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19
제119화. 바르사베
이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은 대자로 바닥에 뻗어있었다. 눈과 흙이 섞여 엉망진창이건만, 그보다 더한 것이 두 사람의 상태였다. 줄줄 흐르는 코피가 멈추질 않았으니.
“베릭. 괜찮은가?”
“와, 씨, 이거 아프다. 아프다!”
“그래. 괜찮아 보이는구나.”
“아프다고!”
그래도 베릭은 저리 아프다는 말이라도 가능하지, 바르사베는 끙끙 앓는 신음만 내며 몸을 웅크렸다. 미숙하게 마력을 개방한 게 패착이었으리라. 한 번에 힘이 빠져나가 전투를 제대로 이어갈 수 없음이 제일 컸다.
이안은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슬쩍 확인했다.
“…우는가?”
“누가? 누가 운다고!”
우는 거 맞네. 바르사베는 분에 차서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입술은 찢어 먹을 것처럼 잘근잘근, 울음을 참아보려 하지만 쉬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안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페트레이오의 여식이라? 어제부터 저택을 맴돌았던 것이 자네였군.”
“그래. 그러니 지금 나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내가 다시 너를…….”
바르사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리 돌아가신 것도 허망하여 미칠 노릇인데, 복수는커녕 이리 당해 버리니 수치도 이만한 수치가 없다. 나름 황궁친위대 소속 기사였건만, 견습의 한계인 듯하다.
“몰린이 그러던가? 내가 페트레이오를 죽였다고.”
이안은 단박에 바르사베에게 정보를 흘린 게 누구인지 알아챘다. 몰린, 게일의 가호로 인해 변경에서 목숨을 부지하여 올라온 행정부의 늙은이. 아마 잘하면 신년회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몰린? 그 영감탱?”
“분명히 말해두지만, 우리는 페트레이오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독극물로 얼굴을 짓눌러 자결한 것을 저택으로 데려와 치료해 주지 않았던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행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페트레이오의 죽음에 어떤 책임도 없는 게 사실이다.
“우리를 먼저 죽이려 한 것은 그대의 아버지이며, 주인과 신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 역시 그대의 아버지이다.”
“거짓말!”
“어째서 거짓말이라 생각하지?”
“아버지는, 아버지는…….”
“그대를 두고 갈 리 없다 여겼나?”
정곡을 찔렀나 보다. 바르사베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부하로서도 괜찮은 자였지만, 아비로서도 나쁘지 않은 자였던 것 같다.
“바르사베. 명확히 하라. 그대가 아비의 못다 한 임무를 하겠노라 맹세한다면 나를 죽이는 것이 응당 맞으나, 아비의 복수를 하겠노라 하면 잘못 짚은 것이다.”
페트레이오는 신념에 따라 움직였고, 결정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만큼 기사로서 명예로운 죽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가족이 느끼는 상실감은 다른 문제겠지만 말이다.
“그대도 기사라면 페트레이오의 마지막을 이해할 수 있겠지.”
기사라면, 혹은 기사로서.
바르사베는 멍하니 땅 한끝만 응시하다 코를 훌쩍거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에서 피 맛이 진하게 났다. 이안은 바르사베가 진정된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혹여 몰린을 믿고 따르는가?”
“아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그렇다.”
긍정했다면 죽이려 했다.
몰린이 저를 죽이기 위해 첩자를 보낸 것이고, 페트레이오의 못 이룬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목적이 확실해지므로. 하지만 그자와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하니…….
‘조금 쓸모가 있으려나.’
이안은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베릭을 돌아봤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옷을 툭툭 털며 마찬가지로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굉음이 한 번 있었으니, 경비대가 오는 것도 시간문제다.
“하지만 몰린 경이 일러준 것은 맞다. 변경에서 올라오는 이안이 아버지를 죽였노라고.”
바르사베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섰고, 여전히 이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살기만 가득한 시선은 아니었다. 의심과 불신 그 언저리 사이로 녹아드는 시선. 적어도 이안을 죽이겠노라는 의지는 사라졌다.
“…페트레이오가 어찌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군.”
“뭐? 무슨 말? 아버지가 무슨 말을 남겼어?”
이안은 일부러 중얼거리며 말을 흘렸다. 바르사베가 한 걸음 다가오며 되물었으나, 그는 그만큼 뒤로 물러서며 웃기만 할 뿐이다.
“궁금한가?”
