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2
제112화. 중앙으로
운명이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적 떼의 공격에 지옥을 맛보았던 카렌나가 새벽달이 질 때 쯤 평화를 기약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도적 떼? 그놈들 본거지를 털었다고?”
“모르겠어. 나도 경비대 친구에게 들었는데, 그렇게 됐다고 하더만?”
“퇴각할 때 추격대가 붙었구나!”
“그건 아닌 것 같아. 듣자 하니 용병이 따로 왔다고.”
“용병? 우리한테 용병 쓸 세금도 있었나?”
“뭐가 되었든 지금 도적들이 다 죽었다는 거 아니야? 응? 그 두목 한 놈 빼고!”
“그래. 그게 중요한 거지! 하,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뒈질 거면 오늘 밤 좀 사리지!”
“됐어. 이미 벌어진 일. 앞으로는 안전하다는 뜻이니까. 경비대가 오랜만에 활약 좀 했군.”
“아니라니까. 경비대가 아니라 외부인이라고.”
“외부인? 지금 카렌나에 그만한 외부인이라면…….”
삼삼오오 모여 지난밤의 악몽을 곱씹던 주민들이 말꼬리를 흐렸다. 동시에 같은 마차의 행렬을 떠올린 것이리라. 여관 주인이 배포 큰 손님이 왔다며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생생했다.
“그자들인가?”
“범상치 않아 보이긴 했다만, 도적 떼를 어떻게…….”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도시의 중심부를 쳐다봤다. 외부인들이 묵었던 여관 방향이었다.
한편, 경비대가 시체를 옮기는 동안 이안의 일행은 마차를 되찾아 여관으로 가져왔다. 말 두어 마리가 비긴 하지만, 그만한 게 어딘가 싶었다.
“로만드로 님. 짐 확인 다 되었습니까?”
“그래. 서류도 빠짐없이 다 있네. 하아, 긴장이 확 풀리는구먼.”
일일이 상자를 바닥으로 꺼내 안쪽까지 다 뒤집어 엎어본 참이었다. 로만드로는 엄지를 치켜들며 실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내왔다.
“다행이네. 지체되는 것이 하루를 넘기지 않아서 말이야.”
원래라면 아침 일찍 카렌나를 떠나기로 했지만, 말과 마부를 새로 구해야 하니 오전 늦게나 출발할 듯했다. 이안은 로만드로와 그 부하들에게 정리를 부탁하고서 여관으로 들어섰다. 핏물이 낭자한 여관 바닥을 직원들이 걸레질하고 있었다.
“어여, 이안. 배 안 고파?”
그 가운데, 베릭은 당당하게 앉아서 고기와 빵을 뜯었다. 맞은편에는 하샤가 자리했다. 접시 하나를 두고 나눠 먹는 모습이 여간 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너나 많이 먹거라. 힘 많이 썼으니.”
“아하. 그리 말하면 또 거절은 안 하지.”
드르륵!
“이안 님. 경비대장이 시장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 참으로 빠릿하구나. 들라 하라.”
이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장은 정수리를 내보이며 후다닥 여관으로 들어왔다. 허리를 굽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걸레질하던 직원들도 덩달아 당황해 멈칫거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카렌나 시장 오닉스입니다.”
퉁퉁하고 짤막한 사내였다. 옷깃이 잔뜩 흐트러져 있고, 얼굴은 불콰했으며, 목소리는 새되게 흥분되어 있었다. 이안은 가만히 그를 위아래로 살폈다.
“우리의 소개도 따로 하여야 하는가?”
“아닙니다. 전해 들었습니다. 신년회를 참석하러 가시는 귀족이시라고요. 황궁 자문관님도 함께 하고 있다는 걸 보고 받았습니다.”
이안이 잠깐 침묵했다. 뒤에서 식사를 열심히 해대는 베릭만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릴 뿐, 다른 자들은 미칠 듯한 중압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적 떼가 침입하여 도시를 엉망으로 만드는 동안, 시장인 자네는 대체 무엇을 했나?”
“그,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도시에서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가까이 오라.”
이안의 명령에 시장은 머뭇거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이만큼? 아니면 조금 더? 적당한 간격을 모르는지라, 시장이 고개를 드는 순간.
‘헉.’
이안의 녹색 눈과 마주했다. 보기 드문 미색인 것도 놀랍지만 생각보다 너무 어린 탓에 말문이 막혔다. 저 나이에 귀족 작위를 받다니. 문득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냄새가 나는데.”
“그것이…….”
망했다. 재수가 털려도 더럽게 털렸다.
