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4
제14화. 훈련장
백작 부부의 고성은 새벽이 가도록 수그러들지 않았다. 덕분에 다음 날 아침. 식당에 나온 것은 첼과 이안 두 사람뿐. 피로한 몸으로 들어서던 첼이 멈칫거리며 눈을 굴렸다.
“형님. 좋은 아침입니다.”
“……”
이안이 먼저 인사를 건넸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찌하여 아버지, 어머니 자리가 비었는지 모를 일이다.
“두 분께서는 오늘따라 늦으시네요. 저희끼리 먼저 먹고 있죠. 어서 앉으세요.”
마주 보는 것도 불편한데, 밥까지 먹으라고? 아침부터 체할 일 있나? 첼이 슬그머니 돌아가려 하자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붙잡았다.
“제가 의자까지 빼드려야 합니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물쭈물 변명을 생각하던 첼이 체념하고 자리에 앉았다. 불과 저번 주까지만 하더라도 빌빌대던 역할은 이안의 것이었거늘. 어찌하여 상황이 이리 역전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그 금빛 눈은 대체…….’
혹시 저주일까? 아버지가 천려족을 멸하기 위해 이안의 몸에 저주를 심어놓고 보내는 건 아닐까? 무지에서 비롯된 온갖 상상력이 첼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이안은 샐러드를 먹으며 그를 지긋이 쳐다봤다.
“형님.”
“…으응?”
“어제 보니까 체력이 많이 약하신 것 같더라고요. 혹시 따로 받는 훈련이 있으십니까?”
훈련이라니. 학교에서 하는 체력 단련도 꾀병 내어 빠지기 일쑤였다. 그런 첼이 따로 움직일 리가 없지 않은가.
이안은 짐짓 걱정스러운 투로 권했다.
“어제 보니 형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체력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데르가 백작 가문에 자식이라고는 우리뿐인데, 둘 다 이러면 천려족에서 어찌 생각할지 심히 염려되더군요.”
뭔가 불길한 걸 느낀 걸까. 첼이 나이프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안 역시 생긋 웃으며 식기를 정리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같이 훈련장에 나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첼이 기겁하며 입을 딱 벌렸다.
훈련장? 사병들이 검과 창을 휘두르는 그곳?
“형님이 말씀하시면 아버지께서는 반기시겠죠. 분명 차기 백작으로서의 소양에 맞는다 칭찬하실 겁니다.”
사실 데르가는 걱정이 많았다. 천려족과 반 전시 상태인 만큼 공자들의 강한 모습이 중요했는데, 첼은 1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쪽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하여서 백작이 선택한 방법은 단장의 권세를 높여주는 것이었다. 데오가 그 수혜자 중 한 명인 셈이다.
“그, 그러시긴 하겠지…….”
검을 휘두르는 건 고사하고 뜀박질도 싫어하는 첼이었다.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이안은 재빨리 기회를 잡아챘다.
“좋습니다. 그러면 식사 후 구경을 먼저 하도록 하지요. 저택 후문만 나가면 바로 있다 하던데요.”
“식사 후 바로?”
“왜요? 그럼 물리시겠습니까?”
밥이라도 먹고 갈 것인가, 아니면 빈속으로 갈 것인가. 택일하라는 의미였다. 첼은 입을 꾹 다물며 빈 부모님의 자리를 원망스레 힐끔거렸다.
이안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음식을 덜어 먹었다. 오늘은 남는 것이 꽤 많을 것이다.
* * *
저택 후문으로 나가자마자 보이는 훈련장.
아주 오래전 선대부터 써왔던 건물인지라 낡았지만, 군의 위용이 그대로 담겨있는 잿빛 벽이 인상적이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바리엘 국기와 브라츠 가문의 깃발이 위풍당당했다.
“데오.”
“첼 도련님?”
훈련장 안으로 들어가자 벤치에 반쯤 누워있는 데오를 발견했다. 여전히 부상을 핑계로 훈련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 얼씬도 않던 두 아이의 방문에, 데오는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저기. 훈련장 구경을 좀 하려고 해.”
