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39
제139화. 다시 맹세하건대
로만드로는 연신 불안한 자세로 마차 밖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둠은 완전히 내려앉았고, 이안은 올 기미가 안 보였다. 들어간 지 벌써 몇 시간째인데.
타닥타닥!
그때, 저 멀리 거대한 계단을 내려오는 금빛 머리의 소년이 보였다. 워낙에 주위가 조용한 탓에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로만드로는 조는 마부를 깨우고서 그의 앞으로 마차를 몰았다.
“이안. 서둘러 타시, 흐어어억!”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로만드로 님.”
“세상에, 세상에! 이아아안!”
“쉬이, 별거 아닙니다.”
“벼, 별거가 아닌 게 아닌데?”
닦아내긴 했으나 턱과 목에 혈흔이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옷이 엉망진창이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로만드로는 당황한 표정으로 차마 이안을 붙잡지도, 그렇다고 놓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떨어댔다.
반면, 이안은 옷깃을 대강 정리하며 마부에게 심드렁히 지시했다.
“출발하시게나.”
“의, 의무관을 찾아갈까요?”
“아니. 마리브 저하의 궁으로.”
“예예. 알겠습니다.”
히이잉!
마부 역시 놀랐는지, 말을 심하게 더듬어댔다. 입을 떡 벌린 채 이안의 상태만 살피던 로만드로, 이내 자상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이안. 이것은 자네의 피가 아닌가?”
“제 피가 맞습니다. 안에서 실담물약을 먹었거든요. 신체적인 고통은 없으나 부작용이 꽤 심합니다. 이러니 다들 지레 겁먹고 반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안이 웃자, 로만드로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그는 이안이 들고 갔던 루론 상자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나? 그리고 이 밤에 마리브 저하의 궁에는 어찌?”
“알려드릴 수는 있다만, 자세히는 모르는 게 로만드로 님의 안위에 좋을 것입니다. 이제 곧 폭풍이 크게 닥칠 예정이라.”
“포, 폭풍?”
“걱정하실 건 없어요. 우리가 있는 곳은 언제나 그 중심일 테니까요. 일이 생각보다 수월히 풀렸습니다.”
로만드로가 손수건에 침을 살짝 묻혀 닦아주려고 하자, 이안이 손날로 거절했다. 마리브에게 지금 이리 가는 것은, 이 꼴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만 돌아가라. 웨슬리가 진정으로 금기된 사령술을 연구했는지 확인 후, 내 다시 전언을 주겠노라.’
아무리 마법부 내에서도 일급비밀이라고 한들, 황자가 알아내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을 터. 모든 게 사실이라면 다음 주에 있을 고위직 임명 회의에서 웨슬리는 제명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마리브에게 손을 써두어야지.’
이쪽에 갔다가 저쪽에 갔다가, 달밤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했어야 하는 일. 원래 힘이란 한쪽에서 미는 것보다 균형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었으니.
“현재 행정부에서는 실담물약에 대한 사안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습니까?”
“아무래도 행정부의 실권은 황제 폐하께 있으니, 그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네. 하지만 아래에서도 우려가 커. 분명 이상적인 물약이지만, 그, 마법부가 비이상적이라…….”
이안은 황궁 내 부서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수를 헤아려 봤다. 100년 후와 크게 다를 게 없다면, 총 스무 개 정도의 부서가 있겠지. 그중 실권에 가까운 것은 다시 열 개 정도로 추려지고…….
“그런데 이안, 게일 저하께 볼일을 보고서 이리 바로 마리브 저하께 간다면 좀 그렇지 않은가?”
“괜찮습니다. 게일 저하도 알고 계실 거라.”
“알고 있다고?”
일종의 이중 첩자다. 이안이 양쪽으로 접근하더라도 크게 수상히 여겨지지 않을 터. 로만드로는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가, 가늠하지 못하고 힘없는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때였다.
타악!
“도착했습니다. 자작님.”
“아, 그래. 로만드로 님. 다시 기다려 주십시오.”
밤중이라 통행이 없어 빠르게 도착했다. 이안은 다시 한번 피가 잘 묻어있는지를 확인하며 마차 문을 열었다. 가까이 다가온 경비가 이안의 상태를 보고서 흠칫거렸다.
“혹시 길을 잘못 드셨습니까? 이곳은 마리브 저하의 궁입니다. 밤중에 방문객이 올 거라는 명령은 받은 게 없습니다만.”
“맞네. 급히 온 것이니 서둘러 전언하시게. 이안 히엘로 자작이 알현을 바란다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는 피로 흠뻑 젖은 이안의 옷을 힐끔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게일 측과 달리 이안과 로만드로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다.
“…세상에, 자작님. 괜찮으십니까?”
“문제없소.”
마중 나온 시종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궁에서 한평생 살아온 자의 감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종장은 서둘러 이안을 마리브의 집무실로 이끌었다.
똑똑.
“저하.”
“들거라.”
마리브는 낮이나 밤이나 같은 모습이다. 머리를 단정히 하나로 묶고 안경을 쓴 채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안 히엘로 자작.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저하, 늦은 밤 송구하오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게일 저하의 궁에서 나온 참입니다.”
게일이라는 이름에 시종장이 서둘러 밖으로 돌아나갔다. 문이 닫히고, 공간에는 마리브와 이안뿐이다.
“우선 저하에게 언질드리지 않고 게일 저하를 뵙고 온 걸 용서해 주십시오. 분명 실담물약을 쓰게 할 것 같아, 저하가 제 행적을 모른다는 진실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피, 실담물약의 부작용이로군.”
“정확하십니다.”
연구가 덜 되었다고 하더니, 실로 가관이다. 저래놓고 상용화라니. 미친 것이지.
