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178
제178화. 달의 뒷면
“필리아 님, 차를 좀 내올까요? 손 시리지 않으십니까?”
하인의 부름에 쪼그려 앉아있던 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대충 올려 묶은 머리칼과 고운 피부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엉망진창이지만, 화사한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괜찮아. 흙은 차갑지만 공기가 따뜻하여 온몸에 훈기가 돌아. 차는 레몬차로 내주면 고맙겠구나.”
히엘로 저택 뒤편에 온실이 세워졌다. 허구한 날 비와 바람을 맞으며 굴라 재배하는 연인을 위하여, 네르사른이 직접 만들어준 공간이었다. 하인이 그녀 옆에 쪼그려 앉으며 굵직한 굴라 줄기를 들여다봤다.
“와아, 벌써 이만큼 자랐습니까? 이거 얼마 전에 심은 것이잖아요.”
“놀랍지? 사나흘쯤 지났을 때 이파리를 죄다 떼주었더니 이리 실하게 자랐다. 이파리가 먹는 영양분이 뿌리로 집중되는 것 같아.”
필리아는 서툴게 무언가를 끼적였다. 저택의 모든 식물을 관찰하고 보살핀 일지였다. 대부분 글자보다 그림이었지만, 기록된 정보가 생각보다 알차서 영지민들도 가끔 자문을 구하러 오곤 했다.
“따뜻한 물수건도 가져오겠습니다. 손 녹이세요. 네르사른 님이 보시면 걱정하셔요.”
“으응. 고마워.”
고운 손이 긁힐까 매일 밤 전전긍긍하는 네르사른이었다. 필리아는 쑥스럽게 웃으며 흙을 토닥였다. 바깥으로 천려의 전사들이 지나가며 꾸벅 인사했다.
“필리아 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필리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앞치마를 꾹 쥐었다. 동맹을 맺고 사막으로 간 전사들이 다시금 히엘로로 돌아온 것은, 자신의 아들이 보낸 서신 한 장 때문이었다.
-언제고 날이 풀리면 이곳의 살얼음이 깨질 것입니다. 그때,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살얼음이 깨진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도와달라 하였으니, 고된 일일 게 분명하였다. 네르사른은 무언가를 짐작하는 듯 보였으나, 필리아에게 알려주진 않았다.
-동맹의 이름으로, 그리고 아비의 이름으로요.
퍼어엉. 필리아는 마지막에 덧붙인 이안의 글귀를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고 민망하여, 모종삽으로 흙만 톡톡 쑤셔댔다.
‘전사들을 히엘로로 부르신다고요?’
‘이안 경의 요청이 언제 올지 모르니, 재빨리 움직이기 위함이요.’
‘괜히 헛된 수고를 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정말 죄송한걸요.’
‘필리아, 그러면 결혼식을 올릴까? 전사들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게끔.’
다시 퍼어엉! 필리아는 네르사른과의 대화를 떠올리자 현기증을 느꼈다. 살면서 이런 행복이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 이안의 허락 아래 축복받는 사랑인지라, 필리아는 처음으로 온 세상을 가진 기분이었다.
“필리아 님! 필리아 님!”
그때, 차를 가지러 간 하인이 다급하게 필리아를 불렀다. 찻잔을 깨트렸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전사들 역시 어수선하게 정원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
타닥타닥!
“신호인가?”
“잠깐만, 네르사른 님을 모셔와!”
“다들 혹시 모르니 구룻잎을 잔뜩 챙겨라!”
필리아가 온실 문을 열며 바깥으로 나섰다.
푸른 하늘 위에 떠 있는 검은색 초승달. 눈뜬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네르사른 님!”
부하들의 부름에 네르사른 역시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심상치 않은 검은 달이다. 그는 필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이마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필리아. 오늘은 정원 일을 그만 정리하고, 저택에 있어 주시오. 위험할 수도 있어.”
“네르사른 님, 저게 대체 무엇이죠?”
“글쎄. 잘은 모르겠다만, 바리엘에서 저런 걸 만드는 자들은 대개 마법사들이지.”
마법사들. 이안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필리아는 핏기 가신 얼굴로 네르사른의 옷깃을 붙잡았다.
“저도, 저도 여기 있을게요. 혹 이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저도…….”
“침착하시오, 필리아. 이안 경은 그대의 아들이라 강인해. 우선은 저 검은 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는 게 좋겠군.”
