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74
제174화. 조금씩 나아가
잠시 후, 시아오시는 이안의 주위가 한산해진 것을 알아채고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는 마법사들과 서류를 든 채 원탁 위의 마력석 가루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무수한 알갱이 중 무엇이 마리브고 게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세를 확인하기에는 문제없었다. 이안이 돌돌 만 종이로 두 지점을 툭툭 두드렸다.
“베올스의 마력이 느껴진 것이 이곳과 이곳이라고.”
“그렇습니다. 단기간에 움직이기에는 물리적인 거리가 상당하죠. 마법사도 아니고, 폐하를 모시는 마검사가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쓰는 비밀 통로가 있다 하면, 저희가 알아채기 힘듭니다. 마법부가 중립 구역임을 알리고, 오시길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이안 님, 짐작 가시는 게 있으시죠?”
“로만드로에게 웨슬리 때의 서류를 떼어 오라 일렀다. 그것을 확인하면 보다 정확히 짐작할 수 있을 터. 베릭은? 준비를 잘 하고 있나?”
“식당 내려가서 밥 먹고 있습니다. 인근에는 마리브 저하의 병력이 가득해서, 준비가 좀 필요할 것 같기는 해요.”
마리브의 병력이라, 참으로 가소로운 말이로다. 바리엘의 하찮은 짐승조차 황제의 아래에 있거늘. 경비라는 작자들이 나서서 혼란을 만드니 이 얼마나 경망한 일이란 말인가.
이안은 피식 웃으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마력석 가루를 정리하던 아코렐라가 시아오시의 기척을 알아채고 눈짓했다.
“장관님. 저기, 부하 왔는데요.”
“시아오시?”
“…드릴 말씀이.”
시아오시는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마법사들을 둘러봤다. 이들이 들어도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는 시선이다.
“아이고, 방어진 확인 좀 해야겠네!”
“그래. 나도 막 그 생각 했다. 음음.”
마법사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자리를 떴다. 시아오시가 노예라는 걸 모르고, 그저 이안의 왼팔이라 여긴 탓이다. 베릭이 계속 한판 붙자고 노래를 불러댄 영향도 있다.
“무슨 일이지?”
이안은 팔짱을 끼며 시아오시를 돌아봤다. 워낙에 과묵한 자라,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젯밤, 게일 저하의 처소에서 아르센 저하를 본 것 같습니다.”
…의구심을 넘어 기함할 말이었다. 이안이 팔짱을 풀며 눈썹을 찌푸렸다. 게일의 처소에 어째서 아르센이?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어떻게?
“상세히 말해다오.”
“복도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푸른 눈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이가 대상자의 아들이라 여기고 지나쳤으나, 아까 보니 그것이 아니오라 아르센 저하임이 분명합니다.”
“…진 저하와 아르센 저하의 외관은 똑같다. 어찌 아르센 저하라 단정하는 것인가.”
“본능으로-”
시아오시는 멈칫했다. 짧게 스쳐 지나갔지만, 그 순간이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으니까. 차갑고 살벌하여, 마치 산 자의 게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이질감. 혹은 우위에 있는 포식자의 섬찟함. 형용할 수 없는 단어들이 엉켜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안이 이것을 이해해 줄까?
그는 마저 말했다.
“-알 수 있었습니다.”
“…….”
톡톡, 이안은 손끝으로 의자 가죽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는 눈동자. 유독 녹색 빛이 짙다.
“…믿어주십시오.”
“그래. 믿는다.”
너무 쉽게 나온 대답에 시아오시가 움찔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는 이안. 무에 그리 당황하냐는 듯 웃고 있다.
“진 저하와 아르센 저하는 거울처럼 닮았으나, 성정이 달라 궁 안의 모두가 쉽게 구분하였다고 했다. 네가 아르센 저하라 느꼈다면 아르센 저하일 것이라.”
