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3
제13화. 화분
“아직 멀었습니까?”
첼이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선선한 날씨에 그리 오래 걸은 것도 아니건만, 아이는 힘에 부치는 듯 자꾸 뒤처졌다.
반면 이안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바깥바람에 마음이 가볍다. 낯선 거리 풍경 보는 맛도 꽤 좋고.
“거의 다 왔습니다.”
“힘드시면 첼 도련님은 돌아가실까요?”
맥의 친절한 말에 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오가 있었으면 몰라. 지금 혼자 돌아간다면 아버지의 지시를 따를 수 없게 되지 않나. 저들이 이안과 나누는 얘기를 최대한 기억하여 가져가야 했다.
“오. 여기군요.”
“포트로가 수준에 맞게 조경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호수도 아주 맑고요. 날씨가 좋으면 저 산이 수면 위에 그대로 비친답니다.”
몰린의 칭찬은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황궁의 화려한 정원을 봐왔던 이안에게도 썩 훌륭하게 보일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안은 곤란한 기색을 숨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이가 얼마나 합니까?”
“글쎄요. 저도 다 돌아본 것은 아닌지라.”
“천천히 걸으면 삼십 분 정도 걸릴 것입니다.”
생각보다 공원이 컸다.
정확한 위치를 지정한 것이 아닌지라, 아이의 어미를 만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몰린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이안은 행인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
그때. 저 멀리 천을 뒤집어쓴 부랑자가 좌판 연 것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아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널린 물건 중 익숙한 것 하나.
‘같은 것이다.’
어미가 전해준 말린 꽃과 같은 종의 화분이 놓여있었다. 이안은 걸음을 멈추고 첼을 돌아봤다. 아주 고맙게도, 땀을 뻘뻘 흘리느라 머리칼이 엉망이었다.
“첼 형님이 너무 힘들어하시니,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면 좋겠습니다.”
“그럴까요?”
“괜찮으시다면 마실 것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잠시만요. 리!”
맥은 뒤에 걷던 하인을 불러 마실 것을 가져오라 했고, 일행은 가까운 테이블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이안은 좌판이 있는 곳을 계속 힐끔거리며 틈을 노렸다.
“하인이 오는 동안 잠시 저쪽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형님. 같이 가실래요?”
“…아니. 나는 괜찮아.”
손까지 내저으며 헉헉대는 첼. 이안이 세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침묵으로 동의를 구했다. 앉은 곳에서 먼 것도 아닌지라, 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뭐 볼 게 있겠습니까만.”
“고맙습니다.”
좌판 앞으로 간 이안은 쪼그려 앉아 물건을 살폈다. 거의 엎드려 있다시피 한 부랑자는 반응이 없다. 설마 쓰러진 건 아니겠지? 이안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하여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의 압생트색 눈이 금빛으로 변하고, 브로치는 붉은빛을 내며 작동을 멈추었다.
“어머니.”
그의 목소리에 움찔. 부랑자가 고개를 든다. 검은 천 아래 사막 모래 같은 금빛 머리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이와 같은 녹안. 이안의 어미다.
“…이안.”
“크게 반응하지 마시고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이안의 어미, 필리아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어찌하여 데르가에게 걸렸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필리아는 고개를 들려다가 이안의 말에 멈칫했다. 천으로 가려진 시야로는 아이의 가슴께밖에 볼 수가 없다.
“이안. 이안…….”
“어머니.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편지도 잘 받았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후두둑. 어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이안은 묵묵히 지켜봤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다. 뒤쪽 사내들이 이 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터.
“이전처럼 해나를 통해 안부 물을 수 없음을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이안은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냈다.
“혹시 어머니가 넣어주셨나요?”
“무엇을? 금화를?”
필리아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백작이 어미를 물질적으로 돌보고 있다는 걸 은근히 강조하려던 장치.
이안은 방긋 웃으며 여인의 손에 금화를 쥐여줬다.
“돈으로 몸 숨길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 제가 해나를 통해 시기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재 이안의 걸림돌은 필리아다. 데르가를 썰어 먹기 위해서는 예상 가능한 변수를 모두 정리해 두는 것이 좋다.
여인은 동전을 가만히 쥐고 고개를 들었다. 당최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이안. 너 눈이…….”
“맹세해 주세요. 저를 위해 그리하시겠다고.”
사자처럼 빛나는 금빛 눈. 놀란 필리아가 눈을 깜빡이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이안.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도 좋아.”
“어머니. 죄송하지만…….”
“이안 님!”
하인이 마실 것과 간식거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맥이 이안을 불렀으나, 아이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저자들에게 금안을 보일 수는 없으니.
“너를 그리 보낸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미안해. 그러니 원한다면 망설일 것 없이 도망치렴.”
맥이 서서히 다가왔다. 가까이 올수록 의아한 표정이 짙어졌다. 여인은 자신의 각오를 전하고자 이안을 만나러 온 듯 보였다. 차마 아이의 손을 잡지는 못하고, 소매만 꽈악 붙잡았다.
“저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이안은 나지막이 결심하듯 덧붙였다.
“여유가 될 때마다 굴라 씨앗을 모아두세요. 필시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불러주셨던 노래는 잊으시고, 제가 편지로 부칠 가사가 앞으로 암호입니다.”
맥이 바로 뒤에 섰다. 이안은 마력을 풀며 방싯 웃어 보였다. 금빛 눈도, 붉은 브로치도,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화분으로 하겠소. 값은 이만하면 되었을 터.”
