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28
제128화. 아침의 손님
“흐히. 흐히히.”
뭔가 즐거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응접실 소파에 널브러진 베릭이 연신 웃음을 흘려댔다. 차를 옮기던 미니가 그걸 보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보면 베릭 님이 신년회 주인공이었나 싶을 겁니다. 어찌 저리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오십니까?”
달이 제일 밝게 빛나는 시간. 이안과 로만드로는 취한 베릭을 데리고 저택에 귀가했다. 잠들지 못한 비비안나와 미니, 거기에 마부까지 합세하여 베릭을 옮기려 들었지만, 차마 계단 위까지 끌어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살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쩜 그리 무겁던지!”
쫑알쫑알, 미니는 전날 밤의 고생을 떠올리며 연신 베릭을 힐끗거렸다. 로만드로는 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저리 보아도 검사 아니던가. 몸이 단단하여 무거운 거지. 어후, 그래도 좀 너무하다 싶더라. 안 그런가, 이안?”
맞은편에 앉은 이안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에 모인 저택 식구들이 모두 저를 흉보고 있다는 걸 알까? 베릭은 입을 쩝쩝거리며 무의식적으로 귀만 후벼댔다.
“베릭에게 금주령이라도 내릴까 합니다.”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저거 저거, 성년식도 안 치른 놈이 술버릇 아주 고약하게 들었어.”
로만드로는 신문을 내려놓으며 바깥 창문을 쳐다봤다. 겨울인지라, 일출이 늦어져 어스름한 아침이었다. 날이 밝아오면 마법부에서 정식 입부요청서가 날아올 터인데, 그 전에 이안에게 확인할 것이 있었다.
“저기, 이안. 내 궁금한 게 하나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로만드로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조금 진중하다. 변화를 알아챈 이안이 찻잔 젓는 것을 멈추었고, 미니 역시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번에 마리브 저하와 알현하였을 때 말이네. 저하께서 헌납금에 대해 물어보셨지 않나?”
“그렇지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안 물어보나 싶었는데, 적당한 시기만 잡고 있었나 보다.
“한데 어째서 헌납금이 준비되었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았나? 루론 마법석에 대한 것도 그렇고. 어차피 주인은 자네이니 내 이리저리 말 붙일 입장이 안 되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궁금하여, 그대의 의중을 묻는 것이라네. 혹여, 그…….”
크흠. 로만드로는 다시금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공무원인 자신과 달리, 이안은 마법사로 홀로 황궁의 소용돌이에 몸을 내던져야 하는 처지였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게는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혹여 말일세. 마법사로서의 정체성을 찾길 원한다면 내게 말해주게. 나 나름대로 자네를 도와줄 터이니.”
게일의 편에 서더라도, 개인적으로 돕겠다.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이안은 차를 마시며 로만드로의 말을 경청하였다. 살짝 떨려오는 목울대를 통해,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게일이 반역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그리 말 못 할 터인데.’
이안의 입매에 미소가 돌자, 긴장했던 로만드로가 눈을 댕그랗게 떴다. 왜 웃냐는 듯이 말이다.
“로만드로 님은 마리브 저하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리 말하면 섭하네. 나는 녹봉 먹는 자라고. 마리브 저하가 상관이시긴 하지만…….”
사표 쓰면 보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언제고 이렇게 계속 볼 사람 아니던가. 모시는 상관이 달라진다면 아쉽긴 하겠지만, 마법사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었다.
“우선 확실히 말씀드리지요. 저는 게일 저하를 위해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그래? 아하하! 아이구, 난 또 긴장했네그려!”
처음 입궁한 날 게일을 만나고, 신년회에서도 단둘이 얘기하는 걸 지켜봤기에 오해한 것이다. 로만드로는 연신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어댔다.
“하지만 마리브 저하께 루론 마법석을 비롯하여, 제 사정을 다 알려드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 어째서…….”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섣불리 패를 다 보여주는 것만큼 황궁에서 위태로운 것이 없지 않습니까. 로만드로 님이 그리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내가 그랬나?”
당연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안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로만드로는 고개만 갸웃거리더니, 이내 수긍했다.
“과거의 내가 꽤 그럴듯한 충고를 했군. 그래, 맞는 말이지.”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혹여 마리브 저하께서 하문하신다면 로만드로 님은 신념에 맞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저를 위하실 필요 없어요. 로만드로 님은 가정이 있으신 분 아닙니까.”
