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63
제163화. 진실을 증명해
로만드로는 서신을 슬쩍 훔쳐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비의 이름이라니. 거참, 반대할 것이라 기우했던 자신이 참으로 바보 같지 않나. 실리를 추구하는 이안의 성격상 그것을 거절할 리 없거늘. 이안은 서신을 마무리하여 인장까지 제대로 찍어 눌렀다.
“로만드로 님. 이것을 잘 부탁합니다.”
“그러지. 비비안나의 전서구가 빠릿하니 참 쓸 만해.”
“그리고 하나 제안드릴 것이 있는데요.”
“뭔가?”
이안은 깍지낀 손으로 턱을 괴며 웃었다. 장관직에 올라서 모든 걸 누리고 있건만, 딱 하나가 모자라지 않나. 완벽한 수행을 위해서는 그를 도와줄 수행원이 필요했다.
“행정부에서 마법부로 오실 생각은 없습니까?”
“마법부로? 내가?”
“네. 로만드로 님은 황궁의 흐름에 정통하시고 오래도록 공직에 계셨으니 업무 처리 능력 역시 뛰어나십니다. 그건 제가 변경에서부터 봐왔으니 잘 알지요.”
“아니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하핫! 아하핫!”
“아, 기분 좋아한다. 칭찬에 약하네.”
베릭이 킬킬거림에 로만드로가 한마디 먹이려다 그만뒀다. 대화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타이를 반듯하게 매만졌다. 현재 황궁에서 제일 뜨거운 감자인 자가 그리 말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우선, 그, 능력을 치하해 주는 것은 참으로 고맙네.”
“치하는 아니고 저의 생각이지요.”
“하지만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상관없습니다. 보좌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의를 위한 것인데, 로만드로 님은 마법사가 아니어도 제게 도움이 됩니다.”
로만드로가 머리를 긁적였다. 참으로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이안은 그것을 보고 싱긋 웃으며 그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다.
“물론 로만드로 님의 의견이 중요하지만요. 파견직 자문관은 출장이 잦아 힘들지 않습니까. 곧 아이도 나올 것인데 언제고 떠돌 수는 없지요.”
“그렇긴 해.”
“급료도 훨씬 높습니다.”
“그, 으흠.”
“그리고 제 곁에 있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뜻밖의 말에 로만드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까 서신에 살얼음이 깨지고 뭐 어쩌고 말하더만, 그게 그 뜻인가?
“생각 잘 해보시고, 결정해 주십시오. 편의와 조건은 이전과 비교할 것 없이 좋게 책정될 것입니다.”
행정부는 황제 권위 아래에서 일하는 부서. 하지만 그 아래에도 조금씩 황자들의 세력이 스며들어 있었다. 게일의 경우에는 몰린과 치엘로니아가 그러했다. 마리브도 분명 숨겨둔 세력이 있을 터. 멀리 갈 것 없이 로만드로가 그의 명을 받아 변경으로 차출되지 않았던가.
‘황자들이 격돌하면 행정부 내에서도 분열이 생길 것이다. 거기에 황제가 자리보전까지 하면 걷잡을 수 없겠지.’
마리브가 황제의 건강에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전혀 무리인 가정도 아니다. 이안은 의아해하는 로만드로를 올려다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던 로만드로가 뭔가를 화들짝 깨닫고 소리쳤다.
“하겠네!”
“네?”
“갑자기?”
베릭 역시 가만 듣다가 놀란 모양이다. 굴라 씹던 것을 멈추고 로만드로를 돌아봤다.
“해나가 그러더구만. 이안 자네, 사막으로 가기 전 사용인들한테 저택 일 그만두라 일러주었다고.”
“아아. 그랬지요.”
“그때 말 들은 자들은 모두 살았고, 안 들었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 하였어. 지금 보니까 촉이 딱 오는구려. 뭔가 자네 말 안 들으면 죽을 것 같아.”
