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
제12화. 제안
첼이 의상실에 간 사이, 응접실엔 이안과 몰린만 남게 되었다.
“국경을 넘어가면-”
조용한 응접실.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몰린의 평이한 말투에 이안 역시 고개를 들었다.
“이곳이 많이 그리우시겠습니다.”
“고향은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너무 아이답지 않은 대답이었나? 그는 잠시 고민하였으나, 몰린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수도에 관심이 많아 보이시던데.”
“아무래도요. 바리엘 국민이라면 누구나 수도 땅을 한 번쯤은 밟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황궁과 교황청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다. 애국의 시발역이자 성지순례의 종착역과 같았으니.
이런 거창한 이유를 제하더라도, 수도는 매달 자잘한 축제와 행사를 진행했다. 아이에게, 그것도 빈민의 서자에게는 꿈같이 화려한 곳일 터.
“안타깝습니다. 두어 달 뒤에 국경을 넘으면 기회가 영 없을 텐데요. 그럼, 첼 도련님은 수도에 올라가신 적이 있나요?”
이안은 방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 없겠지? 이곳은 수도에서 제일 먼 변방이었으니까.
바리엘 귀족 자제들의 사교계 데뷔는 황제의 소관이었다. 매해 벼가 제일 아름답게 익는 가을의 어느 날, 성인식을 앞둔 풋내기 귀족들을 모아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는 것.
“글쎄요. 시일이 더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두 해 정도 지나면 첼과 이안도 사교계에 데뷔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당장 내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년을 기약할 순 없었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백작님께 부탁하여 수도 여행을 해보시지요. 첼 도련님은 기회가 많겠지만 이안 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뉘앙스가 첼을 묘하게 강조했다. 마치 그와 저의 처지를 비교하며 자극하려는 듯이.
하지만 이안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마음 같아서는 뜸 그만 들이고 본론만 말하라 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은 순서가 있는 법.
“아직 부족하여 배울 것이 많아서요. 엄두도 못 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몰린은 반신반의했다. 총명한 것이 고작 글자 하나 못 떼어 끙끙댈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이안이 방싯 웃으며 물었다.
“수도로 가면 황궁을 구경할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데르가 백작 가문의 도련님들은 제가 특별히 게일 저하께 청하여 초대장을 발부하도록 하지요. 저번에 보니 마법사를 궁금해하셨죠?”
몰린의 눈이 빛났다. 이안의 금빛 눈이 허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가늠하기 위해. 하지만 이안은 게일이라는 이름을 되씹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익숙하단 말이지.’
“게일 저하 휘하에는 훌륭한 마력 운용자가 많답니다. 분명 좋은 만남이 될 것입니다.”
“아.”
이안은 냅킨으로 입가를 가리며 어이없이 웃었다. ‘게일’과 ‘마력운용자’라는 연관 단어 덕분이었다. 빛바랜 기억 아래 적혀있던 그의 이름이 기억났다.
“그렇군요. 정말 좋은 만남이 되겠어요.”
황제로서 각인해야 할 대상은 딱 두 종류.
공을 혁혁히 세웠거나 혹은 반역과 관련이 있거나.
특히 후자는 후환 처리가 중요했기에, 시간이 지나도 소홀해서는 아니 됐다. 100년이 지나도 주기적으로 조사하여 혈계가 확실히 끊어졌는지 추적했으니.
‘2황자, 게일. 반역자였군. 실패한.’
유달리 귀에 익었던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게일의 정체가 그것이라면…….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몰린을 쳐다봤다.
혹시, 그날 응접실에서 마력의 흔적을 본 것일까?
‘게일의 반역 주축 중 하나가 바로 마법부였지.’
그것이 이안에게까지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안 그래도 귀한 마법사들이 대거 숙청되는 사건, 황제 이안이 그 부담을 그대로 짊어진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오백여 명에 가까운 마법사들이 이안 세대에서는 고작 백 명에 남짓했다.
‘맞아. 그래서 한번은 보고서를 갈가리 찢은 적도 있었지. 어찌하여 마법사를 끌어들여 그 사달을 내었냐고.’
이제 좀 명확해졌다.
몰린이 이안에게 접근하는 이유 말이다.
이렇게 나오는 거 보니, 응접실 때 무언가 눈치챈 게 분명했다. 마력 운용자라, 마법사가 되기 전 인재를 사전에 회유하는 것이다.
“어디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아닙니다. 그저…….”
이안은 몰린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몰린이 마력을 확신했든 아니든, 현재 이안의 상황에서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잘만 이용한다면 충분히 반길 만한 일이다.
이안은 천천히 제 가슴의 브로치를 보란 듯이 만지작거렸다.
“눈이 좀 따가워서요.”
그리고 이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브로치로 대화가 녹음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그들은 소리 없이 의중을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래요? 잠시만요.”
몰린은 잠시 놀라더니, 이내 일어서서 탁상으로 걸었다. 그리고 작은 메모지와 펜을 들어 보였다.
“이걸 써보시겠습니까?”
“안약이군요. 감사합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메모지를 건네며 이안 가까이 앉았다. 펜을 갈기는 손길이 시원시원했다.
-마력석입니까?
끄덕. 이안은 고개로 긍정했다. 몰린은 관자놀이를 잠깐 짚은 다음, 인상을 찌푸렸다. 수도에서도 귀하다는 물건인데, 변방의 백작이 어떻게 이런 걸 가졌는지 원.
스윽.
하지만 필담하는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거듭 생각했던 것이 적혔다.
-국경을 넘고 싶으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프 볼을 싹싹 긁는 소리가 함께 잡혔다.
