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4
제114화. 입궁
“키야. 뜨신 물 죽인다.”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 집 욕조가 이리 좋은 줄은 또 몰랐네. 하하하!”
오랜만에 온수로 목욕을 마친 로만드로와 베릭이 소파에 몸을 기대고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민가가 없으면 눈 녹인 것으로 땟국물만 겨우 닦아내던 여행이었다. 비비안나는 테이블에 차를 올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여독을 더 풀라 권하고 싶지만, 조금 있으면 오후랍니다. 일찍이 다녀와서 쉬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해. 어차피 보고서만 올리면 신년회까지 특별한 일이 없을 터이니. 아이고! 그런데 왜 이리 몸이 안 움직이지?”
“여보. 아이가 아버지 엄살을 듣겠어요.”
“엥? 그럼 안 되지! 으라라라차!”
로만드로는 벌떡 일어나 옷깃을 탁탁 쳐냈다. 반면, 베릭은 반쯤 감긴 눈으로 코만 훌쩍였다. 따라나서기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부인. 나도 물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하샤.”
비비안나는 생각보다 유연하게 하샤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결혼 전에는 함께 재건 지역을 누볐던 터라, 견문이 넓은 덕이었다. 땟국물을 벗고 뽀송뽀송해진 하샤도 뜨신 물을 홀짝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샤, 너도 저택에 남아 쉬고 있거라. 돌아오는 길에 아스타나로 갈 편을 알아 오겠다.”
“너도라니?”
베릭이 몽롱한 투로 중얼거렸다. 까딱하면 정신 놓을 것 같은 상태다.
“너 말이다. 베릭. 하샤와 함께 저택에 있거라.”
“그, 의미가 무엇이죠, 주인님? 배려하는 거 맞지?”
“왜? 사고 칠까봐 떼놓고 가는 것 같으냐.”
“…아니면 말고. 나는 좋다! 우하하!”
베릭은 한바탕 웃어 보이고는 그대로 고개를 꺾어 반 수면 상태에 들어섰다. 저것 좀 보라며, 혀를 차던 로만드로가 조용히 속삭였다.
“참, 돌아오는 길에 브로치 녹음을 확인할 마력수도 사지.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들도.”
올라오는 길에, 하샤의 증언을 데르가의 브로치에 녹음해 둔 상태였다. 그걸 재생해 들으려면 마력수가 필요했으니, 이안도 외투를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상업구역을 들렀다 가지요.”
“……?”
상업구역이라, 로만드로는 의외라는 듯 입을 오물거렸다. 그것은 중앙의 관료들이 주로 쓰는 명칭이지, 귀족들만 하여도 ‘중심가’나 ‘타운’ 혹은 ‘상점가’ 따위로 명명하곤 했다. 평민들은 ‘시장’ 정도가 되겠지만 말이다.
“이안 자네, 혹시 나 몰래 공부했나?”
“공부요? 어떤?”
“그, 아닐세. 가지. 마리브 저하를 뵙는 것이니 옷차림을 단단히 하게나. 미니! 마차는?”
“준비되었습니다. 서류도 옮겨놓았구요.”
“그래. 가자고.”
로만드로는 비비안나에게 볼 키스를 남기며 밖으로 나섰다. 여행에 썼던 낡은 마차 대신 깨끗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마차가 정문에 서 있었다.
히이잉!
도로를 내달리는 동안, 이안은 거리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100년 전이나 후나,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저기는 하이만 뱅크가 있던 자리 같은데. 아예 들어서면서 건물을 세우고 들어왔었나 보군.’
신문을 내던지며 달리는 사내와 신선한 채소와 고기를 내놓은 매대, 담뱃불 붙여주며 팁을 받는 아이들까지. 이안은 왠지 모르게 감격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끼이익.
마차는 오래 달리지 않았다. 황궁친위대가 거수하며 창문 안을 살폈다. 로만드로가 신분증을 내어주며 인사했다.
“수고하네.”
“확인 감사합니다.”