이안의 말에 로만드로의 표정이 묘해졌다. 확실히 그러했다. 로만드로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비비안나와 곧 태어날 아이.
“두 사람을 위해 사세요. 저는 저를 위해 살 것이니.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심려 안 하셔도 됩니다. 잘 알지 않으십니까?”
처신 하나만큼은 뛰어나다 못해 독보적일 정도다. 아무것도 없이 대사막을 건넌 것도 모자라, 새로운 가문을 세우기까지 했으니까. 로만드로는 차를 홀짝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리 말하면 알겠네. 내 자네를 걱정하되 못 미더워하지는 않아. 언제고 의논할 일이 있으면 하시게나. 루론 마력석은 생각이 있어 보이니, 내 일단 장기 보관할 장소를 찾도록 하지.”
“그리 말씀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꽤 많은 날을 함께했어.”
로만드로의 말에 이안은 웃기만 했다. 어쩌면, 로만드로가 변경으로 내려왔던 것이 진정한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다시 아침 식사를 이어가려고 할 때였다.
띠링! 띵띵!
정문에 걸어둔 초인종 소리가 울려댔다. 주방에 있던 미니가 의아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마법부가 벌써 도착했나요?”
“글쎄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잠시만요. 나가보겠습니다.”
미니는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살짝 열었다. 이안과 로만드로 역시 반쯤 일어나서 바깥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이안 님. 손님 오셨는데요?”
“손님? 이 시간에?”
“바르사베 브루테라는 분이십니다.”
“아아. 황궁친위대?”
이안은 그제야 알겠노라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곤 웃옷을 걸치며 미니를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인지 모르는 로만드로만 베릭을 서둘러 깨우며 채근했다.
“이놈아, 이제 그만 일어나 보아라.”
“으흠. 돼지, 돼지가 말을 하네…….”
“이게 미쳤나! 이놈이! 누구보고 돼지라는 게야!”
따악!
로만드로가 꿀밤을 제대로 먹였지만, 베릭은 잠결인지라 무딘 반응만 보였다. 눈 감은 채 이마만 슥슥 문지르며 하품을 찢어지게 할 뿐이다.
“황궁친위대가 이안을 찾아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니, 서둘러 채비하여 앞으로 나오거라. 이안의 호위라는 놈이, 하여간!”
“으음. 경호대?”
“빨리!”
우당탕탕, 안쪽에서 들리는 소란을 뒤로하고, 이안은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바르사베가 입술을 굳게 다문 다음 거수하며 인사했다.
처억.
“안녕하십니다. 이안 히엘로 자작님. 황궁친위대 소속의 바르사베 브루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베레모와 장갑 그리고 검집에 달려있는 장식 하나하나까지 정석 그대로였다. 이안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롭게 바르사베를 훑어보았다.
‘100년 후의 경호대 정복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아버지의 유품을 찾으러 왔습니다.”
정식으로 정중하게 방문한다면 페트레이오의 유품을 내주겠노라, 이안의 말만 믿고 이리 방문한 것이다. 어쩔 방도 없이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했다.
“정중하게 방문하는 것 치고는 시간이 이르군.”
“실례했습니다.”
“뭐. 밤에 오는 것보단 낫겠지.”
쿵쿵!
“이안! 이아안!”
그때였다. 잠이 덜 깬 베릭이 검집을 그대로 들고서 후다닥 뛰어나왔다. 등을 떠밀며 그를 부추기던 로만드로가 바르사베를 보고 멈칫거렸다.
“호, 혼자시오?”
“그렇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용무?”
“어? 걔네? 골목에서 일격 날리고 제풀에 쓰러진 애. 어금니 박살 났잖아. 코피도 졸라 나고. 반갑다야, 오랜만!”
베릭이 바르사베를 알아보고 인사했으나, 그녀는 살벌하게 눈빛만 흘려댔다. 이 바득거리는 소리가 안 나는 것으로 보아, 어금니는 빠진 그대로인 것 같다.
“…모욕을 하다니.”
“목욕을 하라고? 로만드로 님, 나 어제 토했어요?”
잠도 덜 깨, 술도 덜 깨. 아주 엉망진창이다. 이안은 베릭을 뒤로 물리며 바르사베를 안으로 초대했다.
“무시하고, 응접실로 들지. 로만드로 님,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 물론이지.”
