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4
제124화. 신탁의 빛
“웨슬리 장관님. 신탁의 빛 본체가 도착했습니다. 잠시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못마땅하게 이안을 내려다보던 웨슬리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주위에서 비웃음을 흘리던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 서둘러 움직이며 본체 맞을 준비를 이었다.
“그대는 여기서 대기하라.”
이안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고, 웨슬리는 더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갔다.
윤기나는 검은 벨벳 커튼이 외부와 이곳을 구분하고 있었다. 선율과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거세지는 것으로 보아, 사교적인 즐거움을 물씬 나누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안. 방금 웃었지?”
“음? 내가?”
베릭이 한산해진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바닥에 수많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밟으면 안 되나? 슬쩍 발끝을 치웠으나,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그 위를 걸었다.
“그거 지워지면 어떡해?”
“마법진은 밟는다 한들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다른 것으로 덮지 않는 이상. 신탁의 빛 본체가 아마… 이쯤 하여 세워지겠구나.”
이안은 마법진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날린 글씨로 쓰인 복잡한 공식과 곡선 따위의 원형이 어지러이 겹쳐져 있는 부분이었다.
“웨슬리, 뭔 짓 할 것 같아. 영 꺼림칙하다니까?”
“이미 했을 것이다. 마법부에서는 내가 가진 마력이 볼품없기를 바랄 터이니.”
우선으로는 건방진 서자에 대한 망신 주기요, 다음으로는 이안을 하위 부서로 넣는 것에 대한 대외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마리브 저하의 사람이라 여겨지고 있으니, 핵심 부서로 돌리는 건 당연히 부담이겠지.”
“장관이 거기 대장이라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되나? 누가 뭐라 해? 그럼 눈치나 보면서 허드렛일만 해야 하는 거야?”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부서였지만 결국에는 황궁의 거대한 톱니바퀴 중 하나. 명분 없이 이안을 바닥으로 굴리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황제 폐하의 은혜를 받은 귀족을 명분 없이 하대했다가 어떤 트집을 받을 줄 알고? 귀족들도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출신이 다르다고는 하나, 작위 받은 자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분명 견제가 들어올 거라.”
특히나 마리브에게 일말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럼, 걱정 없다는 뜻이지?”
“그렇지만도 않을 거다.”
“아씨, 머리 아픈데?”
“베릭, 대신 고민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럴 것 없다. 답은 정해져 있어.”
이안은 눈에 걸리는 마법진을 발견하고 중얼거렸다.
기억하는 신탁의 빛 발동 주문과는 미세하게 다른 공식이다. 주위에는 아직 여기저기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빠서 그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진 않지만, 마력을 개방하기라도 하면 바로 집중받게 될 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쉽지만,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건 힘든 일이거든.”
마리브가 원하는 마력석관리부는 상대적으로 선호도가 낮아 접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 우위를 선점하여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히는 게 중요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최대한으로 존재감을 각인시키겠다는 뜻.
‘그리고 무엇보다, 천민 출신이라 하여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나돌 것이다.’
분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비록 서자이지만, 그들과 같이 귀족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보다 더욱 고귀하고 귀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마리브와 게일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제삼의 힘이 필요하다.’
물론, 황제 후보인 4황자와 5황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바로 군중의 힘이 제격이었다. ‘귀족들’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바리엘의 주축들 말이다.
스윽.
이안은 잘못된 마법진 식을 확인한 다음, 베릭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베릭. 손가락 좀 빌려다오.”
“손가락?”
물어뜯어 피 좀 내보라는 듯이 지시하자, 베릭은 제 검지를 와작 깨물었다. 이안은 쪼그려 앉아 지울 부분을 짚어주었다.
“여기랑 여기를 덮어라.”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쓸 만한 걸 들고 오지!”
“그래. 내 불찰이다.”
“응. 고기반찬 일주일.”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릭은 얼씨구나 좋다 하며 마법진 한쪽을 문질러댔다. 검지 마디 정도 되는 작은 부분인지라, 크게 티도 안 났다.
위이잉.
이안이 시선으로 마법진을 최종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별생각 없이 돌아본 베릭이 입을 떡 하니 벌리며 주춤거렸다.