정확히는, 생글생글 웃으며 활발한 쪽이 아르센이라 여기고, 담담하여 조용한 쪽이 진이라 여긴 거겠지만.
“내가 의문스러운 것은 아르센 저하가 그 밤에 어찌, 그리고 어떻게 게일 저하의 처소에 있었는지다.”
이안은 그리 말하며 마력석 가루 지도를 힐끔거렸다. 황궁이 워낙 넓다 보니, 게일의 처소와 아르센의 처소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탈것 없이, 하필이면 그날 밤 게일의 처소에 들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 밖이지 않나.
“너를 맞이하여 경비를 물렸으니, 그래. 들어가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그리했다 쳐도. 이해 안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이안의 중얼거림에 시아오시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아이를 붙잡아 보는 건데. 붙잡아서 아르센이 맞는지 정확히 확인하고, 더욱 쓸 만한 정보를 주인에게 전해줄걸.
“시아오시.”
이안의 부름에 그가 시선을 들었다.
“당분간 쌍둥이 황자 저하를 잘 돌보며, 특히 아르센 저하를 감시하도록 하라. 여러모로 걸리는 게 많다.”
“명심하겠습니다.”
신탁도 그러하다.
나중에 태어난 자가 먼저 태어난 자를 해칠 것.
황좌에 가까운 자가 죽으면 황실의 대가 끊어질 것.
‘후자는 조금 짐작이 되긴 하는데.’
이안이 보기에는 현재 차기 황제로 확실시된 진이 황좌에 제일 가까운 몸이었다. 하여, 당연히 진이 죽으면 황실의 대가 끊어지는 것은 마땅하지.
“…아르센 저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게 불편하다 하여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앞장섰다. 앞으로는 진과 아르센을 조금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과 함께.
“안으로, 어디?”
* * *
“아프시면 바로 말씀 주십시오.”
“…괜찮네.”
의사는 무릎 꿇고 앉아 진의 상처를 살폈다. 얼룩덜룩한 피를 닦아내니, 상처의 깊이가 더욱 깊었다. 천만다행으로 눈과 입가를 비껴갔지만, 흉터를 지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의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벌어진 부위를 소독했다.
“…어머니는?”
“딜라이나 님은 안정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저 놀라셔서 기절하셨을 뿐이에요. 저는 저하의 부상이 더욱 걱정입니다.”
진은 침묵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어미와 형제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이자들은 알까? 황궁에는 비밀이 없으니, 사태가 진정된다면 분명 모두가 알게 되리라.
‘그러면 나는, 어찌 살아야 하지.’
아직도 생생하다. 자신의 손을 놓던 어미의 마지막 온기. 관계가 깨졌으니,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얼굴에 난 상처처럼, 관계에도 그 흔적이 남았을 테니.
“상처가 대각선이라, 붕대가 좀 불편하실 겁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꼭 참아주세요. 덧나면 더욱 아프고, 고생하시니까요.”
의사는 깨끗한 천으로 치료를 마무리하고 일어섰다. 이어서 치유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자들이 다가와 따뜻한 기운을 쬐어주었다.
지이잉. 지잉.
“고통을 덜어줄 것입니다. 저하께서 아직 어리시고, 몸 상태도 안 좋으니 상황을 지켜보며 마력을 주입하겠습니다.”
“마법은 그대들의 소관이니, 뜻대로 해주시오.”
진의 다정한 말에 마법사들이 방긋 웃었다. 아아. 밖에서는 다 큰 황자들이 소란을 피워대고 있는데, 이 어린 저하께서는 아프다고 우는 소리 없이 의젓하지 않나.
“잠시 계십시오. 옷가지를 가져오겠습니다.”
“이안 경은?”
“장관님은 지금 잠시 일을 보고 계신 듯합니다. 불러드릴까요?”
“아닐세. 그저 궁금하여.”
“금방 오겠습니다.”