“베릭. 위에 올라가서 소지품이 든 작은 나무 상자를 가져오너라.”
이안의 고갯짓에 미니가 바르사베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로만드로도 그 뒤를 따랐고, 베릭은 투덜대면서도 성실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자는 페트레이오의 여식입니다.”
“페트레이오? 그렇군, 엥? 뭐라?!”
당황해서 한 귀로 흘려듣던 로만드로가 펄쩍 뛰어올랐다. 몰린의 수족이자, 저들을 죽이려 했던 사내의 딸이라! 이안이 그간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동안, 베릭이 상자를 내왔다.
“이안, 이거 맞지?”
“내려놓아라.”
달깍.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면만 보던 바르사베였으나, 저도 모르게 고개가 아래로 꺾여갔다. 이안은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종이 포장지로 싼 작은 반지를 꺼냈다.
“이것이 페트레이오의 반지일세.”
“아. 이거…….”
“아는가? 독이 묻어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 살에 닿는 순간 괴사하여 흘러내리거든. 실로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네.”
“아버지가 이걸 썼단 말이십니까?”
“암살 실패 후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면 아주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생각되네만.”
바르사베는 손바닥에 반지를 올리고서 천천히 들여다봤다.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을 거기서 찾으려는 듯이. 입술을 꾹 깨문 그녀의 눈썹이 잔뜩 찡그려졌다.
“아버지의 반지가 맞습니다. 하지만 자살용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결혼반지도 아닌데 어찌 그리 끼고 다니냐고, 혹시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라도 생긴 것이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짓던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의미가 이것이었다. 반지의 뜻을 알게 될 때면, 아비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언제부터 끼고 다녔던가?”
“황궁친위대 부대장 자리에서 전역하시고, 새로이 일자리를 얻으시면서부터입니다.”
‘몰린을 모시면서부터 끼게 된 반지이니, 분명 그자가 준 게 맞다.’
인신매매와 관련하여 자주 쓰이는 독이라 하니, 이쪽을 파본다면 몰린 경과의 접점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게일과 맞닿아있겠지.
“그래. 조심히 가져가시게나. 독이 굳었으니 아마 만지기 쉽지 않을 것이네.”
구석에서 그걸 듣고 있던 미니가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를 꺼내왔다. 장신구를 사 오면서 받았던 케이스였는데, 반지 하나를 담아가기에는 딱 알맞았다.
“천으로 감싸는 것보다 이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고맙소.”
“그리고 페트레이오는 자네를 참 신뢰했던 것 같다.”
혹여 남은 가족들이 걱정되지 않냐는 말에, 그는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딸아이를 믿는다는 듯이.
“여기까지야. 내가 그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은.”
이안의 말에 바르사베는 두 손으로 상자를 꼭 감쌌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의 뜻으로 거수경례를 한 다음, 허리까지 숙였다. 천 마디의 말보다 더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럼, 이만.”
“아, 혹시 궁에서 우리를 본다면 잘 좀 부탁하겠네.”
정확히는 맞은편에서 하품을 쩍쩍해대고 있는 저 베릭이라는 자를.
바르사베가 영문 모르게 인상만 찡그리자, 이안은 웃으며 덧붙였다.
“베릭을 조만간 황궁 훈련장으로 보낼 생각이거든. 오가다 모자란 점이 있다 하면 도와주시게.”
“나? 내가? 훈련장으로?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좋고요! 황궁 엄청나다며!”
영문 모르던 것은 베릭도 마찬가지였다. 더 강한 자들과 맞붙고, 성장할 수 있는 장소 아니던가. 바르사베는 대답 없이 저택을 나섰고, 베릭은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가며 소리쳤다.
“야! 우리 훈련장에서 또 만나자! 반대쪽 어금니 털어줄게!”
“그 주둥이 좀 닥치거라!”
“앞니는 좀 그렇잖아~!”
콰아앙!
폭풍처럼 휩쓸고 간 바르사베의 방문에, 로만드로는 한 것도 없이 기운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까 베릭처럼 소파에 널브러져 숨을 쌕쌕거리는 와중.
띠링! 띵띵!
다시금 현관문의 종이 울려댔다. 또 바르사베인가 싶어 별생각 없던 로만드로. 이번에는 미니의 말을 듣고 진짜 벌떡 일어났다.
“헉! 마법부에서 왔습니다! 입부요청서가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