“이안, 저거…….”
“신탁의 빛이로구나.”
신탁의 빛. 그것은 황금으로 만든 거대한 하프의 모양새와 닮아있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과 단단히 바닥을 받치고 있는 틀, 그리고 세심한 장식용 조각들은 신께서 내려준 천상의 악기와 같이 보였다.
“대신 소리를 내는 현이 없지. 줄 대신 은은하게 떨어지는 빛이 보이는가?”
이안의 설명에 베릭이 눈만 부릅뜨고 살폈다. 주위에는 마법사들과 공무원들도 인산인해라,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아니. 안 보이는데.”
“나중에 보아라. 꽤 볼만할 터다.”
신년회. 한 해의 제일 중요한 황궁 연회에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자리였다. 그것도 황족과 귀족들을 대상으로. 바리엘 전역으로 쏟아지는 꽃가루만큼이나 아름다운 빛을 보여줘야 했다.
“이안 히엘로 자작.”
“네. 웨슬리 장관님.”
웨슬리의 부름에 이안이 천천히 다가갔다. 신탁의 빛은 마법진 가운데 놓여 발동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베릭의 작은 핏자국은 신탁의 빛 하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는 법은 아는가?”
“알려주신 적이 없으니, 그럴 리가요.”
“마법부에서 신탁의 빛에 시동을 걸면, 그대는 이 표면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발동시키면 된다. 파장과 세기에 따라 연회장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임을, 기억하는 게 좋을 거다.”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물 먹일 속셈을 갖고 있다 한들, 이렇게 대충 알려주다니. 이안은 고개만 주억거리며 알겠노라 답했다.
“다들 마무리 준비해!”
“네. 장관님.”
지이잉. 지잉.
웨슬리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등을 돌렸다.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마력을 개방하여 바닥의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불이 들어오듯 반짝이는 마법진.
베릭이 눈을 반짝이며 신기하다는 듯 지켜봤다.
‘금빛이 더 빛난다!’
밀폐된 공간에 마력의 흐름으로 바람이 생겨났다. 조금씩 흔들리는 벨벳 커튼에, 사람들의 기대에 찬 웅성거림이 거세졌다. 그와 함께 재빨라지는 악단의 연주.
“네놈, 이안 자작의 호위인가? 뒤로 물러서라.”
“어어? 이안?”
“가 있거라. 베릭. 괜찮으니.”
이안이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가볍게 흔드는 순간이었다. 그를 스쳐 지나가던 한 마법사가 입술을 꾹 깨물며 뒤돌아왔다.
“저기.”
사내처럼 바짝 깎은 분홍 머리의 여인이었다. 이안은 그녀가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 아까 이안 다음 차례로 록산 전투의 공을 치하받은, 마법부 소속의 나키나라는 자였다.
‘헤일, 토미, 나키나. 이렇게 셋 중 여인 이름은 하나밖에 없으니.’
“무슨 일이신가?”
그녀는 주변 눈치를 보더니, 속으로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재빨리 웨슬리가 알려주지 않은 마력확인 방법을 읊어주었다.
“오른손잡이입니까?”
“그렇네만.”
“그렇다면 왼손으로 큰 대를 잡고 오른손으로 마력을 내십시오. 빛의 표면에 손바닥을 다 대는 것이 중요하고,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일루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손놀림 역시 부드러워야 합니다.”
“나키나!”
“알았어! 간다!”
그녀를 부르는 건 역시 마찬가지로 록산 전투의 공을 받았던 사내였다. 나키나는 주변의, 정확히는 웨슬리의 눈치를 보며 이안을 지나쳤다. 다행히 몇몇 마법사가 지켜보긴 했지만, 웨슬리의 시야에는 들지 않은 것 같다.
“나키나. 엄한 일에 끼지 말라니까.”
“아니, 그래도 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두고 바보 만드는 것도 선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 웨슬리가 마법진에 술수를 걸어둔 걸 모르는 탓에, 나키나는 짜증을 잔뜩 담아 꿍얼거렸다.
“어린애 등 처먹는 것 같아서 기분 안 좋아.”
“하여간 너도 참 너다.”
