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68
제168화. 그날 밤
침입자를 맞이하기 위해 어두웠던 게일의 궁. 그와 달리 마리브의 공간은 언제나처럼 환했다. 그날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평소라면 책상에 앉아있을 그가 소파에 누워 시간만 헤아리고 있다는 게 다를 뿐.
끼이익.
“저하. 오늘도 안 주무십니까?”
마리브의 보좌관, 파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수면이 충분한 건 아니었으나, 요즘에는 도가 지나쳤다. 그의 상관은 점점 예민하고, 날카로워졌으며,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
“…낮에 눈을 붙였다.”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판단력이 흐려질 겁니다.”
“그래. 그런 것 같다. 자네를 당장이라도 쫓아버리고 싶으니까.”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고갯짓으로 차게 식어버린 찻잔을 가리키기만 하니, 파알은 맞은편에 앉아 각성제를 꺼냈다.
“이러다 일이 터지면 제대로 대처 못 하실 겁니다.”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다. 다물고 보고나 해.”
“…게일 저하의 처소에 불이 모두 꺼졌다 합니다.”
“…모두?”
“예. 하나도 빠짐없이.”
보좌관의 보고에 잠식하던 피곤이 확 달아났다. 마리브는 각성제를 입에 머금고서 머리를 틀어 올렸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든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게일의 궁에서는 그리하면 안 되지.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이만 가에서는 마력갑옷을 완성했고, 게일과 접촉했던 귀족들의 병력 움직임은 수상했다. 언제든지 서로 급습할 수 있다는 긴장감으로 팽배한 나날. 게일 역시 마리브와 마찬가지로 밤을 조심하고 있을 터인데, 어찌 불을 모조리 꺼버렸단 말인가?
“…눈을 감고 있으면 날아오는 칼을 피할 수 없다. 누가 칼을 던졌는지도 알 수 없지. 결집 명을 내려라.”
“괜찮으시겠습니까?”
파알은 명령에도 발걸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처소에 불이 꺼진 것뿐이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되려 마리브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 신호탄이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지만, 그 전에 달려나가면 부정 출발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그의 상관은 지금 수면 부족으로 판단력이 저하된 상태 아니던가.
“혹여, 게일 저하의 함정이라면요?”
“함정이라 한들, 궁 안의 모든 자들이 빠질 만큼 큰 구멍이겠느냐?”
기척을 느낀 시종장이 다가와 그의 위엄을 갈무리했다. 마리브는 기꺼이 손길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파알을 보는 눈빛이 점점 살벌해지고 있었다. 명령을 이행하라는 무언의 재촉.
“그대 때문에 출발이 늦어지면 책임질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타닥타닥!
보좌관은 어쩔 수 없이 세력 결집을 위하여 밖으로 달려나갔다.
조용해진 집무실. 마리브는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를 보며 게일을 떠올렸다. 하나 닮은 구석 없지만, 이것만큼은 그들이 형제라는 걸 증명했다.
‘게일. 언제고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안 난다. 각자의 어미로부터 물려받은 악연이니, 아예 뱃속부터 자리 잡은 운명이리라.
마리브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각성제 탓인지, 아니면 게일을 끝낼 수 있다는 흥분 탓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거사를 앞둔 긴장감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게 그리 나쁘지 않은 감정이라는 것이다.
“저하, 타이하 장관을 중심으로 궁 안에 있던 자들은 모두 모였습니다. 외부의 귀족들은 전언이 닿는 즉시 입궁할 것입니다.”
마리브는 파알의 보고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아직 달이 환하게 빛나는 시각. 그의 명으로 함께 밤을 견디고 있던 자들이 결집하여 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제국방위부의 타이하 장관이 마리브에게 다가오며 속삭였다.
