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1
제111화. 노예상
“이안? 끝났어?”
밖에서 지키라 했더니, 베릭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안에 들어섰다. 와중에 명령은 확실히 지키려는 듯, 기절한 두목의 발목을 질질 끈 채로.
그는 엉망진창이 된 하샤의 사체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상태가 왜 이래?”
“후일을 위하여, 하샤가 시체를 없애 버리길 원했다.”
“그래? 짜식, 보기보다 강단 좋네.”
쿠웅!
베릭은 도적의 몸을 대충 던지며 하샤에게 가까이 왔다. 개의 눈으로 흘리는 인간의 슬픔이라. 누구도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일 터. 베릭은 코를 훌쩍이며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닦아냈다.
“좋게좋게 생각해. 이런 식으로 몇 번 더 하면 오래오래 살겠네.”
-그걸 말이라고…….
너무나 어이없는 위로에 하샤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댔다. 하지만 나름대로 연민에서 빠져나올 자극이 된 것 같다. 하샤는 짧은 앞발로 눈가와 주둥이 부분을 매만지며 정신을 차렸다.
-두목 놈을 죽인 건 아니겠지?
“주인께서 살려두라 했으니, 못 도망가게 발목만 끊었어. 근데 여기 생각보다 넓네?”
베릭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문을 열어젖혔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놈들이 도적질한 물건 확인도 그러하지만, 혹여 납치된 자가 있을까 싶어서.
드르륵!
“이것 좀 봐봐!”
“전리품을 보관하는 곳인가 보구나.”
“와아, 얘들 잘나갔네!”
“그래. 생각보다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다.”
금화들은 물론이고, 각종 보석과 귀중품이 한데 쌓여 놈들의 만행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안은 혀를 가벼이 차며 안으로 들어섰다. 근방이 전부 소도시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금화가 여기저기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저것 뒤적이던 베릭이 뭔가를 꺼내 들며 이안을 불렀다.
“이안, 신기한 검이 있어.”
칼날이 새카만 검이었다. 혹여 불에 그을린 것인가 싶을 정도로 광택 없는 검신. 재가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베릭이 손끝으로 검의 단면을 쓸어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 묻은 게 아니네.”
“검이 특이하구나.”
“이안도 이게 뭔지 몰라?”
“…나라고 어찌 그걸 다 알겠느냐? 장인 특유의 인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장식용으로 만든 것일 수도 있지. 검이라고 해서 베는 용도로만 만드는 게 아니니까. 아, 간혹 마력석이 섞인 검 역시 색을 띠는 경우가 있지.”
이안도 검사의 검을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황제를 알현하는 동안에는 품위 유지 및 안전상의 이유로 모두 검을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훈련장에서 대련하는 것으로 가끔 마검사들의 위력을 눈으로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만하면 다 아네.”
베릭은 낄낄 웃으며 검을 대충 휘둘렀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는데, 생각보다 가볍고 날렵했으며 무엇보다 제 팔 길이에 딱 맞는 것이 놀랍도록 편했다.
“엥?”
“왜 그러느냐?”
쉬익!
궤를 가를 때마다 잔상으로 남는 검은 흔적도 마음에 든다. 칼날은 무딘 편에 속했지만 이 정도는 대장장이에게 가서 갈아달라고 하면 될 터.
“이안! 나 이거 갖고 싶어!”
“그것을?”
“응응. 안 될까?”
이리저리 찌르고 휘두르고, 난리 났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며 베릭이 들고 있는 검을 쳐다봤다. 하도 험하게 써서 칼날의 이가 다 나가 있는 상태다. 천으로 덧댄 가죽 손잡이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로 잔뜩 엉망이었다.
“명색이 호위인데 검 하나쯤은 네 마음에 드는 게 있어야지. 마을로 돌아가면 값을 치르도록 하마.”
“앗싸! 얼만데?”
“모르지. 밥값에서 조금씩 깔 터이니, 그리 알거라.”
“잠깐! 밥에서 깐다고요?”
도적들이 약탈한 물건은 카렌나를 비롯한 소도시로 귀속되어 주인을 찾거나, 아니면 그대로 도시의 예산으로 편성될 예정이었다. 베릭은 밥을 줄인다는 말에 충격 먹었는지 계속해서 이안과 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씨…….”
하지만 차마 검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어찌 저리도 쉽게 생각이 드러날까. 이안은 피식 웃으며 나머지 전리품을 살피기 위해 움직였고, 보기 드물게 심각한 표정인 베릭이 연신 쫄쫄쫄 쫓아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기 쓰는 자들은 간혹 운명처럼 느껴지는 만남이 있긴 하지. 저러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반했구나.’