외곽 성벽처럼 거대한 문이 스스로 열렸다. 도시 안의 또 다른 도시라. 황궁만큼은 이안의 기억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마법부가 있는 곳으로 꺾였다.
“로만드로 님. 일을 다 보고 돌아갈 때, 마법부 쪽을 들러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지. 마법부는 제2황궁 중앙 본관에 있다네. 안쪽까지 들어가는 것은 좀 그렇고, 바깥에서 분위기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걸세. 참, 제1황궁은 황족의 처소를 비롯한 관료들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고, 제2황궁은 부서가 따로 모여있는 건물이네.”
이안이 마력운용자다 보니 당연히 그쪽에 관심이 가나 싶었다. 로만드로는 손으로 방향을 짚어주며 하나하나, 세심하게 지리를 알려주었다.
“저쪽으로 가면 제3황궁인데 직원이나 하인, 노예들이 쓰는 곳이고, 제4황궁은 중앙 부서 하위, 외부인과 대면하여 업무를 처리하는 곳…….”
이안은 듣고 있노라, 미소로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마법부만 떠올리고 있었다. 나움이 그러지 않았던가? 금기의 마법을 부렸을 때, 마법부 직속 별채로 오면 기회를 주겠노라는 답을 받았다고.
‘가면 무엇이든 알 수 있을 터다.’
어찌하여 서자 이안의 몸으로 들어온 것인지, 황제 이안이 살던 곳에서 나움은 어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은 정녕 죽은 것인지 등등.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뿌연 안갯길에서 저 멀리 미등(微燈)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앞에서 내려주게.”
“이곳은 제1황궁 본관의 동쪽 건물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입구에 선 황궁친위대가 다가와 위엄 있게 용건을 물었다. 로만드로가 그쪽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이안은 반대쪽 창문으로 바깥을 살폈다.
‘여기는 크로니가 쓰던 궁인데.’
황자의 길을 걸은 적도 없고, 따로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안은 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황제의 궁을 이용했으니, 이곳은 자연스레 조카 크로니의 자리가 되었던 터다.
“아아! 그래, 오랜만이네!”
“로만드로 님! 돌아오셨군요.”
“입궁 보고하러 왔어. 짐 좀 옮겨주시겠나?”
1황궁 내에서도 마리브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앞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로만드로를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그들은 서류 상자를 내려주며 물었다.
“마리브 저하를 알현하실 겁니까?”
“그렇다네. 직접 드릴 말씀이 많아.”
“안쪽으로 드시지요. 교대하며 듣기로는 외출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외출? 잠깐잠깐. 오늘 며칠이더라?”
로만드로는 손가락으로 날을 헤아리며 혀를 쯧 찼다. 하필이면 황궁 친목회가 있는 오후였다.
“어쩔 수 없지. 조금 기다리겠네. 시간이 곧 끝날 것 같으니까.”
“예에. 그러십시오. 하인을 부르지요. 서류는 미리 집무실에 넣어두겠습니다.”
두 사람은 하인들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들어섰다. 황궁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모든 것이 우아하고 조화롭다. 이안은 방의 분위기를 보며 마리브라는 황자를 짐작했다.
‘장식품은 인근 왕국 문화가 묻어있는 것들이고, 책들이 읽다 만 것 같지만… 그에 따라 햇빛에 눌린 자국이 선명하군. 또한, 응접실이라면 으레 있는 생화가 없다.’
생각보다 흥미롭지 않나?
인근 왕국의 장식품을 보란 듯이 가져다 놓은 것은 각국의 손님을 들였을 때 보다 친밀한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는 장치였고, 이는 그가 대외적인 처세술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그것의 연장 선상으로 햇빛에 눌린 책도 마찬가지. 추구하는 이미지와 정치적으로 밀고 가는 역할 따위가 은근히 보였다.
‘특히 햇빛이 잘 드는데 조화를 가져다 둔 것은…….’
그런 말이 있지. 동물과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선한 인품을 지니고 있다고. 자연 친화적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성격이 어느 정도 냉정하고, 까다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레르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똑똑.