하지만 하늘에 뜬 것을 땅에 있는 자들이 어찌하겠는가? 전사들은 매를 날려 그 주위를 맴돌게 했다. 거대한 매 수십 마리가 하늘을 수놓다 보니, 영지민들도 하나둘 하던 것을 멈추고 하늘만 올려다봤다.
쉬이익!
“살아있는 것의 냄새는 안 나나 봅니다.”
“저기서 뭔가가 쏟아지거나 아니면 우리가 들어가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속단은 위험하다. 우선, 계속 지켜본다.”
천려의 전사들과 저택 사람들, 그리고 히엘로의 보호를 받는 모든 자가 침묵하며 달의 변화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저기!”
해나의 외침에 풀밭에 드러누워 있던 전사들이 상체를 일으켰다. 달이 점점 차오르고 있다. 완연한 둥근 형체를 그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필리아가 앞치마를 벗으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혹여, 이안이 올까 싶어서.
“이안!”
“필리아, 비키시오! 전사들은 나를 붙잡아라!”
“제가 하겠습니다!”
“시끄럽다. 개척지에 발을 먼저 딛는 것은 우두머리가 할 일이니.”
네르사른이 필리아를 뒤로 물리고, 거대한 어둠에 다가갔다. 조심스레 손을 넣자, 시원한 감각이 인다. 특별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긴장된 숨을 들이쉬며 안으로 들어섰다.
“네르사른 님을 꽉 잡아라!”
“노, 놓치지 마세요!”
필리아도 미약한 힘을 보태어 그의 왼손을 꼭 붙잡았다. 잠시 후, 네르사른은 어둠 속에서 나오며 전사들에게 전했다.
“황궁과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네? 어디요? 중앙의 황궁 말씀이십니까?”
“저 멀리, 아주 작게 빛이 하나 보여.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바리엘의 황궁 돔처럼 보인다. 전사들은 무기를 챙기고 나를 따르라.”
“데모샤!”
그때, 필리아가 네르사른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저, 저도!”
“필리아.”
“저도 제발 데려가 주세요. 이안이 너무 보고 싶어요. 그, 그리고 당신이 황궁에 간다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못 보게 된다는 거잖아요. 저에게 그 한 달은 수십 년과 같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연인의 사랑 고백이다. 전사들은 애써 귀를 막으며 출정 준비를 갈무리했고, 네르사른은 난감하게 웃었다. 그러자 해나가 두꺼운 외투를 필리아 어깨에 걸쳐주며 설득했다.
“네르사른 님. 이안 님을 보신다면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황궁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변방족이 들이닥치면 당황할 것입니다. 제국민 한 명이 끼어있어야죠. 필리아 님은 이안 님의 어머니이시니 신원 확인이 분명합니다.”
필리아는 웃옷을 여미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르사른은 차마 못 당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좋소. 대신 내 옆에 딱 붙어있으시오.”
“네네! 무조건! 해나!”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저도 이안 님 너무 보고 싶은데, 저까지 가면 저택 관리는 누가 하겠습니까. 안부 전해주시고, 전서구 날려주세요! 부디, 안전히.”
필리아는 해나의 뺨에 인사를 남기고 네르사른의 목덜미를 꽉 붙잡았다. 그녀의 두려움을 달래려는 듯, 네르사른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내가 있소.”
“무섭지 않아요. 조금 긴장될 뿐.”
네르사른과 필리아를 선두로, 전사들 역시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와아아! 가자!”
“용기를 먼저 내는 자가 진정한 전사다!”
“가보자고! 어디든, 전사는 살아남으니까!”
“오랜만에 피 냄새 좀 맡겠군.”
“다녀오겠다! 친우여!”
해나는 손을 흔들며 전사들을 배웅했다.
그들이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주위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해나와 저택 식구들은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며 기도했다.
제발, 소중한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 * *
“데모샤!”
갑작스러운 전사들의 등장에 황궁 병사들이 당황하여 뒷걸음질 쳤다.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저도 모르게 마력을 풀며 당혹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모두가 전투 중임을 잊게 할 정도로, 기이한 장관이다.
“이아안!”
그때, 이안은 휘날리는 긴 금발의 여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챘다.
그가 놀라서 두 손을 뻗었다.
필리아 역시 손을 뻗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의 모자(母子)는 한 폭의 그림처럼 서로에게 닿았다.
꽈아악!
중력을 거스르던 것처럼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막상 껴안으니 환상과 같은 착시였나 보다. 이곳 황궁에서 필리아와 전사들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으니까.
필리아는 이안의 목덜미를 껴안으며 애처롭게 속삭였다.
“아들아, 너무 보고 싶었어.”
“어머니. 오랜만입니다.”
