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04
제104화. 작은 맹수
시간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흘러갔다.
새벽달이 떠오르는 겨울의 아침, 이안은 일렬로 서 있는 마차를 살피며 입김을 후 불었다. 눈이 와서 그런지 날씨가 심하게 추웠다.
“아이고, 하필이면 추운 날 올라가시네.”
“중앙으로 갈수록 따뜻해진다 하니, 그게 낫지.”
“바퀴 구른다! 거기! 앞에 돌멩이 끼워!”
“안녕하세요, 이안 님. 좋은 아침입니다.”
“이안! 이안! 나 이것도 갖고 가고 싶은데!”
“베릭 님, 번거롭게 뭐 하십니까? 두세요!”
“에에에. 싫은데!”
영지를 떠나는 사람은 채 열 명이 안 되건만, 그걸 준비하는 자들은 수십 명에 가까웠다. 저택 식구들은 물론이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겠노라 찾아온 영지민들이 복작복작했다.
“이안 님. 빠진 건 없는지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마지막입니다. 하고, 마부가 바로 출발한다 했습니다.”
해나의 말에 이안이 짐만 싣는 마차를 확인했다. 루론 마법석 덩어리들을 비롯해 리엔이 주었던 드리퍼 기계, 연금술사의 목걸이와 반지가 담긴 보석함, 신분증서 등등. 맨몸으로 온 것치고는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
“나는 문제없다. 베릭은?”
“나도 문제없음!”
베릭은 검 한 자루를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변변찮은 옷가지를 제외하고서 가져갈 게 딸랑 그것 하나뿐이라니. 이안은 대단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나머지는 다 로만드로 님의 짐이군요.”
“에잇, 어쩌겠나? 같이 올라가는 부하들만 다섯인데! 아하하하!”
해나의 말에 로만드로가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간다 하니 여간 행복해 보이는 게 아니다. 이안은 마차를 살펴본 다음, 네르사른을 찾았다.
“네르사른 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고,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이안이 작위를 받고, 황궁에서 보다 활약하게 되면 그와 동맹 맺은 천려의 입지도 자연스레 높아진다. 여러 가지 득과 실을 따진 격려였으나, 이안은 어쩐지 진심어린 다정함을 느꼈다.
“데모샤.”
“데모샤.”
신의 축복 아래,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이안은 천천히 저택 식구들에게도 인사를 남겼다.
“다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고생은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신답니까?”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여기는 걱정하지 마시고요.”
“황궁이라! 꼭꼭 눈에 담으시고 얘기 들려주셔요!”
“베릭 님 없으니까 당분간 식비는 줄겠네! 하하하!”
사용인들이 이안을 둘러싸며 아쉬운 말을 건넸다. 이안은 그들의 어깨를 한 명씩 토닥이며 당부했다.
“다들 나 대신 저택을 잘 돌보아다오. 집사인 해나를 중심으로 겨울을 잘 이겨내길 바란다.”
집사, 해나.
사용인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고, 해나는 얼굴을 붉히며 활짝 웃었다. 거참, 민망하면서도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안 님. 저택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맡겨주셨으니, 온몸을 불사르겠어요!”
“무리할 건 없다. 그래도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아직 집사로서 완벽하다 할 순 없었지만, 성장할 여력이 충분했다. 게다가 네르사른과 로만드로의 부하들이 도와줄 것이니, 걱정할 건 없다.
“자,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이안은 마부들에게 손짓하며 출발 준비를 알렸다. 쭈뼛쭈뼛 서 있던 필리아가 조심히 다가와 아들을 안아주었다. 이안은 그녀를 껴안으며 다정히 속삭였다.
“어머니. 잘 계십시오. 저택이든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자유롭게. 그리 사세요.”
필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 더더욱 환하게 웃는 모습만 남겨주고 싶었다.
“출발한다!”
“출바알!”
“아이고, 함 보름 동안 달려봅시다!”
달칵!
이안은 마차에 올라타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맞은편의 베릭, 로만드로 역시 마찬가지. 그들을 태운 마차가 선두로 저택을 나섰다.
히이잉!
“안녕!”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안 님!”
저택 식구들의 외침에 베릭이 입을 가벼이 삐죽였다.
“다들 이안만 부르네. 나는?”
“너는 뭐. 가는가보다, 싶은 모양이지.”
“흥. 막상 없으면 서운할걸?”
이안이 피식 웃으며 창문을 닫으려다 말았다. 이른 아침이었으나, 그의 출발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이 모두 길거리에 나와있었던 탓이다.
“이안 님,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요! 이안 자작님!”