암투의 폭풍 속에서 평생 살아온 자의 촉답다. 그저 넌지시 흘리기만 했는데 기가 막히게 낌새를 알아차렸으니. 혼란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비약이십니다.”
“목숨에 비약이 어디 있나? 나는 우리 아기 성인 될 때까지 죽을 생각이 없다네.”
책임질 자가 있으니 몸 사리는 것에 더더욱 신경을 쓰는 듯하다. 이러나저러나, 이안은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이직 신청을 하도록 하세요. 바로 처리되게끔 하겠습니다. 앞으로 업무 처리 좀 잘 부탁드립니다. 보시다시피 뭐가 너무 많아요.”
이안의 말에 로만드로가 집무실을 둘러봤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와 베릭이 누워있는 소파.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서류가 한가득이다. 마법운용부가 도와주긴 하지만, 그들은 외근직인지라 섬세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똑똑.
“들어오게.”
“이안 님. 마리브 저하의 시종이 왔는데요.”
“아아. 마리브 저하. 곧 간다 전하라.”
회장이 파할 때, 자신의 궁으로 들라 하였지. 이안은 귀찮다는 듯이 허공을 올려다봤다. 게일의 저주를 믿기보다, 실담물약의 신뢰를 의심하는 편이 그에게는 이득이리라. 그리하면 곧 자신을 의심하여 추궁할 것이라는 게 추론 가능했다.
“그리고 마법부 일정 새로 잡는 거요. 그거 대장들이 무슨 훈련을 하면 되겠냐고 물어보는데요.”
이안은 웃옷을 갈아입으며 잠시 고민했다. 공격 마법 등 실전에서 활약할 수 있는 자는 마법운용부로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른 자들은…….
“포탈 여는 마법사가 있나?”
“음, 없는 것 같은데요. 너무 고난이도라.”
“포탈이 무엇이기에?”
“공간과 공간을 잇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금기의 마법이라며?”
로만드로의 물음에 이안과 마법부 직원이 시선을 맞췄다.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침묵이었다.
“시공간을 뒤집고, 돌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게 맞습니다. 그리하여 금기의 마법인 것도 맞고요. 하지만 포탈은 따지자면 일종의 ‘도로’입니다.”
“도로?”
“한 공간과 공간을 이어서 길을 터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유지하는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중간에 포탈이 깨지면 대상자가 위험해질 수 있기에 거의 시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보면 알 것이라, 이안은 부연 설명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포탈에 관한 훈련을 진행하라 이르고 문밖으로 나섰다.
건물 앞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서둘러 이안을 데려오라는 마리브의 전언 탓인지, 시종이 안절부절못한 채 그를 안내했다.
“서두르겠습니다. 장관님.”
“이안이안! 같이 갈까?”
“되었다. 다녀올 터이니 얌전히 있거라.”
이안은 손짓하며 뛰어오는 베릭을 만류했다. 게일에게 패배하여 잔뜩 약 올라 있을 마리브다. 괜히 데리고 갔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마차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며 마법부 정원을 빠져나갔고, 이안은 창문 커튼을 쳐버렸다.
차아악!
* * *
일몰 무렵, 마리브의 궁은 언제나 그랬듯 짙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온화한 색채와 달리 분위기는 어쩐지 차갑고 아슬아슬하다. 이안은 자신을 안내하는 시종이 숨소리조차 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바탕했나 보군.’
처참하다. 아마 마리브는 오늘로 게일을 궁에서 쫓아버릴 수 있으리라 여겼을 터다. 하지만 보란 듯이 살아남아 저에게 ‘상단’을 운운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심정이 어떤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브가 제 시종들에게 어떤 분풀이를 했는지도.
이안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별이 조용히 울렸다. 개미가 기어가듯 말이다.
“마리브 저하, 이안 히엘로 장관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끼이익.
문이 열리자 머리를 풀어헤친 마리브가 이안을 돌아봤다. 황자의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것 그 자체의 형태.