“도련님이요? 왜요?”
데오의 대꾸에 뒤에 서 있던 이안이 나섰다. 태도가 불손하다 못해 시건방지다.
“소백작이 훈련장에 오는 게 무엇 그리 유별난 일이라고 되묻는가?”
“지금껏 처음인지라.”
“전날 외출로 체력의 모자람을 느꼈으니, 앞으로 함께 수련하고자 하네. 호위가 술 먹고 곯아떨어지더라도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관사에서 와인 처먹고 쓰러진 데오를 꾸중하는 말이었다. 이안 입장으로는 참으로 다행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임무에 소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사내는 피식 웃으며 시커먼 이를 혀로 훑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데오로서는 별로 탐탁지 않은 변화였다.
그럴 가능성은 작지만, 혹여나 첼이 무예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다면 단장에게 부여된 권한 일부가 제한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뭐. 아직 어린 데다 포동포동하게 오른 몸집으로 보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만…….
“예. 그러면 따라오십시오. 구경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데오는 느긋하게 앞장서서 걸었다. 널찍한 터 안쪽에서 사병들이 자유롭게 훈련하고 있었다. 대부분 웃통을 깐 채 검을 휘두르거나, 마차 바퀴를 둘러업고 뛰는 등,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으아아악!”
“한 번 더!”
“밀어! 더 세게!”
“으아악!”
개인 훈련을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열기가 더욱 짙은 것이, 곳곳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첼은 표정을 관리하려 했으나 영 불편한 모양이다.
“이쪽이 제일 큰 훈련장이고, 저쪽이 창고, 그 뒤가 휴게실입니다. 밤샘으로 단련할 시에는 휴게실에서 숙식할 수 있습니다. 음. 그리고…….”
귀찮은 티가 역력한 데오의 설명을 한 귀로 들으며, 이안은 안쪽을 쭉 둘러봤다. 구석에서 젊은 자들이 머리를 박은 채 엎드리고 있었다.
“저기는 무엇 하는 것인가?”
대부분 성인인 사병들과 달리, 그들은 앳돼 보였다. 많아 봤자 열여덟 안쪽일 정도로. 데오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고아들입니다.”
“고아?”
세금 충당하기도 힘든 브라츠 가문이 보육원을 운영할 리 만무했다. 보호자 없이 길바닥을 전전할 고아가 살아남는 방법은 딱 하나. 바로 데르가의 사병이 되는 것뿐이다. 군대에 들어오면 일단 밥과 누울 자리는 주니까.
데오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안 님도 재수 없었으면 여기서 저를 봤겠습니다.”
무례하나,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몸은 천민 출신 어미를 둔 사생아. 버려진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출신 성분이었다. 그랬다면 이안 역시 이쪽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겠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그런가? 형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안의 물음에 첼이 얼굴을 굳혔다.
“…데오. 그리 말하지 말게.”
제발, 이안에게 패륜적인 말 좀 그만하라 이것이다.
다시 한번 금빛 눈을 보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두려움에 기반한 꾸중이었으나, 데오는 의외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훈련장 한가운데 땡볕에서 소란이 일었다.
“대가리 제대로 박아!”
촤악!
교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가는 채찍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아이들의 팔과 등, 허벅지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소년병에 학대까지. 단단히 미쳤군.’
데르가, 이자는 정신이 어떻게 됐단 말인가? 이안은 감히 상상도 못 한 처사다. 그가 황제로 있던 바리엘에서는 소년병이란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나 나오던 전력이었다.
이안은 잠깐이라도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데오를 불렀다.
“데오, 네 말대로 재수 없었으면 내 동료가 되었을 자들이다. 격려라도 할 겸 잠시 그늘로 부르지.”
“예? 진심입니까?”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편인가?”
“그건 안 됩니다. 훈련 중에는 백작님이 오시더라도 멈출 수 없습니다. 기강을 위한 방침이니 이해하시죠.”