“부디 영지의 새 이름을 받아오세요!”
“와아아아!”
아이들이 마차를 따라오려는 듯 뛰었고, 저 멀리 화사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실로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이안은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주며, 마지막 작별을 남겼다.
* * *
다그락다그락!
비포장된 길을 내달리는 마차. 베릭은 지루한 표정으로 창밖만 계속 노려봤다. 밤이고 낮이고 보이는 것이라곤 눈을 덮고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뿐이다.
“지루해. 너무 지루해서 정신이 빠질 것 같아.”
“지루하면 마부랑 자리라도 바꿔보거라. 지루할 틈도 없을 게다. 정신도 번쩍 들고 좋겠지.”
로만드로의 말에 이안이 슬쩍 웃었다.
벌써 영지를 떠나온 지 나흘째. 서너 시간마다 멈춰서 말과 마부가 쉴 때를 제외하고는, 종일 흔들리는 마차에 갇혀있어야 하니, 여간 좀 쑤시는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활발한 베릭의 성정상, 이만하면 잘 참고 있구나 싶을 정도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요? 차라리 풍경이라도 볼 맛이 나면 참겠는데, 가도 가도 숲밖에 없어. 온통 흰색에 흰색!”
“이제 나흘째니 열흘 정도만 더 가면 될 것이다. 문제만 없다면 말이지.”
“미쳤어. 진짜.”
눈이 쌓여 마차의 속력이 더디긴 했지만, 마부의 노련함 덕분에 멈춤 없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세 사람이 탄 마차를 선두로 하여 뒤쪽에는 짐을 실은 것들이 줄지어 내달렸다.
“그래도 오늘은 마을에서 묵을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물로 목욕도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쉴 터이니 조금만 참아 보아라.”
“진짜? 큰 도시인가 봐?”
“네가 기대하는 정도는 아닐 것이고.”
“내가 뭘 기대하는데?”
“음, 복층을 넘어가는 주점이나, 도박장, 1박에 은화 수 닢에 달하는 고급 숙박 시설, 대형 투기장 따위는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기대했던 것인지, 베릭이 절망스럽게 입을 떡 벌렸다. 로만드로는 품에서 작은 지도를 꺼내들었다.
“곧 있으면 카렌나에 당도를…….”
“카렌나? 처음 들어보는데?”
“딱히 유명할 것 없는 소도시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문제는 카렌나를 중심으로 한 서쪽 평야 지대라네.”
로만드로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가, 그가 든 지도의 표지에 ‘하이만 뱅크’ 인장이 찍힌 것을 보고 이해했다.
“카렌나, 론긴, 자일쿠프. 이 세 도시 말씀이십니까?”
“그래. 메렐로프 백작이랑 거래하고 금화를 예치하러 갔을 때, 은행장이 말해주지 않았나? 그 세 지역에 도적들이 출몰하고 있다고.”
도적이라는 말에 베릭의 눈이 금세 생기를 찾았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동공에는 기대감이 듬뿍 묻어났다.
“도적이라니! 대박. 나 처음 봐.”
“아직 안 봤는데?”
“이제 곧 볼 거잖아. 그 세 지역, 다 인근에 있으니까 한꺼번에 언급한 거 아니야?”
베릭은 로만드로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럴 때 보면 진짜 귀신 저리 가라 수준의 눈칫밥이다. 베릭의 말대로 세 지역은 말로 하루 안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지금 이쪽으로 들어가고 있으니까, 카렌나에 들어가려면 삼각지를 가로질러 가는 거잖아. 이만하면 도적 만날 만하지. 암암.”
이안은 대꾸하고 싶었으나, 이번만큼은 반박할 거리가 없다. 도적 위험 출몰 지역인 것도 맞았고, 오늘 밤이 특히나 위험한 것도 맞았다.
“호위에 비해 짐이 많다.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넘어가는 것이 좋아.”
“으흥. 그래. 나도 그게 좋아.”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표정 관리라도 하든지.”
사실 이안은 도적으로 인한 물리적 손해보다 시간적 지체가 더 걱정되었다. 여유 있게 출발했다고 한들,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말이다.
신년회 자체에 늦는 것도 문제지만, 축제가 시작되면 황궁에는 외부 손님이 잔뜩 몰려들게 된다. 마법부 별궁을 여유롭게 탐방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달깍.
쉬이이익!
베릭이 작은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찬바람이 들이닥쳐 로만드로의 지도가 거칠게 펄럭였다.
“베릭! 말 좀 하고 열어라!”
“마부 아저씨! 카렌나라는 곳에는 언제 도착해?”
“해가 지기 전에는 갈 것 같습니다!”