방 안의 상태는 더욱 엉망이다. 유리로 된 장식품은 모조리 박살 났고, 하인들은 넙죽 엎드린 채 주인의 분을 받아내고 있었다. 옷가지가 뜯기고, 살갗에 피멍이 들어있다.
“이안 경, 앉으시게.”
“저하. 괜찮으십니까?”
“앉아, 앉아.”
그가 생긋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마리브는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리며 맞은편에 몸을 기댔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매, 분명히 웃고 있는 것이거늘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회장에서는 내가 아쉬운 소리를 했어.”
“아닙니다. 저하, 저도 놀란 참이니까요.”
“나를 이해할 수 있겠지? 게일의 수작이 눈에 훤하거늘, 기대했던 실담물약이 그걸 가려내지 못했잖은가.”
이안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정면만 쳐다봤다. 지금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그의 욕망을 충족해 줄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지금은, 그래. 지금은.
“물약에는 문제가 없었기에, 제가 마셔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새로운 물약을 가져와 입증하겠습니다.”
“하하하! 하하!”
마리브가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트렸다. 청랑하게 울리는 소리였거늘, 엎드린 하인들은 되려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떨었다.
“이안 경. 나는 자네를 믿어. 물약에는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게일은 보란 듯이 실담물약의 효과를 피해갔지 않은가?”
어폐가 있다. 이안을 믿는다고는 하나, 게일이 실담물약의 효과를 피해갔다는 것 자체가 이안의 개입이 있었노라 여기고 있었다.
“그에 관해서는 제가 다시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네. 이미 게일은 저주를 인정받았고, 실담물약을 피해갔어. 구멍 난 그물을 어찌 다시 쓰겠는가?”
앞으로도 실담물약을 믿지 않겠노라, 그리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서서히 말할 때가 되었으니, 그걸 듣고자 한 것이다.
“하여, 나는 다른 것으로 그대들의 진심을 가릴 것이다.”
그대들?
아아. 이안은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회장에서 마리브가 겪은 수모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실담물약 신뢰 입증을 위하여 부하들을 불렀건만, 그 누구도 앞서 나오지 않았지. 게일 앞에서 꽤나 민망했으리라.
“하명하십시오.”
“이안 히엘로 장관. 그대는 현 마법부의 수장이며, 황제 폐하의 명으로 사태 수습의 총책임자가 되었어.”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최대한 이른 시일 내로 게일의 저주를 풀어라. 그것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상관없어.”
마리브는 게일의 저주를 믿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이 진실로 해소되었는지는 관심 밖이라는 뜻. 그건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마리브가 저리 말한다면 뒤따를 명령이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이제 날을 세웠구나.’
“저주를 푸는 과정은 상당히 위험하고 복잡할 터. 그 과정의 결과로 인해 게일이 죽는다고 한들, 그 누가 슬퍼할 것인가?”
“마리브 저하.”
“아쉬워는 하겠지. 하지만 오히려 바리엘의 존폐를 족쇄로 건 자가 죽으면, 필시 모두가 안심할 터.”
게일을 죽여라.
어떤 방식이라도 좋으니, 저주를 풀었다는 것을 공표함과 동시에 게일을 처리해라. 그리하면 실담물약에 관하여 너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겠다.
마리브는 이리 말하고 있었다.
“마리브 저하. 하지만 혹여 저주가 사실이라고 하면, 그 뒷감당은 어쩌시려 합니까? 바리엘뿐만 아니라 저하께도 문제가 생깁니다.”
“아니. 절대, 나는 믿지 않아. 웨슬리 그것이 치정으로 죽어가는 와중에 그딴 저주를 걸었다? 그것도 게일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마리브가 천천히 이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를 바득거리며 경고했다.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으니, 서둘러 붙잡는 게 좋을 것이라고.
“뒤처리를 잘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안. 손에 쥐었다고 다 네 것이 아니니까. 누가 너를 그리 만들어 주었지?”
본인이 만들어 주었다 여기는 듯하나, 명백히 틀렸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를 게다.
이 자리는 이안 스스로가 만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