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0
제110화. 달밤
언덕 뒤로 떠올라 있는 거대한 달. 겨울밤의 달은 유독 맑고, 거대했다. 두 마리의 말이 내달리는 모습이 역광으로 비칠 만큼. 그들은 숲을 오르는 게 아니라, 달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타닥타닥!
하샤를 안고 말을 모는 이안과 달리, 베릭은 거리낄 것 없었다. 그는 성급하게 고삐를 흔들며 발을 굴려댔다.
“이럇! 빨리 가자! 달 지겠다!”
이쯤 하니, 하샤가 아니더라도 베릭은 도적 소굴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언덕의 끝. 본능적으로 저 아래, 도적들의 소굴이 있을 것만 같았다.
히이잉!
“와, 잘 해놓고 사네.”
베릭이 가파르게 깎인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풀숲 사이로 낡은 천막들이 자리 잡아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뒤따라온 이안이 전체적인 지형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도적질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땅 보는 눈만큼은 쓸 만하구나.”
은신하기에는 지리적인 조건이 거의 완벽하다시피 했다. 버려진 숲을 지나, 숨겨진 평야를 내달려, 그 끝까지 서야만 놈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좋다. 주둔지를 확인했으니, 카렌나로 가서 사람들을 데려오자.”
훔쳐 간 도적들의 전리품이 한곳에 쌓여있다. 그리고 그 옆에 쪼르륵 놓여 있는 이안의 마차. 마차가 들어올 만한 길이 따로 있는 듯하다.
“엥? 사람들 데려온다고? 어느 세월에?”
베릭은 눈을 초롱거리며 검 손잡이를 잡았다. 금방이라도 빼 들 기세에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할 수 없다.”
“몰라도 돼. 어차피 다 죽일 거니까. 그리고 마력석이야 그렇다 쳐도, 저놈들이 짐 정리한다고 서류 태워 먹으면 어떡해? 로만드로 님이 불쌍하지도 않아?!”
“베릭. 입에 침이라도 발랐으면 좋겠구나.”
로만드로의 걱정은 무슨, 저가 날뛰고 싶어 그런 거면서. 이안이 피식 웃으며 하샤에게 물었다.
“네 몸이 어디 있는지 알겠느냐?”
-중앙 막사.
하샤의 까만 눈동자가 집요하게 한곳을 노려봤다. 그때, 베릭의 말대로 도적 중 몇 놈이 마차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저것 봐! 이제 로만드로 님은 죽었네! 신혼에 갓난아기 달고 해고당하게 생겼어!”
“베릭. 도적 두목을 놓치면 안 된다.”
“예예. 주인님은 빙 둘러서 걸어오세요. 제가 길 닦아놓을게요.”
“…차질 없이 하여라.”
타앗!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베릭은 말의 옆구리를 차대며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정확히는, 가파른 언덕을 구르다시피 내려간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히이잉!
놀란 말의 울음과 반대로 베릭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짱짱하게 울렸다.
“아하하하하!”
달밤에 들리는 낯선 웃음. 전리품을 정리하던 도적들이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올려다봤다. 저 멀리, 말 한 마리가 벽을 타며 내려오고 있었다.
“어?”
맨 처음에는 저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막사에서 쉬던 놈들도 하나둘씩 나오며 고개를 내밀 정도였으니.
“…뭐야?”
“그러게. 미친놈인가?”
“마을에서 따라붙은 놈 아니야?”
“경비대 깃발은 없어.”
혹시 몰라 무기를 들긴 했으나, 영 긴장이 안 되는 게 사실이다. 예견하건대, 바닥에 닿자마자 낙상하여 죽으리라.
콰앙!
아니나 다를까, 가속을 이기지 못한 말이 그대로 가까운 막사에 꼬라박혔다. 주위에 쌓여있던 물건들이 나동그라지고, 먼지가 뿌옇게 올라와 시야가 흐려졌다.
도적들은 저도 모르게 비소했다.
“쯧쯧. 멍청한 것들은 일찍 죽어줘야 해. 그게 인류에 이롭다고.”
“자네, 아직 안 죽었어?”
“닥쳐. 하여간에 갑자기 이게 무슨…….”
히이잉!
말은 정신이 쏙 빠졌는지, 비틀거리며 도망쳤다. 도적 한 명이 조심스레 다가가 잔해 더미를 발로 스윽 치우는 순간이었다.
촤아악!
베릭의 검이 시원하게 반원을 그리며 사내의 숨을 앗아갔다. 너무 부드러운 움직임인지라, 뒤에서 지켜보던 도적들은 인지하는 데 수 초의 시간이 걸렸다.
