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7
제127화. 숨겨진 신탁
“아르센.”
황제를 침실로 옮긴 다음, 한숨 돌린 딜라이나가 제 아들을 내려다봤다. 평소와 달리 엄한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하지만 아르센은 눈만 데구르르 굴리며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네. 어머니.”
“아까의 그 경망한 행동은 무엇이니.”
“화 많이 나셨어요?”
마리브와 게일이 있을 때에는 숨소리조차 쉬이 내지 말라 일렀거늘, 나서는 것도 모자라 이안 히엘로 자작에게 마력을 보여달라는 요구까지 했다. 황가의 다른 아이들이 있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곤란할 뻔한 상황 아니던가.
“아르센. 어미는 정말 너를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죄송해요. 하지만 아까 어머니도 보셨잖아요? 이안 경의 마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입니다. 그걸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하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르센은 애교 있게 웃으며 제 어미의 팔에 얼굴을 비벼왔다. 혼을 호되게 내겠노라 다짐했던 딜라이나였으나, 아르센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언제나 한풀 꺾이고 말았다.
‘하아.’
신탁을 받은 순간부터 아픈 손가락이었다. 불행을 점지받고 태어난 아이인지라 젖먹이 시절에는 항시 곁에 두고 품었다. 그 때문인지, 아르센은 어미인 딜라이나를 어려워하지 않았으며, 노쇠하여 기력 없는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달깍.
“딜라이나 님. 진 황자 저하 드십니다.”
시종의 전언에 딜라이나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의젓하게 안으로 들어서는 진은 언제나처럼 자세가 올바르다. 소파에 널브러지듯 흐트러져 있는 아르센과는 정반대의 모습.
‘신탁만 아니었으면…….’
딜라이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겨우 격려의 말을 내뱉었다.
“진. 오늘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어머니. 신년회 준비하신 어머님이 고생이 많았죠.”
진은 장갑을 벗으며 테이블 구석에 내려놓았다. 오늘의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났음을 알리는 갈무리였다. 아르센은 재미있다는 듯 사탕을 와작거리며 제 어미와 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진. 네 형인 아르센에게 다시금 일러주렴. 마리브와 게일에게 우리가 어떤 의미인지. 아까 정말 살 떨려서 원. 어미는 제명에 못 살겠구나.”
딜라이나는 진을 가볍게 껴안으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달라도 어찌 이리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아르센이 진의 성격 반이라도 닮았으면 근심 걱정 하나도 없을 것만 같은데.
똑똑.
“딜라이나 님. 황제 폐하께서 잠시 부르십니다.”
“폐하께서? 그래. 곧 가마.”
시종의 부름에 딜라이나는 드레스를 고쳐 입고서 응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조용한 밤중의 시계 소리만 똑딱똑딱 들려왔다. 아르센은 턱을 괸 채 진에게 눈매를 휘어 보였다.
“동생. 어머니 말대로 내게 잔소리를 좀 해보려무나?”
진은 그런 아르센을 빤히 쳐다만 볼 뿐이다. 짤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아르센은 발끝을 까딱거리며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대답이 없네. 왜, 나랑은 말하기 싫어?”
“그런 것 아니다. 이번에는 아르센 네가 잘못한 것임을 잘 알 터인데.”
3황자가 낙상한 것이 과연 사고였던가? 진은 잘 알고 있다. 3황자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의 시선이 마리브, 게일과 정면으로 마주하였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어려서 형님들이 봐주는 것도 시간문제다.”
진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아르센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짜증을 담아냈다. 아이는 턱을 괴며 새초롬한 시선으로 진을 쳐다봤다.
“황제이신 아버지의 덕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마리브 저하와 게일 저하께서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아 이리 호사를 누고 있는 거라고, 어머니께서 누누이 말씀하셨잖아.”
아르센이 벌떡 일어나 진 가까이로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제 어미에게 했듯이, 아이는 동생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며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우리가 어려서 그런 게 아니라, 신탁 때문에 그런 거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나중에 태어난 자가 먼저 태어난 자를 해할 것’이라는 신탁 외, 숨겨진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리고 형제 중 황좌에 가까운 자가 죽으면 황실의 대가 완전히 끊어진다.”
