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
제11화. 술과 물
해나는 쟁반에 말린 과일 따위를 들고 왔다. 그리고 저를 부른 의도가 따로 있다는 걸 직감했는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이안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창밖의 화사한 날씨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실까요?”
“해나. 동생들은 좀 어떠하니?”
식사를 식당에서 한 이후로, 남는 것이 훨씬 풍족해졌다. 해나뿐만 아니라 다른 주방 식솔들까지 주머니를 두둑이 챙길 정도였으니.
“덕분에 아주 잘 지낸답니다. 하루가 멀다고 뛰어다니느라 정신없지만요.”
아이는 마음을 다해 웃었다. 배가 부르자 웃음이 가시질 않고, 가족 간의 정이 깊어지는 나날이었다. 모두 이안 덕분이니라. 아랫것들은 이안이 저들을 위해 음식을 덜어 먹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하다면 다행이다.”
“시키실 일이 있으시지요?”
해나가 이안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조그만 숨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안은 여전히 뒷모습만 보인 채 말을 이었다.
“해나. 어머니에게 전할 말이 있어.”
이안은 계속해서 브로치로 마력을 불어 넣고 있었다. 지금 하는 밀담이 데르가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대외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두 아이는 문맹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
“네. 말씀하시어요.”
드디어 보답할 일이 생기는구나!
해나는 어서 지시하라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반짝- 하고 창문이 빛났지만, 아이는 그저 햇빛일 거라 치부했다.
“내일 점심 포트로가 3구역 공원 호수 쪽으로 와 달라 전해줘. 변장을 꼭 하고서.”
“그것만 전하면 될까요?”
“…주머니를 잘 받았다는 말도 함께.”
아마 처음 있는 접선일 것이다. 이안의 어미가 데르가의 꾀임인 줄 알고 안 나오면 곤란했다. 해나는 짤막한 정보를 머릿속에 꼭꼭 새겼다.
“네. 꼭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미안하다. 너를 그런 곳에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급하여 방도가 없어.”
당장 내일이었다. 다른 방법을 통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해나는 맡겨 달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서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간식도 가져가렴. 보수다.”
“감사합니다! 이안 님!”
해나가 주머니에 말린 과일을 넣을 동안에도, 이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창밖에 무엇이 있기에 저러실까? 아이는 바깥 전경을 떠올리다가 이내 알겠다는 듯 웃었다. 여기서 보이는 건 본채와 사병 숙소뿐.
“내일 첼 도련님과 나가실 때요. 데오 아저씨가 함께한다고 하셨습니다.”
“데오?”
이안의 고개가 살짝 돌았으나, 눈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해나는 두툼해진 주머니를 만족스럽게 매만지며 대답했다.
“네. 하필이면 오늘 야간 훈련이 예정되어 있지 뭡니까? 쉬는 분이 데오 아저씨밖에 없다 합니다. 아직 왼팔이 불편하긴 하나, 두 분 모시는 데는 문제 없다 하시더군요.”
“팔이 어쩌다?”
“아. 이안 님은 모르십니까? 보름 전에 술 진탕 취해서는 왼팔이 부러지셨습니다. 아저씨는 지나가던 무뢰한과 싸웠다고 하지만, 사실 그게 주점의 벽이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라요.”
해나는 킬킬대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안 역시 살포시 미소를 지었으나, 데오라는 작자가 만만치 않은 자임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추태를 부리고도 잘리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팔이 불편한 상태임에도 두 아들의 호위를 맡겼다?
데르가의 신임을 업은 자이면서도 굉장한 실력자라는 뜻이다. 이안은 창문을 가볍게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두마.”
“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또 불러주세요.”
달깍.
아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제야 마력을 거두며 뒤를 돌아보는 이안. 금빛 눈동자가 압생트로 돌아오며, 브로치의 빛이 꺼졌다.
‘음. 데오라.’
첼은 있으나 마나 한 아이라고 하지만, 잘하면 데오라는 작자가 변수를 일으킬 수도 있겠구나. 이안은 소파에 앉아 어미가 준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 * *
일주일 하고도 하루.
이안이 브라츠 저택을 나설 때까지 걸린 시일이었다. 몰린 경이 보내준 마차는 정확히 정오에 도착하여 두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첼 도련님. 이안 님. 이쪽으로.”
그리고 데오라는 사내. 얼굴에 빽빽이 난 상처가 그의 성정을 짐작게 했다. 풍채는 또 어찌나 대단한지, 마차에 들어갈 수나 있을지 걱정될 정도다.
