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65
제165화. 시아오시
“멜라니아 영애. 무례가 지나치십니다.”
반말은 차치하고 이안이라니.
멜라니아가 귀족 중에서도 권세가 제일 강하다는 하이만 가의 영애긴 했지만, 이안은 나라를 통치하는 자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마법부의 장관. 하급 귀족이긴 하나, 그저 핏줄로 귀하게 대접받는 누군가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하물며, 황자들도 지금 그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처지인데.
“이아안?”
하지만 멜라니아 영애는 개의치 않게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말꼬리를 살짝 올려 의문형으로.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의아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찡그리고 있다.
“멜라니아 영애. 많이 취하셨군요.”
“…그런가 봐요.”
멜라니아는 싱긋 웃으며 이안의 팔을 놔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은 진득하여 그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살폈다.
“혹시 우리 본 적 없을까요?”
“신년회에 오셨다면 뵈었겠지요.”
“말고요. 어릴 때.”
“없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실례했어요. 사실 긴가민가했거든요. 이안이라는 이름이 흔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처럼 멋진 분이 제가 아는 자와 동일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칭찬은 기쁘게 듣겠습니다만, 다음부터는 주의하십시오, 영애. 다른 자들이 있었으면 곤란하셨을 겁니다.”
사교계는 작은 바람으로도 폭풍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영애의 막돼먹은 작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둘째치고, 혹여 이안과 불미스러운 소문에 얽힐 수도 있었다. 게일의 여인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거늘, 그리되면 참으로 귀찮아질 터.
“죄송해요.”
멜라니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하나 이안을 볼 때마다 기시감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신년회나 다른 곳에서 보아 그런 것일까? 하지만 어느 순간, 기억 속 ‘그 아이’를 떠올리자 이안이 껍데기를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멜라니아 영애.”
“네. 이안 히엘로 장관님.”
하여, 친숙히 이름을 부르면 그녀가 아는 모습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치 저주를 푸는 마법 주문처럼 말이다. 술에 취하긴 취한 모양이지.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다니. 멜라니아는 똑바로 서서 이안과 마주했다.
“게일 저하의 저주를 알고 계십니까?”
“…그럼요.”
대외적인 것 외, 게일이 숨기고 있다는 개인적인 역경. 멜라니아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활짝 웃었다.
“바리엘의 존폐와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성심성의껏 도울 것입니다.”
분명 멜라니아는 게일의 진짜 저주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녀는 진짜 들어가 보겠노라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안 역시 망설이지 않고 궁을 빠져나왔다.
* * *
“이곳입니까?”
“그렇네. 숙식 제공이 되는 일자리라, 일단 이곳에 부탁하여 노예들을 관리하고 있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은 상업지구의 작은 도축 공장을 찾았다. 고깃덩어리를 가르고, 썩은 내장을 치우며, 핏물을 밀어내는 작업이 주된 곳이다. 악취부터 시작하여 업무 자체가 고강도인지라, 일반 제국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자자! 다음 고기 들어온다! 얼음이 녹기 전에 서둘러 잘라야 하니까, 빠릿하게 움직여!”
대부분 노예 출신이거나 노예들. 고된 만큼 급여는 괜찮은지라 주인들이 보내서 오는 게 일반적이다. 이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로만드로가 공장 책임자를 불렀다.
“이봐, 우리 애들은 어딨지?”
“안쪽에서 포장하고 있습니다.”
“잠시 데려가지.”
로만드로의 말에 책임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똑같은 노예들이지만, 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생활은 천차만별이다. 죽어가거나, 벌을 주기 위해 이곳으로 온 자들은 핏물을 뒤집어쓰며 노역을 해야 했고, 아닌 경우에는 실내에서 포장 일 따위를 하며 나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끼이익.
로만드로가 두꺼운 철제문을 열어주며 이안을 안내했다. 저 멀리, 조용조용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업하는 노예들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나누는 대화였다.
“파켄스 그자의 조사는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습니까?”
