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6
제16화. 마검사
훈련장의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 겉으로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곳곳에서 열기가 솟구쳤지만, 알게 모르게 모두의 신경은 한곳으로 향했으니.
바로, 그들이 모시는 가문의 도련님들이었다.
“몸은 제대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상 위험이 커요.”
“으으. 이렇게?”
도련님들의 체력 단련은 데오의 몫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부상을 핑계로 놀고 있는 자는 그뿐이었고, 무엇보다 성정과 별개로 실력은 우수한 자인지라 데르가가 믿고 맡긴 것이다. 그의 임무에는 이안을 감시하는 것과 문제 시 즉결처분까지 포함일 터.
“형님. 팔을 더 뒤로 뻗으세요.”
“아, 안 되는걸? 너무 아파.”
하지만 이안은 겉보기에 아주 성실히 첼을 도왔다. 데오가 있는 이상 모든 행동은 데르가의 귀로 들어가지 않겠는가? 오해를 사는 건 어리석었고, 방심을 부르는 건 현명한 처사다.
“기초 체력부터 시작할 건데, 중간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목검 자세를 봐드리겠습니다.”
콧잔등이 축축해진 첼이 죽을상으로 입을 비죽였다. 시간이 갈수록 해는 더 뜨거워질 게 분명했다. 데오는 시계를 확인하며 두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거칠게 굴리면 이 짓도 며칠 하고 말 것이다.’
귀찮은 것도 귀찮은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둘은 훈련장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다. 이안은 천려족으로 팔려가니 그렇다 쳐도 특히나 첼. 저 아이는 해가 지날수록 브라츠 백작을 따라 손 거드는 일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혹여 사병 통솔권이라도 넘어가면 밥그릇 뺏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기사들은?”
천천히 몸을 풀던 이안이 질문했다. 어제도 생각했던 거지만, 훈련하는 자들 대부분이 거칠고 투박한 느낌을 풍겼다. 기사 특유의 정제된 분위기를 가진 자는 보이지 않았으니.
‘데오 저자부터가 기사가 아니니 당연하겠지만.’
데오는 작위가 없는 것 같았다. 집안 사용인들 모두가 그를 제각각 불렀기 때문이다. 수많은 호칭 중 ‘기사’라는 단어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가문의 와펜 따위도 붙인 꼴을 못 봤다.
“그 작자들은 고귀하신 몸이라 전용 훈련장에서 따로 지냅니다. 이쪽은 다 곡괭이 잡다가 검 잡은 놈들뿐이지요. 왜요? 기사에게 수업받고 싶습니까?”
데오가 막대기로 바닥을 툭툭 치며 웃었다. 오늘따라 유독 치아가 시커멓구먼. 말투가 껄렁껄렁한 것이, 트집 잡히기만을 바라는 사람 같다.
“되었네. 각자 맞는 선생이 따로 있지 않겠는가?”
데오 너는 초심자에게 딱 어울리는 수준이라 돌려 말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는 귀만 심드렁하게 후비며 등 돌렸다.
“자아. 그럼 뛰겠습니다.”
기사 없는 영지는 없다. 어느 영지든지 기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건 브라츠 영지도 마찬가지. 은밀히 호위와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타앗!
‘변경이니 최대로 잡으면 열 명 정도.’
황궁의 지방 견제로 인해 귀족들이 유치할 수 있는 기사 수는 정해져 있었다. 흔히들 인정하는 기사라 함은, 실력과 경험으로 공인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마물 전투나 타국과의 전쟁 등등. 오합지졸 농민 출신 검사와는 비교되지 않을 전력이다.
‘실력이 꽤 좋은가 보지.’
변경에서, 그것도 천려족과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름 가까이 이곳에서 지냈건만 단 한 번도 기척을 느낀 적이 없었다. 철저히 데르가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계속 뜁니다!”
“허억…. 허억…….”
첼이 침을 질질 흘리며 발을 끌었다. 고작 두 바퀴째 일어난 일이었다. 이안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그를 앞서갔다.
터덜터덜 걷는 데오가 이안을 힐끔거렸다.
‘꼴에 호흡 조절하는 법도 아는군.’
체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영특하게 몸 놀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점점 뒤처지는 첼과 달리 이안은 꾸준히 데오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
검을 들고 대련 중인 두 아이.
“으아아악!”