“이, 미친놈이…….”
반쯤 무릎 꿇고 쓰러진 동료의 바짓단이 피로 물들자, 그제야 자각했다. 저 붉은 머리는 미친놈이 아니라 의문의 침입자라고. 가까운 도적들이 도끼를 휘두르며 베릭에게 달려들었다.
“웬 놈이냐!”
쉬이익!
부웅!
어지간한 칼날은 단번에 부숴 버릴 만한 두께다. 하지만 베릭은 아주 가볍게 도끼를 쳐냈고, 당황한 도적들이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바, 방금 느낌이…….”
느낌이 이상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부드럽고 느린 반격이었으니까. 도적은 베릭의 붉은 눈이 빛나고 있음을 알아챘다. 달빛이 아니었다.
“자자. 손 들어보세요.”
베릭은 씨익 웃으며 검으로 도적 한 놈 한 놈의 얼굴을 가리켰다.
“여기서 오늘 카렌나 털었던 놈?”
“역시, 마을에서 온 놈이군. 왜? 복수라도 하려고?”
“너야? 너 마을에 왔었어?”
“그랬다면?”
솨악!
짧고 시원하게 터지는 바람. 베릭이 개방한 마검사의 힘이었다. 마을에서 이안이 넘겨주었던 마력이 아직 남아있다.
“내가 놓친 놈이 있다는 거잖아. 짜증 나게.”
타앗!
베릭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도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빛과 같은 속도로 검이 유영했다. 말갛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밤중 짐승을 잡아먹는 마물의 것과 같다.
“으아아악!”
“죽어! 아하하! 너, 너 내가 얼굴 봤다!”
“X발, 다 나와봐! 비상이다!”
“무슨 소란인가?!”
“끄아아악! 살려, 살려-!”
무자비한 살육이 시작되는 순간.
이안은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품에 안긴 하샤가 의아하게 고개를 쳐들어 이안의 표정을 살폈다.
-왜 그러지?
“하샤, 베릭 저놈 보면 뭐 떠오르는 게 없는가?”
-개차반인 것 같다. 아스타나에서 저러면 살아가기 힘들어.
“그건 바리엘도 마찬가지란다. 되었다. 슬슬 내려가 보자. 베릭이 우릴 위해 길을 닦아둔다 하였으니.”
이안은 말을 몰며 귓전에 울리는 소란을 뒤로했다.
‘아무리 마검사라고 한들, 베릭은 정도가 과하다. 두려움이 없고, 맹목적인 살육을 좋아해. 좀 기이한데.’
세상의 모든 것이 모여있는 중앙으로 가면, 베릭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터.
이안은 언덕을 내려가 주둔지 입구에 당도했다. 베릭의 소란으로 인해, 문지기가 자리를 비운 상태다.
“가자.”
하샤는 긴장한 것처럼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안쪽으로 들어갔으나, 인기척이 거의 없다. 침입자 하나 잡으려고 떼거리로 달려간 듯싶다.
콰앙! 쾅!
저 멀리, 확신을 더 하는 굉음이 터졌다. 이안은 하샤의 안내를 받으며 주둔지 중심으로 나아갔다. 시체를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차.
“하샤. 원한다면 내려주마. 나는 마차가 안전한지 먼저 봐야 하니.”
-이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괜찮다.
이안은 말에서 내려 마차들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도적 한 놈이 짐칸 뒤에서 나오자, 망설임 없이 마력을 쏘았다.
퍼엉!
짧은 빛이 터지며 도적이 뒤로 넘어갔다.
‘하나, 둘, 셋…….’
약탈당한 것이 모두 그대로다. 이안은 마력석과 서류 더미 등, 보관 상자가 온전하다는 걸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구나.”
하샤는 이안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보이는 중앙 막사를 향하여. 발돋움할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들어와 머리를 얼리는 것 같았다. 하샤의 모든 신경이 막사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윽.
“음?”
막사에 다다른 순간, 안에서 나온 거대한 사내. 하샤가 올려다보고 있는 탓도 있지만, 키가 천장에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체격이 엄청났다.
“뭐야?”
도적들의 두목이다. 하샤가 얼어붙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냉큼 개의 목덜미를 잡아채어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개새끼?”
끼이잉.
살려면 어쩔 수 없지. 하샤는 아무것도 모른 척, 녀석의 방심을 부르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다.
그때였다.
“떡대!”
피를 듬뿍 뒤집어쓴 베릭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는 한 놈의 시체를 질질 끌어오고 있었는데, 두목은 너무 황당한 광경에 넋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네가 대가리야?”