찔러보듯 물어본 적이 있다. 페트레이오에게, 가족이 있다면 후환이 두렵지 않냐고. 하나 그는 침묵으로 대답했었다. 이제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대답이다. 여식이 저리 씩씩하니, 걱정할 것 없었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면 이리 몰래 따라붙을 게 아니라, 격식과 예의를 차려 저택에 방문하라. 그리하면 내 그대에게 아버지의 반지도 함께 넘겨주겠다.”
페트레이오의 반지. 은침에 독이 묻어있어 조사를 위해 밀봉한 상태로 가져왔다. 아마 바르사베가 본다면 그것이 페트레이오 본인의 물건인지, 아니면 몰린이 자결용으로 따로 마련해 준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 터. 그것은 곧 몰린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가자. 베릭.”
“어? 저거 안 죽여?”
“되었다. 여기서 죽이면 일이 어찌 될 줄 알고.”
신년회를 앞둔 시기. 중앙에는 이안을 적대시하는 세력이 바글바글했다. 비단 게일과 몰린뿐만 아니라, 천민 출신으로 가주에 오른 그를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반 귀족도 많을 터.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시기에 제아무리 상대가 첩자라 한들, 꼬투리 잡힐 여지를 줄 수 있다.
“바르사베. 그대는 시기를 참 잘 잡은 것 같네.”
“쟤가 또 죽이려고 덤벼들면 어떡해?”
“그때는 베릭 너도 무기가 있을 터이니 괜찮다.”
“어? 아하하! 그렇지. 내가 검만 쥐면 또 다르지.”
무엇보다, 이안을 전력으로 죽이고자 했으면 밤중에 침입하여 사달을 냈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바르사베는 그러지 않았지. 적어도 상관없는 자들을 휘말리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 아니던가.
“또한 내가 죽으면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 어디 있는 지 모르니, 곤란하지 않겠나? 안 그런가? 바르사베.”
이안은 혹여 못 알아들었을까 봐 넌지시 말을 짚어줬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경비대가 거의 당도할 시간이다.
타닥타닥!
“이쪽이다!”
“이쪽!”
아니나 다를까, 골목을 빠져나오니 반대쪽으로 냅다 뛰어 들어가는 경비대 뒷모습이 보였다. 굉음의 출처를 알아내기 위해 근방을 이 잡듯 뒤질 것이다.
“베릭, 고생 많았다. 서둘러 피하자.”
“이안, 나 추워. 배고파. 졸려.”
“거지의 중요 요소를 다 갖췄구나.”
“이게 누구 때문인데!”
이안은 베릭에게 서둘러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피투성이인 베릭을 보며 흠칫거리는 것도 잠시. 슬금슬금 길을 피해주며 지나갔다.
베릭은 골목 구석에 쌓인 눈을 퍼서 얼굴을 박박 문질러댔다.
“피만 닦아낸다? 나중에 고기 사줘. 알았지?”
“알겠다. 가서 옷도 새로 갈아입자. 그건 버리는 게 낫겠어.”
안 그래도 누더기 같은 옷인데, 맨몸 전투로 인해 너절했다. 이안은 서둘러 로만드로가 가 있는 의상실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십여 분 만에 가게에 도착했다.
띠링.
청명한 방울 소리와 함께 훈기가 훅 올라왔다. 달착지근한 향수 냄새도 잔뜩 섞여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로만드로가 무의식적으로 뒤돌아보다 까무러쳤다.
“세상에!”
“좀 늦었습니다.”
“아니, 베릭. 시궁창에서 구른 게냐? 꼴이 그지구나, 그지!”
뛰느라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진 이안과 달리, 베릭은 로만드로의 표현 그대로 시궁창에서 구르다 온 것 같았다. 비비안나마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입을 떡 벌렸으니. 의상실 마담은 정녕 저자가 손님이 맞는지, 로만드로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비비안나 부인, 옷은 봐주셨나요?”
“아, 네네. 마침 디자인 선택이 막 끝났어요. 요즘 남성복에서 유행하는 건 살짝 여유 있는 라인에 밝은색 정복. 거기에 테슬을 가볍게 다는 거라 하더군요, 마담?”
“아아. 실례했습니다. 잠시만요.”
부인의 채근에 마담이 정신을 후딱 차리고 마네킹을 줄줄이 가져왔다. 베릭이 보기에는 죄다 같은 옷이었지만, 이안은 하나씩 꼼꼼히 따지며 의상을 훑었다.
