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1
제121화. 신년회
이안은 가죽 장갑에 손을 끝까지 밀어넣으며 미니의 손길을 받았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완벽하게 뒤로 넘기기 위해서였다. 이안은 정복과 동봉된 테슬을 가슴팍에 달며 뒤를 힐끔거렸다.
“아하하. 나 완전 잘 어울리죠?”
“그래. 이래서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나보다.”
“로만드로 님도 평소보다는 좀 낫네.”
“어쭈? 칭찬이 가면 그대로 돌아와야지, 어찌 반토막 내어 오느냐?”
베릭 역시 평소 풀어헤쳤던 머리를 단정히 묶고, 단추를 목 끝까지 잠갔다. 허리춤에 찬 낡은 검집이 어울리지 않게 툭 튀었으나, 어차피 회장에 들어가려면 무기를 모두 맡겨야 했기에 상관없었다. 로만드로까지 복식을 제대로 갖춰 입으니, 확실히 실감 났다.
‘오늘이 진짜 그날이구나.’
미니가 다 되었다는 듯 앞으로 돌아와 방긋 웃었다. 옆에서 조금씩 거들던 비비안나 부인 역시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쩜, 이리 화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부인.”
“진심인걸요. 아마 회장에서 이안 님이 제일 반짝일 거예요. 랄톤 후작가의 아드님도 잘생겼다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비교가 안 되지요. 암요.”
비비안나는 저의 조카라도 되는 것처럼, 연신 이안의 의연한 자세에 감탄하며 웃었다. 베릭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비비안나! 나는요?”
“오, 베릭 님도요. 아주 멋지세요.”
“어라. 말에 영혼이…….”
“자자. 이제 그만하고 서둘러 출발하지. 황궁으로 들어가는 마차가 줄지어 있을 걸세. 평소보다 막힐 터이니, 일찍일찍이 가는 게 좋아. 게다가 이안은 신년회 주인공 아닌가? 가서 지시받을 사항도 많으니까.”
로만드로가 베릭과 비비안나를 떼어놓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소파에 몸을 말고 누워있는 하샤가 헤벌쭉 웃었다.
-잘 다녀오시게.
“그래. 늦을 것이니 하샤도 쉬고 있거라. 베릭! 출발하자꾸나. 옷 구겨지지 않게 바른 자세로 걸으렴.”
세 남자는 비비안나와 미니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평소와 달리 마차 안에는 향긋한 향기까지 감도는 듯했다.
끼이익!
“다녀오겠습니다!”
“비비안나,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이안 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히이잉!
이안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마차가 출발했다. 황궁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평소보다 고급 마차가 즐비한 것 같았다. 처음 들어서는 황궁에, 베릭이 창문에 얼굴을 딱 붙이고서 눈을 반짝였다.
“미쳤다.”
“침 떨어지겠구나, 베릭.”
옆에서 함께 달리는 마차들은 모두 각 가문의 인장 찍힌 깃발을 화려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본인이 어디의 누구인가만큼 자랑스러운 게 없는, 귀족들의 장엄한 기세였다.
타닥타닥!
하지만 이안은 특별한 신년회의 주인공. 다른 귀족들이 입궁 절차를 차근차근 밟는 동안, 이안의 마차는 황궁 직원의 인도에 따라 샛길로 빠져 바로 1황궁 본관 대연회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끼이익.
“어서 오십시오. 이안 님. 로만드로 님. 신년회의 작위임명식 담당관 칼입니다.”
마차에서 내리자, 황궁 담당관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이안을 맞이했다.
주인공은 무릇 나중에 등장하는 법 아니겠는가. 대연회장 안쪽 별실에서 대기 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서서히 입장하기 위한 방침이었다.
“마차가 생각보다 많이 도착했던데.”
“아무래도 이번 신년회를 기대하시는 귀족분들이 많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변경의 천민이 마력운용자인 것도 모자라 마리브의 눈에 들어 가주와 영주직을 단번에 꿰찼으니, 다들 이안을 ‘구경’하고자 함에 발걸음을 서두른 것이다.
