었으니.
“다이브 님. 먼 길 떠나기에 앞서, 축복을 빕니다.”
“악마 같은 년!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그럼요. 저는 잘 먹고 잘 지낼 터이니, 다이브 님도 부디 그러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볼일 없으면 참 좋겠네요.”
리엔 부인은 우아하게 웃으며 전혀 우아하지 않은 말들을 쏟아냈다. 미친년, 또라이 같은 년, 머리에 나사가 풀린 년 등등. 다이브는 사정없이 노골적인 욕을 쏟아내다, 이안을 노려봤다.
“이안 네놈도 그렇다! 감히 메렐로프 가문을 건드리고 살아남을 성싶은가! 지하신의 저주가 곧장 떨어질 터다!”
이안은 개무시하며 출발 준비 중인 사병과 보좌관을 둘러보았다. 긴 여정에 빠진 것은 없는지, 그리고 산맥을 넘을 때 도적 따위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 따위를 건네주기도 했다.
찰그럭.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족쇄를 풀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클라크였다. 그는 피멍이 든 손목을 매만지며 커다란 배낭용 가방을 짊어졌다.
“준비되었는가?”
“…네.”
부인은 그와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물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생판 남처럼 느껴질 정도의 냉랭함이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게.”
아마 저 가방에는 리엔 부인이 챙겨준, 두둑한 여비가 들어있을 것이다. 다들 마차에 올라탔고, 클라크가 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클라크는 부인을 향해 그리 말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부인은 대답 없이 등을 돌렸으며 이내 악바리를 질러대는 다이브를 향해 손만 흔들었다.
“잘 가세요. 지옥에서나 봅시다.”
“이럇! 가자!”
히이이잉!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힘차게 메렐로프 저택을 빠져나갔다. 부인은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자. 그럼.”
그리고 이안과 로만드로, 특히 그의 부하들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식사라도 하러 가실까요? 로만드로 부하님들은 앞으로 메렐로프와 자주 보게 되지 않습니까?”
“네. 잘 부탁드립니다. 부인.”
“저야말로. 많이 도와주세요.”
이안은 영지 전역에 휘날리는 검은 리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혹여 자신의 이전 몸이 죽었더라면, 바리엘 전역에 저런 것이 걸렸겠구나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손님들을 안으로 모시던 부인이 이안을 불렀다.
“이안 경? 안 들어가세요? 추운데.”
“부인. 백작의 장례식은 어찌 되었습니까?”
부인은 반짝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무얼 묻냐는 듯이.
* * *
히이이잉!
메렐로프에서 영지로 돌아오는 길. 이안은 만찬에서 곁들인 포도주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안, 자네 괜찮나?”
“…로만드로 님 얼굴이 더 벌건데요.”
“아하핫. 실은 나도 자네 얼굴이 두 개로 보인다네.”
“그 말도 벌써 세 번째입니다.”
“그래? 취했나 보군. 근데…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까? 자네 얼굴이 두 개로 보여.”
“…….”
기분 좋게 취한 로만드로가 가볍게 주사를 부려댔다. 부인은 몸에 술통이라도 들어있는지, 같이 마셨으면서도 아주 멀쩡하니 그들을 배웅했다.
끼이이익!
“이안 님. 도착했습니다.”
“아, 수고했네. 쉬게나.”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이안은 비틀거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살짝 비틀거리기가 무섭게 뒤에서 터지는 비명.
“세상에, 이안 님!”
“어?”
이안이 뒤를 돌아보자, 가죽 포대 자루를 옮기던 인부들이 걱정스레 다가왔다.
“어이구, 아프시다는 말은 들었는데 걷지도 못 하시네. 괜찮으십니까?”
“열이 있으신가 보네. 얼굴이 시뻘게요.”
“날 추운데 서둘러 들어가십시오.”
아프다고? 누가?
이안이 눈만 꿈뻑거리는 동안, 인부들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 사라졌다. 늦은 밤 퇴근하던 중이었나 보다. 이안은 의아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원.”
그나저나, 문 앞에 웬 잡다한 것들이 잔뜩 쌓여있는지 모르겠다. 이안이 안으로 들어서자, 하인들이 다가와 코트를 받아주었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근데 저것들은 무엇이냐?”
“이안 님 몸 허하다는 소문 듣고서 영지민들이 보낸 것입니다. 몸보신할 거리가 오후 내내 계속 쌓였습니다.”
그때와 같다. 이안이 괴한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지민들이 찾아와 위로를 건네주지 않았던가. 지금은 어찌 된 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마음이 여전한 듯하여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겨울이라 뭐가 없을 줄 알았는데, 다들 어찌어찌 잘 모아두고 있었나 보다.”
말린 꽃, 귀여운 물감 그림을 입힌 달걀, 말린 고기,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잼 단지 등, 소소하지만 온기가 확실히 느껴지는 선물들이었다. 이안은 웃으며 하인에게 부탁했다.
“잘 정리해서 침실로 옮겨라.”
“네. 이안 님. 그리고 손님이 와 계시는데요.”
“손님? 누구?”
올 사람이 없을 터인데? 이안이 반문함과 동시에, 난간 위에서 베릭이 소리쳤다.
“이안, 늦었네?”
“베릭. 밥은?”
“먹었지. 필리아 왔어.”
“어?”
그의 옆으로 쏘옥 얼굴을 내미는 한 여인. 이안 자신과 쏙 닮은 금발과 녹안이 두드려졌다. 산중 생활에 익숙해진 것인지, 이전과 달리 보다 튼튼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안.”
그녀는 환히 웃다가도,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에 감정이 북받치는 것 같았다.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려 이안의 볼에 떨어졌다.
“이안. 누구인가?”
뒤따라 들어온 로만드로가 차가운 손을 비비며 의아하게 물었다. 처음 브라츠로 들어왔을 때, 필리아의 존재를 모두에게 숨겼었다. 천려족과의 동맹에 어떤 잡음도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황궁에서 온 로만드로는 이안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고, 더 이상 그녀의 존재 자체가 걱정되는 시기는 지났다.
“로만드로 님. 인사하십시오.”
이안은 묵묵히, 산에서 기다리며 굴라를 모아준 여인에게 감사를 표현하기로 했다.
“제 어머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