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72
제172화. 쌍둥이의 운명
아르센은 언제나 웃는 아이였다. 청랑한 웃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함께 미소 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 아이였건만, 그리하여 참으로 예뻐 보였건만, 딜라이나는 어쩐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세요? 아침부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런 것이겠지. 황제는 행방불명에 황자들은 권력 다툼에 귀족들까지 끌어당겼다. 신분 모를 기사들이 궁을 헤집고 있으니, 준전시나 마찬가지다.
‘아니. 준전시보다 더 위험하다.’
전쟁이라면 저들을 지켜줄 병사들이라도 있지. 제국방위부 장관까지 사태에 가담했다면, 참담하여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일생일대의 위기. 딜라이나가 멍하니 입술만 깨물고 있자, 아르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품을 부드럽게 파고들어 인사를 건넸다.
“어머니. 왜 그래요?”
“…아르센, 이럴 때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진. 옷을 갈아입어.”
편안한 옷이 아니라, 언제든 밖으로 도망칠 수 있게 채비를 하라는 뜻이다. 딜라이나는 무릎을 꿇어 아르센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황제 폐하가 행방불명되셨다. 마리브와 게일이 직인 확보를 위해 세력을 일으켰어. 이곳까지 들이닥칠지는 모르겠으나-”
“아아.”
“…아르센?”
아르센은 더더욱 활짝 웃으며 제 어미의 손등을 토닥였다. 모두 잘 될 것이니 하나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당연히 이곳까지 들이닥칠 것입니다. 게일 형님이라면 몰라도, 마리브 저하는 저희를 죽이려 들 테니까요. 어머니가 게일 형님과 손잡은 것, 다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잔악하여 현실을 제대로 짚었다. 두 황자의 균형을 위한 일이라 해도, 마리브 입장에서는 딜라이나가 게일의 편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참에 모조리 죽이고 정리하는 것이 훗날을 위한 일이겠지.
“아르센.”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들을 지지하지 않은 세력들이 우리를 도와줄 겁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을게요. 진, 우리 오늘은 뭘 입을까?”
아르센은 진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면서도 전혀 부합하지 않은 행동이다. 진은 입술을 꾹 깨물며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 웃을 일이 아니다.”
“왜애? 난 나쁘지 않다고 봐. 어머니.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무엄하게 감히, 황궁에서 소란을 일으킨 죄는 필시 형님들을 벌할 것입니다.”
두 황자 중 살아남는 자는 승리자가 될 터.
하지만 승리라는 단어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치열하게 맞부딪친 만큼 세력들은 깎여나갈 것이고, 대처만 잘한다면 의도치 않게 기회를 잡을 수도 있으리라.
“형님들이 없고, 아버지조차 없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아르센과 진. 후계 순위로 본다면 두 사람이 차기 황제가 될 확률이 높았다. 진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아르센의 팔을 붙잡았다.
“그것도 살아남은 뒤의 얘기다. 그걸 방지하기 위하여 마리브 형님께서 우리를 죽이려는 것 아니겠나.”
“…우리?”
“딜라이나 님! 잠시!”
“무슨 일인가?”
딜라이나가 시종장의 부름에 문을 나서자, 아르센은 진을 껴안고 속삭였다. 어찌하여 ‘우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쌍둥이 형제 중 황좌에 가까운 자가 죽으면 황실의 대가 완전히 끊어진다.”
“…….”
“내가 죽으면 황가의 대가 끊어지는데? 형님께서 나를 죽이실까?”
아르센의 속삭임에 진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게일 형님의 저주도 바리엘과 연관되어 있다.”
“알아. 그래서 게일 형님을 생포하려 할 터. 하여, 진실이든 아니든 저주가 풀렸다는 걸 알린 다음 처리하겠지. 역모죄를 판단하는 재판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짧을 것이다.”
