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62
제162화. 들꽃 같은 그대라서
“해나 님. 전서구가 왔습니다.”
“어디서? 메렐로프인가?”
“아니요. 중앙에서 온 것 같아요. 일전에 주인님께서 보냈던 전서 문양과 비슷합니다.”
해나는 장갑 낀 손으로 서신을 건네받았다. 흐트러짐 없이 바짝 묶은 머리칼과 깨끗하고 단정한 옷매. 사창가 근처에 살며 배곯았던 아이의 모습은 말끔하게 사라진 지 오래다.
해나는 기쁘게 웃으며 하인에게 명령했다.
“전서구에게 시원한 물과 모이를 주고, 편한 자리를 마련해 주거라.”
“네. 해나 님.”
하인이 허리를 숙이며 사라지자, 그녀는 서둘러 집무실로 올라갔다. 스스로 점잖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보다. 주인의 연락이 이리 기뻐서 발걸음이 주체 안 되는 걸 보면 말이다.
“안에 네르사른 님 계시오?”
“계십니다. 한데, 필리아 님도 함께라.”
“바로 기별을 넣어 주시오. 이안 님의 서신을 가져왔으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천려족 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르사른과 필리아, 두 사람이 이리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 이안이 중앙으로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필리아는 다시 숲으로 돌아갔었다.
똑똑.
“네르사른 님. 해나입니다. 이안 님의 서신이 왔답니다.”
하지만 바로 며칠 후. 사막의 모래만 밟고 지내던 네르사른이 친히 숲까지 올라 그녀를 데리고 왔다. 새로 단장한 주인 방을 쓰게 하였으며, 정원을 가꾸는 등 소일거리를 주어 생활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어디로 날아가지 못하게, 안정적인 삶을 위한 무게 말이다.
처음에는 필리아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완벽하게 저택에 녹아들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들에게나, 네르사른에게나.
“들어오라.”
“실례합니다.”
네르사른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무덤덤하니,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말이다. 소파에 앉아있는 필리아의 얼굴이 홍당무인 것과는 확실히 대비되었다.
“이안 경의 서신이라고?”
“네. 봉투 하나에 꽤 여러 개가 담겨있습니다. 메렐로프 부인에게도 보내는 게 있는데, 전서구가 지친 것 같아 직접 전하려 합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네르사른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이안이 중앙으로 떠난 뒤 두 번째로 받는 연락이지 않나.
첫 번째는 그가 ‘히엘로’라는 성을 부여받았으니 영지 명 역시 바뀌었다는 걸 알리는 내용이었다. 사적인 전달이 한 줄도 없는지라, 당시 필리아와 해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 하면, 어떤…….”
필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자, 해나는 침착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진정시켰다.
“필리아 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베릭 님이 보낸 것도 있더군요. 편지가 아니라 그림이지만, 꽤 공들여 색칠했습니다. 위급한 것이라면 그럴 리 없겠지요.”
“그래, 필리아. 안심해. 당신에게 온 것도 있거든.”
“저요?”
네르사른이 자연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잡아당겼다. 무릎에 앉히고서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주는 모습이 참으로 다정하다. 해나는 눈 뜨고 있지만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듯이 먼 산을 쳐다봤다.
“어릴 때 자신에게 마법사의 재능을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있어. 금안으로 변하는 것 외에 말이지.”
“아니요. 저는, 저는 이안에게 그런 재능이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저…….”
과거를 헤집느라 필리아의 말이 점점 늘어졌다. ‘재능’이라는 단어로 뭔가가 떠오른 것이다. 네르사른이 해나에게 펜과 종이를 준비해 달라 손짓했다.
“이안이 아주 어릴 때, 상단에 심부름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붉은 화분을 받아왔는데-”
“실라스크.”
“아아. 네. 맞아요. 그걸 받아오며 그러더군요. 화분을 준 분이 ‘재능 있다’면서 칭찬을 크게 해주었다고요. 저는 당연히 잡일에 관한 것이라 여겼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뉘앙스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여인은 말라버린 기억 한 방울이라도 짜내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다예요.”
“아마 이안 경에게 도움이 될 것이오.”
“혹시 다른 말은 없나요? 그, 인사라든가.”
“있지. 필리아, 저택에서 부디 편히 지내고 있으라 하네. 황궁의 일로 인해 연락이 뜸하지만, 마음만은 가까이 있다 여겨 달라 적혀있어.”
