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6
제116화. 별궁의 사내
드르륵.
마리브는 티테이블 서랍을 열어 안경을 꺼냈다. 그리고 보좌관에게 손짓하여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그들 앞에 가죽 케이스를 덧댄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마력석이라고, 알고는 있는가?”
“네. 알고 있습니다.”
“크흡-!”
이안은 예의 있게 정좌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제 발 저린 로만드로는 사레들려 난리를 피워댔다. 이안이 마력석에 대해 숨기고자 하는 것 같은데, 바로 황자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왔으니.
“이런, 로만드로.”
“소, 송구하옵니다.”
마리브가 인상을 찡그리자, 보좌관이 가까이 다가와 손수건을 건넸다. 그러곤 조심스레 바깥으로 나가기를 권했다. 황자 앞에서 침 튀기며 기침이라, 경망한 일 아니겠는가.
“로만드로 님. 잠시 바깥에서 공기를 쐬시지요.”
“예에. 그러지요. 크흠. 실례하겠습니다.”
로만드로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이안을 걱정스레 힐끔거렸다. 저 없이 혼자 잘할 수 있겠나 싶었으나, 괜한 걱정이다. 이안은 어떤 동요 없이 계속해서 마리브의 얼굴만 살펴보고 있었다.
끼이익.
로만드로가 나가자, 마리브는 안경을 쓰며 손짓했다. 서류를 확인해도 좋다는 허락의 의미였다.
“마법부에서 부서를 정할 때, 아마 자네의 의중을 먼저 물어볼 것이네.”
이안은 종이를 넘김과 동시에 속으로 슬쩍 웃었다. 첫 장부터 상급 마력석 루론의 그림과 함께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아마 로만드로가 옆에 있었다면 사레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마법부 내 마력석관리부는 인력이 항시 부족하다 하지. 마법사들은 저들의 마법 수련과 정신 탐구에만 관심이 있고, 마력석 같이 부차적인 연구에는 딱히 흥미가 없는 듯해.”
“아무래도 검사들이 무기 연구보다 검 휘두르는 걸 더 좋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안 경을 보아하니, 학문적 탐구에 재능이 깊을 듯한데.”
마력석관리부로 입부하라는 명령이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따져봐야겠지만, 황자 앞에서는 무조건 알겠노라 답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예, 저하. 배움이 부족하여 항시 갈증을 느끼곤 합니다.”
게다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꽤 큰 수확이었다.
드문드문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마력석에 대한 정보를 이리 정리해서 주다니! 보고서 두께로 보아 마법부 내의 정보를 그대로 빼 온 게 분명했다.
“그거 다행이군. 자네가 마력석관리부로 배정되어 마력석 매장지를 알려준다면, 내 헌납금 사안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도록 하지. 특히 그 맨 앞 페이지의 루론이라는 걸 위주로 하여.”
금화 1만 닢을 주겠다는 게 아니라 도와주겠다는 말이었다. 아마 총회를 다시 열어 결정을 번복해 주겠다는 뜻 같은데…….
이안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살짝 벌렸다. 불합리한 제안은 둘째 치고, 마리브의 의중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게일이 루론 마력석을 차지하고자 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주축이 마법부였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만. 전혀 관련 없는 마리브까지 끼어드는 모양새로 보아 정치적인 수가 더 얽혀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론 매장지 하면, 브라츠를 뜻하는 것 아닌가? 물론 다른 곳도 있겠지만, 브라츠가 대형 매장지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발견하면? 그 뒤에는 어쩔 생각이지?
차라리 게일보다 먼저 루론을 독점하겠다, 이런 의도라면 일이 쉬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게일이 못 쓰게 루론을 다 없애 버리겠다, 하면?’
게일과 마찬가지로 이안에게는 까다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브라츠의 광산은 둘째 치고, 이안이 가져온 루론이 한순간에 증발할 수도 있었으니까.
이안은 우선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겠다는 뜻을 보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마리브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으며 안경을 벗었다. 경험상, 명령을 지시했을 때 ‘왜’를 되묻지 않은 자들은 대게 일을 잘 해내곤 했다. 마리브는 오히려 본인이 궁금해져서는 질문을 이었다.
