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5
제115화. 황제의 초상화
“마차를 준비할까요?”
친목회를 마무리하고 돌아갈 것인지 묻는 말이었다. 마리브는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웃으며 와인 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게일이 여전히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으니, 대답을 가리기 위함이다.
“되었다. 대기하고 있다 하니, 그리하라 이르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시해.”
“…명령 받들겠습니다.”
목적어가 없는 지시였으나, 보좌관은 그 뜻을 알아챘다. 바로 고개를 숙이며 바깥으로 나갔고, 게일의 시선 역시 떨어져 나갔다. 함께 사담을 나누던 다른 관료들이 은근슬쩍 무슨 일인지를 물어왔다.
“급한 일이십니까? 저하?”
“아닙니다. 경들과 이리 뜻깊은 자리를 나누고 있는데, 그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계속 작품 설명을 해주시오.”
물론 눈앞의 고리타분한 귀족 노인들보다 천출로 대사막을 휘어잡은 풋내기 서자에게 흥미가 끌리는 건 당연했다. 분명 게일도 두 사람의 입궁을 전해 들었을 터.
“예, 저하. 다음 작품은 마력석 가루를 섞어낸 물감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밤이 되면 실제로 빛이 나는 작품이지요.”
“오호. 마력석 가루를요?”
“요즘에는 안료에 이것저것 섞는 것이 유행이지 않습니까.”
마리브는 관료의 설명을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게일 쪽을 힐끔거렸다. 게일은 웨슬리의 허리를 감은 채 사교를 즐기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먼저 행동을 내보이면 등을 보이게 되겠지. 마리브의 보좌관은 게일과 웨슬리의 부하들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었다.
‘어찌하려나. 게일.’
게일이 금화 1만 닢에 달하는 헌납금을 건의했을 때, 마리브는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거 괜찮겠노라, 서둘러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는 태도를 보여줬다.
실제로 상관없는 것도 맞았고, 이안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맞았다. 하지만 더 나아가, 훗날 이안을 써먹을 곳이 ‘마법부’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가 컸다. 은근한 여지를 던져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게일은 어림도 없겠지만, 마법부의 몇몇 아둔한 자들은 속여낼 수도 있으리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친목회를 파하면서까지 이안을 반겨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이안이라는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서로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냈다.
* * *
“…어우.”
좀 쑤신 로만드로가 조용히 기지개를 켰다. 쨍하니 화사했던 햇빛이 점차 짙어지며 노을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기다림에 지쳐 몸이 풀리는 게 당연지사. 하나, 옆에 앉은 이안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이안. 자네 괜찮나?”
“무엇이요?”
“허리 말일세. 허리. 젊어서 그런가. 나는 눕고 싶어 미치겠네그려.”
로만드로의 투덜거림에 이안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궁이라 그런지 더욱 자세를 반듯이 유지하는 것 같았다. 이안은 차게 식은 차를 내려다보며 짐작했다.
‘예상보다 훨씬 늦는 것으로 보아, 진짜 게일과 같이 있나 보군.’
그때였다.
똑똑.
“마리브 저하 드십니다.”
“헉!”
갑자기 들려온 기척에 로만드로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이안도 구겨진 웃옷을 자연스럽게 정리하며 문 쪽을 쳐다봤다.
그가 100여 년의 시간을 넘어와 처음으로 보는 황족이다. 따지자면 선조이며, 황궁의 영광을 함께 이어간 혈족 아니겠는가. 촌수로 따지면 남에 가까울 정도로 먼 사이겠지만.
끼이익.
문이 열렸다. 긴 금빛 머리를 하나로 묶은 벽안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인상적이다. 웃지 않아도 웃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로만드로, 오랜만이오.”
“마리브 저하를 뵙사옵니다.”
