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6
제126화. 아르센과 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황가의 모두가 모여있는 자리다 보니, 보안을 목적으로 한 보호막이 처져 있었다. 시끌벅적, 본격적인 사교의 장으로 변모한 1층의 소란스러움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타악.
“이쪽입니다.”
이안은 익숙하게 시종장의 뒤를 따랐다. 조금씩 구조가 달라져 있긴 했지만,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안은 감을 잡아갔다. 어스름한 긴 통로 끝에는 황궁친위대의 복식을 한 기사들이 서 있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이안 히엘로 자작님을 모셨습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다부지고, 굳건하여 명예를 위해 죽고 사는 자들의 아우라를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이안 히엘로 자작님. 황궁친위대 3대장 베올스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몸수색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뜻대로 하시게.”
“협조 감사합니다.”
이안이 팔을 가볍게 들자, 친위대장은 이안의 허리춤과 다리를 쓸어 만진 다음 고개를 숙였다. 귀하신 몸들과 가까이에서 대면하는 것인데, 이 정도 수고는 당연히 감수해야 했다.
“들어가시지요.”
끼이익.
대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거대한 문이 열렸다. 소파에 자유로이 기대어 소곤소곤 떠들던 황가의 일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직계가 아닌 방계인 자들이리라.
“어머. 왔네요.”
“전하, 이안 히엘로 자작이 왔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신기하군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동시에 쏟아져 내렸다. 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황제 가까이 다가갔고, 예법대로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드는 순간, 황제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과 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이자들이 현 바리엘 제국 권력의 중심이자, 미래를 위한 단서들이로다.’
황제의 곁에 바짝 붙어서 보필하고 있는 은발의 여인, 딜라이나. 그리고 마리브와 게일, 이어서 어린 황자들인 아르센과 진까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황궁에서, 나아갈 길을 짐작하려면 저들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진. 저것 좀 보아라. 아까 마력 쓰는 것이 힘들긴 했나 봐. 땀에 젖어있지 않니?”
아르센은 제 동생인 진에게 속닥거리며 키득댔고, 진은 무표정으로 이안을 담담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만드로의 말대로, 두 사람을 구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거울을 놓은 것처럼 똑 닮아 있었으나, 지닌 성정이 확실히 정반대였기에.
“이안 히엘로 자작. 내 다시 한번 그대에게 축복을 내리네. 오늘 보여준 모습이 귀족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야.”
황제가 느릿하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이안은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몸을 뻗었고, 황제는 친히 와인 잔을 건네주었다.
“제 인생 최고의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마법부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듣기 좋군.”
시종장이 이안을 소파에 앉혀주자, 마리브가 선두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두 황자를 함께 보는 것은 처음이지 않나. 이안은 한발 물러서는 마음가짐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폈다.
“이안 히엘로 자작은 변경에서부터 그 능력을 잘 보여줬습니다. 마법부에 가서도 분명 성과가 있겠지요. 안 그렇나, 게일?”
되묻는 마리브의 말에는 웃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이안의 마력이 예상보다 굉장했기 때문이다. 입부에 대한 권한을 웨슬리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만 해도 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게일은 아무렇지 않은 척 피식 웃으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걸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마법부의 일은 마법부 장관인 웨슬리가 알아서 할 일인데.”
철저하게 선을 긋는 자세였다. 게일과 웨슬리가 연인 사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누구도 대놓고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저것이다.
당사자가 모른 척 발뺌하니, 무어라 하겠나.
“이안 히엘로 자작. 그대는 마법부로 입부한다면 어디를 생각 중이시오?”
딜라이나가 넌지시 물어보자, 마리브와 게일의 눈썹이 동시에 찡그려졌다. 서로의 의중을 떠볼 수 있는 화두가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리브는 이안이 마력석관리부로 가길 원했고, 게일은 마리브가 원하는 부서는 무조건 반대인 입장이다.
‘마법지원부인가?’
게일은 마리브의 표정을 살피며 속으로 가늠했다. 마력석을 파고 있으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중심 세력인 지원부에 이안을 꽂아 넣을 것이라 여긴 게다.
“제 소견도 소견입니다만, 저는 웨슬리 장관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마법부의 수장이시니, 분명 제게 적합한 자리를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안은 넌지시 대답을 미루며 여지를 계속 남겨두었다. 당연한 게, 여기서 마력석관리부라 얘기했다가 게일 측에서 어떤 대응이 들어올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현명한 처사요.”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은 마력석관리부로 갈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럴 것이었다면 애초에 마력확인식에서 그리 힘을 쓰지도 않았을 터. 다음 황제가 쌍둥이 황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끝까지 마리브와 함께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내린 결정이다.
‘마력석관리부로 가게 되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그러면 훗날을 대비하기 힘들어져. 일단 다른 부서로 가고, 마리브에게는 게일의 역제안을 알려주며 속임수라 일러두면 된다. 반대로 게일에게는 역제안을 받아들이겠노라 하고 마리브와 노선을 달리한다는 걸 보여줘야 해.’
유리공예를 하듯, 아주 세심하게 두 사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보시게. 이안 경.”
그때였다. 아르센은 근질거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안에게 말을 붙였다. 게일과 마리브가 그를 힐끔 돌아보자, 딜라이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네. 아르센 저하.”
“나를 아시는 게요?”
