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60
제160화. 격돌의 시작
위엄 있는 대회의실에서 게일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비단 그가 그날의 주인공이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여유만만, 판명을 앞둔 자의 태도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보란 듯이 멜라니아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서 꿀을 뚝뚝 흘려대고 있었으니.
“멜라니아 하이만 영애. 오랜만입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신년회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아버지가 편지 정리를 할 때면 가끔 말씀을 꺼내신답니다.”
“한데, 오늘은 어쩐 일로?”
“게일 저하의 중요한 회의라 하여 함께했습니다.”
“네? 아아, 아하하! 그렇군요. 음음.”
하이만 가(家). 바리엘의 경제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대가문. 타국의 왕가 피가 섞여 있는 탓도 있지만, 그들의 위상은 일반적인 귀족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황족과 귀족, 그 사이의 하이만’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으니까. 은행이 신전과 같은 정도로 신성시된다는 것 자체가 그 방증이었다.
“게일 저하, 그나저나 확실히 회의장은 분위기가 무겁군요. 의상을 더 단정하게 입고 올 걸 그랬어요.”
“아니. 아주 잘 어울리오. 걱정할 것 없어.”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뻐요.”
다들 무채색의 정복을 입은 것과 달리, 멜라니아의 드레스는 봄을 담아내고 있었다. 화사하고 반짝였으며, 장신구 하나하나가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이안은 그것이 상당히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게일의 수작이라는 걸 알아챘다. 회의실에 들어서는 자들 모두 멜라니아의 존재를 인식하게끔 만든 것이다.
‘게일이 하이만 가의 여식을 사로잡았노라. 즉, 하이만 가는 게일을 지지한다.’
다른 귀족도 아니고 하이만이라. 두문불출하여 바빴던 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회의장의 모두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나.
그때, 게일이 멜라니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뒤쪽을 힐끔거렸다. 이안과 시선이 딱 마주치자, 그는 씨익 웃으며 눈짓으로 멜라니아를 가리켰다. 이어서 입을 벙긋벙긋.
‘어떤가?’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안은 무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숙인 채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게일은 어깨만 으쓱거린 채 고개를 정면으로 고쳤다.
“게일 저하도 참 대단하시네, 진짜.”
“웨슬리 님이랑 그렇게 붙어먹던 게 얼마 전인데.”
“경망하다. 혀를 조심하라.”
“…실례했습니다. 장관님.”
이안은 부하들의 입단속을 시킨 다음, 회의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브와 그의 추종자들이 안으로 들어섰고, 정면의 게일과 멜라니아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마리브는 발걸음을 멈추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게일. 세상에.”
“좋은 아침입니다. 형님.”
게일이 멜라니아를 떼어놓고 다가가 인사했다. 마리브는 손을 맞잡는 대신 고개를 살짝 틀어 경멸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개 버릇 남 못 준다 하더니, 여전하구나. 하긴, 누구한테 배웠을꼬.”
지방의 보잘것없는 귀족 출신이었던 게일의 생모를 언급한 것이다. 아름다움으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던 여인. 황제가 꿈자리에서조차 잊지 못해 종종 잠꼬대로 찾는 여인.
마리브의 노골적인 모욕에 게일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꽈악.
게일은 지나치려는 마리브의 팔을 붙잡은 채 싱긋 웃었다. 입매는 분명히 미소를 머금었으나 시선은 냉랭하기 그지없다.
“그 말, 아버지 앞에서도 해봐라.”
“네가 직접 전하거라. 곧 있으면 궁 밖으로 쫓겨날 것인데, 폐하의 심려도 덜어드릴 겸. ‘아버지, 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빌붙어 먹는 핏줄이 건재하여, 먹고 사는 데는 걱정 없습니다.’라고.”
타악!
마리브는 가볍게 그의 손을 쳐내며 앞으로 걸어갔다. 멜라니아는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속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게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가 죽으면 바리엘이 망해? 폐하와 나도 죽어? 말 같은 소리도 정도가 있지. 게일, 오늘이 바로 황가의 이름으로 사는 마지막 날이다.’