“이미 로만드로 님께서 전언하셨겠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년회가 시작되면, 신탁의 빛이 점화될 것입니다. 그때 입장하시어, 잠시 대기하셨다가 작위와 가문 명을 하사받으시고 바로 마력확인식을 진행하시면 됩니다.”
말은 간단했다. 간단한데, 중간중간 비어있는 시간을 귀족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어찌 보면 신년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지 않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바짝 긴장한 로만드로와 달리 이안은 소파에 풀썩 앉으며 느긋한 자태로 어깨를 살살 돌렸다.
“신탁의 빛으로 마력도 검증하나?”
“그렇습니다.”
말이 거창하지, 사실은 그저 장식용으로 만든 마력 일루전이었다. 마력운용자의 힘에 따라 물결처럼 반응하는데, 아무래도 마법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퍼포먼스 식으로 화려하게 퍼지는 것이 특징이었다.
한마디로 보여 주기 식 행사란 뜻.
‘흠. 망신 줄 생각이 있다면, 아마 그때가 제격일 터다. 어지간한 마력에는 반응하지 못하게 수를 써두는 거지.’
마력에 감응하여 빛이 크고 장엄하게 뻗어 나가면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한 듯 안 한 듯 조용히 흐트러진다면 그것만큼 웃음 사는 일도 없으리라.
“이안. 잘할 수 있겠는가?”
“예법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내가 나서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심장이 뛰나 모르겠어. 어휴. 진짜.”
로만드로가 손톱을 딱딱 깨물며 몸을 떨어댔다. 반면 베릭은 그저 모든 게 신기하다는 듯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이상한 조합인지라, 담당관은 살짝 떨어진 채 그들을 주시하기만 했다.
똑똑.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뉘엿뉘엿 조금씩 내려간다 싶을 때,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등장하기에 최적의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자문관이 깍듯하게 문을 열어주며 이안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베릭. 너는 로만드로 님만 따라 다니거라.”
베릭이 저만 믿으라는 듯 엄지를 들며 웃었다. 언제나처럼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기다란 복도를 걸을 때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는 것 같다. 저 멀리, 중앙 계단 아래, 수많은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이쪽입니다. 입장하시겠습니다.”
“후우.”
숨을 내쉰 것은 로만드로였다. 이안은 옷깃을 단정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들이 양옆에서 거대한 문을 열어주었다.
끼이익.
“어머, 안녕하세요. 부인.”
“지난주 티 파티 이후로는 처음이네요.”
“오. 그대가 샬롯 경이구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얼마 전에 군대를 다녀왔다지?”
“오늘 레이디의 드레스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점점 열리는 틈. 귀족들의 대화가 틈새로 밀려 나왔다.
복도의 은은한 조명과 달리, 대연회장 안쪽은 대낮처럼 밝고 화려했다. 마법으로 띄운 정령 수백 마리가 하늘을 유영하여 볼거리를 선사했고, 악단의 완벽하고 고아한 선율이 모든 것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듯했다.
타악.
이안이 연회장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제일 가까이 있던 귀족들이 하던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틀었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부인들의 눈이 커지고, 사내들은 ‘저것’ 좀 보라며 턱을 가볍게 움직였다. 도미노가 쓰러지듯, 연회장의 기묘한 기류가 이안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베릭. 이쪽.”
“어엉? 벌써요?”
입장과 동시에 로만드로는 베릭과 함께 옆으로 빠졌다. 로만드로도 이곳에서는 한낱 평민 자문관. 이안에게 귀족들을 이어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저것 좀 보십시오. 그자입니다.”
“아아. 브라츠 변경백 서자?”
“세상에. 생각보다 더 어리네요.”
이안은 홀로 붉은 융단 카펫에 올라서서는 귀족들을 훑어봤다. 꼼짝 않고 서서는, 시선만 느릿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린 것이 어찌나 독하면 제 아비를… 무서워요, 정말. 또 변경 야만족과 친하다 하니,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죠.”
“언니. 쟤 좀 괜찮지 않아?”
“미쳤구나? 정신 차려. 천민 출신이라고.”
“마력운용자라면서요? 한데 어찌 마리브 저하와…….”