불법 노예 정황은 물론이고 밀수품도 걸렸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없었다. 밀수품이라 하면, 아마 베릭의 흑검처럼 도적들과 연관된 약탈 전리품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곧 있으면 재판에 회부될 것이네. 그리되면 얼굴 볼 일 없이 바로 처단이지.”
“안면 있는 사령술사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요?”
“경비대에서 조사하였으나 딱히 그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여. 내 조금 더 힘을 써보겠네.”
로만드로는 중지와 엄지를 비비며 돈 세는 시늉을 했다. 슬럼가의 경비대를 움직이려면 그것만큼 좋은 자극이 없었으니까.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장 구역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다른 구역과는 달리 쾌적하고 청결하다. 감시하는 책임자의 손에 채찍이 없는 것만 하여도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아, 안녕하세요.”
“로만드로 님이셔. 저기.”
“이안 님도 계시네. 안녕하세요.”
노예들은 포장하던 것을 놔두고 넙죽 엎드려 그들을 맞이했다. 이안은 그 뒤통수를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지낼 만은 한가?”
“네, 네넵! 이곳이 말로만 듣던 천국인가 싶습니다.”
“철창 밖에서 사는 것 자체가 참으로 좋습니다. 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일하는 즐거움이 뭔지 알게 해주셔서.”
“감사할 것 없다. 몸값을 스스로 번다 생각하라.”
파켄스에서 이자들을 데리고 온 비용을 메꾼다고 하는 게 맞을 터다. 그걸 넘으면, 다음에는 자유민 신분을 사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도 관리하기 힘들어 도축 공장에 위탁하는 중이니. 차라리 돈 주고 해방시키는 게 이안에게도 이득이다.
“그,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누군가의 물음에 이안은 대답하지 않고 노예들만 살폈다. 너무 늙거나 어린 자들은 탈락, 가녀린 자들도 탈락, 몸집이 과하게 비대한 자도 탈락이다. 누가 보아도 암살에 제격인 자가 필요했으니.
“그대들 중에 몸 좀 쓰는 자가 있나?”
“몸을 쓰는 자요? 시아오시가 우리 중에서는 제일 일을 잘합니다. 이리 포장하고 있기에는 그게 아깝다며, 가끔 도축하러 불려가기도 하지요.”
“아까 불려갔으니 일하고 있을 겁니다.”
“호강에 겨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공장장이 시아오시를 너무 부려댑니다. 저희와 같이 왔는데 포장하기에는 아깝다면서 툭하면 데려가요. 노예니까 어쩔 수 없다만은, 결국엔 이안 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노예의 말에 로만드로가 격하게 소리쳤다. 분명 그들의 노예들은 도축 작업에서 빼라 전하였거늘! 이안은 책임자를 부르겠노라 날뛰는 로만드로를 진정시키며 안내를 명했다.
“이쪽입니다.”
맨발의 노예가 앞장서서 걸었다. 찰박찰박, 마른 바닥이 점차 젖어가며 그의 발자국 소리가 도드라졌다. 이안은 그것이 물이 아니라 가축의 피라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는 이놈이다.”
“시아오시! 어서 작업해!”
“…….”
책임자가 채찍을 돌돌 말아 잠들어 있는 가축을 가리켰다. 멀거니 서 있는 시아오시의 옆모습이 보였다.
잿빛의 머리칼과 눈동자. 그는 지시를 거부하는 것처럼 턱을 딱딱하게 굳히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텅 빈 것 같은 시선이 유독 공허하다.
“시아오시!”
짜아악!
결국 채찍이 그의 왼팔을 후려쳤다. 그러자 시아오시는 칼을 다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 색이 다르군.”
왼쪽 눈동자는 잿빛이지만, 오른쪽은 옅은 갈색이다. 아마 저것이 노예시장에서 그의 값어치를 높였으리라.
시아오시는 한숨을 삼키며 소의 목덜미를 더듬더듬 만졌다. 급소를 찾기 위하여.
