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48
제148화. 은밀한 거래
녹음 진 그늘 아래,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섰다.
드문드문 바람이 휘날릴 때마다 새어 나오는 햇빛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안은 주위에 보이는 사람은 없지만, 게일의 보좌관과 호위들이 기척을 숨기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안 경. 우선 그때 나를 구해준 것에 고마움을 전하네. 그 누구도 웨슬리와 대적하지 못했는데, 그대는 해냈어. 가히 칭찬할 만하지.”
게일이라서, 게일이 필요해서 구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한 것일 뿐. 수많은 자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안은 응당 당연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한데, 말투가 상당히 부드러워졌군.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로다.’
그를 오래 본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에는 어딘가 모르게 오만하고 당당한 기세가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듯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중했다. 웨슬리도 없고, 저주로 인해 입지가 확 좁아질 위기에 처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이제 한 번의 실수만으로 완전히 끝날 수도 있으니까.
“하문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이안 경. 나는 그날 밤을 기억한다. 그대도 기억하는가?”
게일의 궁에 들었던 밤을 말하는 것이다. 그날이 바로 지금 벌어진 모든 상황의 시작이나 마찬가지다. 이안은 고개를 조아리며 잠깐 뜸을 들였다. 솔직히 지금 그에게는 게일이 별로 필요가 없었으니까.
“저하께서 기억하신다면 저 또한 기억할 것입니다.”
마리브를 견제할 수 없는 게일은 그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 된다. 힘의 균형에서 패배한 자를 어찌하여 이안이 끌고 가겠는가?
“나는 특히 그대가 마리브를 황제감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을 기억한다.”
천천히 다가오며 목소리를 죽였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바람을 타고서도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된다는 듯이.
“웨슬리의 저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리엘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에게만 내려진 시련. 나는 절대로, 절대로 마리브에게 지지 않아. 그럴 바에는 죽음이 낫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태도였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서, 이안은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문득, 그가 지난 역사에서 반역을 ‘일으켰던’ 자였음을 깨달았다.
‘이미 전적이 있는 자다. 혹여 이번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면 반역도 불사할 수 있겠어.’
일종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반역이라는 중죄를 직접 행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적인 계기.
전 브라츠를 노리고, 귀족들을 포섭하는 등의 물밑 작업을 계속해 왔으니, 모든 것이 흐트러지기 전에 일을 터트릴 수도 있겠다.
“그대가 내게 웨슬리의 금기 사령술을 일러주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대에게 좋은 것을 알려주지.”
게일은 자신의 말에 집중하라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거래를 시작하자는 뜻이었다. 물러날 곳이 없는 게일과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는 이안. 다시금 바람이 불었다. 은밀한 거래가 거센소리에 묻혔다.
솨아아.
“현 사달이 나기 전, 마리브가 실담물약을 손에 넣으려고 사람을 썼더군. 시기로는 그대가 마리브의 궁에 들어서 맹세한 다음 날.”
이안이 눈썹을 구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연기하며 맹세했건만, 마리브의 가슴 깊은 곳의 불신까지는 자르지 못했나 보다.
“그걸 누구에게 쓰려고 했겠는가?”
“…저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비단 나만의 생각인 것 같지는 않은데.”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중 첩자 노릇을 하겠노라 당당히 밝혔으니, 어쩌면 그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이안의 대답에 게일이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지금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나왔다.
‘…실담물약 제조에 관여하라?’
“그대는 마법부에 입지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루론 석의 대량 공급자다. 분명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 여겨지는데.”
사실이다. 게다가 여의치 않으면 아예 마법을 걸어 효능이 없도록 할 수도 있다. 조금 걸리겠지만, 새로이 제조하는 시간을 따져보면 확실히 문제없다.
“마리브 앞에서 실담물약을 먹어야 하는 것은 어차피 ‘우리’ 둘뿐이지 않나. 이안 경. 자네는 분명 마리브를 따르지 않는다고 했어. 이리하는 게 서로에게 이득일 터인데? 안 그래?”
“하지만 저하, ‘우리’ 둘이 동시에 마리브 저하 앞에 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안도 마주 보며 방긋 웃었다. 게일을 도와주기에는 명목이 너무 부실하다는 걸 돌려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리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숙청당한다면, 그때는 그 누구도 마리브와 대적할 자가 없다. 아버지조차 마찬가지지. 황제감이 아닌 자 아래에서 평생 조아릴 성정은 아닌 거로 보이는데, 그때 가서 그대가 마리브를 거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게일을 먼저 처리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로 인해 마리브가 완벽하게 권력을 그러쥐면 훗날이 어려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안이 진정으로 밀고 갈 자는 쌍둥이 황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자신의 그릇된 선택으로 황제의 자리가 뒤바뀐다면 그것만큼 난감한 일이 또 없다.
‘게일과 마리브, 둘을 동시에 보내면 제일 좋을 것 같다만.’
“내가 쥐고 있는 마리브의 비밀을 알려주지.”
“……!”
게일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실하게 이안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안은 조금 놀란 듯, 웃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비밀이요?”
“아직 확증이 없어 밝히지는 못했으나, 조사가 진행된 지 꽤 된 것이다. 아주 구미가 당길 거라 여겨지네만.”
부스럭.
게일은 안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겹겹이 접힌 것을 열자, 안에는 분가루와 비슷할 정도로 희고 고운 가루가 나타났다. 이안은 의문스러운 눈길로 게일을 쳐다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이게 뭔지 알겠는가?”