하필이면 진득하게 퍼마시고 있을 때 습격을 당한 것도 모자라, 귀족과 중앙관료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사장은 혹여 피 냄새로 가려질까, 사죄하는 척 연신 이마를 바닥에 비벼댔다.
“주, 주, 중요한 가족 모임에서 한잔했다는 것이, 이리되었습니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이안은 시선을 시장에서 경비대장으로 옮겼다.
사실, 거짓말을 파악할 때는 당사자보다 옆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당사자는 진실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거짓된 얼굴을 꾸며내지만, 옆에서 듣고 있는 자는 비교적 긴장을 덜 하니까 말이다.
‘거짓이군.’
경비대장의 입매가 묘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깨문 것이다. 이안은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그만 다물라. 술 냄새가 여까지 난다. 카렌나의 법으로, 생포한 도적의 처분이 어찌 되는가?”
술 냄새라는 말에 시장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그리고 이내 카렌나의 법을 되새기며 조심스레 대답을 내놓았다.
“…일단 사형은 확정입니다만, 카렌나의 도시법으로 약탈과 살인, 특히나 무리를 이루어 범법 행위를 한 자들은 태형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채찍으로 등짝을 때리고, 정신 잃으면 친히 깨워 때리는 걸 반복하는 것, 살점이 사라질 때까지 반복하여 생지옥을 보여주는 게 카렌나의 법이었다. 녀석의 숨이 실낱처럼 가늘어질 때쯤 교수형틀이 세워지겠지.
“좋다. 내 도적 두목에게 볼일이 있으니, 여기를 정리하고 수감장으로 가겠다.”
“수, 수감장으로요?”
“문제 있나?”
“어…….”
시장의 얼굴이 난처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털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동안 저는 떠나실 수 있게 마부와 말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 이안은 물러가도 좋다는 뜻으로 등을 돌렸고, 시장은 끝까지 긴장감을 붙든 채 물러섰다.
드르륵!
“어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붙는 기분이다. 경비대장이 마실 것을 건네주며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신년회 때문에 바빠 보여 다행입니다. 바로 오전 중으로 떠난다고 하니까요.”
“내 말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려가는 거였으면 곤란할 뻔했어. 어린데 성깔이 장난 아닌 것 같네. 작위 임명을 받으러 간다지?”
“제 생각에는 전쟁에서 활약한 자들 같습니다.”
경비대장은 아직까지 베릭의 능력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람된 자로, 어찌 혼자 그 많은 도적 떼를 말살하였는지 말이다. 시장 역시 주억거리며 식은땀을 훔쳐 내렸다.
“마법을 쓰는 자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일전에 다닐로 조사 나왔던 자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무튼, 내 저자들에게 할 말이 하나도 없음은 부정할 수 없다. 혹여 자문관이 보고서라도 올리면 실로 난감해져. 도적 두목을 보고자 한다는데, 연유를 알고 있나?”
시장이 물었으나, 경비대장도 알 턱이 없었다.
이안이 언데드에 관한 것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도적 사건이 복잡해질 염려도 있고, 혹여나 웨슬리가 하샤의 존재를 알아챈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도 있었으니.
“볼일이라 하면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말을 잃었으며, 마부를 잃었고, 푹 쉴 수 있는 밤을 잃었다. 고고하신 귀족 나으리께서 그놈을 가만둘 리 없다는 게 결론이다.
“안 되겠다. 가서 내 직접 태형을 치마.”
“준비하겠습니다.”
“살점 쫙쫙 떨어지게, 응. 그리하자. 그러면 화 좀 풀리겠지.”
경비에서 실점하였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점수를 따겠다는 계산이었다. 전혀 엉뚱한 판단이었으나,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 * *
베릭은 든든한 배를 어루만지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녁도 못 먹고 그리 움직여댔으니, 배가 곯았던 게 당연했다. 여관 안쪽이 대강 정리되자, 이안은 하샤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이제 하샤는 어찌할 생각인가?”
-할머니도 없고, 시체도 정리하였으니 아스타나로 돌아가야 할 듯싶다. 지금으로서는 방도가 없는 게 사실이니.
“할머니가 계파의 수장이라고.”
이안은 사진 속 노인을 떠올리며 상황을 짐작해 봤다. 계파의 수장이라 하면 조력자도 많겠지만 적대 세력도 만만치 않을 터. 그녀가 웨슬리를 피해 아스타나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혹 중앙까지 나를 데려다주면 안 되겠나? 아스타나로 가려면 어차피 그쪽을 통해야 하네.
“중앙에 당도하여서, 개의 몸으로 어쩌려고?”
이안의 나지막한 물음에 하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참으로 암담하고 난감한 처지. 이안은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매만지며 제안했다.
