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55
제155화. 균형을 위한 견제
비밀이라는 말에 아르센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웃고는 있었으나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탓이다. 황자의 하문에 감히 자작 나부랭이가 그따위로 대답하다니, 하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독기가 그득하구나.’
영악을 넘어선 악이 느껴졌다. 서로 침묵하며 시선을 나누길 잠시. 아르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몸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아하하. 이안 경은 참 재밌는 사람 같아.”
“과찬이십니다, 저하.”
아르센과 진의 얼굴이 판박이처럼 닮아있다고 한들, 둘을 구별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아르센은 언제나 만개하여 활짝 피어있었고, 진은 그늘에서 녹지 못하는 얼음 같았다. 차분하고, 차가우며, 무심한.
“내가 실수했군. 웃어서 들킨 것이라, 그러지 않았으면 성공했을 터인데.”
아르센은 두 볼을 매만지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보조개가 아니라, 진의 행동 특성에 ‘웃음’이 없다는 것으로 들켰다 생각한 모양이다.
끼이익.
“이안 경. 안으로 드십시오.”
“아르센 저하도 함께 듭니까?”
“저하? 추운데 어찌 나오셨어요? 이리 오세요.”
이안의 고갯짓에 시종장이 기함하며 아르센의 어깨에 제 겉옷을 둘러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기다린 것처럼 콜록, 하고 짧게 기침했다.
“그새 찬 바람을 맞으셨군요.”
“이안 경이 오신다고 하니,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아르센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잡고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이안은 황자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손이 차서 저하의 손도 차게 할 것입니다.”
“이안 경은 내가 싫은가?”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잡아. 오른손으로.”
명령이다. 아이의 단호한 언사에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종용했다. 고집이 워낙 강하시니, 한 번 수틀리면 꼼짝하지 않을 터. 이안은 아르센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들어가지.”
끼이익. 쿵!
문 안으로 들어서자, 훈기가 확 돌았다. 이른 아침이건만, 딜라이나는 완벽한 차림새로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내 들어오는 이안과 아르센을 보며 의아한 미소를 지었다.
“아르센, 어딜 갔나 했다.”
“이안 경을 마중 나간 것입니다.”
딜라이나의 맞은편에는 진이 앉아있었다. 바른 자세로, 기품을 유지하며, 꼿꼿하게. 진은 이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눈을 내리며 인사했다. 아침 햇살로 인한 속눈썹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안 경, 앉으시오. 업무로 혼란스러운 것을 알고 있으니, 그리 긴 대화가 되지는 않을 터.”
딜라이나의 손짓에 이안이 코트를 정리하며 앉았다. 반면 아르센은 진에게 쪼르르 달려가 찰싹 붙더니, 아무도 듣지 못하게끔 조용히 속삭였다.
“나 마법사의 손을 잡았다?”
“…….”
진은 눈동자만 돌려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아르센은 남들보다 한발 앞서나가는 걸 좋아했으니까.
황가의 다른 아이들처럼 마력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을 것이다. 하여, 직접 마법사의, 그것도 웨슬리를 처단하였다는 자의 손을 만지고 온 것일 터.
“다음에는 마력구를 만져보려고. 어때? 대단하지?”
자랑이 듬뿍 담겨있는 형제의 말에, 진은 이안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손가락 틈으로 유영하던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마력의 감촉. 진이 먼저 만졌다는 걸 알면, 아르센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왜 대답이 없어? 대단하지 않아?”
“…대단하다. 아르센.”
기어코 대답을 듣고야 마는 성미. 아르센은 활짝 웃으며 진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너는 못 만져봤지만, 구경이라도 하라는 듯이. 그때, 딜라이나가 헛기침을 하며 두 황자를 자중시켰다.
“황자들은 정숙하시오.”
“네. 어머니!”
“…죄송합니다.”
똑같이 주의를 받았으나 진의 어깨만 도드라지게 움츠러들었다. 이안은 그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 단편을 찾을 수 있었다. 귀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흘려보낸 찬란한 어린 시절. 누군가 옆에서 제대로만 알려줬어도 그리 헛되이 아파하지 않았을, 그런 시절 말이다.
‘마법사는 귀하지만 대부분 천민 출신입니다. 들키면 저택에서 쫓겨날 것이니 숨기십시오.’
크로니. 반역자이자, 조카이며, 궁 밖에 있었을 때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어른. 어린 이안에게 그의 말 한마디가 세상이었으며, 진실이지 않았던가.
‘조카가 아닌 너를 지켜본 가족으로서 말한다. 이안, 네가 황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니? 너는 그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마법사. 상황이 만들어낸 행운으로 황좌를 거머쥐었다가는 필시 네가 다칠 것이다. 그러니, 제안을 거절하라.’
결과적으로는 그 말이 맞았다.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안은 반역으로 주저앉았고, 나움을 비롯한 소중한 자들을 잃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중에는 크로니도 포함하여.
“이안 경?”
“네. 딜라이나 님.”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딜라이나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는 듯이. 그녀는 찻잔 입구를 우아하게 매만지며 물꼬를 틀었다.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오.”
“일이 많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습니다.”
“마법부 장관직 선출도 함께 하고 있다 하던데.”
“사실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현장에서 중심 잡는 자가 있어야 하니까요.”
“마리브 저하께서는 어찌, 격려의 말을 해주시던가?”
딜라이나가 슬쩍 미끼를 밀어넣었다. 이안의 후원자가 마리브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이는 곧 이안이 마법부 장관이 되었을 때, 마리브에게 이득인지를 확인하는 것일 터.