“황궁의 네 번째 황자이시니, 당연하지요.”
“아까 그 마력 말일세. 한 번만 더 보여주면 안 될까?”
아주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이다. 어미는 가슴 졸이며 제 목덜미를 걱정하고 있건만, 아르센은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
“응? 한 번만.”
“그래. 나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
“폐하, 괜찮겠지요? 윤허해 주세요.”
황가의 다른 아이들 역시 조금씩 몰려들며 한마디 보탰다. 장식품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허락했고, 이내 아이들은 눈빛을 환히 빛내며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나 아르센 저하, 아까와 같은 마력은 신탁의 빛이 있어야 하는 것이랍니다.”
“괜찮네. 어서 보여줘.”
이안은 마리브와 게일을 힐끔 보며, 마지막 허락을 구했고 이내 손바닥을 보이며 마력을 개방했다.
지이잉. 지잉.
아르센은 녹색의 동공이 금색으로 변하는 걸 그대로 들여다봤다. 황가라 하여도 아이들은 어쩔 수 없는 아이들. 듣기 좋게 꺄르륵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고, 묘하게 날 섰던 분위기 역시 조금 가라앉았다.
“와아. 신기하다. 만져도 되나?”
“아르센 저하. 물론입니다.”
“내 아직 어려 마법부와는 인연이 별로 없다네. 행사 외 이리 보는 것은 처음이라 참으로 신기하군.”
“아르센.”
보다 못한 딜라이나가 아르센을 불렀다. 어찌하여 아르센이 마법부에 갈 수 없는지, 아이는 정녕 모르는 것일까? 그곳의 수장 웨슬리가 게일의 수족이기 때문이거늘.
“체통을 지키시오. 이안 경은 광대가 아니니, 더 이상의 무례는 삼가시게나.”
아르센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안은 손까지 내저어가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마마. 오늘은 저에게 있어 참으로 기쁜 날이니, 황자 저하께도 기쁜 추억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핑계 아니면, 쌍둥이 황자의 얼굴을 언제 가까이서 보겠는가? 이안의 말에 아르센이 다행이라며 활짝 웃곤 그에게 바짝 붙었다.
“그리 말해주어 고마워!”
확실히 구김이 없구나. 황좌의 권력 다툼 따위는 전혀 모르고 자라는 방계의 아이와 같다. 이안은 아르센의 이마부터 턱까지 자세히 살피며 혹시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했다.
‘징조도 없다.’
“크흡!”
그때, 가만히 앉아있던 황제가 거친 기침을 쏟아냈다. 숨이 꺽꺽 넘어갈 듯 거칠어지자, 마리브가 먼저 달려가서 아비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흐음…….”
“아버지를 먼저 안으로 모셔라.”
“예. 마리브 저하.”
시종장은 마리브의 명령대로 황제를 부축하였고, 이내 딜라이나 역시 그의 옆을 따라붙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게일은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손끝으로 바람만 후, 불어대며 평온한 자세를 유지했다.
“아르센, 이안 경을 곤란하게 하지 말고 이리 오거라.”
밖으로 나가던 딜라이나가 제 아들을 불렀다. 아르센은 귀찮다는 듯 발로 땅을 툭툭 치더니, 제 어미를 따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딜라이나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이름은 하나 더 있지 않나.
“진 저하.”
이안은 구석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진을 불렀다. 은발의 푸른 눈. 아이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진. 너도 가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게일이 넌지시 묻자, 진은 말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딱히 어딘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저하.”
이안은 그런 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안의 눈동자가 그사이 녹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함께 안내해도 되겠습니까? 시종장을 따라 들어올 때, 복도가 좀 어두웠습니다.”
이안은 황가의 어린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 때, 진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아챘다. 낄 수 없다는 듯 그저 고개만 이쪽으로 돌린 채, 미동도 않았던 것이다.
“…원하는 대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이안.”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게일이 그를 불렀다. 그러곤 다시 돌아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는 게 아닌가. 이안은 미소를 머금은 채 허리를 숙였고, 이내 진의 시종 두 명과 함께 문을 나섰다.
지이잉. 지잉.
“보십시오. 랜턴보다 이것이 더 밝답니다.”
이안이 마력을 개방하며 진과 함께 걸었다. 진은 앞을 보는 척하면서도 연신 옆을 힐끗거렸다. 아르센이 마력을 처음 보는 것이라면, 진 역시 처음 보는 것일 테니.
‘진도 흉터가 될 만한 피부 징조는 없다.’
이안은 얼굴을 상세히 뜯어보기 위한 배려였으나, 진에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 것 같다. 잘 걸어가던 그가 문득 멈추며 이안을 돌아봤다.
“이안 경.”
“예. 저하.”
“…만져봐도 되겠나?”
“마력을요? 물론입니다.”
이안은 무릎을 꿇으며 진과 시선을 맞추었고, 이내 더욱 따뜻하게 마력을 만들어냈다.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따뜻한 빛으로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아까 아르센이 보았던 게 이거구나.
진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여 마력을 휘어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운 촉감에,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종들 역시 실로 오랜만에 보는 진의 웃음.
‘어라?’
가까이서 그걸 지켜본 이안이 멈칫거리고 말았다. 거울처럼 똑 닮은 아르센과 진. 하지만 웃을 때, 진의 왼쪽 볼에 보조개가 패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