노골적이다 못해 따갑다. 그들은 자못 신기한 구경거리가 나타났다는 듯, 하대하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구석으로 돌아 나온 로만드로는 그걸 보면서 아랫입술만 깨물어댔다.
‘이럴 줄은 알았으나, 막상 눈으로 보니 더하구나.’
기득권 세력의 고고한 기세를 어찌 홀몸으로 꺾으랴. 로만드로는 서둘러 황제 폐하가 등장하여 이안을 주인공으로 추대해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스윽.
하지만 그 순간.
이안은 턱을 가볍게 들고 웃었다. 태생부터 타고난 것처럼 우아하고 자신 있는 미소였다.
‘웃으십시오. 폐하.’
이안은 나움의 말과 함께, 처음 황제로서 참석했던 연회를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황제를 잡아먹기 위해 득실댔던 뱀 같은 자들과 비교한다면, 이 정도는 상당히 부드러운 상황이라 여길 수 있을 터.
‘내면의 힘은 굉장해서,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전달되는 법입니다. 스스로 중심이라 여기십시오. 그러면 상대가 폐하를 중심이라 여기고 다가올 것입니다.’
이안이 카펫을 걷기 시작했다. 올곧게 뻗은 허리와 부드러운 턱선, 그리고 실로 여유로운 시선 처리가 도저히 변경의 천민이라 여길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언제나 웃으십시오. 폐하가 웃으면 세상이 웃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울면, 세상은 더 크게 웃을 것입니다.’
스윽.
이안은 카펫을 밟고 있는 한 귀족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가 가야 할 길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이안이 말없이 방긋 웃자, 사내는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서 주었다.
“아, 이런. 실례했소.”
“아닙니다. 혹시 세르오 가의 영식이십니까?”
이안이 힐끗, 그의 가슴팍에 달린 인장을 알아채고 말을 붙였다. 슬쩍 찔러본 것이긴 하다만, 회귀 전 봤던 눈에 익어 있는 문양이었다. 당황한 사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이름을 말했다.
“말론 호프 세르오입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이안이라 합니다. 오늘 성(姓)을 받는지라, 말씀드릴 이름이 짧아 아쉽군요.”
“아아. 그래요. 맞아요. 그대가 이안이지요.”
“안녕하세요. 날이 참 좋지요? 저는 알레나라 세르오랍니다.”
이때다 싶어, 옆에 있던 여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인의 시선이 이안의 위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이안도 웃음으로 환대했다. 영향력 있는 자들은 아니었지만, 처음 어울릴 상대치고는 나쁘지 않았으니. 고리타분하게 나이 든 귀족보다, 이리 또래를 먼저 공략하는 것도 분위기를 파고드는 방법 중 하나임을 이안은 잘 알았다.
“마력운용자라 하시던데요.”
“그렇습니다. 오늘 작위를 받고 나서, 바로 마력확인식이 있답니다.”
“그러면 악수 좀 해주시겠어요? 마력운용자와 만나면 운이 좋다고 하던데. 마법사 칭호를 얻기 전에 말이에요.”
“물론이지요. 레이디.”
“어머. 저도…….”
이안은 자연스럽게 그들 틈으로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시끌벅적 떠들고 있는 세르오 가문의 사람들 외, 다른 무리들도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귀를 이쪽으로 열고 있었다.
“세르오, 우리에게도 소개를 좀 해주지 않겠어?”
“아아. 이쪽은 하이만 가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이쪽이 이안?”
호기심 있고 사교적인 귀족 몇몇이 다가오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반전되었다. 시작이 어렵지, 흐름을 타고나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반응이었다.
부우우우.
이안이 귀족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묵직한 트럼펫이 울리더니 악단의 연주가 멈추었다. 동시에 여인들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가볍게 허리를 숙였고, 사내들은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황제의 입장이다.’
“황제 폐하 입장하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이안은 연회장으로 들어와 단상에 오르는 발걸음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황제, 그대는 누구인가.’
얼굴만 본다면, 그리하여 흐릿한 기억이 선명해진다면, 이안은 다음 차기 황제 역시 떠올릴 수 있으리라.
하나둘씩, 귀족들이 인사를 갈무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고개를 드는 순간, 이안은 멈칫하며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