기강은 개뿔. 이안은 대답 대신 가까운 벤치에 앉아 그쪽을 지켜봤다. 망할 훈련이 끝나면 바로 불러서 안위를 살필 참이었다. 첼 역시 머뭇거리며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으아아악!”
“제대로 못 해? 굶고 싶나?”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팔 똑바로 들어!”
“아아아악!”
절규가 처절했다. 주위 훈련 소리에도 묻히지 않을 만큼. 팔을 뒤로 한 채 머리로만 지탱하던 몸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버텨!”
그들 중 유독 이안의 눈에 들어오는 한 아이.
산발의 붉은 머리칼을 대충 묶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독기 그 자체다. 서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로 세상을 보는 듯한 시선.
“저 아이…….”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떼었다.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체격은 날렵한 편이었는데, 몸이 달달달 떨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버티는 모습이었다.
이안의 시선을 따라간 데오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베릭입니다.”
딱히 특출난 신체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교관들도 지독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집요한 아이였다. 선별 전투에서 체급이 두 배 가까운 상대와 맞붙었지만, 귀를 물어뜯고서 승리를 쟁취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 벌로 사흘간 금식 처분을 받았다.
이안은 다리를 꼰 채 베릭을 주시했다.
“흐윽…….”
남은 사람은 단둘. 베릭과 다른 아이의 목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었다. 교관은 시계를 확인하며 침묵했다. 둘 중 하나가 남을 때까지 기다릴 참인 듯싶다.
“으아아악!”
악을 질러가며 버티는 베릭. 그걸 기점으로 상대 아이는 힘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땀에 젖은 상체가 모래로 범벅이 되었다.
삐익!
“그만.”
교관의 말에 베릭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숨을 씩씩거리며 일어서지 못하던 아이는 고개만 겨우 돌려 침을 뱉었다. 이마는 피로 엉망이다. 모든 걸 쏟아냈는지 엎드려서는 꼼짝도 못 했다.
“그럼 베릭이라는 애가 저 중에서 1등이야?”
질겁하며 그걸 본 첼이 물었다.
“그건 또 아닙니다. 악쓰는 것이 쓸 만은 하다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실력이 성질을 따라오지 못해요. 특히 전투에서는.”
교관이 베릭의 머리에 물을 부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일어날 수 없는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일찍이 포기한 다른 동료들은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었다.
“저런 열의라면 훈련에 모범적일 텐데?”
“…체질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들은 안 됩니다. 타고난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요.”
매일 먼저 훈련장에 나와 제일 늦게 나가도 성장이 더뎠다. 독기를 물어서 버틸 수 있는 건 누구도 따라갈 수 없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적의 칼날 앞에서 이만 꽉 문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할 텐데요. 각자 쓸만한 곳이 따로 있으니까. 베릭도 전선보다는 특수임무에 적합한 것 같아 따로 뺄 생각입니다.”
데오는 첼과 이안에게 들으라는 듯 덧붙였다.
병력 관리 쪽은 자신을 비롯한 적임자가 잘하고 있으니, 너희들은 곱디고운 손으로 펜대나 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을 알아듣기에 첼은 너무 아둔했고, 이안은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다.
‘뭔가 이상해.’
아까의 그 눈빛은 정말이지, 뭐랄까.
신념과 명예를 위해 죽고자 하는 기사 자체였다. 전쟁의 불구덩이가 생생히 떠오르는 기백. 성인도 안 된 아이가 저런 성정을 가진 게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악을 내지를 때 순간적으로 희미한 마력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여러모로 마검사 특징인데.’
마력을 다루는 검사.
몸 안의 기를 마력이 막고 있어 각성 전에는 성장이 더디다. 하지만 한번 각성하고 나면 어지간한 인간과는 비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전력일 터.
‘발굴하려면 내재한 마력을 자극해 줄 마력운용자가 필요하다. 그 자체가 귀하니 평생 자신이 마검사인 줄도 모르고 죽어간 자들이 많겠지.’
“훈련이 끝난 것 같으니 이제 불러보게.”
이안은 데오를 향해 지시했다.
두 번의 거절은 용납지 않겠다는 듯 아주 단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