로만드로는 바로 허리를 굽히며 황실 예법을 따라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한 발자국 뒤에 있던 이안도 우아하게 손짓했다. 사실, 인사는 하는 것보다 받는 게 익숙하긴 하다만 이것도 영 어색하진 않았다.
“수고가 많았네. 가족을 두고 내려가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저하. 바리엘과 저하의 영광에 빛을 더하게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이안은 슬쩍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로만드로 치고는 굉장한 화술이 아니던가. 그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브라츠의 생활이 너무 좋았다’는 말을 연신 늘어놓았다.
의례적인 대화가 몇 번 오간 뒤.
“…그대가 이안이로구나.”
마리브의 시선이 로만드로를 지나 이안에게 닿았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이안. 주황빛의 짙은 노을이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마력을 개봉했을 때처럼, 아이의 왼쪽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마리브 저하를 뵙습니다. 이안이라 하옵니다.”
눈빛은 자신감 있되 오만해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에는 힘이 있되 거슬리지 않았다. 치켜든 턱선이며, 곧은 어깨, 단정히 서 있는 자세가 숱하게 봐왔던 귀족 그 자체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의외로구나.’
그 이상의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마리브는 앉으라 손짓하며 로만드로를 칭찬했다.
“로만드로가 황실 예법을 아주 잘 알려준 것 같군.”
“아닙니다, 저하. 이안 경이 워낙 출중하여 제가 알려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대 이상이라 해야겠지. 고작 첫인상 하나로 이만한 호감을 주기도 어려울 것이다. 세 남자가 착석하자, 하인들이 차게 식은 찻잔을 따뜻한 것으로 바꿨다.
“그래. 이안 경.”
아직 작위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귀족이 될 아이였다. 마리브는 나름의 존칭을 써주며 질문했다.
“중앙으로 올라오니 어떠한가?”
“듣던 대로입니다. 세계를 받치는 바리엘의 중심이라 칭송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진심이었다. 중앙을 처음 본 아이가 아니더라도, 황제 이안은 수도를 그리 여기고 있었다.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황자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로만드로는 모르겠지만, 황자가 응접실로 들어와 처음으로 진실하게 웃은 순간이었다.
“변경에서 있었던 일은 내 로만드로의 보고를 통해 파악하였네. 로만드로, 가져온 보고서는 금주 내로 처리하여 결재를 내리도록 하지.”
“예. 저하.”
“로만드로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지만, 이안 경은 고향을 떠나온 것이네. 꽤 많은 이들이 배웅해 주었을 것 같은데.”
이안은 방긋 웃었다.
그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마리브였다. 한데 질문이 저러하니, 숨겨진 의미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하옵니다. 저택의 사용인들을 비롯하여 영주민들이 밤낮으로 배웅식을 열어주었습니다. 접경한 천려인들도 마찬가지지요. 중앙으로 올라가면 한동안 볼 수 없음을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아쉬움을 달랬답니다.”
이안이 영지에서 어느 정도의 입지를 다져놓고 왔는지를 물어본 것이었는데, 대답이 꽤 만족스럽다. 민심과 천려족과의 동맹. 이 두 가지가 영주직을 찬탈하게 한 제일 큰 요소였으니.
“그렇군. 이안, 그대는 신뢰 있는 영주가 되겠어.”
“과찬이십니다. 모두 마리브 저하께서 도와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리브는 이안이 자신의 의중을 읽어냈다는 것 자체가 기특했다. 확실히 쓸모가 있다.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맥락을 이해하는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데르가 백작의 영향인가?’
사창가에서 살았다는 서자치고는 기세가 만만찮다. 아마 백작에게 수모를 당하면서 몸으로 깨우친 듯싶다. 거기에 대사막을 오가며 담도 키운 것인지, 황자와 대면하면서 떠는 기색이 하나도 없지 않나.
“신년회 일정은 알고 있겠지? 황실의 신년회는 언제나 특별하지만, 올해는 더욱 그러하다.”