아르센은 그것이 마치 자신을 보호해 주는 마법 주문이라도 되는 것 마냥, 자랑스럽게 말했다. 진은 그런 제 형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형제 중 누구인지를 지칭하진 않았으나, 다들 어림짐작으로 그것이 아르센이라 여기고 있었다.
‘동생이 형을 해칠 것인데, 그리되면 황실의 대가 끊어질 것이다.’
진은 반박하듯 겨우 잇새로 대답했다.
“아르센. 신탁이 언제나 맞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언제나 틀린 것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온 형제에게서 달짝지근한 사탕 냄새가 났다. 아르센은 진에게 연신 머리를 비벼댔고, 진은 언제나처럼 그런 형을 토닥였다.
“진. 나는 네가 참 좋아.”
“…나도 그렇다.”
황실의 대와 관련된 신탁은 아주 소수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딜라이나와 황제 그리고 몇몇의 황자들.
‘내가 너를 어찌 해치겠어.’
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데, 주위의 모두가 가끔 진을 그렇게 대할 때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이미 죄인이 된 것 같지 않나.
“진. 그러니까, 나 죽이지 마.”
“그런 농담 좀 하지 말라니까.”
“아하하. 알겠어, 알겠어.”
아르센은 깔깔 웃으며 다시금 사탕을 집어 먹었고, 진은 자연스럽게 그런 형의 손에서 장갑을 벗겨주었다. 오늘따라 하루가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
* * *
2층 연회장으로 돌아온 이안은 자신을 기다리던 게일과 마주했다. 그는 계속해서 와인을 마셨던 탓인지,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미 대부분의 황족은 1층, 귀족들과 사교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고 이곳은 그들만 남아있었다.
“이안, 아버지는 잘 가셨나?”
“그렇습니다.”
“흐음. 그래?”
이안은 게일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를 살폈다. 제 아버지가 저리 기침하며 실려 나가는데, 어찌 미동이 없나 싶었던 거다. 그 시선을 알아챘는지, 게일이 웃으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아버지가 저러신 지 꽤 되었다. 자다가도 숨이 꺽꺽 넘어가기가 일쑤인데, 또 다음날 되면 멀쩡하게 일어나시지.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나는 마리브가 더 의아하다. 왜 저리 호들갑인가? 마치 아버지가 이번에는 죽으리라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익숙해진다 한들, 걱정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적어도, 듣기로는 황제가 마리브보다 게일을 더 아낀다고 들었다. 황후의 소생이었고, 그걸 존중하는 듯 보였으나 뒤에서는 게일을 더 애틋해 한다고.
‘그렇다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권력이지 않나. 황제가 죽으면 게일이 아쉬울 것인데, 어찌 저리 태평한지, 원.’
이안은 속으로 혀를 쯧, 차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게일이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남으라 한 것인지 대충 짐작은 갔다.
“아까 마력확인식 말이네.”
“네. 저하.”
“참으로 인상이 깊었어. 혹시, 변경에서 마법사를 따로 본 적이 있나?”
게일은 웨슬리가 마법진에 수작질을 걸어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이안이 그리 완벽하게 신탁의 빛을 내보였으니, 결론은 둘 중 하나다.
‘웨슬리가 실수했거나, 아니면 이안이 마법진을 고쳤거나.’
웨슬리의 성격이 불같기는 해도, 마법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완벽한 여인이었다. 이안이 없었더라도 신년회라는 큰 행사 특성상 무엇이든 차질 없이 진행했을 터였다.
“없습니다. 변경에는 마법이라는 걸 들어본 적도 없는 자들이 많습니다. 집시와 비슷한 자들은 본 적이 있으나, 마법사를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바닥의 피는 이안 경이 흘린 것인가?”
베릭의 피로 문댔던 자국을 찾아냈나 보다. 정확히 마법진의 수정 부분을 지워냈으니, 이안이 했으리라 짐작한 거다. 그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마법부 내에 이안을 돕는 세력이 있다.’
“아니요. 저는 피를 흘린 적 없습니다.”
이안은 능청스럽게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혈흔 검사를 한다면 그 피와 이안의 피가 맞는지 확인 가능할 것이다.
“그래?”
“네. 아무래도 마법진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무사히 식이 마무리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게일이 이안의 손 따위를 샅샅이 훑었으나, 확실히 상처는 없어 보였다. 방긋방긋 웃는 이안이 속으로 생각했다.