“한데, 이안 경은 원래 그리 대답을 잘하는가?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늘 그리 긍정적인 말만 해대니, 오히려 의심이 가는군.”
이안은 마리브의 푸른 눈과 마주했다. 황자답게 표정을 읽기는 힘들지만, 은근히 묻어나는 장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심히 살벌하게 여겼을 질문이었지만 말이다.
이안은 바로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로만드로 님이 변경으로 내려왔을 때부터, 마리브 님을 뵈었다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지만, 오랜 기간 황자의 명령을 전달받지 않았나. 마리브는 소리 내 웃으며 소파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그렇군. 요즘 마력석 섞은 안료로 그리는 게 유행이라 하여, 내 후원하는 화가들에게 지원해 볼까 해.”
마리브는 분위기를 유하게 풀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보고서에도 실담물약에 관한 언급이 적혀있지만, 그걸 정치적인 의도로 해석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안의 능력에 달려있었다. 알아먹으면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고, 모른다면야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될 일 아니겠는가.
“그럼, 이만 일어서도록 하지. 흐음, 로만드로는 그대로 의무실에 실려 간 모양이니 들를 필요 없이 출궁하라.”
“예. 저하.”
“앞으로 전달할 것이 있으면 로만드로를 통하지 말고 보좌관에게 직접 전달하고.”
아직 한배를 탔노라 믿을 수는 없어도, 한 방향을 보고 있다는 건 인정하겠다는 의미였다. 이안은 다시금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인사를 남겼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나 또한 좋았네.”
“그럼, 이만.”
끼이익.
이안은 응접실 문을 나서자마자 복도 끝에서 서성이는 로만드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후다닥 달려와 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끄, 끝났나?”
“왜 안 들어오셨습니까? 가시지요.”
“아니이. 다시 들어가기가 좀 그래서. 근데 나 인사해야 하는데?”
“마리브 저하가 들를 필요 없이 나가라 하십니다.”
“허이고. 세상에나, 감사하다. 어서 가자!”
상사의 방에서 벗어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되돌아가려니 발걸음이 무거워 움직일 수 없었노라, 로만드로는 소곤소곤 민망한 투정을 부려댔다.
“그래서, 무어라 하시던가? 보고서는 또 뭐고?”
“로만드로 님. 아실 텐데요. 황궁에는 초상화에도 귀가 달려있는 법이라고.”
쉬잇, 이안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일단은 궁을 벗어나서 말해주겠노라는 신호였다.
“나가는 길에 마법부를 들렀다 가면 될 것 같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는 출궁하는 게 좋겠지요?”
“그렇지. 어두워지면 출입 담당 경비가 더욱 세심해지니 귀찮아질 걸세.”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거대한 본관 계단을 내려왔다. 수백 명이 동시에 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은 공간에, 오직 작은 발소리만 낮게 울렸다.
타닥타닥!
“마법부 돌아서 출궁하세.”
로만드로의 말에 마부가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두 사람을 실은 마차가 1황궁 본관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긴장이 쫙 풀린 로만드로가 흐느적거리며 끙끙 앓아댔다.
“아이고, 오랜만에 대면보고 하려니 이리 힘들어.”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로만드로 님. 혹시 황자 저하가 더 계십니까?”
“응? 황자 저하?”
이안의 물음에 로만드로가 식은땀을 훔치며 돌아봤다.
“저하들이라면 꽤 계시지.”
1황자 마리브와 2황자 게일을 포함하여 열댓이 있다는 말에 이안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한데 사실상 두 분 외에는 황궁에서 입지가 전혀 없다 보는 게 맞네. 3황자께서는 몇 년 전에 낙상하시어 돌아가셨고, 아래 4황자, 5황자는 너무 어리시거든.”
계승 순위로 따지면 그 이하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 아래의 황자들은 나이가 차더라도 순위에서 많이 밀렸고, 마리브와 게일을 능가할 만큼 역량이 뛰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현재 황제 폐하 옆을 유일하게 지키는 후궁이 한 분 있어. 딜라이나라고, 그분이 4황자와 5황자의 생모이네. 폐하를 대신하여 신년회를 준비할 정도로 신임을 독차지하는 분이시지.”
