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56
제156화. 꽃가루 흩날리는
“이안 경. 바쁘십니까?”
누군가의 부름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소매는 걷어 올려진 지 오래고, 단정했던 머리칼도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몇 날 며칠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대가였다. 마법부와 황궁을 잇는 유일한 자로서, 당연한 모습이지만.
“무슨 일입니까?”
“이안 경 앞으로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아아. 루론석? 금방 나가지요.”
“그리고 조금 후에 마력확인도 있는 거 아시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안은 다른 마법사들에게서 존칭을 듣고 있었다. 나이 어린 신입이라 귀족이어도 하대받는 게 일반적인 분위기였거늘, 차기 장관의 유력 후보로 떠오르자, 위엄이 저절로 따라왔다.
히이잉!
저 멀리, 마차 서너 대가 줄지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안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루론석 구경을 위하여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는 아코렐라 대장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손톱을 딱딱 물어뜯던 그녀가 냉큼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어서! 어서들 오시게!!”
“아코렐라 대장, 위험합니다!”
히이잉!
말들이 놀라든 말든, 아코렐라는 방방 뛰어다니며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와서 물건을 좀 내리자는 지시였다. 마차 안에서 로만드로와 베릭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서 이안을 찾았다.
“이안이안!”
“이거 여기에 내리면 되겠나?”
손을 붕붕 흔드는 인사에, 이안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경비와 직원들이 상자를 바닥에 내리자, 아코렐라는 콧김을 내뿜으며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보랏빛의 루론석 덩어리가 한가득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이리 큰 것들은 처음 봅니다.”
“와아, 덩어리다. 상자 하나당 몇 킬로그램은 거뜬하겠는데요? 사람을 더 불러와야겠습니다.”
손을 달달 떨며 루론석을 들어 올리는 아코렐라. 계단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법사들도 술렁이며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마력석관리부가 아니더라도, 저리 귀한 마력석의 대량 공급은 모두에게 긍정적인 일이었으니까.
“아코렐라 대장! 코피! 코피!”
“…빛깔이 너무 영롱하고 아름다워, 하아, 진짜 돌아버리겠다. 당장 갈고, 태우고, 여기저기 섞어서 연구해보고 싶어. 핥아봐도 됩니까!? 이안 장관!?”
“미쳤어요? 그걸 왜 핥아요?”
“내가 너한테 물었는가? 마력석 주인에게 물었다.”
그녀는 쌍코피를 줄줄 흘려대며 반쯤 맛 간 눈으로 웃어댔다. 허락 안 하면 사달이 날 것 같은지라,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이제는 그쪽 소속 물건이니 핥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서둘러 보관실로 옮기는 게 좋을 겁니다. 곧 황궁재정부에서 사람이 올 것이라.”
“끼야호! 고맙소!”
“네. 알겠습니다.”
루론석이 실제로 입고되었는지를 마법사와 확인 후, 이안에게 대금이 지급될 예정이었다. 당장은 금화 몇만 닢 정도만 들어오겠지만, 헌납금 정리와 로만드로에게 사례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다.
“이안! 아니다, 주인님! 밥 먹을래?”
“속지 마시게. 이놈, 황궁훈련장 밥통 다 비우고 왔어. 가서 하라는 훈련은 안 하고, 노닥거리고만 있으니. 팔자로 따지면 제일 상팔자일세.”
“갔는데 제이럿도 없고 어금니도 없고. 다들 잔챙이뿐이라 쉬엄쉬엄 한 거라고요.”
웨슬리 사태로 황실의 보안이 더욱 철저해졌다. 하여, 제이럿과 바르사베 역시 덩달아 바빠져 훈련장에 잘 나오지 못하는 모양. 마법사들은 붉은 머리칼의 어린 검사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아, 쟤가 걔네. 제이럿 대장 마력 개방하게 했다는.”
“생각보다 어리잖아? 그런데 이안 경의 호위라고?”
“대단하네, 제이럿 대장이랑 맞먹었다니.”
“듣자 하니 변경에서 데리고 온 자라 하더만, 확실히 알 수 없는 곳이다. 루론석 매장지도 있고, 저런 미친개도 있고…….”
이안을 쳐다보는 베릭의 입가에서 미소가 씰룩거렸다. 눈을 초롱초롱, 귀는 쫑긋쫑긋. 칭찬인지 욕인지 분간도 못하면서 주목받는 것은 기분 좋은지, 연신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이안은 그런 베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좋은가?”
“오호이, 이거 은근히 기분 좋네.”
“검을 운명으로 삼는 자들이 주로 그러하지.”