“오예! 더 빨리 달려줘!”
“노력해 보지요. 말들이 힘들어하지만 않는다면.”
마부가 웃으며 말고삐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지자, 베릭은 만족한다는 듯 엄지를 치켜들고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타닥타닥!
말발굽 소리가 얼마나 규칙적으로 이어졌는지 모른다. 베릭은 창문에 볼을 딱 대고서 곯아떨어졌고, 로만드로는 작은 종이에 선물용 글귀를 끄적여댔다. 이안이 둘을 구경하는 재미로 시간을 죽일 때였다.
히이잉!
“이안 님!”
“음? 무슨 일이지?”
마부의 부름에 이안이 창문을 열었다.
“저희가 아침에 출발했던 숲에서 카렌나 사이에 마을이 하나 더 있습니까?”
“마을이? 잠시만 기다리게. 로만드로 님. 지도 좀 줘보십시오.”
“아아. 그래. 큰 걸 꺼내지.”
“…쓰읍! 왜? 벌써 도착했어?”
베릭이 침을 스윽 닦으며 일어났다. 내달리던 말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으니, 그는 거리낄 것 없이 루프 창문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다 왔네!”
베릭은 마을을 발견하고 신난다는 듯 마차 천장을 퉁퉁 쳐댔다. 하지만 지도를 살피던 이안과 로만드로는 의아한 시선을 나눌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하군. 인근에는 마을이 없는데.”
“언제 만들어진 지도입니까?”
“작년에 만들어진 걸세. 내려올 때도 이걸 보고 왔으니 정확도에는 문제가 없어.”
이리 살피나 저리 살피나, 지도상 위치는 숲 한가운데였다. 베릭은 마부에게 서둘러 가보자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카렌나나 여기나 뜨거운 목욕만 할 수 있으면 상관없지 않나? 일단 가보자고!”
“안 된다, 베릭. 멋대로 굴지 마라.”
“아, 왜에!”
베릭이 루프에서 내려와 이안을 쳐다봤다. 허락을 구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단호했고, 로만드로 역시 별로 마땅찮아 했다.
“황궁에서 제작한 지도에 없는 마을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모르겠나? 분명 제국에 신고되지 않은 공동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인근에는 도적이 출몰한다는 정보까지 있지.”
“확률이 높다. 높아.”
도적떼의 소굴일 수 있다. 괜히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보다 이쯤하여 돌아가는 게 훨씬 나은 판단이었다. 이안은 베릭을 끌어 앉힌 다음, 마부에게 명령했다.
“당장 말머리를 돌리고 되돌아간다. 뒤쪽부터 하나씩 빼라고 하게.”
“아, 네네. 알겠습니다.”
“이봐! 뒤에! 맨 뒤에부터 돌아 나가!”
“30분 전에 갈림길 지나왔지? 거기까지 되돌아간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빠졌어야 했나 봐.”
“돌려, 돌려! 천천히!”
이안과 로만드로, 베릭은 마차에서 내려 행렬이 빠져나가는 걸 유도하며 도왔다. 달려온 길이 좁은 산길인지라, 하나하나 돌리는 게 여간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쓰흡. 아, 추워.”
베릭은 코를 훌쩍이는 것인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연신 마을 쪽을 힐끔거리며 발만 동동 굴러댔다.
“추워추워추워!”
“베릭. 시끄러우니까 좀 다물어라.”
“이안 님. 이거 말이랑 연결을 해제하고 마차 몸통을 따로 돌려야겠는데요? 공간이 안 납니다.”
마차 열 대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려 하니 정신이 없다.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와중이었다. 베릭은 팔짱을 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슬쩍 비탈길을따라 내려갔다. 기왕 멈춰선 김에 볼일이라도 볼 생각으로.
사락.
그때, 뒤에서 들리는 낙엽밟는 소리. 토끼라도 있나 싶어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베릭은 눈으로 덮혀 온통 흰색 천지인 사방을 둘러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앙!
수풀에서 뿅, 하고 나타난 흰색 개 한 마리. 베릭이 덤덤하게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도 베릭을 빤히 올려다봤다. 까만 눈동자와 코, 그리고 선홍빛 혓바닥.
누가 봐도 개다. 그것도 잡종.
“뭐여?”
앙!
“웬……,”
혹시 저쪽 마을에서 기르는 놈인가? 베릭은 잠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으나, 이내 무시하기로 하고 몸을 돌렸다. 지금은 볼일 보는 게 더 급하다.
-이보쇼.
“……??”
베릭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어이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살아있는 것이라곤 이 개놈 새끼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