그는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미묘하게 둘의 호칭을 달리 불렀다.
“함께 타는가?”
“그렇습니다만?”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것 같은데…….
이안은 못마땅한 시선을 한 번 흘긴 다음 차에 올라탔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말이 힘겹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첼과 이안은 서로 반대쪽 창문만 쳐다보며 침묵했다. 차라리 학교 가는 것이 좋겠다며, 아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으나 이안은 감탄하는 중이었다.
‘오호.’
변경, 그것도 사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풍경이 색달랐다. 수도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냈고, 참전했던 전쟁은 정반대 쪽 지역이었다. 여타 귀족들처럼 휴양을 떠난 적도 없다.
바리엘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낯선 느낌을 넘어 이국땅을 달리는 것 같았다. 한 세기가 주는 간극도 있겠지만.
“혹여 포트로가에서 갈만한 곳을 아시오?”
그렇게 한참 구경하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이안의 질문에 첼이 돌아봤고, 사내는 눈만 끔뻑거렸다.
“행정관님이 지역 소개를 부탁했으니 체면치레라도 해야 할 것인데, 아시다시피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소.”
먹고 살기 급급했던 빈민가의 아이였으니까.
“안 그렇습니까? 형님? 아무리 그래도 저 살던 곳의 골목 소개는 영 아닐 것 같아서요.”
“…그, 그렇지.”
손님들이 궁금해한다고는 하나, 진짜 그곳을 보여줄 수는 없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창가다. 백작 가문의 영식들이 손님들 데리고 어찌 그쪽으로 간단 말인가? 미친 일이지.
데오는 코를 긁적거리며 난감하게 답했다.
“글쎄요. 술집이야 많지만 중앙처 나으리들이 갈만한 곳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는 곳은 늘 시끄러운 곳인지라.”
“…자네는 내가 미성년이라는 걸 까먹었는가?”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이안의 면박에도 데오는 그저 뻔뻔하게 웃었는데, 시커먼 이에서 악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영 꺼림칙한 작자군.’
그저 위생 때문이 아니다. 끊임없이 단도 끝을 만지작거리는 습관도 그렇고, 음흉한 눈빛이 영 사람 같지가 않았다.
“되었네. 어쩔 수 없이 공원이나 돌아야겠어.”
이것이 바로 이안의 목적이었다. 바로 밑밥을 깔아두는 것. 혹여나 데오가 백작에게 보고할 때를 염두에 두었다. 공원에서 어미를 보기로 했으니, 모든 게 자연스러우면서도 확실해야 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내리시지요.”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마부가 문을 열어줬다.
포트로가는 확실히 상층민의 거주지가 분명했다. 잘 닦아놓은 돌길과 가로수를 차치하더라도, 대로변 떡하니 세워져 있는 ‘하이만 뱅크’가 그 증거였다.
바리엘 전역의 금융 인프라를 담당하는, 제3의 성역이라 불리는 곳. 각 영지에 하나 이상씩 지점이 나 있었는데, 저들이 없다면 막대한 세금을 마차에 실어서 보내야 할 것이다.
쿵!
데오가 마지막으로 내리자,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맥이 반갑게 다가왔다.
“오! 이안 도련님!”
“맥 경. 마중을 나와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바깥에서 보니 더욱 반갑습니다. 아. 첼 도련님도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맥은 이안과 첼을 반겨주면서도 뒤쪽의 경비를 힐끔거렸다. 웃음 뒤에 경계하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데오는 귀만 후비적거리며 반응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그들은 건물을 통째로 쓰는 것 같았다. 데르가 저택처럼 크진 않지만, 고급스러운 자재들로 마감된 실내 장식이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이곳은 관사인가요?”
“네. 수도에서 공무원이 파견될 때 쓰는 곳이랍니다. 깔끔하고 편안하여 제집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안쪽은 준비가 끝나있었다.
쟁반 가득 쌓인 음식에 포도주까지 완벽했다. 브라츠 백작저 오찬과 그다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호위병께서도 함께 들려고 하는 건가?”
“아니 됩니까?”
맥이 응접실 문을 앞에서 두고 묻자, 데오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상당히 무례한 처사였지만, 맥은 팔짱만 꼈다. 이자를 어떻게 떨굴지 고민하는 것이다.