마리브는 이안을 쳐다봤다. 문제없이 준비했다는 걸 확인하려는 듯이.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황제 폐하의 등장으로 심판 아닌 심판이 시작되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황제는 딜라이나의 부축을 받으며 제일 높은 단상에 올랐다. 어찌 볼 때마다 안색이 흙빛인 게, 움직이는 것이 용하다 느껴질 정도다. 세월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 인간이건만,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숨통을 노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도다.
“시작하게.”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자작은 앞으로 나오시오.”
탕탕탕!
수상의 봉이 힘차게 울리자, 이안은 미리 준비한 병을 쿠션에 받쳐서 앞으로 나섰다.
“새로이 취임한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입니다. 황실의 명으로 이전의 실담물약을 모두 폐기하고, 새롭게 제조한 것입니다.”
유리병에 들어있는 투명하고 깨끗한 액체. 회의실의 누런 조명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귀족들은 흥미롭게 몸을 앞으로 빼내며 그걸 내려다봤다. 상용화가 된다면 필시 그들의 일상생활에 녹아내릴, 중대한 마법 물약이 되리라.
“루론석 대량 공급으로 인하여 연구를 다방면으로 진행한 결과. 몇 가지 부작용을 해결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거론되었던 각혈을 포함해서요.”
“루론 공급은 이안 히엘로 경이 진행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저하.”
마리브는 일부러 한 번 짚어주었다. 이안의 권세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문제가 생길 시 전적으로 이안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도까지 들어있었다.
수상은 게일을 앞으로 불러냈다.
“게일 저하. 폐하의 이름으로 하문하겠습니다.”
“경애하는 마음으로 신실히 답하지요.”
수상은 안경을 바로 세우며 잠시 뜸을 들였다.
“게일 저하는 전 마법부 장관 웨슬리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하여, 저하의 죽음을 시작으로 바리엘의 수많은 제국민에게 죽음의 그늘이 질 것이며, 이는 곧 바리엘의 쇠퇴요, 멸망이라는 저주 또한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게일은 손을 들어 보이며 맹세했다.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자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터트렸고, 반대파는 다시금 헛웃음을 흘려댔다.
“마지막으로 1황자 마리브와 황제 폐하에게도 죽음의 저주가 내려진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까?”
다들 침만 꼴깍 삼켰다. 마리브는 팔짱을 낀 채로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고, 황제는 주름진 피부로 인하여 그 얼굴을 쉬이 읽어낼 수가 없었다. 딜라이나가 황제의 손을 부여잡으며 눈을 가볍게 감았다.
“사실입니다.”
콰앙!
“게일 저하, 끝까지 이리 나오시는군요.”
“아아. 바리엘에 멸망의 저주가-!”
“정숙하시오!”
“정숙!”
누군가의 분에 찬 소리가 물결을 만들어낸 것 같다. 소란스러움은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퍼졌고, 수상은 연신 봉을 두드려댔다. 정숙을 명했으나 쉬이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 게일이 실담물약을 들어 올리기 전까지 그러했다.
스윽.
“그리 떠들어서 무엇합니까? 이전과 다른 게 없지 않습니까?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모인 자리이니 다들 똑바로 보시오.”
“…….”
그는 실담물약을 한 모금 머금었고, 이어서 보란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숨결과 함께 목젖이 꿀렁거렸다. 제 식도를 타고 물약이 흘러들어 갔음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다. 게일은 입가를 닦으며 수상에게 눈짓했다.
“…게일 저하. 저하는 오늘 이곳에서, 제가 물은 말에 거짓을 고한 게 있습니까?”
게일이 희미한 미소를 짓자, 마리브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말소리보다 빠를 수는 없지.
“모두 진실이외다.”
탕탕! 탕!
“게일 저하께서는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저하의 안전이 곧 바리엘의 안전이라 여기고, 엄히 모십시다. 저하께 위해를 가하는 자는 필시 반역으로 다스려야 해요!”
“세상에, 말도 안 됩니다!”
“마리브 저하! 이게 대체 어찌-”
마리브의 추종자들은 당황하여 그에게 몰려들었다. 앞과 옆에서 죄다 떠들어대는 와중, 마리브는 무표정으로 게일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경을 벗었다.
“게일.”
…그 저주가 진짜라고? 말도 안 된다.