“마법부 자체적인 일인지라, 아직 황궁에서 격려가 따로 내려오진 않았습니다. 딜라이나 님께서 먼저 해주신다면 가히 영광이겠나이다.”
마리브, 그리고 아래 황자들과 결탁한 게일의 구도가 예상되는 현재. 이안은 여지를 주어 대답했다. 그러자 딜라이나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괜찮으십니까?”
왜 저러는 거지? 이안이 의아하게 쳐다봤으나, 딜라이나는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러면 혹시 자네의 지원 세력 중 마력석관리부 대장도 합류하였는가?”
“딜라이나 님. 게일 저하를 만나셨군요.”
“…….”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다. 딜라이나는 대답 대신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태도로 짐작하건대, 게일이 딜라이나에게 접촉하여 임시 동맹을 제안한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딜라이나의 친정이 어디인지 아는 바가 없군.’
아르센과 진이 너무 어리고, 그 위에 장성한 황자가 버티고 있으니 황궁 내부 세력은 보잘것없다.
하지만 딜라이나는 황제의 신임을 얻어 황후 역을 해내고 있는 여인. 게다가 출신에 대한 말이 나돌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귀족은 기본이고, 외국의 왕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 정확히는 게일이 찾아왔다. 궁에 들어오고 처음 있는 일이었지. 어지간히 상황이 어렵구나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게 꼭 그만의 일이 아닌 듯싶어서.”
“황궁에는 어른이 많을수록 좋지요. 그래야 아르센과 진 저하께서 보고 배우는 게 많을 것입니다.”
마리브와 게일의 균형이 일그러지면 그 여파가 쌍둥이 황자에게 쏟아진다. 딜라이나는 관망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세가 기우는 쪽에 붙어 힘을 맞춰주는 것이 결국에는 살아남는 것임을 깨달았다.
“게일이 그러더군. 웨슬리를 대신할 자가 마법부에 숨어있다고. 하여 장관 후보 중 한 명일 것이라 여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자가 없었어.”
그녀는 잠시 목을 축인 다음 말을 이었다.
“대부분 뒷배 없는 잔챙이고, 그나마 후보 중 쓸 만하다 싶은 쟝 대장은 내가 후원하려 했거든.”
아. 쟝 대장의 뒤에 서 있던 자가 딜라이나구나. 이안은 감이 좀 잡힌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대가 게일의 숨겨진 패라면 말이 달라지지. 굳이 파이 나눠 먹을 것 있겠는가? 나 역시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하겠네.”
“영광이옵니다.”
이리하면 1황자, 2황자, 4, 5황자 모두가 동시에 지지하는 마법부 장관의 탄생이다. 그 누구도 감히 반대의 뜻을 입에 담지 못하리라. 이안은 게일의 수작질에 피식 웃음을 삼켰다.
‘이리저리 바쁘시군, 게일. 그래도 한배를 탔으면 이런 사안에 대하여 언질이라도 주는 것이 좋을 터인데.’
정보 공유가 안 되니, 딜라이나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 수 없지 않나. 게다가 임시 동맹으로 무엇을 거래했는지조차 모르겠다.
게일은 임시적인 세력 구축이겠으나, 딜라이나는? 그녀는 무엇을 얻었을까? 단순히 균형 유지만 보고 덤벼들지는 않았을 터.
“하면 저를 이리 부르신 것은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심이셨습니까?”
“그것이 제일 중요하지. 지금은.”
딜라이나는 싱긋 웃었다. ‘지금은’이라는 단어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이안도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법부 장관이 되면 내 다시 자리를 마련하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 되면 그대는 마법부의 모든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알아두시게. 알게 되면,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음도 알아두시고.”
마법부의 기밀 자료에는 아르센과 진의 신탁 내용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터. 밝혀진 신탁 외에 다른 것이 더 있다는 뜻일까? 뭐, 나중에 되면 알겠지.
이안은 담담한 인사만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든지, 제가 필요하시면 하명하십시오. 딜라이나 님의 영광스러운 도움 역시 잊지 않을 것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참, 그 얘기 들었는가?”
딜라이나는 이안을 멈춰 세웠다.
“이건 나도 게일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귀족 여식들의 모임에서 흘려들은 것인데.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하여서.”
“하문하십시오.”
“게일이 하이만 가의 여식과 약혼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아는 바가 있나?”
하이만 가. 바리엘 금융의 심장을 틀어쥐고 있는 귀족 가문. 타국의 왕족 핏줄까지 흐르고 있는 터라 실세 중의 실세다. 웨슬리가 죽고 없어진 빈자리를 채우기에는 아주 적격한 가문이지.
“죄송합니다.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 아쉽군. 알겠네.”
사실이라면, 게일은 정말 쉽게 죽지 않는 사내다. 거의 반쯤 죽여놓았다 안심하는 마리브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칠 수 있을 터.
끼이익.
이안이 밖으로 나가자, 딜라이나는 머리칼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마리브와 게일의 피 터지는 싸움 속에서 언제나 불안에 떠는 것은 그녀와 아들들이었다. 지금 당장 사태를 무마한다고 한들, 언젠가는 정면으로 맞설 때가 오지 않겠는가?
아르센과 진이 장성하기 전, 분명 마리브든 게일이든 칼을 들이밀 것이다.
‘마리브와 게일, 그리고 이안이라.’
이안이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지점처럼 느껴졌다. 분명 마리브와 게일, 둘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키를 쥐고 있을 것만 같다. 저자만 제대로 쥘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어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응? 아니란다.”
딜라이나는 애교 있게 안겨 오는 아르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이내 진을 쳐다봤다. 진은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 무심한 눈으로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