“밝은 게 유행이라 하나, 베릭은 옷을 험하게 쓰니 어두운 거로 하지요. 저는 흰색으로 하겠습니다. 이쪽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군요.”
“탁월하신 안목입니다.”
이안의 선택에 마담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사탕발림이 아니라, 의상실에서 제일 잘 나가는 디자인을 고른 것이다. 덩달아 제일 비싼 옷감이기도 하고.
“그리고 디너에서 입을 것은?”
“이쪽 라인으로 보시면 됩니다.”
“음, 다른 건?”
비비안나는 차를 홀짝이며 그런 이안의 모습을 지켜봤다.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적으로 이안의 행동이 특이한 건 사실이었다. 변경 사막을 주된 무대로 활동했던 이안이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젊은 귀족들보다 옷 고르는 게 자연스러웠으니 말이다.
“이거랑 이거? 뭐가 다른데?”
오히려 베릭과 같은 반응이 자연스럽지 않나. 단추의 모양이나, 안감이 어찌 다른지 따위를 비교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비비안나에게 도와달라 했지만, 전혀 손쓸 게 없었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상의와 하의는 물론 코트와 구두 그리고 장갑까지 한 세트로 맞춘 이안은 베릭을 힐끗거렸다. 영 어울리진 않지만, 그래도 황실에 들어서기 위해서 구색은 맞춘 것 같다.
“감사합니다. 가격은 다 하여 금화 다섯 닢입니다.”
평민 한 명의 월 소득이 금화 한 닢인 걸 생각하면 참으로 경악스러운 가격이었다. 베릭의 입이 떡 벌어졌지만, 이안은 우아하게 수표를 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구경하던 로만드로가 일어나서 뭔가를 첨언하려는 순간이었다.
스윽.
이안은 금화 여덟 닢을 적어냈다. 피팅을 도와준 마담에게 주는 팁이자, 일종의 허세였다. 이곳은 중앙의 귀족들이 주로 찾는 의상실이었으니, 그들이 떠나면 분명 마담은 다른 귀족들에게 이안에 대한 얘기를 흘려댈 터였다.
“마감을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다면 호의적인 인상을 심어둠과 동시에, 재력과 씀씀이가 귀족 그 자체라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뜨내기 변경 촌놈보다는 차라리 졸부라는 이미지가 귀족 사이에 스며들기 좋을 터이니.
“잘했네.”
로만드로 역시 그걸 일러주려 일어선 참이었다. 이안이 자연스럽게 계산을 처리하자, 은근슬쩍 엄지를 들어 보이며 칭찬했다. 이안은 연신 거울을 보며 어색해하는 베릭을 돌아봤다.
“베릭. 그건 다시 마담에게 주고, 새 옷으로 갈아입거라. 상점가를 한 바퀴 돌고 네 검을 찾으러 가야 하니.”
“이거 입고 가면 안 돼요? 주인님?”
“그래. 안 된다.”
“아아아. 신년회 언제라고? 이거 진짜 멋지다. 마음에 들어.”
거울 앞에 착 붙어서는 연신 제 몸만 둘러보니, 이안은 로만드로와 재밌는 시선을 나누며 웃기만 했다. 그 순간이었다.
퍼엉!
“어? 또? 또 뭐 터졌다!”
바깥에서 큰 굉음이 나자, 베릭이 반사적으로 창문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로만드로와 비비안나는 차분했는데, 바로 황궁에서 곧 있을 신년회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었던 것이다.
“기사님. 너무 놀라지 마세요. 신년회 기간을 알리는 황궁의 신호랍니다. 하늘을 보세요. 곧 꽃가루가 눈송이처럼 떨어질 터라,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
비비안나의 말에 이안 역시 베릭 옆에 붙어 창밖을 올려다봤다. 100년 전의 바리엘에서는 이런 개회도 하였구나, 싶어서.
“어! 진짜다!”
푸른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꽃가루. 금빛과 연분홍빛, 그리고 흰색의 반짝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안은 그제야 왜 자신의 시대에는 이것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이것도 마법이구나.’
마법사가 대폭 줄었으니, 이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진정한 신년회의 시작을 알리는 빛이었다.
퍼엉!
“오! 또 터진다!”
베릭이 발을 동동 굴러대며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데, 저쪽은…….
“대장간 쪽 아닌가?”
“그래. 그쪽 방향이구나.”
“내 눈에 검은 연기가 보이는데, 이안도 그래?”
연기?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돌렸고, 이내 솔솔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