“이안, 그래서 밥은?”
베릭의 말에 이안이 시계를 확인했다. 식사하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오늘 그는 중요한 일정을 앞두었다.
“안 되겠구나. 슬슬 마력확인식을 할 참이라.”
“마력확인식? 신년회에서 했잖아.”
“그것은 마력 자체가 있는지를 확인한 것이고, 이번은 우열을 가리는 일이다. 마법사들의 대장이라 한다면 누구나 인정할 만한 마력을 갖고 있어야 하니까.”
다들 눈치껏 가늠은 하겠으나, 겨루어서 서열을 나누는 건 다른 문제였다. 아마 대장직 중 후보로 출마하지 않은 자들은 자신의 경지가 드러나는 게 싫어서 포기한 자도 있을 터.
“따라가도 돼?”
“마음대로.”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베릭은 신난다는 듯 방방 뛰며 주위를 돌았다. 로만드로가 아코렐라의 뒤를 따르며 손을 흔들었다.
“이안 경, 여기 나머지 정리는 내가 하겠네. 재정부에서 수표를 써 주면 그것으로 바로 헌납금 처리를 하지.”
“고맙습니다. 로만드로 님.”
“그러니까. 그, 베릭은 자네가 처리하게.”
“…고맙다는 말이 도로 들어갈 뻔했습니다.”
차라리 행정 업무 보는 게 낫지, 저 망나니 같은 녀석을 데리고 황궁에 있는 건 수명 깎아 먹는 일이라며, 로만드로가 질색했다. 베릭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보채었다.
“그래서? 그거 어디서 해? 마법사들 싸우는 거!”
* * *
마법수련실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지만, 마법사들은 모두 이곳을 ‘유리돔’이라고 불렀다. 공격 마법을 연마하다가 외부에 피해 주는 것을 막기 위해 방어계 마력석으로 돔 벽을 쳐 두었기 때문이다.
“이안아아아! 주인아! 파이팅! 다 죽여 버리자! 갈아 마시자! 깔아뭉개자! 잘근잘근 밟아버려! 아자아자!”
차분한 마법사들 사이 유독 눈에 띄는 베릭. 그는 주먹까지 불끈 쥐며 응원이랍시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안이 나키나에게 부탁한다는 눈짓을 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베릭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제자리에 앉혔다.
“모두 모였나?”
선출을 진행할 타 부서 대장이었다. 그는 주변을 쭉 훑어보다가, 위층의 어느 지점을 보며 멈칫거렸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조아렸다. 이안과 다른 후보들도 뒤를 돌아봤다.
“저분은 마리브 저하 아니신가?”
“사법부 장관도 와 있어.”
“알음알음 다들 모습을 보이시는군.”
“황자 저하가 여긴 어쩐 일로, 아.”
마법사들이 중얼거리다가 이안을 힐끔거렸다. 이유가 따로 있겠는가? 바로 마리브가 직접 밀어주고 있는 이안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일 터.
스윽.
이안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모두 가슴에 손을 올리며 그쪽으로 인사했고, 대장은 헛기침하며 마력확인식의 절차를 설명했다.
“서로 마주 보며 마력을 쏘고, 미는 쪽과 밀려나는 쪽을 확인한다. 마법은 불가하고, 순수한 마력구로 그 능력을 증명한다. 제한시간은 총 삼 분. 이의는 받지 않을 것이며, 지금이라도 포기할 자는 포기해도 좋다. 상대의 마력에 밀려 넘어지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으니.”
잠깐의 침묵. 한 마법사가 손을 들었다.
“…포기하겠습니다.”
“좋다.”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또 없나?”
그들은 포기를 선언하며 이안을 힐끔거렸다. 사실상 차기 장관의 윤곽은 거의 나온 참 아니던가. 내부로는 부서 절반 이상이 그와 함께하고 있고, 외부로는 황궁의 실세 지원을 한몸에 받고 있다. 또한, 웨슬리와 대적한 것으로 보아 마력 자체의 힘 역시 넘볼 수 없겠지.
“포기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대장은 쟝을 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너는 포기 안 할 거냐는 듯이. 이안도 그를 돌아봤는데 표정이 참으로 복잡하고 심란해 보였다.
‘딜라이나가 후원을 철회했다 하면 그야말로 의미가 없을 것인데.’
의미의 유무를 넘어 오히려 위험이 될 수도 있다. 마리브, 게일, 딜라이나가 미는 자를 꺾고 장관 자리에 오른다? 과연 그 자리가 얼마나 가게 될까?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자가 암투의 승기를 쥐면, 그것은 곧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쟝?”