‘서둘러 베릭 데리고 귀가해야겠다. 베릭까지 저리 살펴본다면 곤란하지.’
“저번에 제안한 것은 어찌 생각하나.”
“마법부의 진정한 일환이 되는 것 말씀이십니까?”
이안의 말에 게일이 침묵으로 긍정했다. 아래에서 들리는 즐거운 소란이 조금씩 흘러들어 오는 묘한 분위기. 술에 취해서 그런가, 평소보다 게일의 화술이 더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저는 영광이지요.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그래?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게일이 재밌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주인의 목이라도 비틀고 올 터인가?”
“저하. 송구하지만, 연회장에는 귀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말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지.”
계단을 올라오며 느꼈던 마법의 힘. 단순히 방어막뿐만 아니라 비밀 누설 따위도 막고 있는 듯했다. 이는 모두 마법을 주관하는 웨슬리의 주도 아래 이뤄지고 있으니, 게일 뜻대로 비밀에 있어서는 안전할 것이다.
“…원하시면 증명하겠나이다. 하지만-”
이안은 조심스럽게 게일의 시선을 받아치며 대꾸했다. 떠볼까? 술에 취했으니 어느 정도 떠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저하께서도 저에게 증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올바르게 가야 하는 길이 그곳이라고.”
게일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 좋게 취한 것이 분명했다. 영문 모를 일로 인해 이안의 마력확인식이 성공적이었으나, 그런 그가 진정한 마법사가 되겠노라 한다면 게일에게는 오히려 청신호였다.
“그래. 좋다. 하지만 순서를 명확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대가 먼저, 증명하여.”
이안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 저기.”
로만드로였다. 황제 폐하가 나가는 것까지 지켜봤는데, 이안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되어 올라온 것이었다. 기사의 검집에 가로막혀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으나, 서로가 발견할 수는 있었다.
“실례합니다. 이안 히엘로 자작님께 전언할 게 있어서.”
“로만드로! 오호, 로만드로!”
“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게일 저하.”
“그래. 변경에서 참으로 고생 많았지. 내 인상적이었다네. 이쪽으로 들지 않겠나?”
잘못 걸렸다 싶은 표정이 여실했다. 로만드로는 변경에서 게일의 일을 전면으로 훼방 놓은 마리브의 부하였으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안 히엘로 자작님께 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요.”
“아까도 1층에서 그리하여 이안을 데려가지 않았던가?”
어찌 다 듣고 있었구나. 이안이 살짝 놀란 듯 게일을 돌아봤다.
“이안 경이 데려온 기사 놈이, 아니, 기사가…….”
베릭? 이안은 저도 모르게 뒤통수가 아려오는 걸 느꼈다. 그는 게일에게 공손히 인사를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합니다, 황자 저하. 기사가 변경에서 올라와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아서요. 혹여 실수라도 하여 신년회의 분위기를 망칠까 우려됩니다. 이만 물러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게일은 혀를 쯧, 차며 다시금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로만드로를 따라 복도를 내달렸다.
“로만드로 님. 베릭이 왜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놀랄 것 없네. 자네 데리러 간 거 맞아.”
“쉿. 여기서는 모든 말이 게일 저하께 들어갑니다.”
“아이고, 젠장. 바, 반은 맞는 말입니다요!”
로만드로가 제 입을 턱 막으며 질겁했다. 아까 나왔던 연회장 정원. 베릭은 풀숲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연신 땅만 파고 있었다.
퍼억! 퍼억!
“우헤헤. 우헤.”
“베릭 저거 제대로 취했어. 땅굴 계속 파기 전에 그만 말리세. 귀가하자고.”
“오잉! 이안! 이이안!”
이안은 긴장이 탁 풀리는 걸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베릭의 손끝을 잡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상처가 흙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제 집으로 가자.”
“앗싸! 가자! 여기는 술만 있고 고기가 없네!”
“시끄럽다, 이놈아! 이것저것 다 처먹었으면서!”
이쯤 하면 되었다고, 이안은 신년회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베릭을 잡아끌었다. 언제라도 게일의 손아귀에 붙들릴지 모르니.
‘그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골치 아파질 테다.’
로만드로 역시 허겁지겁, 파인 땅굴을 발로 갈무리한 다음 이안의 뒤를 따라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