꽈악, 아르센이 진을 더더욱 세게 껴안았다. 진은 그의 허리에 어정쩡하게 손을 올리고서 멈칫거렸다. 밀어내려면 밀어낼 수 있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진. 불쌍한 나의 동생 진.”
“아르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것은 너를 위한 일이다. 나아가 어머니를 구하는 일이고, 더 나아가 바리엘을 위한 일.”
아르센은 저와 똑 닮은 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저를 해하려는 운명을 타고난 동생. 그래서 언제나 그림자 속에 살던 동생.
“나를 위해 움직여.”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그림자로 있어.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서 나를 살려. 서열이나 신탁으로 봤을 때, 사태가 마무리되고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내가 살면, 너도 살고. 그리고 어머니도 살아.”
아르센은 진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시금 낮게 강조했다.
“마리브 형님이 직인을 탈취했다는 것은 아직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직인보다 아버지의 시체를 보이는 것이 후계 자리를 견고히 하는 데 확실한 방법이니까.”
괜히 관료들이 인정하네 마네 말할 것 없다. 차기 승계로 넘어가서 게일을 역모로 몰면 끝. 하지만 이런 개싸움에 가담했다는 것은 상황이 꽤나 복잡하게 꼬였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그건, 마리브와 게일을 제외한 자들에게 기회다.
“진. 모두에게 증명해야지. 네가 나를 해칠 애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네가 잘 해주지 않으면 모든 게 끝이라.”
사락, 아르센이 진의 머리칼을 만져주며 웃었다.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저를 살리고 위하라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진은 담담한 눈빛으로 제 형을 쳐다봤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하지만 다른 자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아서 문제지.”
“…아르센.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거니? 마치 그런 것처럼 들려.”
콰아앙! 쾅!
무어라 다시 말을 꺼내려 하는데,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아르센은 그만하자는 듯 몸을 빙글 돌리며 옷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면 옷 갈아입을까? 오늘은 똑같은 옷을 입자.”
평소에는 조금씩 차이를 주었지만, 오늘만큼은 판박이처럼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면, 아르센에게 날아오는 칼날이 헷갈려서 진에게 갈 수도 있으니까.
쾅! 쾅!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불러도 시종이 오지 않았다. 바깥의 소란이 예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먼저 준비를 마친 아르센은 진의 어깨를 붙잡은 다음 활짝 웃었다.
“웃어봐. 나처럼.”
“…….”
“어서.”
아르센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입꼬리를 올리는 진. 볼우물이 희미하게 패였으나, 아르센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기에.
“좋아. 너, 이렇게 보니까 멋지다.”
“농담하지 마. 아르센.”
“아하하.”
콰아앙!
“아르센 저하! 진 저하!”
“이쪽으로, 이쪽으로 나오십시오!”
그때, 시종들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사색이 되어 각자 한 명씩 아르센과 진을 안아 들었고, 이내 어쩔 줄 몰라 하며 더 안쪽의 방으로 도망쳤다.
“어머니는?”
진은 시종의 소매에 피가 묻어있는 걸 알아챘다.
“어머니는!?”
“아르센! 진!”
끼이익!
별채의 별채로 들어가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자, 딜라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잡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서두르자! 여길 나가!”
“이쪽이다! 딜라이나와 아르센, 진이 여기 있다!”
“밖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모두 통제해!”
“마법부로 가야 한다. 마법부! 아르센! 진!”
“잡아라! 게일과 역모한 놈들! 죽여!”
“서둘러, 뛰어!”
멀리서 낯선 병사들의 외침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문이 뚫린 게 분명했다. 짐작하건대 마리브의 병사들이겠지. 진은 자신을 안고 뛰는 시종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눈을 꼭 감았다.
‘정원이 이다지도 넓었구나.’
말(馬) 없이 달리는 게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것인지도 모를 거침 숨과, 짓밟히는 잔디, 가끔씩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어제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처억.
그때였다. 열심히 달리던 시종이 멈춰 섰다.
“다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는지.”