“이안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미안합니다. 맥 경. 살까 말까 고민한다고 오래 걸렸어요.”
이안은 화분을 집어 들며 웃었다. 맥이 아이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으나, 담담함 외에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부랑자를 힐끔거리며 아이를 안내했다.
“첼 도련님이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약하십니다.”
이어서 소곤소곤. 첼의 흉을 보며 낄낄댔다. 이안 역시 웃으며 살짝 뒤를 돌아봤다. 필리아는 천을 뒤집어쓴 채 아예 엎드려 있었다. 소리 없이 우는 법을 아는 여인이다.
“화분을 사셨군요. 이안 님.”
“무슨 식물입니까?”
드고르의 질문에 이안은 웃기만 했다. 알게 뭐란 말인가. 식물에 견식이 깊은 것도 아니요, 편지 내용으로 봤을 때 아이가 기르던 화분인 것만 확실했다.
“글쎄요. 꽃이 너무 예뻐서 샀는데요.”
“처음 보는데…. 맥! 자네는 알지?”
“내가 어찌?”
“꽃다발 바치는 건 자네 전문 아닌가?”
“드고르! 정말!”
하지만 놀랍게도, 자리에 모인 모두가 화분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수채화를 머금은 듯한 붉은 꽃잎이 화려하여 한 번 보면 잊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화분을 끌어안으며 뒤를 돌아봤다. 여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 *
달깍.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 데오가 비틀거리며 내렸다. 아직 술이 덜 깬 게 분명했다. 대문 앞, 하인들이 랜턴을 든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피곤하시지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이안 도련님 먼저 집무실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일사불란하게 외투를 받고 물수건을 챙겨줬다. 이안은 화분을 하인에게 맡긴 다음, 바로 위층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라.”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허락이 떨어졌다. 어지간히 기다린 모양이지. 안으로 들어서자 데르가가 깃펜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브로치.”
인사보다 먼저 브로치 확인이 중요했다. 이안은 책상 가까이 가 가슴팍의 브로치를 내려놓았다.
“무슨 얘기를 했느냐?”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오찬은 관사의 응접실에서 진행됐고, 주로 수도 얘기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근처의 공원으로 가서 학식 토론을 이었습니다.”
“그래? 그뿐이다?”
데르가는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브로치를 집어 들었다. 옆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통이 있었는데, 마력석을 활성화시키는 물약이었다.
퐁당.
액체에 잠긴 마력석이 빛을 발했다. 이안이 마력을 불어넣었을 때와 같은 반응. 잠시 후, 천천히 고동에서 퍼지는 파도 소리처럼 목소리가 울렸다.
[…이곳은 관사인가요?] [수도에서 공무원이… 파견되는… …쓰는 곳이랍니다. 깔끔하고… 제집처럼… 있습니다.]“제집처럼 무어라 한 거냐?”
“제집처럼 지내고 있다 한 것 같습니다.”
하급 마력석이라 그런지 음성이 깔끔하지 않았다. 이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 했다.
‘이런 식으로 정확하지 않을 부분을 꼼꼼히 따질 요령이구나.’
피곤한데, 확 그냥 마력을 쏟아내서 부숴 버릴까? 이안이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백작 부인 메리였다.
“잠깐 저 좀 보시지요.”
“무슨 일인데 그러하오?”
굳은 입매가 분노를 담고 있었다. 백작은 브로치를 건져내며 인상을 찡그렸고, 부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이안을 노려봤다. 도저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저 천한 것이 바깥으로 나돌 때마다 첼을 붙일 생각이신가요? 수업까지 빼면서 하는 일이 고작 저것을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거라니요!”
“지금 어디서 바락바락!”
“안 하게 생겼습니까?”
저택에 도착한 첼의 꼴이 말이 아니긴 했다. 물에 빠진 돼지처럼 땀에 푹 절어서는, 휘청휘청 걷는 모습이 영 형편없었으니.
메리는 두 번 다시 아이를 감시역으로 보내지 않겠노라 선언했고, 데르가는 언성을 높였다. 안 그래도 쌓인 게 많은 사이였는데, 불씨가 붙는 게 느껴질 정도다.
“저기.”
이안은 둘을 가만히 지켜보다 끼어들었다. 귀 따가운 부부 싸움을 더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버지.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홀라당 미끄러지듯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자주 있는 일인지, 하인들이 몸을 웅크리며 복도를 빠르게 내지르고 있었다. 총총, 아래로 내려온 이안은 해나와 마주했다.
“해나.”
“이안 님. 화분은 방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고마워. 덕분에 일을 잘 끝냈다.”
어머니를 잘 만났다는 뜻이었다. 해나가 그의 뒤를 따르며 조잘거렸다.
“막상 전언하니 공원이 크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손님들 거주지인 포트로가 3구역과 제일 가까운 입구로 말씀드렸답니다.”
이안은 방문을 열며 아이를 돌아봤다. 어쩐지. 쉽게 만났다 했더니, 해나가 일 처리를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똘똘하니 참으로 도움 되는 아이다.
“그래. 고맙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렴.”
“네. 도련님. 감사합니다!”
해나는 랜턴 불을 정리해 준 후,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첼처럼 녹초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안 역시 다리가 저려서 고단했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곤란한데…. 첼을 앞세워서 훈련장에 나가볼까?”
체력도 단련할 겸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다. 격동의 때가 올 것이 분명했으니.
이안은 난생처음으로 엎드린 채 곯아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