꽈아악.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을 다잡았다. 최대한 고통을 줄여 일격에 끝내는 게 중요한 작업이다. 어중간한 자들이 칼을 잡으면 언제나 가축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들려오곤 했다. 시아오시가 투입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쉬이익!
“잠깐! 이봐!”
“헉, 로만드로 님.”
“이거이거, 계약 위반인 거 알고 있지? 우리는 포장 업무만 한다고 하여 노예들을 맡긴 것인데.”
“아이고, 그게 아니라요. 마침 오늘 딱 일손이 부족하여서, 부득이하게 차출하였습니다.”
“어허! 내 다 알고 왔거늘!”
허공에서 시아오시의 칼이 멈췄다. 책임자가 쩔쩔매는 것으로 보아, 분명 그의 주인이 온 것이다. 시아오시의 오드아이가 이안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체격이 좋은데 날렵해 보이는군. 암살자로는 제격이로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진중해 보여, 저런 자들이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법이지.’
“정말 아닙니다. 정말로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지? 시아오시?”
책임자가 은근히 압박하여 그를 채근했다. 주인은 가면 끝이지만, 책임자는 종일 같이 있는 자다. 적당히, 눈치껏 행동해야 생활이 편해질 터.
“…열일곱 번째입니다.”
하지만 시아오시는 묵묵히 진실을 털어놓았다. 이안이 주인이라 충성하는 것인지, 성정이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이안에게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노예는 결국 재산이다. 체력이나 건강상으로 문제가 생기면 어찌할 것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송구하옵니다.”
“계약 위반에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지. 로만드로.”
이안의 부름에 로만드로가 뒤에서 앞니를 보이며 인상을 써댔다. 책임자, 따라 나오라는 뜻이다. 책임자가 쩔쩔매며 로만드로를 따라 나가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잠들어 있는 가축들의 숨소리만 나지막하다.
“시아오시라고 하였나.”
“…네.”
“어디 출신이지?”
“모릅니다. 노예상 감옥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생부터 노예라 이거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든 가축을 힐끔거렸다.
“체격이 좋다. 그대는 전투를 해본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재능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리 살아있으니까요.”
노예가 전투를 해봤다 하면, 십중팔구 여흥을 위한 투기판을 뜻했다.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 자체가 재능의 증거다.
“즐기지는 않고?”
“…네.”
왈왈 날뛰는 베릭과는 반대로 차분하다. 말의 무게를 잘 아는 것처럼.
“어째서?”
“피를 보는 게 유쾌하지 않습니다.”
시아오시의 대답에 이안이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다. 보여주기식으로 보내는 암살자로는 이만한 자가 없다. 말 그대로 대외적인 용이었으니, 혹여 경비 하나라도 피를 보게 했다간 게일에게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다.
“여기서 일하는 게 고되었겠군.”
“…….”
“하면, 내가 다른 일을 시키고자 하는데. 그건 잘 할 수 있겠나?”
이안의 물음에 시아오시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참으로 묘한 사내다. 철창에서 태어난 자라고 하니 그 운명의 기구함이 얼마나 깊을지는 짐작이 되지만.
“잘은 모르겠으나, 하라면 하겠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든다.”
뼛속까지 노예였던 자라 그런 것일까. 마치 주인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대하는 태도다. 이안은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귀한 자를 죽이러 갈 것이다.”
“…….”
가축도 못 죽여서 이러고 있는데, 사람을 죽이라고? 시아오시의 얼굴에 얼핏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이안의 명령.
“하지만 죽이면 안 된다. 그저 두 발로 걸어가서 그대로 잡히면 돼. 검집에서 검을 꺼낼 필요도 없을 터. 이미 얘기가 다 된 것이니 너의 안전 역시 내가 최대한 보장하마. 어찌, 하겠느냐?”
수상한 명령의 내용은 둘째치고, 주인이 노예에게 하겠냐고 묻다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주인님의 명이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