그가 냄새를 맡아보라며 가볍게 손짓하자,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코가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는 뇌리에 박혀 있던 기억을 꺼낼 수 있었다.
바로, 메렐로프의 리엔 부인이 하완에서 들여왔다는 수면용 환각제였다. 자는 와중 무호흡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일종의 마약이자 독약.
“이것은 외국에서 상단들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신종 수면 환각제다. 자세히 맡으면 냄새가 특이하다는 걸 알 수 있지.”
게일은 당연히 이안이 모를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메렐로프의 사태에 관하여 보고 받은 바가 없었으니까. 이안은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게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자신도 갖고 있다. 로만드로의 집 다락방, 리엔 부인이 중앙에서 요긴하게 쓰라며 선물해 준 게 상자에 담겨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저하, 대체…….”
“대화의 흐름을 잃었나?”
게일이 낮게 웃었다. 이해를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하지만 이안은 더듬더듬,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뱉어냈다.
“지금 이것이 마리브와 관련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마리브라, 그것참 듣기 좋은 호칭이군.”
“대답해 주십시오.”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어. 사실 노인에게 그것은 세월의 무심함 때문이겠지만, 뭔가 이상하다 느낀 것은 몇 달 되지 않았다.”
잠자리를 봐주는 후궁, 딜라이나가 호들갑을 떨어대며 황궁 약제실을 털어대기 전까지 게일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알았다. 아버지가 연신 잠결에 꺽꺽 넘어가며, 자신의 생모 이름을 부르고, 심지어는 기상한 상태에서도 환각을 종종 보았노라고.
‘가족 환각.’
그러고 보니, 베릭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냄새 맡자마자 기절하긴 했으나, 가족의 환영을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이안은 나무에 등을 기대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수다. 이안 자신에게 그리고 게일과 마리브 모두에게.
“확실히 제안하지. 실담물약 제조에 관여하여 주면, 그리하여 나에게 다시금 기회가 오면, 지금까지 내가 조사한 모든 것을 너와 공유하겠다. 이는, 마리브를 향한 칼자루를 함께 쥐자는 뜻이다.”
이안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게일을 노려보았다.
이쯤 하니,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다. 지금 이안이 거절을 한다고 하더라도, 게일은 반역이나 혹은 증거 조작 따위로 마리브를 직격으로 노릴 게 분명했다.
그것 또한 명백한 반역. 황궁에 피의 폭풍이 몰아칠 것이고, 이안의 계산을 벗어나는 수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게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하.”
“그래?”
게일은 웃음을 흘리며 궐련을 꺼내 들었다. 그는 있는 힘껏 연기를 내뱉으며 두 손을 옆으로 들어 보였다.
“어떤 의미로?”
그래. 바로 저런 의미로 말이다. 반역이라는 선입견과 저 방종한 태도. 황제를 해하려 한다면 필시 그것이 게일이지, 마리브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둘의 성정이 이토록 다르지 않은가.
“알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마리브보다 나를 더 아끼신다. 이는 곧 나의 기반이자 힘이거늘,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아마 황궁에서 아버지가 죽으면 웃을 자는 마리브뿐일 터다.”
이어서 황제가 될 테니까.
하지만 현 황제에게 세력을 의탁하고 있는 딜라이나나 쌍둥이 황자, 게일에게는 악재임이 분명했다.
‘맞다. 다른 자들은 황제가 없으면 오히려 출궁해서 죽은 듯이 살아야 할 것이다. 마리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끔.’
이안은 복잡한 머리를 뒤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게일이 궐련을 권하듯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는 궐련은 해도, 마약은 멀리하는 자다.”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궐련도 멀리하는 자라.”
“그래? 오래 살겠군. 줄만 잘 탄다면 말이지.”
이안은 문득, 게일이 귀족들의 마약 파티에서 난리를 쳤던 걸 떠올렸다. 그때 노예들을 죄다 죽임으로써 세력을 공고히 하고, 마약에 관한 입장을 발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리되면 실로 신중히 해야 한다. 게일도 게일이지만, 마리브가 걷잡을 수 없게 커져서는 안 돼.’
방법은 하나.
‘둘 다 한번에 묶어서 처리하는 수밖에. 얻을 것 얻고, 자를 것을 자르자.’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게일을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싱긋 웃으며 침묵했다. 서로 속내가 어떤지 짐작하는 눈빛이 여실했다.
“저하,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들, 다 제가 믿어도 되겠습니까? 사실 모두 거짓이라 한다면 저로서는 알아챌 방도가 없는데요.”
“그대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다.”
게일은 궐련을 문 채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게일의 부하가 아주 은밀하게 다가왔다.
무슨 수작인가 싶은 것도 잠시.
이안은 그의 손에 들린, 낯익은 물약을 알아챘다.
“…실담물약 아닙니까?”
“이안 경은 이미 겪어봤으니 알 것이네.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지. 이번에는 내가 마실 차례군.”
그는 망설임 없이 실담물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어서 이안에게 질문해 보라며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안은 빈 병을 슬쩍 본 다음, 입을 열었다.
“저하, 제게 하신 말씀 모두 맹세코 진실입니까?”
게일의 입가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그는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궐련 연기가 더욱 짙어지며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래. 맹세하여, 내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