-적자인 첼이 있거늘, 불합리하지요. 이안 님은 생모도 따로 있지 않습니까? 바리엘을 떠나면 백작 부인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그가 예상했던 서문과 일치했다.
아이의 유일한 약점인 생모를 언급하며 마음 깊은 곳의 반발심을 찔러댔다. 이들은, 첼 대신 이안이 이곳에 남았으면 하는 거다.
‘내가 마력을 쓰는 걸 봤다면, 예상대로 게일 쪽으로 끌어들여 세력에 힘을 보태려는 것이고, 아니라면…….’
반역자들이니까 딱 하나지.
이안을 허수아비로 세워 브라츠 가문의 영지를 먹겠다는 뜻이다. 경영이 엉망이었지만 그로 인해 병사 수는 다른 곳보다 몇 배나 많았다.
무엇보다 반란의 성공은 속전속결이 핵심. 변방의 다른 귀족들이 지원군을 보내기 전, 여기를 주둔지로 둔다면 효과적인 저지를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군. 데르가는 어찌하고?’
이러나저러나 백작의 협조를 받는 것이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다.
‘현 실세는 1황자 쪽이니 데르가와는 당장 견제하는 사이. 2황자 세력의 접근이 나쁘지는 않았을 터인데? 당장 반역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은근한 세력 형성 정도로 찔렀을 터. 하지만 이안을 꾀는 것으로 보아 불발된 게 자연스러운 가정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안은 데르가를 알고 있었다.
그처럼 탐욕스럽고 처세에 예민한 자가 2황자의 접근을 거절하다니? 차라리 보류하여 줄타기하고 있다면 설득력이 있겠다만…. 몰린의 태도로 보아 아예 거절한 것 같다.
이안은 담담한 눈길로 몰린을 쳐다봤다.
-저를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원하신다면요.
어째서?
어째서 데르가는 중앙의 세력 다툼에 관심이 없나?
순간, 이안은 집무실에서 봤던 서류가 떠올랐다.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높은 군사 비율. 과세가 폭탄 수준이었지만, 그걸로 감당이 될까 싶었다. 오죽했으면 영지에 특수자원이 따로 있나 생각해 볼 정도였으니.
‘이놈 이거 혹시…….’
황궁으로 바치는 세금을 떼먹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모든 정황이 들어맞았다. 최대한 중앙과 얽히지 않으려는 태도와 비정상적인 경제 구조, 비농기의 바쁜 업무까지.
톡톡.
몰린은 이안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마지막으로 적힌 말에 답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이안은 작은 손으로 답장을 써 내렸다.
-제게 뭘 원하시나요?
말이 잘 통하는군. 몰린은 숨김없이 그날의 금빛 눈을 언급했다.
-혹시 이안 님. 마력운용자 아니십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안은 딱 잡아뗐다. 아직 마력운용자라는 게 밝혀지면 득보다 실이 많았다. 게다가 상대는 마법부를 등에 업고 반란을 꾀하려는 자. 신변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숨기는 게 현명했다.
몰린은 말없이 메모지를 톡톡 두드렸다. 거짓을 잡아내려는 노인의 눈이 날카로웠다.
-그거 아쉽습니다.
-혹시 그 때문에 말을 물리실 건가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이안 님이 필요해요. 잘만 도와주신다면 수도로 올라가 이안 님의 입적을 반대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국경을 넘어갈 이유도 없지요.
“옷은 좀 편하십니까?”
그때, 밖에서 드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안으로 들어갈 터이니 대화를 마무리하라는 신호였다.
몰린은 당황한 기색 없이 메모지를 재떨이 통에 그러모았다. 거기에 작은 불씨를 넣고, 뚜껑으로 봉했다.
끼익.
“어?”
옷을 새로 맞춘 첼이 문을 열다가 멈칫거렸다. 분위기가 묘하게 딱딱해서 그런 것이다. 몰린은 인자하게 웃으며 첼을 반겼다.
“이런. 역시 그쪽 의상실 마담 실력이 좋아요.”
“드고르 경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감사합니다.”
“제가 물을 엎지른 탓인데요. 어서 식사를 마저 하시죠. 그나저나 맥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것인지.”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다시 열렸다. 경비는 어디 가고 맥 혼자였다.
“술통에 빠지면 익사가 아니라 술독으로 죽을 자더군요. 시음해 보라 하니 홀짝이다가 맛 갔습니다.”
맥의 유쾌한 말에 오찬 분위기가 단번에 살아났다. 이안은 미소로 화답하며 남은 고기를 썰어 먹었고, 몰린은 두 부하에게 눈짓했다.
‘어떻습니까?’
‘예상대로 영민하다.’
첫 오찬에서 몰린은 백작에게 게일의 의중을 전했으나, 데르가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난감해하며 문을 여는 순간, 이안의 금빛 눈과 마주한 것이다. 잘만 하면 가치가 있다. 특히 마력 운용자라면 신이 내려준 기회라 여길 참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예의 주시해.’
몰린은 왼쪽 눈썹을 까딱거리며 맥과 드고르에게 지시했다.
한편, 이안은 왼손의 포크와 오른손의 나이프를 내려다봤는데, 꼭 제 손에 황궁과 천려족 모두가 들린 것 같았다.
스윽.
그렇다면 가운데 놓인 스테이크는 브라츠가 될 것이다. 둘을 동시에 이용한다면, 아주 깔끔하게 잘라 먹을 수 있으리라.
“고기 맛이 역시나 훌륭합니다.”
이안은 한마디 보태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호위병이 곯아떨어졌으니 오늘은 멀리 못 갈 듯합니다. 식사 후 소화할 겸 공원 산책이라도 할까요? 몰린 경이 말씀하신 호수를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