“…어, 어머니!?”
“지금 어머니라 했지?”
이안의 대답에 마법사들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멈칫거렸다.
‘미친, 핏줄이라는 게 진짜 있긴 있네. 못 속여.’
‘천사가 내려오는 줄 알았다. 진짜.’
‘이안 님의 어머니? X바, 어떡하지. 나 방금 반한 거 같은데.’
제각각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떼어냈다. 진 황자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와…….”
짤막한 탄성. 이안은 그 탄성으로 하여금,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깨달았다. 진 황자를 대피시키기 위해 일각이 다급하거늘.
사아아악.
“포탈이 닫힙니다!”
“아, 이런.”
포탈은 제 역할을 다 했다는 듯 사라졌다. 그러자 병사들도 퍼뜩 정신을 차리며 검과 창 따위를 다잡았다.
“야, 야만족? 옷차림이 왜 저래?”
“히엘로! 마법으로 야만족을 부른 것인가?”
“이는 대제국 바리엘을 기만하는 것이자, 황궁의 불명예다!”
무기가 이안과 마법사들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자, 전사들이 몸을 낮추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다들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상황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언제 또 기고만장한 제국 병사를 박살 낼 수 있겠는가? 히엘로와는 인연의 동맹을 맺었으나, 선대부터 이어온 제국의 핍박은 여전히 전사들의 심장에서 뛰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마리브는 헛웃음을 지으며 화살을 들었다.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자, 전사들은 검을 빼 들었다.
“화살, 화살에 맞으면-!”
피잉!
화살이 맨 앞 전사의 팔뚝에 꽂혔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충 뽑아낸 다음, 대를 꺾어버렸다. 마력을 쓰는 자들이 아니었기에, 호박색 원석은 무용지물이다.
“이안 경, 오랜만인데! 우리 뭐하면 될까?”
“이놈들 대가리 다 따면 되는 건가?”
“야만족이라 한 새끼, 내가 봐 뒀다. 니 얼굴이 더 짐승 같아. X새끼야.”
이는 뒷골목의 개싸움이 아니다. 철저한 명분과 정의 아래에서 움직이는, 역사에 쓰일 전투. 일러야 할 순서가 있거늘 전사들은 들끓는 피를 참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이 잠시 기다리라 외치려는 순간.
“다들 자중하라.”
네르사른이다. 그는 필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이안에게 눈짓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둘러 알맞은 지시를 내리라는 듯.
이안은 앞으로 나서며 필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제 어머니인 필리아, 그리고 이쪽은-”
황궁에 입궁하여도 문제가 없다는 걸 모두에게 짚어주는 게 첫 번째다.
“새 아버지인 네르사른. 전사들은 네르사른의 식구이니 황궁의 적이 아니오.”
“아, 아, 아버지?!”
마법사들은 한꺼번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기겁했다. 어머니는 천사인데 아버지가 변방족이라.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개 같은 족보군.”
마리브가 비웃으며 검을 빼 들자, 병사들도 재정비하며 기합을 내질렀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있는 힘껏 소리치며 마력을 개방했다.
지이잉! 지잉!
“마법사를 해치려는 자들을 물려주게!”
“데모샤!”
“데모샤!”
콰직! 콰아앙!
퍼억!
전사들은 적진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전사의 손아귀에서 병사들의 목뼈가 속절없이 으스러졌고, 사지는 버려진 인형처럼 꺾여나갔다.
검과 창 따위가 전사들을 막아섰지만, 자연의 위대함과 평생을 겨루며 살아온 자들에게는 덩굴의 가시보다 못한 공격이다.
“으아악! 으악!”
“이, 이놈들 뭐야?”
“잠깐! 살려, 살려-!”
“아아아악! XXX!”
쿠웅! 쿠우웅!
밀고 들어왔던 병사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마법사들은 전사들을 방패 삼아 보호막을 재생성하였고, 이내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지이잉. 지잉.
“밀어라!”
“마리브 저하를 처단하라!”
“죽여! 저 새끼들 다 죽여!”
“이놈들아! 마법사가, 어!?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저놈들 못 죽이면 우리가 죽는다! 최대로 개방해!”
콰아앙! 쾅!
엉키고 엉키는 전투가 다시 발발했다. 이안은 필리아의 손을 놓으며 이를 바득거렸다. 그의 시선은 마리브에게 향해 있었으니.
“어머니. 진 황자 저하를 잠시 부탁합니다.”
“이안!”
타앗!
거세게 휘몰아치는 마력의 흐름.
이안은 사자와 같은 금안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