네르사른의 말에 필리아의 얼굴이 활짝 피어올랐다.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네르사른은 사막의 장마를 떠올렸다. 수십 년마다 한 번씩 내리는 폭우로 모래 산을 덮는 흰색 꽃의 절경. 들꽃 같은 사람이라 눈길이 갔건만, 이제는 그 꽃처럼 자신을 잠식해 버린 사람.
“답장을 직접 써 보겠소? 내가 도와주지.”
“네. 좋아요. 꼭 그러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의 만남도 알리고 싶은데.”
“…그것도 좋아요.”
배시시 웃는 모습에 해나가 눈부시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시궁창에 있을 때도 아름다웠거늘, 사랑을 만나니 빛 그 자체다.
“한데, 이안이 혹시 반대하면 어쩌지요?”
펜을 만지작거리던 필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네르사른이 너무 좋지만, 아들이 반대한다면 맞설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말에 네르사른은 피식 웃으며 단박에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소. 이안 경은 현명한 자니까.”
안심하는 필리아의 모습에 네르사른 또한 안도했다.
하나, 가슴 깊이 자리한 근심까지 떨쳐내진 못했다. 짐짓 그럴 리 없다 말하긴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현명함’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않나.
‘이안이 어찌 생각할지…….’
난생처음 느끼는 묘한 감정에, 네르사른은 필리아의 작은 손을 꼬옥 감싸 쥐었다.
* * *
“필리아 님이 결혼을? 네르사른 님과?”
로만드로는 입이 떡 벌어져서는 다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대체…….
“왜? 잘 어울리잖아. 필리아는 예쁘고, 네르사른은 멋지니까. 물론 카칸과 비교하면 좀 왜소하긴 한데, 그만하면 전사 중의 전사지!”
베릭의 말에 로만드로의 표정이 더더욱 묘하게 변했다. ‘왜소’라니? 아무리 네르사른이 책사의 지위라고 한들, ‘왜소’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네 몸뚱이나 돌보거라. 쪼꼬만 게.”
“내가 뭐 어때서?! 이거 다 실전 근육인데!”
“이안, 그나저나 답신을 어찌 쓸 것인가?”
로만드로는 베릭을 무시하며 넌지시 그의 표정을 살폈다. 편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짓에서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왠지 눈치를 살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이안?”
“…네르사른이라.”
“저, 그,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네만… 필, 필리아 님도 고생 많이 하셨으니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면 참 좋지 않겠어? 그, 우리 이제 천려족이랑 끈끈하고, 음. 나는 실로 경사라 생각하네. 물론 황궁에서는 고깝게 보는 눈이 있겠지.”
마법부 장관이자 히엘로 령의 주인인 이안의 아버지가 야만족이라. 안 그래도 처음 귀족 사회에 발 디딜 때 천출이라 멸시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새로 들이는 아버지가 네르사른이라면? 어떤 말이 나돌지는 빤했다. 이안과 로만드로는 그들이 진정한 전사라는 걸 알지만, 중앙의 귀족들은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터.
“당황스럽긴 하군요.”
“하지만 히엘로 령은 여기서 굉장히 멀어. 우리가 함구한다면 중앙의 누구도 모를 일이라 여겨지네.”
“로만드로 님은 필리아, 아니, 어머니를 굉장히 애틋하게 여기시나 봅니다.”
“그럼! 힘들게 사시지 않았나.”
로만드로는 헛기침을 해대며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럴 줄 알았네.”
“에엥? 거짓말! 아까 완전 놀랐으면서?”
“아니, 그때 저택 입구에서 필리아 님과 네르사른 님이 만났을 때. 뭔가 짜르르! 짜르르하는 그 묘한 기운을 내가 감지했다, 이거지.”
“이안! 저거 거짓말이다. 몰랐는데 아는 척하는 거임.”
“이놈아! 진짜래도!”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펜에 잉크를 먹였다. 답신으로 쓸 내용을 정한 것이다. 로만드로는 베릭과 투덕대다가 고개를 쓱 빼내어 내용을 확인했다.
“귀족들이 안다면 확실히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 될 것 있겠습니까?”
그는 갓 입궁한 ‘이안’이 아니라 마법부의 장관인 ‘이안 히엘로’였다. 뒤에서 아무리 말이 나돈다 한들, 그저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진정한 동맹은 혼인으로 이어지는 법이니. 특히 천려족은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자들 아닙니까? 어머니께도 큰 행복이 되겠지요.”
