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2
제122화. 다음 황제는
진귀한 옷감에 빈틈없이 놓여있는 화려한 금실. 왕관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보석을 치렁치렁 달고 있었으나, 정작 황제는 말라 버린 고목과 같았다.
세월의 흔적이 깊게 스며든 주름과 반쯤 색이 날아간 동공. 거기에 거무죽죽한 피부색은 오늘내일한다 해도 전혀 놀라울 것 없어 보였다.
‘얼굴을 보니 어렴풋이 알겠다.’
이안은 어렵지 않게 그를 기억해 냈다. 복도의 왼쪽 끝에 걸려있던 황제의 초상화를 단박에 떠올린 것이다. 워낙 안색이 안 좋아서 인상 깊었던 것도 있지만, 저런 몰골로 꽤 장수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어 유독 머릿속에 남았다.
‘그렇다면, 저자 다음으로는…….’
이안의 고개가 저절로 황제의 뒤쪽으로 옮겨졌다. 황자인 마리브와 게일이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으니. 그들은 일전과 달리 정복을 제대로 갖춰 입어, 태가 늠름하니 훌륭했다. 다른 황자들은 아예 단상에 오를 생각도 못 하고 뒤로 돌아 나가는 게 보였다.
‘다음 황제는 은발에 푸른 눈. 그리고 왼쪽 이마부터 오른쪽 턱까지 베인 상처가 있는 자다. 한데 여기서는 다른 황자들이 안 보이는구나.’
마리브와 게일은 절대 아니다. 상처는 고사하고 이목구비 자체가 다르다. 이안은 다음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주위를 힐끗거렸다.
혹여나, 혹여나 말이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이안처럼 황자가 다 죽어서 외부 적자를 데려올 경우까지 헤아린다면 공작가도 포함하여 확인해야 했다.
‘은발, 은발…….’
그래도 은발이 흔한 머리칼은 아니지. 아마 본다면 단박에 알아보리라.
이안이 안도감을 느끼며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황제의 뒤, 양옆으로 선 마리브와 게일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흥미가, 달리 보면 감시와 경계의 기운이 느껴지는 눈빛들이다.
‘흠. 저렇게 붙여서 보니 형제가 맞긴 맞는군.’
둘은 거리를 두고 정면을 보고 있는 상태라, 서로가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이안은 모른 체하며 황제 쪽으로 고개를 고정했다. 옆에 있던 귀족들만 당황한 채 황자들의 눈치를 볼 뿐이다.
“왜, 왜들 저렇게 보시는 걸까요?”
“우리가 아니라 이안을 보시는 걸세.”
“확실히 오늘 주인공은 따로 있네요.”
“…무슨 생각이신지 전혀 모르겠어요. 무서워라.”
“쉬이. 조용히 하게. 폐하께서 말씀하실 터이니.”
소곤소곤대던 귀족들의 잡담이 완전히 끊겼다. 황제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 탓이다.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몇 번 오물거리더니 인자하게 웃었다.
“대 제국 바리엘의 한 해가 이리 지나가오.”
쥐어짜듯 조용히 내뱉는 말이었지만, 황제의 음성은 넓은 연회장 구석구석까지 울렸다. 이 또한 마법의 힘이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공간감이 없는 음성. 베릭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이번 해에도 제국을 위해 힘써준 그대들에게 친히 격려하오. 분명 다음 해에 만개하는 꽃은 더욱 화사할 것이며, 밭은 금빛일 것이요, 돌아오는 바람은 따뜻할 터이니.”
황제의 신년회 인사였다. 귀족들은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등, 경청하고 있다는 자세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그는 올해 제국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짚으며 지난 한 해를 주르륵 늘어놓았다.
“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인한 신전 복구로…….”
구구절절, 끝도 없이 이어지는 황제의 연설은 솔직히 말해서 지루했다. 슬쩍 뒤를 돌아본 이안이 로만드로와 베릭과 눈이 마주쳤다.
‘재! 미! 없어!’