“식사하시고 학식 토론도 즐거이 하십시오. 저는 그저 구석에 있기만 하면 되니.”
사내의 말에 이안은 몸을 빙글 돌려 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서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까딱거리며 신호했다.
“같이 저택에서 나왔는데, 식사를 구경만 하게 할 수는 없지요. 혹시 식기와 와인 잔을 하나 더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이안은 일부러 ‘와인’에 힘을 주어 말했다. 몸으로 먹고사는 자가 몇 번이고 술에 취하여 팔이 부러졌다 한다. 분명 술 없이는 죽고 못 사는 성격일 터.
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와인은 올리지 않았는데.”
두 명의 초대 손님이 모두 아이였다. 데르가와 메리 부인도 없는 오찬에서, 술을 준비할 리가 없지 않나. 이안이 그걸 모를 정도는 아닌 것 같고…….
“혹시 술을 즐기나?”
“예? 뭐. 아니라 하면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지하로 가게나. 거기에 와인 창고가 있는데 가서 원하는 걸 골라보도록 하지. 예상치 못했지만, 식기를 놓으면 어쨌거나 자네도 손님이니까.”
…이게 맞나? 맥은 이안을 힐끔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주 완벽한 소통이었다. 아이가 희미하게 웃자, 맥은 감을 잡고 데오를 부추겼다.
“종류가 꽤 많아.”
“바로 아래입니까?”
“건물 지하.”
데오는 코를 킁, 하고 훌쩍이더니 첼과 이안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건물 안이라 위험은 없다. 첼과 이안이 붙어 있는 한 잠깐은 괜찮을 터.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관사의 와인 창고라! 평소에는 보지도 못한 술이 즐비할 것이다.
“그럼. 뭐.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기다리게. 드고르!”
맥은 응접실 문을 열고 드고르를 불렀다. 그리고 뭐라 속삭이더니, 데오에게 따라오라며 지시했다.
“도련님들. 어서 오시지요.”
드고르는 맥의 역할을 이어받아 손님들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몰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시선이다.
“앉으세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장소만 데르가 저의 뒤뜰에서 이쪽으로 옮겨진 것 같은 기시감. 그들은 어제와 다름없는 인사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오호. 첼 도련님이 다니시는 학교가 근처라고요?”
“네. 마차를 타면 10분 정도 걸립니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질문의 대상일 것이다.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첼에게 관심을 쏟아부었다. 이안은 그것이 어쭙잖은 눈속임이라는 걸 알지만, 어쩌면 첼에게 통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그들은 이안에게 별로 말도 안 붙이던데요? 다른 의도는 딱히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눈 대화는…….’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가져오라 했으니, 아이는 머릿속으로 저들의 말을 기억하느라 애쓰고 있을 터. 이안은 첼의 아둔한 모습이 상상되어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데르가는 브로치를 확인할 것인데.
‘자. 언제쯤 시작하려나.’
이안은 조용히 다물고 고기만 우물거렸다. 사실 데르가 만큼이나 그도 궁금했다. 대체 무슨 저의가 있어서 그를 밖으로 빼낸 것일까. 짐작 가는 바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아!”
촤악!
그때, 드고르가 물병을 쏟았다. 아주 정확하게, 첼의 바지로. 고전적이지만 어쩌면 확실한 방법. 이안은 그것이 신호임을 알았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아. 네…….”
첼은 반사적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소변을 지린 것처럼 허벅다리가 죄 젖어버린 것이다. 이안은 미동 없이 평온하게 고기를 한입에 넣으며 드고르의 대사를 점쳤다.
‘옷 갈아입으시겠어요?’
“갈아입으셔야겠는데요.”
“괘, 괜찮습니다.”
“잠시만요. 하인에게 서둘러 적당한 옷을 사 오라 하겠습니다. 마침 바로 옆 건물에 괜찮은 의상실이 있어요.”
우물우물.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식사를 이었다.
“그러지 말고 직접 다녀오십시오. 형님. 평소 가던 의상실이 아니라 사이즈를 제대로 모르지 않습니까?”
분명 하인에게 이르면, 그는 다시 올라와서 첼이 직접 가야 할 것 같다고 전언할 것이다. 안 봐도 훤하다. 몰린은 물로 입을 축이며 이안을 쳐다봤다.
“그렇지 않습니까? 몰린 경?”
그러니 시간 낭비 따위 그만하고, 우리 진짜 얘기를 나눠보자고. 아이는 눈빛으로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