그것도 일개 전사가 아니라 족장의 동생이자 책사인 네르사른이다. 히엘로와 천려족 사이에 끊을 수 없는 믿음의 고리가 될 터. 이전 브라츠와 중앙군의 전력 손실을 메울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진심으로 축하해야지요. 경사입니다.”
“그래, 경사지! 경사야! 나도 따로 축전을 쓰겠네.”
“나도나도! 또 그릴래!”
이안의 긍정적인 답을 듣자마자 로만드로는 베릭의 손을 맞잡으며 만세를 불러댔다. 솔직히 해나가 울며 전사를 떠나보냈을 때, 언젠가는 혼인으로 인한 결합이 일어나겠거니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필리아일 줄은 전혀 몰랐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다. 그래. 이는 정치적인 계산을 차치하고서 인간적으로 축하할 만한 일. 필리아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이안도 잘 알지 않나. 그는 삐뚤빼뚤 적힌 서신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안, 나의 아들. 사랑해. 보고 싶어. 해나도, 네르사른 님도, 저택 모두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 덕분에 나 역시 행복하단다. 이안아, 너는 어떠니? 행복하니? 언제나 어미가 있다는 걸 잊지 마렴. 건강하고 무탈하게, 너를 안고 싶다. 아가야. 사랑해.
어미의 사랑은 이리도 절절한 것이로구나. 이안은 솔직히 낯설다 못해 조금 신기한 참이었다.
‘워낙 어렸을 때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남아있는 기억도 하나 같이 별거 없는지라.’
귀족의 정략결혼이라 그런 것이었을까? 이안이 친부모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액자에 걸린 빛바랜 가족사진 자체를 떠올려야 했다. 그것 외에는 기억이 없었으니까.
“이안, 왜 그런가? 잉크가 굳었어?”
“아니요. 무슨 말로 서두를 뗄까 고민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의아한 것이, 어머니의 서신에서는 결혼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요. 저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고 청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필리아는 관계를 알리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이안의 장난스러운 말에 로만드로는 주책스러운 웃음을 쏟아냈다.
“어허헛! 어헛! 그것참, 아무리 전사라고 한들 사랑 앞에서는 귀여워지는 법이로군.”
“참, 로만드로 님. 그건 알아보셨나요?”
“아아. 하이만 가에 대해서 말이지?”
로만드로는 제 볼을 찰싹찰싹 때리며 들뜬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곤 이안의 말이 맞았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만 가에서 비공식 약혼을 진행 중이라 하네. 기정사실이 되었어. 아무래도 저주를 비롯하여 구설수가 많았으니, 공식적인 것은 상황이 안정되면 할 것 같고.”
로만드로가 수염을 배배 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아.”
“하이만 가에 말씀입니까?”
“마력갑옷을 이례 없이 대량으로 주문했다 하더라고. 왜, 그때 보지 않았나? 은행 경비들이 쓰는 것인데, 일당백을 해내는 갑옷 말일세.”
“나! 그거 완전 탐나!”
베릭이 주먹을 확 치켜들며 소리쳤다. 금화가 잔뜩 든 무거운 궤짝을 한 손으로 휙휙 들어 올리는 걸 보고 어찌나 기함했던지 모른다. 이안이 펜을 가볍게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점 확장이 있는 것 아닙니까?”
“보통 연간 두 개에서 세 개 정도만 늘리는 추세인데, 이번에 주문하기로는 100벌에 달하더라는 말이 있어. 덕분에 황궁친위대 납입 주문이 밀렸다 하더라고. 아직까진 그저 소문일세. 아마 마력석 공급도 그럴 것인데? 아코렐라 대장이 별말 없던가?”
“요즘 루론석을 중심으로 한다고 정신없습니다.”
“갑옷에 들어가는 마력석이 중하급이긴 하지만, 씨가 마를 지경이라는 푸념을 들었어. 확인해 보시게.”
“네. 그러지요.”
이안은 방긋 웃으며 확인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하이만 가에서 마력갑옷을 준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대략 짐작되었다.
이안은 필리아에게 쓰던 편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스윽.
-네르사른 님.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 어머니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르사른 님이 영원의 사랑을 맹세하듯, 히엘로와 천려에도 영원한 동맹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덧붙였다.
-언제고 날이 풀리면 이곳의 살얼음이 깨질 것입니다. 그때,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맹의 이름으로, 그리고 아비의 이름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