“…나는, 나는 포기 안 한다.”
쟝은 한참 고민하다가, 쥐어짜듯 선언했다. 자존심도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장관직에 집착이 깊다는 뜻이다. 아둔한 것인지 우직한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 터.
“그래? 알겠다. 그러면 이안과 쟝, 두 사람만 마력확인식을 진행한다. 오래갈 것도 없겠군. 단 한 차례로 판가름이 나겠어.”
처억!
대장이 손으로 각 끝 지점을 짚었다. 멀리 떨어지라는 신호였다. 두 사람이 끝까지 걸어가는 동안, 다른 자들은 모두 돔을 벗어났다.
“주인아아! 이기자! 이기면 내가! 오늘은 통돼지 안 먹을게!! 우리에게는 오로지 승리다아아!”
“귀청 떨어지겠다, 이놈아. 좀 닥쳐라.”
“이안! 한번 보여줘!”
“웨슬리도 꺾었던 실력 아닌가!”
“꺾은 게 아니라, 그, 막아선 거지!”
“쟝! 조심하라고!”
“뭐야, 쟝. 포기 안 했네? 의왼데?”
마법사들의 소란스러움이 한번에 쏟아졌다. 돔을 타고 천천히 퍼지는 마법의 빛. 이내 유리에 커다랗게 숫자가 피어올랐다. 카운트다운이었다.
“이안, 네가 딜라이나 님을 만나서 뭘 어찌했는지는 몰라도, 아직 끝난 건 아니다.”
-10. 9, 8…….
“이, 이것으로 다시, 증, 증명하겠어.”
쟝이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더듬어댔다. 여기서 이안을 꺾으면 딜라이나의 마음을 돌릴 수도, 나아가 마법부 전체의 여론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이안은 진실한 미소를 지으며 마력을 천천히 개방했다.
지이잉.
“쟝.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시끄러워. 내가, 내가 마법부에 들어와서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갓 들어온 네가 뭘 알아!?”
-7, 6, 5…….
“알아야 하는가?”
“뭐?”
“그대도 내가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지 않나.”
“듣다 보니까 짜증 나네.”
-4, 3…….
“이번은 기회가 아니었다 여겨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결실을 보는 게 만고의 이치니. 나는 그대가 포기하지 않은 것을 높게 산다.”
그 말에 쟝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아갈 길이 막혀있다는 걸 알면서도 발을 떼는 그 용기. 작은 희망일지라도 끝까지 붙드는 집념.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쟝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올 게 분명했다.
“닥쳐!”
-2, 1…….
솨아아악!
숫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쟝이 마력을 터트렸다. 짧은 잔디를 휘날리며 순식간에 이안의 눈앞까지 당도했다.
하지만, 이안의 금안과 마주하는 순간.
퍼어엉! 펑!
콰지지직!
쟝의 힘은 그대로 튕기며 사방으로 찢어졌다. 이안의 몸체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빛. 두 사람의 마력이 공중에서 맞물리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아니, 들어갔다고 여겼다.
“어? 쟝?”
“어어어!?”
“쟝! 얌마! 너 뭐 해?”
“으아아악! X발, 이거, 무슨!”
단 몇 초.
쟝이 이안의 마력을 막아낸 것은 단 몇 초였다.
밀고 들어오는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의 발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땀이 뚝뚝 떨어졌으나, 그걸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쟝 스스로조차도.
“아니!”
퍼어어엉!
살짝 힘이 풀리는 순간. 쟝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서 벽에 내다 꽂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고, 마법사들은 모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윽.
이안은 우아한 손짓으로 연기를 몰아냈고, 이내 객석을 올려다봤다. 어서 판결을 내리지 않고 뭐하냐는 듯이.
그때, 천천히 그 앞으로 떨어지는 꽃 한 송이.
“수고했다.”
마리브가 던진 꽃이었다. 승자를 축하하기 위한, 하얀 꽃.
그러자 그의 주위에 있던 마법사들도 마법으로 꽃가루를 만들어냈다. 하나둘씩 그들이 보낸 꽃가루가 이안의 발치에 쌓였다.
“이아아안! 쟤가 내 주인이다!”
“잘했다, 대단하다, 이안!”
“방금 그게 뭔데? 나 잘못 본 거 아니지?”
“쟝! 괜찮아? 쟝! 정신 좀 차려봐!”
“신년회에서도 범상치 않긴 했는데, 와.”
이안은 마리브의 꽃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경례했다. 마법사들의 경외 섞인 박수가 꽃가루와 함께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