“게일 저하의 처소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웨슬리와 툭하면 설전을 부렸던 타이하 장관. 연임이 불가할 거라 여겨졌거늘, 신년 인사 회의가 지나고 구사일생으로 재취임할 수 있었다. 차기 제국방위부 장관이 웨슬리와 특별히 친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궁의 불을 모두 끈 것은, 침입자를 맞이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마리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희 쪽에서 침입자를 담당하겠다 하였으나 일차로 거절당했습니다.”
“심문할 게 무엇 있나. 내 이름을 부를 것인데. 게일의 자작극이다. 타이하 장관. 그대는 침입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라. 보안을 명분 삼아 게일의 궁을 봉쇄해.”
“한데, 좀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마리브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무엇인지 서둘러 말하라는 듯이.
“게일 저하의 상태가 말이 아니랍니다. 출혈이 심하여 의무실로 실려 갔는데, 현재 당직 중인 의사들이 모조리 들러붙어 지혈 중이라 들었습니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마리브의 발걸음이 멈췄다. 상황으로 보나 뭐로 보나, 게일이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일임이 분명하지 않나. 그런데 상태가 저렇다니?
“확실한 것인가?”
“제 부하가 직접 보고 왔습니다.”
마리브는 우뚝 멈춰서는 흩날리는 깃대를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정황은 분명하다. 과정에서 뭔가 잘못된 게 있나 보지. 마리브는 문득 한 아이를 떠올렸다.
‘이안.’
한 치 속도 짐작할 수 없는 아이. 게일을 죽이라 명했으나 그걸 곧이곧대로 이행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상 심판대에서 게일을 끝장내지 못한 그때. 마리브는 이안을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라, 옆에 앉아있는 참가자처럼 느꼈다.
‘이안이 한 짓인가? 게일에게 자작극을 미끼로 접근,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나?’
“마리브 저하. 어찌할까요?”
서둘러 움직여야 할 주군께서 꼼짝을 안 하니, 파알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그 순간, 찬 바람이 화악 불어왔다. 마리브의 긴 머리칼이 휘날리고, 이내 복잡하게 얽혀있던 그의 생각이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따르라.”
처억.
파알과 타이하 장관, 각 부서의 고위간부,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까지. 모두 선두로 한 마리브의 뒤를 따르며 빠르게 걸어갔다. 그들이 든 횃불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황궁을 가르는 거대한 빛의 강줄기.
역사를 바꾸는 물결이다.
“황제 폐하의 처소로 간다.”
“황제 폐하의 처소로 간다!”
“게일의 궁을 폐쇄하고, 하이만 가의 황궁 출입을 금한다.”
마리브가 명할 때마다 좌우로 따라붙던 부하들이 갈라졌고, 상시 경비대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 모르며 길을 터주었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긴 한데, 도저히 뭐가 어찌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는 듯.
처억.
“마리브 저하.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황제의 궁에 당도한 마리브. 그를 막아선 것은 황궁친위대 대장 중 한 명인 베올스였다. 평소라면 마리브의 출입에 관여하지 않았겠지만, 분위기가 너무 험악하지 않나. 저 뒤에 모여든 자들은 무엇이고, 마리브의 허리춤에 단단히 달린 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황제 폐하를 뵈러 왔다.”
“불가합니다. 밤이 너무 늦었고, 이런 상황으로는 절대 허할 수 없습니다.”
결연했다. 황제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그의 소임이었으므로. 마리브는 점점 터 오는 동을 보며 중얼거렸다.
“베올스. 지금 내가 황제 폐하를 뵈지 못하면, 실로 폐하의 안위가 위험해질 것이다.”
“그게 무슨…….”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자, 바리엘의 모든 대소사를 결정하는 ‘인장’.
해가 뜰 때까지, 정확히는 침입자와 마리브가 정식으로 엮이기 전까지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마리브는 정말로 과격한 처사를 할 수밖에 없다.
“베올스. 비켜주게.”
“세상에, 리아마!”