“너, 이 새끼!”
휘익!
두목은 하샤를 집어 던지고 바로 도끼를 빼 들었다. 그저 작은 소란인 줄 알았다. 으레, 약탈을 성공적으로 한 날은 부하들이 쾌락과 술에 취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으니까.
“네 부하들 쩔더라. 베는 맛이 죽여줘.”
“이런, 미친놈이!”
채앵! 챙!
망설일 것 없다. 두 사람은 바로 서로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맞부딪혔다. 고막을 찌르는 쇳소리가 소름 끼치게 터져 나왔다. 바닥에 나뒹굴던 하샤가 정신을 겨우 차리며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흐아아아!”
타앗!
베릭의 얼굴로 어쭈, 하는 표정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덩칫값은 하는 편인지 여타 다른 도적놈들과 도끼 휘두르는 힘 자체가 다르다.
“허억, 허억…….”
도끼를 놓친 두목이 송골 땀을 흘려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걸 본 베릭은 보란 듯이 검을 바닥에 버렸다.
“……?”
“너는 베는 맛보다 패는 맛이 더 좋을 것 같아.”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시건방진 놈이로군.”
“그런 놈한테 까이면 얼~마나 아프게요~!?”
퍼억!
달려든 두 사람이 동시에 주먹을 뻗었다. 치고받기를 여러 번. 두목은 합이 길어질수록 본능적인 낭패감을 느꼈다. 베릭이 일부러 맞아주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빠악! 빡!
점차 베릭이 타격 횟수가 많아졌다. 베릭의 주먹에 피가 묻어왔으나, 그게 누구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하하! 역시 예상대로네! 살집이 쫀쫀하니, 잘 붙어.”
“커헉-! 헉!”
퍼어억!
쿠웅!
마지막 일격. 얼굴이 뭉개진 두목은 비틀거리다 결국 정신을 잃었다. 베릭은 손을 가볍게 털며 검을 집어 들려고 했다.
“베릭.”
뒤에서 들리는 이안의 목소리. 돌아보자, 말을 몰고 온 이안이 눈짓으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물어볼 것이 많은 자다. 죽이면 안 돼.”
“아아. 주인님 오셨어요?”
스윽, 베릭은 피 묻은 손으로 코를 닦아내더니 환하게 웃었다. 실로 개운하다는 듯.
“제가 길 잘 닦아뒀습니다.”
“길이 좀… 시뻘겋긴 하구나.”
“지체 높으신 분들은 레드카펫 걷는 거 좋아하니까.”
흘러내린 도적 떼의 피로 엉망이 된 바닥. 말발굽을 따라 푹 젖은 흙의 촉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안은 말에서 내려 베릭의 상태를 쭈욱 살폈다. 피를 뒤집어써 멀쩡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다.
“하샤는?”
“여기 안으로 들어가던데?”
“너는 혹시 모르니 도적 대장을 감시해라.”
“에엥? 나도 안쪽 궁금해.”
스윽.
이안은 베릭을 무시하며 막사 입구를 걷었다. 바깥도 바깥이지만, 안쪽으로 들어서니 영 불쾌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안은 하샤의 발자국을 따라 쫓았다.
“하샤?”
막사 안의 작은 별채. 이안은 얌전히 앉아있는 하샤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왔는가.
푸른 머리칼의 어린아이 시체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자세를 고정하기 위해 밧줄로 묶어두었지만, 의지가 없는지라 몸이 반쯤 흘러내린 상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하게 진행된 부패 상태.
하샤는 자신의 껍데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네.
거울 속 자신을 기억한다. 생기 넘치던 눈망울과 뽀얀 볼 그리고 쏙 들어가던 볼우물까지. 하샤는 목이 메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아. 원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진정 그리해도 되겠는가? 하샤의 영혼이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어찌하여 사령 통제권이 넘어갔는지 알 수 없다. 더 탐욕스러운 자가 눈독 들이기 전, 없애 버려야 한다. 바깥의 도적이 살아있지 않는가? 혹여 눈뜨자마자 술식을 구사하면 곤란해지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그걸 실행하는 건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인간의 몸으로 살아갈 기회를, 스스로 부수는 것이니까.
“하샤. 그대의 결정을 친히 격려하겠다.”
-…….
하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끝까지, 자신의 마지막을 눈에 담을 뿐.
지이잉.
이안은 마력을 응축해 시체의 머리를 터트렸다. 뇌수가 흘러내리고, 온전했던 아이의 형체가 어그러졌다. 하샤는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뚝 흘렸다.
이제 진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