“로만드로 님. 친목회 장소로 기별을 보냈습니다.”
“그래. 고맙네.”
하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곁눈질로 이안을 살폈다. 저자가 소문으로만 듣던 브라츠 변경의 서자인가 싶었다. 천한 핏줄로 귀족인 제 아비를 밀어내고 영주 자리를 찬탈한, 그야말로 사교계에서 뜨거운 감자인 자였다.
‘생각보다 어리잖아?’
변방의 야만족을 휘어잡았다는 소문을 들은지라, 호전적인 사내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눈앞의 이안은 섬세하고 부드럽다는 인상이 더욱 강했다.
끼이익.
응접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이안은 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황궁 친목회라 하면 고위 관료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맞습니까?”
“그렇다네. 주로 사냥을 나가지만, 가끔은 예술 작품 감상을 하기도 해. 작품이 한번 오고 가면 작가의 몸값이 미친 듯이 뛰기도 하지. 뭐,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다 얽혀있는 것 아니겠나?”
호로록. 차를 마시는 로만드로가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황궁에서 마시는 차만큼 완벽한 게 없다는 듯이.
“그러면 게일 저하께서도 같이 있으시겠네요.”
“응?”
“마리브 저하께 기별이 가면, 게일 저하께서도 일찍이 아시겠어요. 저희가 중앙에 당도했다는 것을.”
정확히는 위업을 방해한 건방지고 눈엣가시인 ‘이안’이 도착했다는 걸 뜻했지만 말이다. 로만드로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이탈 음이 가볍게 들려왔다.
“그, 게일 저하께서는 친목회에 잘 안 나오시네.”
“그러십니까?”
정녕? 진심으로?
2황자의 신분이니 견제당하지 않기 위해 자중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몰린을 살린 선택으로 마리브와 전면전에 돌입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반역이라는 저들만의 위업에 변수가 생겼으니 지금도 그리할지는 미지수 아니겠나?
“…그, 그럴걸? 아마?”
로만드로는 이안의 되물음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서 음미하던 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입술이 바짝 탄다는 듯이.
“뭘 그리 긴장하십니까. 황궁에 들어선 순간부터 비밀이란 없지요. 아마 마법부 쪽도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성문이 마력으로 열리니까요. 오늘 아나, 내일 아나, 무엇이 문제겠어요?”
“문제는, 그래. 없지. 없는데 심리적인 부담이랄까?”
로만드로는 다시금 목을 가다듬었다. 브라츠에서 자문관 역을 맡았으니, 필시 언제고 게일이 그를 부르리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안은 바스락거리는 조화를 바라보며 희게 웃었다.
“사냥이라면 외부 터로 가셨을 것이니 하인이 금방 기별하였다 알리지 못했을 겁니다. 오늘은 작품 감상을 하시는 모양입니다.”
이안은 고갯짓하며 1황궁 별관을 가리켰다. 역시나 한 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방향이었다.
* * *
“아, 이게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 조각상입니까?”
“예예. 주문이 밀려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했는데, 어찌 운이 좋아서 바로 받았습니다. 그 조각가가 요즘 제일 인기가 많아요.”
“예술이군요. 이게 바로 예술이지요.”
“아 참. 이것도 좀 보시겠습니까?”
각 부처의 관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저들만의 예술 작품을 나누고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처럼 자유로이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선이 나뉘어 있었다.
왕당파인 마리브 쪽과 반대파인 게일 쪽.
물론 고귀하신 귀족들인지라 모두 모른 척, 선을 가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미묘하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첫눈처럼 고요히 내리고 있었다.
“마리브 저하.”
그때, 마리브의 보좌관이 실례를 무릅쓰고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로만드로와 이안이 입궁하였다 합니다. 현재 집무 응접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오호. 마리브는 뜻밖의 소식에 웃으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와인을 마시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일. 웨슬리 역시 마찬가지로 그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두 황자의 날 선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이안 놈과 브라츠 자문관이 입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