마리브가 살기를 두르며 게일에게 다가가자, 그들의 추종자 역시 흥분하여 뒤따르려 했다. 위엄있는 수상의 경고에 떡하니 막혀 버렸지만 말이다.
“회장의 분위기를 흩트리는 자는 경고 없이 퇴장이요, 모독죄로 고발하겠습니다.”
마리브는 게일과 마주했다. 한참을 노려보던 그는 이안을 돌아봤다. 잇새로 나오는 음성에서 그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안, 실담물약은 분명 문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네. 문제없습니다.”
“한데, 어째서-!”
“형님.”
게일은 차분하게 그를 가로막았다. 분명 높낮이 없는 목소리건만, 어찌하여 웃음기가 느껴지는 것일까?
“형님이 바라던 진실이 아니라 하여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아니면, 설마 바람을 진실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까?”
마리브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솟아올랐다. 그걸 본 이안은 자중하라는 듯이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황제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진정하시고 자중하심이 옳습니다. 그리고 제 목숨을 걸고 자신하건대, 물약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안의 말에 마리브가 단상 위를 쳐다봤다. 황제가 눈동자를 느릿하게 움직이며 아들들의 마찰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마리브는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면 확인을 해보면 되겠어. 거기 누구 없는가!?”
마리브가 평정을 되찾은 척, 뒤돌며 웃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적인 분위기. 마리브의 추종자들이 당황해하며 멈칫거렸다.
“누구든 나와 물약을 마셔보아라.”
“…예? 저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누구든 나와보라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알랑거리던 자들이 죄다 난감하게 굳어버렸다. 실담물약을, 이 자리에서?
“…저, 저하.”
“카일롯 경? 이리 나와보지 않겠나? 아니면 노레르벵? 자네는? 아아, 그렇지. 베커만! 그대가 마셔보시오.”
호명당한 자들은 사색이 되어 입술에 침만 묻히고 서 있었다. 황제를 비롯하여 궁 안의 모두가 보고 있는 자리이지 않나? 그것도 대립되는 세력이 눈 시퍼렇게 뜨고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성인(聖人)조차 부담스러우리라.
“저하. 제가 마셔서 증명하겠습니다.”
“아니. 마법부와 관련된 자들은 제외하겠어.”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이안은 속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연기를 하자니 등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는 듯하다. 변경에 있었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이지 연기는 체질도 아니거니와 소질도 없구나 싶다. 흥분한 마리브에게는 크게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그는 말문이 잠시 막힌 듯 숨만 고르고 서 있었다.
‘…젠장.’
이안은 마법부의 장관이자,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자다. 이런 식으로 흥분해서 잃기에는 아쉬운 패였거늘. 실수했다는 걸 바로 깨달은 것이다.
“아니면 형님이 드셔보십시오.”
게일은 느릿한 손길로 물약을 빙글빙글 돌렸다. 반쯤 남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누구도 믿지 못한다 하니, 직접 드시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아니겠습니까?”
그리고서 입매를 씨익 올렸다. 어서 마리브가 마셔주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저도 형님에게 물어볼 것이 있거든요. 아버지께서 최근 편찮으신 걸 알고 있는지. 외국에서 쓸 만한 상단이 있는지. 뭐, 그런 것 말입니다.”
그의 말에 마리브의 눈이 커졌다.
“어떠십니까? 드셔보시겠어요? 스스로도 먹지 못하는 걸 어찌 부하들에게만 강요하시는 겝니까. 못나 보이게.”
“게일…….”
두 사람의 속삭임은 너무나 작아서, 이안만이 들을 수 있었다. 결국 애매한 침묵을 기다리지 못한 황제가 직접 나섰다.
“마리브. 그만하라.”
“…폐하.”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마리브의 표정이 꽤 볼만하게 변했다. 의기양양한 게일과는 정반대로.
“…하면, 계속 보고를 이어나가도 되겠습니까?”
“이안 히엘로 장관. 보고라 하면?”
달그락.
이안은 마리브의 손에서 실담물약을 받은 다음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마리브가 묘한 눈빛으로 이안을 주시했다. 한쪽에 힘을 실어주었으면 또 반대쪽에도 실어주는 게 응당 맞지 않겠는가?
“금기의 마법 저주에 관해서요.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라고 하나, 저주는 저주.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듯 저주에도 푸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