“됐고, 내려가자. 난 이거 안 볼래.”
“그거 좋다. 오랜만에 맥주나 먹을까?”
“헤일이 쏘는 건가?”
그들은 찝찝한 마력확인식을 보는 것보다, 출궁하여 시끌벅적한 뒷골목에서 술통을 까는 걸 택했다. 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세 사람의 이름을 되새겼다.
‘록산 전투라. 헤일, 토미, 나키나.’
마력확인식이야, 과거 수없이 참관했던 이안이다. 당연히 그 방법을 모르지 않았지만, 저들의 마음 씀씀이가 인상 깊었다.
사아아악.
그때, 이안의 옆으로 빛이 환하게 쏟아졌다. 연회장을 가르던 벨벳 커튼이 걷힌 것이었다. 아까보다 한결 풀어진 회장의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 이안 히엘로 자작이시군!”
“드디어 시작하려나 봐요.”
“하루에 두 탕 뛰시느라 힘들겠어. 하하.”
“아니지. 자네, 생각 좀 해보시게. 뒷골목에서 근근이 먹고 살던 자인데 무에 그리 어렵겠나?”
“저 마력확인식은 처음 봐요. 기대되라!”
“근데 언니, 아무리 봐도 잘생겼죠? 솔직히 생긴 것만 보면 천민 출신인 게 뭐 그리 중요하겠나 싶어.”
“쉬잇! 경망한 소리 그만 좀 하렴.”
온갖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가득했다. 누군가의 비웃음, 경멸, 흥미, 호의 따위가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안이 서 있는 단상과, 그를 지켜보는 귀족들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을.
‘이안! 힘내게!’
저 뒤에서 두 주먹을 불끈 들어 올리는 로만드로 역시 보였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황제를 비롯한 황족 일가가 이안을 주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일과 마리브의 눈빛이 특히나 형형했으나, 이안은 무시한 채 신탁의 빛 앞으로 다가갔다.
“마법부 장관 웨슬리입니다.”
웨슬리는 이안에게 보여줬던 차가운 냉기를 꼭꼭 숨긴 채, 장관에 걸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은 2층의 게일에게 닿고자 했다.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는 게일만이 알겠지만 말이다.
“대제국 바리엘을 받치기 위해서는 마법의 힘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 근 몇 년 동안 새로운 인재가 없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올해가 끝나는 날. 마법부에, 더 나아가 바리엘에 새로운 축복이 내리는 것 같아 참으로 기쁩니다.”
웨슬리가 눈매를 구부리며 웃었다. 마법부는 다른 부서보다 특히나 할당된 예산이 많았다. 그 예산이 다 어디서 오는가? 바로 귀족들의 세금에서 오는 것이다.
“이안 히엘로 자작께서 보여주시는 마력은 앞으로 대제국 바리엘을 위하여 영광스럽게 쓰일 것을 맹세합니다.”
짝짝짝.
웨슬리가 박수를 치며 옆으로 물러서자, 귀족들 역시 반사적으로 박수를 쳐댔다. 환호하고자 함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몸에 밴 습관과 같은 것이다.
‘흐음.’
이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귀족들의 따가운 눈길이 쏟아졌으나, 어떤 흔들림 없이 신탁의 빛을 붙잡았다.
타악.
머뭇거리는 행동에 웨슬리의 입매에 비웃음이 걸리려는 순간이었다. 이안은 아주 자연스럽게 한쪽 어깨로 신탁의 빛을 기대어 자세를 잡았다. 마치 현 없는 하프를 치려는 듯이.
‘이렇게 하는 거였지?’
오래전, 황제이자 마법사였던 기억이 익숙한 몸짓을 만들었다.
지이이잉. 지잉.
“오오오. 세상에.”
“저것 좀 보세요. 눈 색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마력이 개방됐다. 녹안이 금안으로 변하고, 사방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안은 오른손으로 빛의 표면에 손을 올렸고, 이내 부드럽게 문질렀다.
솨아아악!
파앗!
“아…….”
이안의 손길을 따라 수천 가지의 빛깔이 흐트러졌다. 천상의 음악을 눈으로 본다면 바로 저것이라며, 귀족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