마리브의 뒤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삼대장 중 한 명인, 리아마였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등장에 베올스가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잡았다.
“마리브 저하께서는 황제 폐하를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볼일이 있어서 그래. 지금 그대가 막아선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대의 목을 베어야 하네.”
“…우리? 지금 우리라고 했나?”
“비켜주시게. 황제 폐하께 해될 일은 전혀 없어. 내가 보장하지. 마리브 저하, 말씀해 주십시오.”
삼대장의 위력은 황궁의 모두가 알고 있다. 베릭과 맞붙었던 제이럿, 베올스, 그리고 리아마. 이 세 사람을 개인으로 당해낼 자는 없으리라.
“맹세하지. 아들이 아버지를 보러온 것이다. 원한다면 당연히, 그대도 함께하라.”
마리브는 싱긋 웃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당해낼 수는 없다만, 필요하다면 꺾어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대장끼리 검을 겨눈다면 그 피해가 얼마나 클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제이럿이 없는 지금, 나까지 없으면…….’
그야말로 황제 폐하를 바로 곁에서 지킬 자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산을 끝낸 베올스가 검 손잡이를 천천히 풀었다.
“마리브 저하만 무장을 해제하고 드십시오.”
“그러지. 그대가 나를 해하지 않는다 약조한다면.”
“지금 상황을 보십시오. 저하. 누가 누구를 해한단 말입니까?”
마리브는 모두에게 기다리라 눈짓하며, 베올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베올스는 리아마를 노려본 다음 바로 황자의 뒤를 쫓았다.
타닥타닥!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 마리브의 세력은 완연히 밝아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새로운 역사가 쓰일 아침이 온 것이다.
* * *
“황제 폐하께서 마리브 저하께 직인을 넘겨주었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된다 여기지? 그 증거가 여기 있거늘.”
“직인을 넘긴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현재 황제 폐하의 유일한 후계자이다. 폐하의 건강이 악화되어 국정을 보살필 수 없음이라. 한탄스럽지만 내가 대신 직인을 잡겠다는 것인데, 그대가 무엇이라 이리 목소리를 높이는지 모르겠군.”
“마리브 저하!”
대회의장은 엉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아침에 마리브가 황제의 직인을 확보하여 그 권위를 대신할 것이라 하니까. 관료들은 모두 저마다 목청을 올려가며 떠들어댔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게 해주십시오!”
“불허한다. 건강이 매우 위태로우셔서.”
“정녕 그것이 사실 맞습니까? 저하, 지금-”
“지금 내가 아버지를 감금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마리브의 말에 한 관료가 하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황족 모욕으로 몰려갈 경우, 두말할 것 없이 손해였으니까. 다들 웅성웅성,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밤사이 게일의 처소에 침입자가 들었다. 폐하는 쓰러지셨고, 이는 지금 바리엘 역사상 두 번 없을 위기이니. 혼란을 가중케 하는 자는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마리브의 말에 점차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전복이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반역이자, 역모다. 마리브는 직인을 자랑스럽게 매만지며 이안을 불렀다.
“마법부 장관은 이에 동의하시오?”
“저하.”
“황궁의 출입 및 보안은 마법부가 관여하는 일인데, 어찌 게일의 처소에 침입자가 들었는지 모르겠소. 이에 관해서 마법부 장관도 보고할 게 있을 것 같은데.”
침입자에 대해 설명하라. 그 뜻이다.
이안은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직인을 보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역시 직인, 내가 아는 직인이 아니다.’
황제였을 때 썼던 것과 확실히 다르다. 변경에서 영주임명서를 받았을 때도 느꼈지만, 100년 전과 후의 인장이 다른 게 분명했다.
‘어째서?’
마리브는 이안의 대답을 재촉하듯, 직인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였다.
콰앙-!
바깥에서 들리는 굉음. 다들 몸을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검을 손에 든 게일이 회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 모를 것을 손에 잔뜩 묻힌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