“그리 마음에 드는가?”
“피 묻어도 티 안 날 것 같아 좋아.”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응당 대가가 필요한 법이지. 당분간 훈련이라 생각하여라.”
사실 먹는 걸 진짜로 제한할 생각은 없었으나, 베릭에게는 행동을 제어할 만한 여러 가지 긴장감이 필요해 보였다.
이안은 안쪽을 다 살펴본 다음, 감금된 자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이쪽은 됐다. 베릭, 가서 로만드로 님과 주민들을 불러와. 마차를 찾았다는 것도 알리고.”
드르륵.
밖으로 나오자, 벽에 바짝 붙어서는 아르르 거리는 하샤가 보였다. 그새 깨어난 두목이 팔로 기어가고 있었던 탓이다. 양쪽 아킬레스 건이 제대로 잘린 터라, 무릎 아래로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으니.
“일찍 일어났네?”
“허억!”
베릭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도적 두목은 사색이 되어 숨을 들이마셨다. 나름 거친 자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해왔던 자였으나, 베릭처럼 압도적으로 강한 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강하기만 한가?
“꺼져! 미친놈, 저리 가라고!”
단단히 정신이 나간 놈이라, 깊은 후유증까지 남겼다. 도적은 손을 내저으며 베릭에게 소리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적의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꽈악.
“자자. 괜히 힘 빼지 마시고 대화 좀 해볼까?”
“그, 그건 내 검인데…….”
베릭은 방금 찾은 흑검을 녀석의 목덜미에 댔다. 칼날을 따라 희미한 상처가 생겼고, 이내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왔다. 이가 다 빠져 무디다 생각했는데 날이 매섭다. 명검은 명검인가 보다.
“네놈, 지금부터 묻는 말에 하나의 거짓도 없이 답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목이 떨어진 채로 저승에 갈 것이니, 부하들이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앞에 서서는 담담하게 도적을 내려다보았다. 범상치 않은 말투에 도적이 슬쩍 고개를 쳐들려고 했으나, 베릭이 머리통을 밟아버리는 바람에 저지당했다.
“사령술사의 시체로 어찌 사령술을 구사하였나?”
“예? 그게 무슨 말인지…….”
“발뺌할 생각이구나.”
스윽.
이안의 말에 베릭이 칼날을 바짝 세웠다. 목덜미를 조금씩 파고드는 고통에, 도적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으아아악! X발, 살려, 살려주시오!”
“두 번의 아량은 없다. 다시 묻지. 사령술사의 시체로 어찌 사령술을 구사하였지?”
도적은 눈을 질끈 감은 다음, 말을 더듬으며 털어놓았다.
“훔친 것 아니고 저가 따라온 것이요!”
“그러니까, 왜?”
“그, 그건…….”
도적 두목은 베릭의 흑검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말하자니 난감한 일인지라, 그는 대충 모른 척 무마하며 말을 넘겼다.
“나도 잘 모르오. 처음에는 죽여도 죽지 않기에 이거 물건이다 싶었지. 노예상에 팔려고 시, 시체를 데리고 갔는데…….”
노예상. 이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희미하게 사건의 실마리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약탈과 납치를 일삼는 놈들이니, 그걸 처리할 노예상이 뒤에 버티고 있음은 당연했다.
“설마 그놈들이 도와준 것인가?”
“그렇소! 노예상이 말하기를, 애새끼 시체를 잘만 이용하면 그들과 똑같은 놈들을 여럿 만들 수 있다 했지. 대신 시체가 많이 필요한데, 우리야 사람 죽이는 게, 이, 일이니까…….”
“거래를 텄군. 노예 상단이 술식 쓰는 법을 알려주면, 네놈들은 언데드를 만들어 팔아먹는 것으로.”
“시체를 가져가서 뭔 짓을 했는지는 모르오. 진실로 맹세코! 우리야 시체 하나 팔 생각이었는데, 모아두면 카렌나로 돌아올 때마다 금화를 주겠다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소.”
노예상은 바리엘에서만 활동하지 않는다. 사업의 특성상, 여러 인종과 종족을 아우르는 ‘상품’ 수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예장이 상시 일어나지 않는 바리엘과 달리, 주변국들은 지하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상단 이름은?”
“파켄스 노예 상단.”
파켄스. 확실히 이안의 귀에도 익은 상단이었다. 100여 년 후 사람인 그가 알 정도라면, 어느 정도 규모와 근본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겠지.