바로, 천민 출신 이안의 귀족 작위임명식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바로 마력운용자 확인을 비롯하여 여러 행사가 연달아 잡혀있었다.
로만드로가 조심스럽게 끼어들며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오늘 막 도착한 터라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일정은 거의 추려졌네. 출궁하기 전까지 보좌관에게 전달하라 일러주마.”
“예. 저하. 유념하여 준비하겠습니다.”
“신년회 후에는 마법부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열려. 자네의 마력을 측정하고, 부서 발령을 진행할 터인데…….”
마리브는 이안의 왼쪽 눈을 쳐다봤다. 노을이 걷히면서 녹안으로 돌아온 상태다. 마리브는 본격적으로 말로 이루어진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 전에 이안. 자네는 스스로가 영주직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질문이 상당히 예민하고 난감하지 않나. 출신에 관해 묻는 건지, 능력에 관해 묻는 건지 모를 애매함이 들어있어서 더욱 그렇다. 가만 듣던 로만드로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라 하면 아닌 대로, 맞다 하면 맞는 대로 꼬투리를 잡힐 만한 질문이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 여기는 영주를 어디에다 써먹을 것이며, 그 정도가 지나쳐 자만한다면 모자란 것만도 못하다.
하지만 이안은 답이 정해져 있음을 아는 듯, 크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상당히 당돌하고 자신감 넘치는 대답.
로만드로는 들이마셨던 숨이 목구멍에서 턱 하고 막히는 걸 느꼈다. 마리브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흥미롭거나 불쾌할 때나 나오는 표정임을, 로만드로는 알고 있었다. 반면, 이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마리브 저하께서 결정하여 일구어내신 것이니, 감히 누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저는 저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완벽히 해낼 의무만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단순한데, 나를 천출 서자라 여겨 그런 것인가?’
빤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마법부를 거론하며 저리 묻는 의중이 투명하다 못해 단순하여 헛웃음이 들 지경이었다.
이안을 영주직에 앉힌 것은 자신임을 다시 확인받고, 충성을 맹세하길 바라며, 마법부에 들어가서 첩자 노릇을 성실히 하라는 것.
“말에 자신감이 있군. 나는 그런 자를 좋아해.”
“영광입니다. 저하.”
마리브는 흡족하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기류를 읽어내리던 로만드로도 그때다 싶어 차를 홀짝였다.
그런데 말이다. 이안은 마리브의 얼굴을 계속 뜯어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금발에 벽안. 물론 황실에서 주로 보이던 특색이긴 하다만…….’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에서 마리브의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별궁에서 황제의 침실로 통하는 복도에는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시대별로 걸려 있었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오가며 봤던 것들이니, 이안이 놓쳤을 리는 없다.
하지만.
‘저자를 초상화에서 본 기억이 없어.’
게일은 반역에 실패하는 게 확실하다. 그리하여 당연히, 적통이자 경쟁자인 마리브가 황좌를 잇겠노라 여기고 있었다. 이리 마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혹시 다른 후계자가 또 있는 건가?’
하지만 주목할 만한 인물이 없는 것 같았는데.
이안은 표정을 숨기며 복잡한 생각을 묻어두었다. 일단은 현재에 집중하여 황자의 신임을 얻어내는 게 중요했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당장 게일과 견줄 만한 자는 마리브가 유일한 듯 보였으니까.
“이안 경.”
“예. 저하.”
“중앙으로 내야 할 헌납금은 어찌,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가?”
굴라 매매를 통해 얻은 금화도 있고, 상급 마력석이 한가득하니 문제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가벼이 내저었다. 황제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자에게 패를 내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요. 저하.”
“흐음. 그것참 안타깝군. 그러면 내 좋은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하는데.”
마리브는 이안의 속내도 모른 채,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안의 거짓말을 눈치챈 로만드로만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절부절 차를 홀짝거렸다. 표정, 절대 들켜서는 아니 된다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