“중앙으로 데려다주고, 거기서 아스타나로 가는 편까지 도와주마. 대신 네가 겪었던 일을 공증으로 하여 녹음을 해두고 싶다.”
“같이 간다고? 아, 마차 좁은데.”
“베릭. 네가 드러눕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하샤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베릭은 트림만 꺼억- 해대며 마뜩잖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또한, 내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길 바란다.”
하샤의 진정한 죽음이 있었던 날, 그의 곁에서 누가 도와주었는지, 그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라는 뜻이었다. 하샤는 심장에 새기듯 중얼거렸다.
-이안.
“그래. 좋다.”
-이! 안!!
하샤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꼬리를 빙빙 돌려댔다. 그러면서 베릭의 팔을 탁탁탁 쳐댔는데, 아무리 쳐내도 꺾이지 않았다.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챙길 것이 있다면 제대로 챙겨두어라.”
아침이 밝아왔다. 적어도 점심 전에 출발하는 것이 목표였으니. 이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샤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타악!
앙앙!
“개의 몸이면 개소리도 자연스럽게 나나 봐. 꺼억.”
“베릭. 너는 그만 먹고, 따라나서라.”
“방금 건 놓친 저녁이었고, 이제 아침 먹어야지! 어어? 아침!”
이안은 무시하며 바깥 거리로 나갔다. 시야가 밝아지자, 엉망이 된 카렌나의 전경은 더욱 참혹하게 다가왔다. 수감장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두고 주민들이 어색하게 다가왔다.
“저기…….”
흙과 먼지로 엉망인 사내. 그는 코를 긁적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얘기 들었습니다. 도적 놈들 잡아주셨다고.”
“밤중에도 살려주셨는데, 은혜를 어찌 갚습니까?”
“감사합니다! 저기, 이건 약소하지만…….”
“아, 되었-”
주민들은 거절하려는 이안을 지나쳐 베릭에게 다가갔다. 그는 난데없는 환대에 헤벌쭉해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암암. 내가 구했지. 구했고말고. 우헤헤! 주인보다 내가 힘을 더 썼지.”
“예? 주인이 있어요?”
“아. 주인이 있다고? 금발 머리 저분이시네!”
“그럼 저분이 우릴 구해준 거잖아!”
“감사합니다!”
베릭의 한마디에 바로 감사 인사가 옮겨갔다. 횅해진 베릭은 어이없다는 듯 입만 떡 벌렸고, 이안은 인자하게 웃으며 수감장으로 향했다.
“이안!”
“서둘러 오거라.”
“와나, 진짜. 어이없네. 내가 다 했는데!”
베릭이 찡얼대며 이안을 쫄래쫄래 따라왔다. 수감장에 도착한 이안은 미리 언질 받은 경비대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 오셨습니까!”
땀에 절어서는 피 묻은 채찍을 들고 있는 시장. 그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보란 듯이 도적놈의 몸뚱이를 보여줬다. 매질 한번 대차게 한 듯싶다.
“제가 아주 혼쭐을 내두었습니다. 기절했는데, 원하신다면 더 치셔도 됩니다!”
이안은 기절한 도적 두목을 보며 어이없이 되물었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이리 기절시키면 어쩌잔 건가?”
“네? 그게, 무슨…….”
“그대는 술 먹을 때 눈치를 안주로 먹나 보군.”
“아니, 저는 그것이…….”
이게 아닌가? 시장이 다시금 질색하며 눈을 굴려댔다. 이안은 바깥의 떠오르는 해와 기절한 도적을 보며 혀를 찼다. 갈 길이 바쁘건만…….
“종이를 가져오라.”
“네? 네네!”
그는 종이에 로만드로의 저택 주소를 쓰며 당부했다.
“깨어나는 대로 도적을 심문하여 답신을 보내라. ‘푸른 머리 아이가 어찌 따라붙었는지.’를 물어보면 된다. 기한은 보름.”
어찌 보면 잘된 것 같기도 했다.
베릭이 검을 들이밀었는데도 숨겼던 내용이니, 쉬이 답을 들을 수 없을 터다. 여기는 고문 전문가가 여럿이니까 어떻게 해서든 자백받을 수 있겠지.
“그 안에 내가 서신을 받지 못하면, 황궁에 네놈의 직무유기를 고발하겠다. 또한, 함구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든다면 내 친히 이곳을 다시 찾겠다.”
이안은 종이를 넘겨주며 고갯짓했다. 찾아오면 그날로 죽은 목숨이니, 일 처리 좀 잘하자는 의미다. 시장은 딸꾹질만 해대며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