마법사는 진의 옷이 엉망인 걸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진은 눈을 감고 다리를 천천히 까딱거렸다.
‘이안 경을 만나면, 우선 고맙다는 말을 하리라. 저를 도와주어 이리 살았노라고. 망설임 없이 안아주어 참으로 고마웠다고. 그리고 어머니까지 구해줘서-’
끼이익.
황자였으나, 그 전에 아이였다. 눈을 뜬 이후로 지금까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해서 터졌다. 진은 뒤죽박죽 섞여드는 생각에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타닥.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진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가 돌아왔나?
“진.”
익숙한 목소리에 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아르센이 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은 숨을 멈추며 몸을 굳히고 말았다.
“진. 상처는 어때? 괜찮아?”
“…아르센.”
“마리브 형님도 참 너무하시지.”
아르센은 눈망울을 붉히며 제 동생의 상처를 만졌다. 쓰라린 탓에 진이 인상을 찡그리자, 아르센은 되려 더 놀랐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미안해. 많이 아파?”
“…….”
진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대하는 게 어려웠으나,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당최 어떤 표정으로 아르센을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 아까 일에 화가 많이 났니?”
“…….”
“그러니까 내가 미리 말했잖아. 너의 역할이 중요할 거라고. 지금 황궁이 얼마나 복잡한 상황인지는 알지? 우리는 그저 위기를, 너무 빠르게 만났을 뿐이야.”
아르센이 진을 껴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허공을 응시하던 진이 중얼거렸다.
“넌, 내가 죽기를 바라지.”
등을 토닥이던 아르센의 손길이 멈췄다.
“신탁으로 인해 네가 죽기 전에,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덤덤하게 진을 바라보던 아르센의 입매가 휘어졌다. 그리고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깔깔댔다.
“진!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누가 보면 내가 신탁을 내린 줄 알겠어.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건 나인데? 너의 존재로,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런 운명을 살고 있어.”
“거짓말. 너는-”
“어머니의 선택은 어머니의 뜻이라. 나에게 화풀이하지 마.”
아르센의 말에 진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가 너를 버린 게 내 탓이라는 거니? 너는 그저 너라서 버림받은 건데, 왜 자신에게 언성을 높이는지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운 좋게 이안 경이 나타나고, 갑옷 입은 자들이 나타나서 망정이지. 너로 인해 어머니와 내가 죽을 뻔했어.”
아르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처럼 진의 핏줄을 뜨겁게 만들었다. 진은 그것이 분노임을 깨닫지 못했다.
“앞으로는 행동을 조심해 주길 바라. 응?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어머니까지 저버릴 수는 없잖아.”
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데, 한평생 짓눌려왔던 아르센의 비수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기분이다.
그때, 문에 그림자가 들어섰다. 진과 마주하고 있는 아르센은 킬킬거리며 동생의 어깨에 뺨을 부빌 뿐이다.
스윽.
이안이다. 문가에 기대 팔짱을 낀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안. 진의 심장이 쿵쿵 뛰어올랐다.
“진, 약속해 줘. 우리는 가족이잖아.”
“…….”
귀하니 눈물을 거두라는 이안의 위로가 아르센의 속삭임을 지워 버렸다. 저들의 비명보다 자신의 숨이 더 귀하다는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어렵지 않게 이안의 음성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나, 나는-”
이안이 손으로 자신의 입매를 매만졌다.
울지 말고, 웃으라.
귀한 자의 눈물은 무거워서 천지를 가득 채울 것이라.
“나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치는 자신이 알아줄 것이니, 믿고 스스로 따르라. 스스로 따르다 보면 오롯이 자신만 남아 있을 것이니.
“나는 싫다.”
“…뭐?”
아르센이 볼 부비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진이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아르센을 노려봤다. 넘칠 것 같았으나, 절대 흘러내리지 않았다.
“나는 죽기 싫다. 아르센, 더는 내게 너의 운명을 책임지라 하지 말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