“베릭, 이 미친, 아니!”
타악! 타악!
몰아치듯 검을 휘두르는 아이는 베릭이었다. 상대는 뒷걸음질 쳤지만, 이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서 오는 밀림이 아니라 그저 몰아쳤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걸 안 베릭의 표정이 개운치 않았다.
“시발!”
이상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지 않았던가? 자고 일어나니 먹지도 않은 약빨이 떨어진 기분이다. 베릭은 점점 사라져가는 묘한 감각을 붙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찔렀다.
“야! 적당히 하라고!”
타악!
받아주던 동료가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동시에 맞부딪힌 검이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제야 베릭은 멈추며 숨을 골랐고, 동료는 재수 없다며 침을 뱉었다.
“그러니까 하기 싫다고 했잖아!”
“아침에 내기에서 진 건 너야. 메이럴.”
누구도 베릭과 대련을 원하지 않았다. 설렁설렁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베릭의 기세에 다친 훈련병들도 몇 있었다.
동료들이 낄낄대며 메이럴을 놀려댔고,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베릭이 떨어진 목검을 주워들었다.
“베릭.”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다. 그가 붉은 눈동자로 이안을 쳐다봤다. 땀에 젖은 그가 말갛게 웃고 있었다.
“뭡니까.”
“이제는 꺼지라고 안 하는구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확실히 그때 맛이 갔긴 갔나 보군. 저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니.”
사실 아까 전에 알았다. 지난날, 자신에게 물을 부어준 것이 서자 이안이라는 것을. 가주의 영식들이 훈련장에 나온다며 사방에서 씹어대니, 저도 모르게 들은 것이다.
이안이 방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괜찮다. 땡볕 아래에서는 모두가 눈머는 법.”
베릭은 대꾸할 마음이 없었다. 경을 치려면 쳐라, 이런 태도였다. 사실 어린 서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만은. 천천히 검을 끌며 그늘로 이동하자, 이안이 따라붙었다.
베릭이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봤다.
“첼 형님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거든. 천천히 쉬면서 걸으려 한다.”
뒤에는 데오가 첼을 거칠게 잡아끌고 있었다. 더는 못 가겠다며 쓰러지면 일으키고, 다시 넘어지는 것으로 정신이 없다.
“좀 먹을래?”
이안은 주머니에서 잘 말린 육포를 꺼냈다. 하인들이 훈련할 때 배곯지 말라고 챙겨준 것이다. 사람의 환심은 이토록 근본적인 데서 온다.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시작이요, 그것이 기본적일수록 효과가 좋다.
하지만.
“싫은데. 요.”
“어찌하여?”
“먹을 이유가 없으니까.”
베릭은 망설임 없이 쳐냈다.
의외였다. 아무리 데르가가 사병 확충에 신경을 쏟고 있어도 고아 출신 병사가 풍족하게 지낼 리 없었다. 그저 바깥에 있었을 때보다 입에 풀칠은 한다 정도겠지.
“그만 비키. 시죠.”
“말이 영 이상하구나. 존대할 거면 제대로 하거라.”
“…….”
그래도 녀석은 단호했다. 자신이 서자 이안인 것을 알면서도 행동에 변화가 없다라. 친절과 호의를 철저히 거절하는 자세였다.
까탈스럽다 생각하는 것도 잠시. 이안은 이것이 오히려 잘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심복보다는 수족이 필요한 거니까.’
사사로운 것에 관심이 없다면, 높은 확률로 자신만의 신념이 있을 것이다. 그것만 충족시켜주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계약을 맺을 수 있겠지.
물론 정석은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주종관계를 얻는 것이지만.
드르륵.
베릭은 붕대로 자신의 오른손과 목검을 칭칭 감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휴게실 문을 열고서 동료를 불렀다. 정확히는 방금까지 대련하던 메이럴이라는 자를.
“메이럴. 나와.”
“더위를 처먹었나, 어디서 이름을…….”
“승부가 나지 않았어.”
정녕 미친놈 아닌가. 메이럴이라는 아이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맞은편의 거구 사내가 대신 일어섰다. 체격이 베릭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어제부터 자꾸 까부네. 응?”
“꺼져. 너한텐 볼일 없으니까.”
“메이럴도 너한테 볼일 없다잖아!”
콰앙!