뻐끔뻐끔. 베릭이 입 모양으로 이안에게 말했고, 로만드로는 반쯤 영혼이 빠진 것처럼 한숨만 쩍쩍 해대고 있었다. 이안이 피식 웃으며 다시 앞을 돌아보자, 그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변경의 반역 가문 브라츠가 멸문하였다. 대제국 바리엘에 반하는 자들이 저들의 미래를 보고자 한다면, 그쪽을 돌아보게 하라.”
짝짝짝.
귀족들이 가볍게 박수 치며 호응했다. 앞으로 탈세하여 뒷돈 빼는 가문이 있다면, 브라츠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을 견고히 알리는 대목이었다. 황제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마리브가 게일 쪽을 힐끗 쳐다보며 웃었다. 반면, 게일은 반응 없이 무표정일 뿐이다.
스윽.
이안은 이제 슬슬 자신이 호명될 것을 알아챘다. 재상이 꽃으로 장식된 받침대를 들고 다가왔기 때문이다. 황제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전 브라츠의 이름을 영원히 역사에서 지우며, 황제의 명으로 새로운 가문을 세우겠노라.”
귀족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이안에게 돌아왔다. 이제 정식으로 그들의 세계에 발 딛는 순간이었다.
“이안.”
황제가 친히 이름을 부르자, 귀족들이 좌우로 벌어지며 길을 만들어냈다. 박수갈채와 함께 황궁 악단의 선율이 이어졌고, 이안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단상으로 올라서자, 황제의 얼굴이 더 자세히 보였다.
‘나이가 몇이지? 장수했다는 건 알겠으나, 실로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이안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고, 황제는 친히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안. 이리 보니 반갑군.”
“영광이옵니다. 폐하.”
“그대는 데르가 브라츠의 피를 이었으나, 제국을 위해 반역자 제압에 공로로 하였음을, 내 인정하네. 또한 바리엘 제국의 발전에 필시 필요한 인재인 것도.”
황제의 손짓에 이안은 일어나서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가슴팍에 달리는 브로치. 엑스 모양으로 그어진 검 뒤로 흰색 꽃이 만개한 디자인이었다. 이것이 앞으로 이안의 가문 문양이 될 터였다.
“저게 대체 뭐랍니까?”
“글쎄요. 잘 보이지는 않지만, 흰색 꽃인 것 같죠?”
“화려한 색을 두고 흰색이라니…….”
몇몇 귀족들이 은근한 비웃음을 흘렸으나,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성(姓)과 달리 가문의 문양은 이안이 직접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굴라 꽃인지도 모르는구나.’
변경에서는 이미 굴라가 없어서는 안 될 작물이다. 이른 시일 내로 바리엘 전역에 굴라가 상용화될 것인데, 이는 곧 대기근의 해결을 뜻했다. 그 위업을 이안이 이끌었다는 걸 확실히 하기 위해, 가문 문양 자체를 굴라 꽃으로 삼았다.
훗날 이 흰색 꽃은,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증표가 되리라.
“하여, 그대를 히엘로 자작에 봉한다.”
이안 히엘로.
그것이 이안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기꺼이 숙이며 기품 있게 인사했다.
‘히엘로?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한데, 어쩐지 귀에 익은 그 이름. 바로 생각이 안 나는 것으로 보아, 귀족 가문의 이름은 아닌 것 같고… 어디선가 흘려들은 듯싶다.
히엘로, 히엘로.
이안은 새로 받은 성(姓)을 계속 되씹으며 작위를 임명받았다.
“바리엘의 영광을 위하여.”
“바리엘의 영광을 위하여.”
이안이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뒤에서 그걸 지켜보던 마리브가 방긋 웃으며 갈채를 보냈다. 게일 역시 의례적이지만 마찬가지. 연회장을 가득 채운 정령의 빛들이 아름다운 흐름을 만들어내며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짝짝짝.
“이안 히엘로 자작.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호크먼 자작님.”
“오, 나를 아시는가?”
“정확히는 자작님의 자제이신 퓔른 경을 안다는 게 맞겠지요. 인본주의, 제가 그것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반갑네. 나는 하이니스 후작일세.”