“일전에 말씀하셨던 루론석에 관한 정보를 살피던 중, 예상 매장지가 현 히엘로 령에 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아, 마리브는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서 게일이 그토록 탐하였던 거로구나. 실담물약 사안까지 들먹이며 귀찮게 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안은 황자의 안색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여, 게일 저하께서는 저를 불러 루론석을 마법부에 공급하라 명하셨습니다. 이는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는 아니 된다. 루론석을 공급하면 실담물약 안건에 빌미를 주게 돼.”
“저하. 실담물약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마법부 아닙니까? 그 수장인 웨슬리가 게일의 사람이니, 물약 자체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진실을 말한다 해놓고, 거짓을 말하게 될지, 그리고 나아가 정체불명의 액체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마리브는 안경 받침을 올리더니, 이내 담담히 되물었다.
“한데?”
“웨슬리 장관이 실각하여 마법부의 주인이 바뀌면 전혀 문제가 없게 되지요.”
웨슬리 장관이 실각?
말도 안 되는 일이다만, 그리된다면 마리브에게는 둘도 없을 호재였다. 게일의 주축 세력이 공중분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대체 어떻게? 웨슬리가 스스로 물러설 리는 없고, 방법이라곤 게일이 쳐내는 것뿐인데, 그놈이 웨슬리를 어찌 버린단 말인가?’
그때, 마리브는 문득 하이만 가의 막내 여식을 떠올렸다. 최근에 게일이 공을 그렇게 들이고 있다 하더니만, 혹여 웨슬리와 그것으로 인해 다툼이라도 난 것인가?
바리엘에서 은행업을 독점하고 있는 대가문의 막내딸이자, 이웃 왕족의 피가 섞여 있고, 사교계에서도 아름답다 정평이 나 있는 여인. 신년회에서 게일과 딱 붙어 파티를 보냈노라, 소문이 날 대로 나 있는 상태였다.
이안은 천천히 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외람되지만, 혹여 장관석이 공석으로 남으면 마법부에서 어찌 선출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마법부만큼은 무엇보다 실력 위주이니, 분명…….”
마리브의 말꼬리가 흐려지자, 이안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마력확인식에서 범상치 않다고는 여겼으나, 그 정도일 줄이야.
“게일 저하가 마력확인식 때 제 마력을 보고 인상을 크게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마리브도 아름답다 여겼지만, 그것이 ‘웨슬리와 비교하여 어느 정도다’라고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저 운 좋게 걸려온 변경의 귀족이 쓸 만하구나 싶은 정도였거늘.
“하여 차기 장관 후보자들을 하나씩 물색하시는 중인 듯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게일 저하가 웨슬리 장관을 쳐낼 것이라 예상한 것입니다.”
“분명 뒤에 숨겨진 속내가 있을 게다. 어지간해서 게일은 절대, 절대 웨슬리를 못 버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하. 혹여 장관이 실각하여 제게도 기회가 온다면 말입니다.”
지금 이자가 무어라 하는 거지? 갓 입부한 신입 마법사가 장관직을 입에 올리다니. 하지만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내뱉었다.
“실담물약 건을 진행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부에서 세력을 모으기에는 외부적인 담합 요소가 필요합니다. 실담물약을 허가해 주신다면, 제가 그것으로 사람들을 모아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담물약에 얽혀있는 부서만 해도 몇 개던가.
마력석관리부, 물약연구부, 마법실험부…….
“할 수 있겠는가?”
“해낼 것입니다. 저하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분명 수월하게요.”
마리브는 생각했다.
혹여 게일이 웨슬리를 쳐낸다면, 분명 마법부에 점 찍어둔 차기 장관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기회는 의외로 모두에게 공정히 내려질 것이다. 이안이 갓 들어온 새내기긴 하여도 어쨌거나 마법부 소속의 마법사였으니까. 감히 단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니던가.
“이안. 다 좋아. 다 좋으나, 내게는 아직 게일과 웨슬리가 갈라질 것이라는 게 와닿지가 않아. 꿈에서 듣는 허무맹랑한 헛소리처럼 느껴진다, 이걸세.”
진짜 게일이 웨슬리를 버릴까? 아니, 애초에 웨슬리가 버려진다고 하여 버려질 여인이던가? 마리브가 부드러운 눈매를 가늘게 뜨고 이안을 노려봤다.
‘실담물약을 진행하라 종용하는 작태가… 혹, 게일의 편에 붙은 게 아닌가?’
이안은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이래서 눈치가 빠릿한 자들은 피곤하다.
“제가 실담물약을 언급한 것은, 제가 루론석의 대량 공급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루론석과 관련하여 큰 이슈는 그것뿐이고, 또한 마법부를 제외한 타 부서에서 모두 반대하는 중이라 하니, 안건을 통과시키면 마법부에서 크게 지위를 확립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입니다.”
영 앞뒤가 안 맞는 말은 아니다. 마리브는 고개를 들라는 뜻으로 펜대를 이안의 턱에 가져다 대었다.
동생은 칼을 들이밀더니, 형은 펜을 들이미는구나.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우선, 웨슬리가 실각하는 게 먼저고 후에는 이안 자네가 마법부에서 싹수를 보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걱정 마십시오, 저하.”
지이잉. 지잉.
이안은 마력을 개방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녹안이 금안으로 변하며 주위에 마력의 빛이 감돌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노라고.
“맹세하건대, 이것은 분명 저하를 위한 빛입니다.”
“그래. 기대해 보겠네.”
마리브는 이안의 턱을 가볍게 치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작질이든 뭐든, 어쨌거나 웨슬리를 자리에서 끌어내는 것 자체가 의미 있을 터.
이안은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