남자가 베릭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벽에 찍어 눌렀다.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 베릭은 익숙한지, 주춤하지 않고 치고 나와 목검을 휘둘렀다.
“꺼지라고!”
퍼억! 퍽!
이안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확실히 베릭의 성격이 정상은 아니다. 폭력에 대해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처럼 굴지 않나. 게다가 강한 힘과 승부에 집착하는 면모까지.
퍼억! 퍽!
안타까운 것이라면, 기세와 달리 현실은 냉정하다는 것. 베릭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체격이 두 배나 차이나는 사내를 이길 순 없었다.
“미친! 새끼가! 작작 좀! 하라고!”
퍽! 퍽!
빠악!
공을 차듯 남자가 베릭의 복부를 내려 찼다.
으음. 저건 좀 아프겠는데? 이안이 속으로 걱정함과 동시에 베릭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털며 낄낄댔다.
“자꾸 까불면 오래 못 산다? 일찍 죽으면 고맙겠지만. 하하하!”
“끄어억…….”
베릭은 대자로 누운 채 숨만 꺽꺽댔다. 이안이 그의 얼굴로 가 쪼그려 앉았다. 베릭의 시선으로 금빛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저놈 혼내줄까?”
이안의 속삭임에 베릭이 눈을 감았다.
“…꺼지라고 시발.”
“왜? 이기고 싶지 않아? 세상에 이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거든.”
아무리 서자라 한들, 이안의 말 한마디면 저런 훈련병 하나쯤은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릭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런 건 의미가 없으니까.”
강한 힘. 오직 그것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이었다. 아비의 폭력에 가족 모두가 무릎 꿇고 빌 때도, 강도의 무자비한 칼질로 집안이 피로 물들어도, 베릭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지켜볼 뿐.
이러한 사정까진 몰랐지만 이안은 그 뜻을 알아챘다.
“그래. 그게 네 의미구나.”
그때, 저 멀리서 첼이 뒤로 쓰러졌다. 난감해하는 데오와 주위의 사내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어 첼의 몸을 흔들어댔다. 베릭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진짜 한 번만 더 말 걸면 죽인다.”
“근데 꼴이 이러해서…. 쯧쯧.”
“아이씨-”
이안은 베릭의 눈에 손을 올렸다. 쪼그려 앉은 채 숙이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겐 본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첼이 뒤로 쓰러지는 바람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나한테 아주 괜찮은 방법이 있는데 말이지.”
손바닥 아래로 베릭의 시선이 느껴졌다.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기백이다. 동공이 괜히 붉은색이 아닌 것 같다.
“네가 원하는 그 강한 힘. 내가 줄 수도 있거든.”
“헛소리하네. 미친 새끼가.”
“너에게 필요한 것을 준다면, 너 역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줘야 한다.”
자못 진지한 목소리였다. 베릭이 침묵하자, 이안은 낮게 웃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 하는 게 의외였다. 그저 흘러가는 말이라도 쉬이 못 하는 걸 보면, 경박한 말투와 달리 진중한 성격인 듯 싶다.
지이잉.
이안은 망설임 없이 마력을 흘러 넣었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하지만 여전히 각성하기에는 모자라다. 마검사가 스승을 모시는 기간이 최소 1년이니, 그 역시 그만한 시간을 공들여야 할 것이다.
“……!”
베릭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몸을 잠식한 고통이 순식간에 물에 씻겨가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것이 정신을 깨웠다. 베릭은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귀로 들으며 벌떡 일어났다.
“어허.”
놀라서 손을 떼는 이안. 그 틈으로 아이의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혔다. 맞물리는 것도 잠시.
베릭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죽었던 신경이 살아나는 것처럼 모든 게 예민하다. 자신을 때려눕혔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첼을 구경하고 있었다.
“쯧쯧. 처음부터 저러면…….”
“이래서 브라츠 백작님이…….”
목소리가 늘어지듯 귓가에 맴돌았다. 베릭은 눈을 반짝이며 반사적으로 뛰었다. 마치 맹수가 신호를 받고 튀어 나가는 것 같다. 목검도 거추장스러운지, 던져버리고 주먹을 뻗었다.
타앗!
“으아아악!”
“……?”
기합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사내. 그가 마주한 것은 피 칠갑이 된 채로 달려드는 베릭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바람 한 점 불지 않건만 그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오직 이안만, 그게 마력의 흐름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