“후작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안이 내려오자, 귀족들의 반응이 조금 유연해졌다. 그저 황제에게 이름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전의 이안과 지금의 이안은 달라진 게 없는데 말이다. 물론, 아직도 다가오지 못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세력이 더 많았지만, 현재 사교계에서 중심이 되는 건 이안임이 분명했다.
“이어서, 록산 전투의 공을 치하하겠노라. 마법부 소속 헤일, 토미, 나키나.”
이안의 차례는 끝났지만, 신년회는 계속 이어졌다. 크고 작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기사들이 한가득이었고, 승작하는 귀족들도 몇몇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을 축하하는 말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자, 그는 조심스럽게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 여길세!”
“이요! 이안 히엘로 주인님~?”
“이제 진짜 자작이로구먼. 귀족이시여. 축하하네!”
로만드로와 베릭도 그를 찾아오고 있었는지, 바로 마주칠 수 있었다. 속닥속닥,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축하하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이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확인식이 이어지려면 조금 걸릴 것입니다.”
“그래. 이제는 서서 구경만 하면 되니, 참으로 마음이 편해.”
이안처럼 완전히 신분이 바뀌는 승작은 없는지, 다들 중앙의 붉은 카펫보다 단상 옆의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로만드로 님.”
“응?”
입구로 들어와 직진만 하여 차마 알아채지 못했다. 문 위쪽에 나 있는 2층에서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신년회를 구경하고 있었으니.
“위층에 앉아있는 분들, 폐하의 후궁들입니까?”
“아아. 그렇지.”
철저하게 선이 그어진 것이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자를 제외하고서는 나머지 가족 관계는 모두 권력의 중심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있노라고.
‘아. 은발.’
이안은 그들 가운데 앉아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리고 있었는데, 자세가 고고하며, 후궁들 사이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듯했다. 이안이 다시금 로만드로를 슬쩍 불렀다.
“저기 은발의 후궁은 누구신지 아십니까?”
“누구? 은발? 아아.”
로만드로가 힐끗,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한적하면서도, 다들 황제의 말보다는 저들끼리의 은밀한 잡담을 즐기는 분위기였지만, 여기는 황궁이었다. 단어 하나하나도 조심해야 하는 곳 아니던가.
“딜라이나 님일세.”
딜라이나. 4황자와 5황자의 생모이자, 현재 유일하게 황제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는 후궁. 다른 후궁들은 그저 정치적인 연유로 결혼하여, 늙고 곧 죽을 것 같은 황제와 큰 교류를 맺지 않았다.
하지만 지켜야 할 아들들이 있는 딜라이나 만큼은 실낱같은 힘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했기에, 황제의 곁을 직접 보필하여 적극적으로 궁내 행사를 주도하였다.
“신년회도 딜라이나 님이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준비한 것일세. 이런저런 내부 일을 다 봐주고 계셔서, 황후의 빈자리를 잘 메우고 계시지.”
딜라이나가 은발이다.
하면…….
“아들분들도 은발이십니까?”
“응? 그렇다네. 머리칼은 어머니인 딜라이나 님을 닮았고, 눈동자는 아버지인 황제 폐하를 닮았지.”
푸른색 눈이라는 뜻. 이안은 다음 차세대 황제가 딜라이나의 아들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4황자와 5황자 중 누구냐는 건데…….
‘1황자, 2황자 다 황좌에서 밀려나는 마당에, 4황자, 5황자의 순서에는 의미가 없다.’
이안은 계속해서 위쪽을 보며 혹여 황자가 보이는지를 살폈다.
그때였다.
“……!”
딜라이나 옆으로 나타나는 열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이안은 황제의 초상화에서 본 그 남자인 것을 바로 알아봤다. 저 아이가 자란다면 초상화의 그자가 되리라.
“로만드로 님. 혹, 저…….”
저 아이가 4황자인지, 5황자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똑같이 생긴 남자아이가 한 명 더 나타났다. 로만드로는 대수롭지 않게 위쪽을 힐끔거리더니 대답했다.
“아아. 그래. 4황자, 5황자께서는 쌍둥이시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