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5
제15화. 베릭
열일곱의 베릭은 좀 별난 아이였다. 붉은 머리칼을 닮아 성정이 불같아서 그런지, 함께 훈련받는 동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맨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그랬다.
군기반장이 눌러놓겠다며 싸움을 걸자, 팔과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굴복하지 않고 뻗어댔다. 결국, 기절로 마무리했지만.
‘이기진 못해도 지지는 않는 자식’.
훈련생 모두가 뒤에서 그를 그리 불렀다.
“휴식.”
“하아아.”
“그늘로 이동.”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훈련장. 교관의 휴식 명령에 다들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와중, 아무도 베릭을 일으켜 주지 않았다.
베릭 역시 기대하지 않았는지, 눈을 감으며 숨을 고를 뿐이다. 조금 지나면 스스로 움직일 거니까.
“베릭?”
베릭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눈을 치켜들었다. 금빛 머리가 화사하게 빛났지만, 그뿐이다. 눈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일어설 수 있겠나?”
“…너 누군데.”
“이안.”
“꺼져.”
브라츠 백작에게 서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애송이가 바로 그자라는 건 몰랐다.
베릭의 관심 밖이었다. 합숙한 지 벌써 반년 되어가는, 침상 동료 이름도 모를 정도니까. 한 달 전 저택에 들어와 산송장처럼 살던 아이를 알 턱이 없다.
‘성격이 더럽군.’
반면 이안은 그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마검사의 특징이랑 부합한단 말이지.
편견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어찌 된 일인지 그가 봐왔던 마검사는 성격이 죄다 저러했다. 뭐든 베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안달 나 사고 치기 일쑤였지.
“태도가 참으로 불손하다.”
“아…….”
이안은 그의 얼굴에 물을 흘려주며 꾸중했다. 베릭은 시원한지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릴 뿐이다.
이안이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늘에서 첼과 데오, 훈련생들이 그를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서자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감도 못 잡겠다는 표정이다.
‘한번 시험해 볼까?’
이안은 그들을 등지고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물을 먹여주는 척, 베릭의 턱을 잡았다. 맞닿은 손끝으로 그의 마력이 흘러내렸다.
“…….”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베릭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몸 전체를 꽉 채우고 있던 핏덩이가 조금씩 녹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물이 주는 해방감이라 생각한 것인지, 그는 땅에 흘린 것이라도 핥아먹을 기세였다. 이안은 남은 것을 흩뿌리고 일어섰다.
‘됐다.’
일반인은 순수한 마력을 받아낼 수 없다. 힘을 담아내는 그릇의 밀도 차이 때문이다. 마력운용자는 그것이 탄탄하여 마력이 새지 않지만, 일반인은 구멍이 숭숭 뚫린 것과 같아 담아내지 못했다.
치유와 환각 마법이 대우받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일반계 공격 마법이야 대상이 누구이든 한번에 쏟아부어 그릇을 깨뜨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치유, 환각같이 대상이 받아낼 수 있게끔 마력을 변형하는 것은 고급 중의 고급 기술이었으니.
아무튼, 베릭은 어떠한가?
마력을 고이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아주 희미한 힘이었음에도, 어미 젖을 찾는 갓난아이처럼 필사적이기도 했다.
‘싹수가 있어.’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이런 곳에 마검사의 싹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안은 마력을 풀며 첼과 데오 쪽으로 향했다. 첼은 땀을 뻘뻘 흘리며 벌써 지친 기색을 보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서 있기만 했는데.
“형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시지요.”
실로 기다린 말이었다. 첼의 안면이 화악 밝아지며 상기됐다.
“그, 그럴까?”
“그리고 내일부터 나와 훈련하면 되겠습니다.”
이어서 다시 진흙에 처박힌 것처럼 어두워졌다. 아직 아이라 그런 것인가? 어찌 저리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이 노골적인지 모르겠다.
“차기 백작님이라면 그리하셔야지요.”
이안은 방싯 웃으며 덧붙였다. 여전히, 베릭은 훈련장 바닥에 누워 마력의 잔여감을 느끼고 있었다.
* * *
“첼과 훈련장에 나간다고?”
데르가가 되물었다. 마침 마력석 브로치에 담긴 모든 말을 완벽하게 정리한 때였다. 분명 해 떴을 때 불러왔건만, 바깥은 어느새 별로 촘촘했다.
이안은 종일 말하느라 쉬어버린 목을 가다듬었다.
“예. 저택 후문 바로 앞이지만, 문을 나서야 하기에 아버지께 허락을 구합니다.”
데르가가 유리통에서 마력석을 꺼내 마른 천으로 닦았다. 표정은 심드렁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의뭉스러운 듯 같기도 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바깥 한번 다녀오는 데도 체력이 많이 소진됩니다. 가문의 두 영식 모두 이런 꼴이라면 천려족에게 멸시를 당할 것이고, 무엇보다 국경을 넘어 사해를 지날 때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데르가는 서류 더미를 옆으로 치우며 한마디 던졌다. 시험하는 듯한 말투가 아주 거만했다.
“바깥을 자주 나돌면 들떠질 것이다.”
혹여 네가 다른 마음먹을지 어떻게 알지? 라는 질문이었다. 주기적으로 몰린을 만나러 가는 것도 솔직히 불안하건만, 계속해서 기회를 주는 건 탐탁지 않았다.
이안은 주머니에서 서신을 꺼냈다.
“일전에 주신 주머니. 그 답신입니다.”
이안의 어미에게 주는 편지. 그는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머니가 있는 이상 허튼짓 못 할 거라는 건, 데르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고.