그때, 베릭이 칼등으로 도적 두목의 얼굴을 수차례 후려쳤다.
빠악! 빡!
“말이 짧다?”
“으어억! 파켄스 노예 상단입니다!”
“좋아좋아.”
베릭은 이것이 밥값이라 생각하는 듯싶었다. 검을 들어 보이며 뿌듯하게 이안을 쳐다봤으니. 이안은 피식 웃으면서 재차 질문을 던졌다.
“하면, 금화 중 일부는 상단에게 받은 것인가?”
“그렇다, 니요! 그렇습니다!”
“술식은 어떻게 써먹었지?”
“온전한 시체 열 구가 있어야 멀쩡한 놈 하나 겨우 나오는 정도였습니다. 그, 머리카락이 있어야 해서 대머리 놈들도 못 쓰고요.”
그 말을 듣던 하샤가 귀를 쫑긋거렸다.
-내가 쓰는 술식 방법이 맞소. 사령술사마다 술식에 특색이 있는데, 나는 머리칼을 써야 해서 그렇지.
도적놈의 눈깔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말하는 개라니. 그것도 음성으로 짐작하여, 아이의 영혼이 들어서 있는 것 같았다.
“대머리들 좋겠네? 술식에 걸리지도 않고.”
하샤의 술식을 그대로 구사한다라. 베릭의 실없는 소릴 무시하고, 이안은 혹시나 한 마음에 하샤를 돌아봤다.
“더 듣겠는가?”
-물론. 나는 그 몸의 주인이니.
“좋다. 말해보아라. 어찌 술식을 진행했는가?”
도적은 미치겠다는 듯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평소에는 거리낄 것 없이 해댔던 악행이었다. 하나, 이리 자백하듯 제 입으로 말하려 하니 자각한 것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라고.
“…시체를 가져다주면 알아서 하더이다. 근데 평소에는 통제가 안 되니 일 안 할 때는 묶어두었지요.”
하샤는 집중하여 도적의 말에 귀 기울였다. 증언이 길어지자, 이안은 베릭에게 눈짓하여 서둘러 마을에 다녀오라 지시했다.
“시체를 깨끗이 한 다음에는 꽃을 따서 냄새를 입히고…….”
타닥타닥!
베릭이 마을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도적의 말이 이어졌다. 하샤는 이내, 시체가 했던 술식이 완벽하게 하샤의 것과 일치한다는 걸 깨달았다.
* * *
“로만드로~ 님~!”
“헉! 베릭이다! 베릭! 이안은 어쩌고?”
“나 피 뒤집어썼는데 그건 안 물어봐요?”
“아니이! 너야 어련하겠나? 그래서 이안은?”
“다들 따라와요. 마차 찾았어. 그리고 경비대도 데리고 와. 수습해야 하니까.”
베릭의 말에 로만드로와 일행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그들은 당장 경비대장을 불러 지원을 요청했고, 베릭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달이 거의 지고 하늘이 보라색으로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타닥타닥!
수많은 말들이 도적 떼의 소굴로 말 머리를 고정한 채 내달렸다. 그리고 이내, 궤멸한 마을의 상태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안!”
“오셨습니까?”
이안은 하샤와 함께 로만드로를 맞이했다. 그는 바로 마차 쪽으로 달려가더니, 자료와 마력석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곤 무릎을 꿇었다.
“흐억.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아니, 로만드로 님. 나한테 감사해야지?”
“그래. 베릭. 이리 오거라, 어이구, 예쁜 것!”
“으아아악! 징그러!”
로만드로가 친히 격려하려 하자, 베릭이 질색하며 뒤로 물러섰다. 안으로 들어선 경비대장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세상에, 이게 다…….”
“다 죽었습니다. 시체예요.”
“아아. 한 놈 살아있어. 대가리.”
“시체를 먼저 수습해라! 안쪽에 숨어있는 놈들이 없는지 확인해! 천막이란 천막은 모두 걷어내라!”
“네! 알겠습니다.”
달이 지면서, 도적 떼의 명운도 져버렸다. 이안은 하샤를 껴안은 채 경비대가 상황을 정리하는 걸 지켜봤다.
‘그나저나, 도적 두목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술식에 대해 꽤 자세히 숙지하고 있던데, 언데드가 처음에 따라붙은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말이 안 되지. 이안은 팔짱을 낀 채 호송당하는 도적 두목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벌벌 떠는 그에게 싱긋 웃어주며, 마을로 가서 다시 보자는 시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