마리브였다. 단단히 올려 묶은 머리칼은 여전했으나,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에는 상처로, 옷에는 피와 먼지로 엉망이다.
시종은 진을 세게 껴안으며 뒷걸음질 쳤다. 가슴과 가슴으로 느껴지는 심장 소리가 거세다.
“마리브!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딜라이나가 황자들을 보호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후궁이긴 하지만, 관계로 따지면 딜라이나는 그의 어머니였다. 아르센과 진이 마리브의 형제이듯.
“황제 폐하에게 위해를 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경망이라니! 바리엘의 1황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신가?”
뒤에서는 그들을 쫓던 병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사면초가다. 앞으로는 마리브요, 뒤로는 검을 든 자들이니. 어느 쪽으로 가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망이라. 그것은 그대가 게일의 편에 든 것을 일컫는 말이겠지. 게일을 숨기고 있나?”
“뭐?”
마리브의 말에 딜라이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숨기고 있냐니. 저 말은, 전투의 승기가 마리브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의미 아닌가?
“아니, 우리는 상관없는 일이라. 게일을 보지 못했다. 황자의 체통을 생각하여 길을 터주시오. 이 어린것들을 불쌍히 여겨…….”
“상관없다?”
마리브가 천천히 다가오자, 딜라이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진이 시종을 밀어내고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혀, 형님,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그걸 본 아르센도 질세라 진의 옆에 섰다. 무표정의 쌍둥이라. 마리브는 검을 까딱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아르센이고, 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르센! 진!”
딜라이나가 두 아들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시종들은 병사들에게 제압당해 엎드렸고, 차가운 바람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하다.
“누가 아르센인가?”
“…어찌 물으십니까.”
진의 물음에 마리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길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가늠하듯, 아이들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딜라이나. 게일의 손을 붙잡은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니. 아들 하나를 내놓아라. 그리하면, 그대의 친정을 생각하여 모두 죽이지는 않겠다.”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손이 달달 떨려왔으나, 이를 알아챌 수도 없을 만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니면 모두 여기서 죽든지.”
마리브의 말에 그녀는 품속의 두 아들을 내려다봤다. 제 손으로? 아들을? 말도 안 되지만, 이런 상황 자체가 이미 말이 안 되지 않나.
“어머니.”
그때, 아르센이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다. 마리브가 어째서 ‘누가 아르센’인지를 물었는지 생각하라는 눈짓이다. 신탁이 걸려있는 만큼 쉽게 죽일 수 없는, 그런 존재.
“어머니.”
이어서 진이 그녀를 불렀다. 아르센과 달리 촉촉한 눈망울이다. 다가올 운명을 깨달았는지, 애절하게 그 이름을 부른다.
‘미안하다.’
딜라이나가 결국 진의 손을 놓았다. 아이는 누구도 잡아주지 않은 제 손바닥을 보며 뒤를 돌아봤다. 아르센을 품에 안은 딜라이나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르센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눈썹을 까딱거렸다.
‘어서.’
진은 마리브를 쳐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미와 마찬가지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는데, 평소 텅 비어있던 것과 달리 확연한 감정이 느껴졌다.
“네가 진이구나.”
“…….”
분노. 마리브는 처음으로 진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그도 돌이킬 수 없이 지나왔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계속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다.
스르릉!
마리브가 검을 빼 들자, 진은 눈을 감았다. 그의 칼끝이 아이의 머리를 내려치려고 할 때.
퍼어엉! 펑!
갑자기 주위에서 터지는 굉음. 마리브는 멈칫거리며 공격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안이 서 있다.
“…이안?”
이안은 마리브 앞에 서 있는 아이 얼굴을 확인했다. 이마부터 턱까지 쭉 이어져 있는 상처. 피가 흘러내렸으나, 눈물만큼 짙지는 않으리라.
“…검을 거두세요.”
쌍둥이의 운명이 갈라지는 순간.
황제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