데르가는 곱게 접힌 종이를 살짝 펼쳤다.
“어머니에게 제가 아직 글 쓰는 것이 미숙하다고 덧붙여주시기 바랍니다.”
그쯤이야. 데르가는 이미 집사로부터 가정교사가 수업 시간에 답장을 작성했노라 들은 상태였으니까.
바스락.
편지를 펼쳤다. 필체가 엉망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애정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백작님과 마님 그리고 도련님 모두 저를 잘 돌봐주고 계셔요. 어머니가 부탁하신 건 제가 꼭 구해보겠습니다. 부디 돌아오는 그날까지 무탈하시길. 짧은 노랫말과 함께 그리움을 보냅니다. 하늘에서 달이 떨어지면 해가 떠오르지. 영원한 어둠은 없노라.
마지막 줄이 모자간의 암호인 듯싶다.
데르가는 이안이 구룻잎을 구해오겠다 다짐한 문장을 보고 수염을 매만졌다. 은근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어미가 뭘 부탁했느냐?”
“아버지는… 주머니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시험하듯 질문한 것인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데르가가 고개를 들어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보기 드물게 날이 선 것이, 데르가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어미의 전언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데르가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돌았다.
“내가 그리 한가해 보이더냐?”
“…아닙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천려족 여인들이 주로 한다는 머리 장신구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역시 이안의 계산이었다.
어미의 부탁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데르가가 서신을 확인했을지 의심하는 연기. 경계하듯 일부러 눈까지 깔고 목소리를 떨어보는데…….
아. 도저히 못 해 먹겠다. 연기는 정말이지 취향도 아니고 재주조차 없구나.
그런 이안에게 깜빡 속아 넘어가는 데르가는 또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허락해 주시면 당장 내일부터 훈련장에 나가겠습니다.”
이안은 말을 애써 돌렸다. 이미 첼을 달달 볶아 그를 통해 데르가의 허락을 받은 뒤였지만,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서.
데르가는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훈련을 빙자하여 첼에게 해 입힐 생각은 말거라. 그랬다간 데오가 그 자리에서 네 목을 잘라버릴 것이다.”
아이에게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구나.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하다는 말도 잊지 않고서.
“참. 몰린 경은 또 언제 만난다 했지?”
“모레입니다.”
모레 다시금 그들을 만나러 나갈 것이다.
이안의 말에 데르가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마 백작 부인의 반대로, 그때는 첼을 동행시키지 못할 터.
“알겠다.”
데르가는 어서 나가보라며 손을 내저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에도, 이안은 그의 책상 위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저것 중에 분명 세금과 관련된 게 있겠지…….
달깍.
이안은 어두운 복도에 서서 몰린을 떠올렸다. 그들이 원하는 이안의 가치가 대체 무엇일까.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데르가를 끌어내리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첼 대신 이안을 내세우는 것까지도 대충은.
‘그렇다면 역시 세금 문제가 제일이지. 저들도 데르가의 탈세를 의심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것이, 황궁을 상대로 한 탈세는 중죄 중의 중죄였다. 재수 없다면 모반 혐의를 적용하여 브라츠 성씨를 가진 모두가 처형될 수도 있다.
이안이 입적하지 않는다면… 노예로 전락하는 벌을 받게 되겠지.
‘무엇이 되었든 일단 위험해.’
브라츠 성(姓)이 사라지면 가문도 사라지는 것이니 이안의 존재 가치 또한 없어지게 된다. 앞으로의 생존에 위험이 따른다는 뜻이다.
사활을 건 줄타기.
데르가는 이안을 사막으로 팔아넘기려 하고, 몰린은 브라츠를 먹으려 하고 있다. 둘 사이에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터다.
‘그런데 보니까, 저택 안에 눈과 귀를 심어둔 것 같은데 말이지. 특히 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는 눈치였어.’
“이안 님?”
하인이 랜턴을 들고서 그를 불렀다. 침실로 돌아가지 않겠냐는 부름이었다. 이안은 그의 뒤를 따라 복도를 가로질렀다. 저택의 제일 높은 곳이라 그런가. 창 너머로 아직 아른거리는 훈련장의 불빛이 보였다.
“다들 늦게까지 고생하는군.”
이안의 따스한 중얼거림에, 앞서던 하인이 슬며시 웃었다. 이안이야말로 종일 데르가 집무실에 잡혀 제일 고생하지 않았던가? 식당에서 매일 같이 깨끗한 음식을 내려주던 아이에게, 하인은 은근히 친밀감을 느꼈다.
“침실에 활동복을 따로 구비해 두었습니다.”
“그래. 고맙네.”
“평안한 밤 되십시오. 이안 님.”
한편, 훈련장에는 몸이 여전히 달아오른 사내들이 검과 창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붉은 머리의 베릭이었다.
“저 새끼 오늘 뭘 잘 못 처먹었나?”
“그러니까. 힘이 넘치네.”
“낮에만 해도 죽어가더만.”
해가 지면 촛불이 꺼지듯 온몸의 기력이 사그라들던 베릭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두 숙소로 돌아간 이후에도 검 휘두르는 것에 멈춤이 없었다.
쉬이이익!
촤악!
잇는 힘껏 허수아비의 목을 잘라낸 베릭. 처음으로 제 뜻대로 검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거친 숨이 환희와 쾌락으로 젖어있었다.
“하하…. 이거지, 씨발.”
대체 뭘까. 훈련의 성과가 슬슬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낮에 계속 쓰러져 있어서? 어찌하여 햇빛 아래 금발 아이가 떠오르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베릭은 다시 한번 검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