황후 자리는 비어있고, 수많은 후궁은 감히 권력 싸움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촛불처럼 빌빌대는 황제를 등에 업고 마리브, 게일과 어찌 싸우겠는가? 하지만 딜라이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황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가 믿을 만한 구석은 오로지 황제 한 명뿐이겠구나.’
마리브나 게일이 황좌를 이으면, 당연히 다른 후계자들은 견제라는 이름으로 숙청당할 게 분명했다.
“마리브 저하는 특히 딜라이나 님을 좀…….”
“싫어하시나 보군요.”
“무시한다는 게 맞는 말일 걸세.”
로만드로는 말 하나하나가 버겁다는 듯, 괜히 헛기침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마차 안에는 본인과 이안, 둘밖에 없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다른 황자들 중에 다음 황제가 나올 것 같은데.’
그저 습관처럼 매일 지나온 복도였다.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정보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확실한 기폭제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현 황제의 얼굴 같은 직관적인 조각 말이다.
“신년회 때 다 뵐 수 있겠지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리하겠지. 제국에서 제일 중요하고 큰 행사이니.”
신년회. 작위임명식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주 중요한 자리가 될 게 분명했다. 이안은 어둠 속에서 풍경이 점점 바뀌는 걸 알아챘다. 2황궁 중앙 본관에 다다른 탓이다.
‘다 왔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창문으로 얼굴을 붙였다.
“여기서 내려주십시오.”
“응? 여기서?”
“로만드로 님이 마법부 인근에서 목격되면 무슨 말이 나올지 모릅니다. 저는 아직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괜찮겠지만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바깥에서 잠시 보고 올 생각이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마리브의 부하로 알려진 로만드로가 서성였다가 무슨 소문이 나돌지 모른다. 황궁은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으니.
끼이익.
“이안.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달려오게.”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로만드로 님.”
이안은 마차에서 내리다 잠시 그를 돌아봤다.
혹시나 말이다. 별채로 갔을 때 나움의 마법 흔적을 발견한다면? 그리하여 이안의 원래 모습,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이 로만드로와 함께하는 마지막이 될 터였다.
‘아아. 그래. 베릭에게 인사를 제대로 할 걸 그랬다.’
그건 좀 아쉽군.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는 본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으니.
이안은 로만드로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쓰게 웃었다.
“진실로 고맙습니다. 베릭도 잘 거두어주시고.”
“갑자기 뭘, 새삼스럽게. 서둘러 다녀오시게나. 베릭 놈 늦으면 또 한바탕 지랄할 걸세.”
다녀오라는 말에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남긴 채 익숙한 길을 따라 걸을 뿐이다. 어느 순간 숨이 점점 차오르는 것을 느끼자, 이안은 저가 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세상으로, 그리고 나움을-’
구하고 싶다. 나움, 이안의 유일한 스승이자 친우여.
상앗빛 벽돌로 쌓인 작은 건물이 보였다. 마법부 경비들이 쓰는 쉼터였다. 저걸 기점으로 꺾어 들어가면 바로 별채다.
타악!
심장은 쿵쿵 뛰어오르지만, 발걸음은 뚝 하고 멈추고 말았다.
“…별채가 없어.”
없다. 분명 있어야 할 마법부 부속 별채 대신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수십 그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원이라 하기에는 미적인 관리가 영 엉망이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 하기에는 곳곳에 의미 모를 깃대가 꽂혀있었다.
저벅.
이안은 나무 사이를 걸으며 허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달빛이 유독 밝게 내려앉았다. 색색의 깃발 역시 바람결을 따라 휘날렸다. 신비로운 느낌도 잠시, 이안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아하. 그대가 이안?”
솨아아아.
검은 머리의 벽안. 거대하고 다부진 체격과 더불어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가 심히 냉랭해 보이는 사내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지만, 이안은 그자가 마리브의 형제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이거 반갑군. 나는 게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